대한예수교 장로회
설교모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대인관계

작성자 늘푸른 댓글 / 조회: 3,901회 작성일 2017-08-21 11:34
***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대인관계 / 마태복음 18:1-10

마태복음 18:1-10, “1 그 때에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이르되 ‘천국에서는 누가 크니이까?’ 2 예수께서 한 어린아이를 불러 그들 가운데 세우시고 3 이르시되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4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사람이 천국에서 큰 자니라. 5 또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니 6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작은 자 중 하나를 실족하게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이 그 목에 달려서 깊은 바다에 빠뜨려지는 것이 나으니라. 7 실족하게 하는 일들이 있음으로 말미암아 세상에 화가 있도다. 실족하게 하는 일이 없을 수는 없으나 실족하게 하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도다. 8 만일 네 손이나 네 발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장애인이나 다리 저는 자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과 두 발을 가지고 영원한 불에 던져지는 것보다 나으니라. 9 만일 네 눈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한 눈으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눈을 가지고 지옥 불에 던져지는 것보다 나으니라. 10 삼가 이 작은 자 중의 하나도 업신여기지 말라. 너희에게 말하노니 그들의 천사들이 하늘에서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항상 뵈옵느니라.”

** 들어가는 말

예전에 인터넷을 달구었던 ‘6번 아버지’라는 글을 기억하십니까? 외동아들을 키워 서울로 보내고 아내가 먼저 세상을 떠나자 아들 집으로 온 노 아버지. 가족들의 무관심과 홀대에 못 이겨 가출을 하면서 남긴 글이 “3번아 잘 있거라. 6번은 간다.”라는 쪽지였습니다. 아들은 이 암호 같은 내용을 이해할 수 없었는데, 아버지를 찾아 방황하던 아들이 우연히 아버지의 친구를 만나 그 쪽지 내용을 알았습니다. 아버지가 평소에 늘 하던 하소연이 ‘자신의 집에 1번은 며느리, 2번은 손녀 딸, 3번은 아들, 4번은 강아지 밍크, 5번은 가정부, 6번은 자신이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우습기도 하지만 서글픈 현실을 꼬집는 이야기여서 가슴이 먹먹했습니다. 이렇게 사람 사는 세상에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서열이 생깁니다. 사람뿐만 아니라 모든 동물의 세계에는 서열이 존재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 서열에 민감해집니다. 그런데 참으로 어처구니없게도 하나님을 믿는 신앙 안에서도 이런 서열이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마저 이 서열에 빠져 있었습니다. 누가복음 9:46절에서 “제자 중에서 ‘누가 크냐?’하는 변론이 일어나니”라고 했으며, 22:24절에서도 “또 그들 사이에 ‘그 중 누가 크냐?’하는 다툼이 일어난지라.”고했습니다. 제자들마저 틈만 나면 서열 다툼이었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말씀에서도 예수님의 제자들이 어느 날 예수님께 “천국에서는 누가 큽니까?”라고 물었습니다. 이제는 이 땅에서 서열을 메기던 것도 부족해서 하나님의 나라에서까지 서열을 메기려고 했습니다. 여러분도 혹시 이렇게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사람들을 서열을 메기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래서 오늘은 영적인 서열에 관하여 말씀을 살펴보려합니다.

※ 본문말씀의 배경과 의미를 살펴봅시다.

오늘의 본문말씀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천국에서는 누가 큽니까?”라는 질문에 대한 예수님의 답변적인 해설입니다. 이 말씀을 영적인 결단을 촉구하는 내용으로도 사용하지만 더 중요한 주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대인관계’입니다. 본문말씀에서는 사람과의 관계를 말씀하지만 이 사람과의 관계가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도 말씀합니다. 예수님 당시 이스라엘의 사회 환경은 열악하고 척박한 것이었습니다. 정치적으로는 유럽과 팔레스타인 지역의 패권을 장악하고 있던 로마의 강력한 세력에 지배당한 속국이었습니다. 경제라고 할 것도 없이 무거운 세금과 착취로 그들의 살림살이는 어려웠고, 종교적으로도 감당하기 힘든 율법으로 어디 마음 둘 곳이 없는 고난의 시기였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예언자들을 통하여 약속하신 메시아를 고대하고 있었습니다. 바로 그런 시기에 예수님이 오셨으며, 짧은 3년의 공생애를 통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시던 때였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행하시는 이적들을 보면서 자기들을 구원할 메시아라고 따랐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어느 날 느닷없이 제자들에게 “장차 사람들의 손에 팔려 고난을 받아 죽임을 당하고 삼일 만에 부활할 것이라.”고 선언하셨습니다. 그러자 제자들은 근심에 빠졌습니다. 그러나 제자들 누구도 예수님의 말씀이 의미하는 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제자들은 예루살렘에 점점 가까워지자 새로운 기대감에 빠져서 예수님과는 전혀 다른 생각에 사로잡혔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것이 왕이 되시기 위한 것으로 알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제자들 사이에 권력과 명예의 자리를 두고 암투가 벌어졌습니다. 본문과 마찬가지로 누가복음 22:24절에서는 “또 그들 사이에 그 중 누가 크냐 하는 다툼이 난지라.”라고 했고, 마가복음 10:35-37절에서는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이 주께 나아와 여짜오되, ‘선생님이여 무엇이든지 우리의 구하는 바를 우리에게 하여 주시기를 원하옵나이다.’ 이르시되 ‘너희에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여짜오되 ‘주의 영광 중에서 우리를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앉게 하여 주옵소서.’”라고 했습니다. 이에 대하여 다른 제자들은  ‘야고보와 요한에 대하여 분히 여겼다.’(41절)라고 격분했습니다.

이를 지켜보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본문의 말씀을 들려주셨습니다. 즉 서로 높아지려는 제자들에게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조건과 함께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마땅히 갖추어야 할 대인관계에 대하여 가르치셨습니다. 지금 이 시대도 다를 것이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본문 바로 앞쪽인 16:24-25절에서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오늘의 우리들은 십자가를 지는 일인 섬김과 헌신과 봉사의 일을 힘겨워하고, 세상적인 것을 버리고 비우는 것은 더더욱 하지 않으려 합니다. 오히려 섬김을 받는 것과 높은 자리에 앉는 것과 부귀영화를 누리는 것이 좋은 신앙인 것처럼 생각합니다. 그러면 우리 그리스도인은 어떤 관계를 이루어야 하겠습니까?

※ 하나님이 원하시는 관계는 자신을 버리고 낮추는 관계입니다.

세상에는 우리 사람 중심으로 보았을 때 세 가지의 관계가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과의 관계이며, 둘째는 사람과의 관계, 셋째는 사물과의 관계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정립되지 않았으니 사람과 사물 즉 육신적인 관계 속에서 삽니다. 그래서 이들은 세상의 일들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물질적인 욕구로 만족을 삼습니다. 하지만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하면서 근본적인 관계는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이는 세상적인 만족이 아니라 영적인 소망과 만족으로 산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로마서 8:24-25절에서는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고 하십니다. 그리스도인이 이 관계를 무시하고 세상에 소망을 두면 육신적으로 살아가는 세상 사람과 전혀 다를 바가 없게 됩니다. 그러므로 사람과의 관계에서도 우리의 영원한 소망을 전제로 한 관계를 이루어야 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이 이루어야 하는 예수 그리스도안에서의 인간관계는 세상적으로 보면 어려운 조건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조건으로 어린아이와 같은 삶을 제시하셨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인간관계도 이 작은 자 하나도 업신여기지 않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도 빌립보서 2:3절에서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라고 하십니다. 세상 사람들은 ‘자기 자랑하는 맛으로 산다.’고들 합니다. 그래서 옛날 양반시대에는 체통 때문에 ‘찬물을 마시고도 이빨을 쑤신다.’고 했습니다. 지금이라고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특히 우리나라는 일류병이 들어서 일등이 아니면 알아주지도 않습니다. 그래서 인간관계에서도 더더욱 허세만 많아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환경이지만 예수님께서는 ‘어린아이와 같이 자신을 낮추고, 보잘 것 없는 작은 자를 업신여기지 않아야 한다.’고 하십니다.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이 사람과의 관계에서 반드시 갖추어야 하는 것은 겸손입니다. 하지만 정말 실천하기 어려운 것이 ‘자기를 낮추는 겸손’입니다. 예수님께서 본문 3절에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고 하셨습니다. 바꾸어 말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고 싶다면 아무리 어려워도 겸손하게 자신을 낮추라.’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나 자신이 생각할 때에 정말 보잘 것 없는 사람을 만났는데 그 사람 앞에서 자신을 낮추고, 그 사람을 나보다 낫게 여길 수 있겠습니까? 오늘의 교회에서 물의가 일어나는 대부분의 일들이 자신을 낮추지 못하는 교만함 때문입니다. 사람은 자신이 무시당하고 있다고 여기면 아무리 힘없는 사람이라도 화가 나고 분쟁을 일으키게 됩니다. 그런데 이런 사람까지도 하나님께서 지으신 소중한 생명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자신의 교만한 때문에 힘없고 가난하고 연약한 성도 중의 한 사람이라도 실족하게 하면 차라리 죽는 것이 낫다고 하십니다. 본문 6-7절입니다.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작은 자 중 하나를 실족하게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이 그 목에 달려서 깊은 바다에 빠뜨려지는 것이 나으니라. 7 실족하게 하는 일들이 있음으로 말미암아 세상에 화가 있도다. 실족하게 하는 일이 없을 수는 없으나 실족하게 하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도다.” 무서운 말씀이지요?

예수님은 이어서 이렇게 사람을 실족시키는 죄가 무섭다는 것을 직접적으로 강조하십니다. “만일 네 손이나 네 발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장애인이나 다리 저는 자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과 두 발을 가지고 영원한 불에 던져지는 것보다 나으니라. 9 만일 네 눈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한 눈으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눈을 가지고 지옥 불에 던져지는 것보다 나으니라.” 이 말씀에서는 특별하게 자신의 자랑과 교만 때문에 실족하게 하는 것을 염두에 두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고린도후서 11:30절에서 “내가 부득불 자랑할진대 내가 약한 것을 자랑하리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 외에는 자랑 할 것이 없습니다. 여러분이 지금도 세상의 것들을 자랑거리로 삼고 싶다면 아직은 온전한 주님의 사람이 되어 있지 않은 것입니다. 요한일서 2:16절을 봅시다.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의 나라를 사모한다면 나를 교만하게 하고 세상 것들을 자랑하게 하는 모든 것을 과감하게 버리고 작은 사람까지도 존중하는 인간관계를 이루어야 합니다.

우리가 이렇게 작고 힘없고 가난하고 연약한 사람이라도 나와 동일한 하나님의 자녀로 인정하고 존중해야 할 이유는 본문 10절에 있습니다. “삼가 이 작은 자 중의 하나도 업신여기지 말라. 너희에게 말하노니 그들의 천사들이 하늘에서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항상 뵈옵느니라.” 하나님의 자녀가 되면 하나님께서 자신의 자녀를 섬기도록 천사를 지정하여 배치하십니다. 그 사람의 천사가 항상 하나님께 그 사람의 상황을 보고하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14절입니다. “모든 천사들은 섬기는 영으로서 구원 받을 상속자들을 위하여 섬기라고 보내심이 아니냐.” 그러므로 우리가 이렇게 작고 힘없고 가난하고 연약한 사람이라도 나와 동일한 하나님의 자녀로 인정하고 존중하게 되면 주어지는 하나님의 은혜도 큽니다. 베드로전서 5:5-6절에서는 “젊은 자들아, 이와 같이 장로들에게 순종하고 다 서로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하신 손아래에서 겸손 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고 하십니다. 뿐만 아니라 시편 149:4절에서는 “여호와께서는 자기 백성을 기뻐하시며 겸손한 자를 구원으로 아름답게 하심이로다.”고 하셨고, 잠언 15:33절에서는 “겸손은 존귀의 길잡이”라고 하시고, 22:4절에서는 “겸손과 여호와를 경외함의 보상은 재물과 영광과 생명이니라.”고 하시며, 이사야 29:19절에서는 “겸손한 자가 여호와로 인하여 기쁨이 더한다.”고 하시며, 57:15절에서는 “하나님께서 마음이 겸손한 자와 함께 거한다.”고 하셨습니다. 이처럼 겸손한 삶에는 하나님의 나라를 비롯하여 수많은 약속이 들어있습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예수님께서 마지막 때를 말씀하시면서 마태복음 24:12-13절에서 말씀하십니다. “불법이 성하므로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지리라.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고 하셨습니다. 지금 우리의 때가 이렇게 온 사회와 나라가 불법과 거짓으로 가득합니다. 그래서 사람을 사랑하기 보다는 무관심과 의심의 눈초리를 세우고 나 자신이 해를 당하지 않으려고 경계하며 멀리하려 합니다. 이렇게 하면 나 자신도 하나님께로부터 멀어지게 되고 결국 버림받게 됩니다. 그래서 마지막 때에는 그리스도인들이 서로 모이기를 힘써서 서로 관심을 가지고 돌아보도록 부탁하셨습니다. 내가 작고 소외받는 사람들에게 관심을 가지면 하나님께서 나에게 관심을 가지십니다. 예수님은 나 같은 죄인, 나 같이 어리석은 인생에게 관심을 가지셔서 하나님의 신분을 버리시고 그 멸시의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그 주님을 만나려면 예수님의 사랑 안에서 서로 존중하는 인간관계를 형성해야 합니다. 아프리카 속담에 “나무를 심어야 할 시기는 20년 전이었다. 그러나 두 번째 중요한 시기는 바로 지금이다.”라고 했습니다. 많이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나의 영원한 소망을 위하여 겸손한 삶을 이루어갑시다. 하나님 앞에서 겸손하게 자신을 낮추는 사람이 하나님의 나라에 큰 사람입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 앞에서 큰 사람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마라나-타(μαράνα-θ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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