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예수교 장로회
설교모음

숲을 보는 신앙

작성자 늘푸른 댓글 / 조회: 5,110회 작성일 2017-06-25 21:38

*** 숲을 보는 신앙 / 고린도후서 4:16-5:10

고린도후서 4:16-5:10, “16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 17 우리가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18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 1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느니라. 2 참으로 우리가 여기 있어 탄식하며 하늘로부터 오는 우리 처소로 덧입기를 간절히 사모하노라. 3 이렇게 입음은 우리가 벗은 자들로 발견되지 않으려 함이라. 4 참으로 이 장막에 있는 우리가 짐 진 것같이 탄식하는 것은 벗고자 함이 아니요 오히려 덧입고자 함이니 죽을 것이 생명에게 삼킨 바 되게 하려 함이라. 5 곧 이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에게 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라. 6 그러므로 우리가 항상 담대하여 몸으로 있을 때에는 주와 따로 있는 줄을 아노니 7 이는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행하지 아니함이로라. 8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있는 그것이라. 9 그런즉 우리는 몸으로 있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가 되기를 힘쓰노라. 10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나타나게 되어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

** 들어가는 말

미국의 소설가 ‘리처드 바크’의 대표작인 ‘갈매기의 꿈(Jonathan Livingston Seagull)’이라는 신비주의 소설이 있습니다. 전직 비행사였던 작가가 비행에 대한 꿈과 신념을 실현하고자 끝없이 노력하는 갈매기 ‘조나단 리빙스턴’의 일생을 통해 모든 존재의 초월적 능력을 일깨운 우화형식의 신비주의 소설입니다.
조나단 리빙스턴은 단지 먹이를 구하기 위해 하늘을 나는 다른 갈매기와는 달리 비행 그 자체를 사랑하는 갈매기입니다. 멋지게 날기를 꿈꾸는 조나단은 진정한 자유와 자아실현을 위해 고단한 비상의 꿈을 꿉니다. 조나단의 이러한 행동은 갈매기사회의 오랜 관습에 저항하는 것으로 여겨져 다른 갈매기들로부터 따돌림을 받게 되고 끝내 그 무리로부터 추방당하게 됩니다. 동료들의 배척과 자신의 한계에도 좌절하지 않고 끊임없는 자기수련을 통해 완전한 비행술을 터득한 조나단은 마침내 무한한 자유를 느낄 수 있는 초현실적인 공간으로까지 날아올라 꿈을 실현하게 됩니다. 그러나 조나단은 자기만족에 그치지 않고 동료 갈매기들을 초월의 경지에 도달하는 길로 이끌게 됩니다.

이 작품은 '가장 높이 나는 새가 가장 멀리 본다.' 는 진정한 삶을 향한 깨달음을 전하는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조나단 리빙스턴은 다른 갈매기들이 해변에서 혹은 인간세상의 쓰레기들에서 썩은 고기를 차지하려고 싸울 때 자신은 높이 더 높이 날기 위하여 창공을 비행합니다. 결국 조나단은 높은 하늘에서 넓은 세상을 바라보게 됩니다. 우리 사람들도 바로 눈앞의 이익에만 몰두하면 넓은 것을 보지 못하게 되며, 육신적인 것에 집착하면 영적인 것을 볼 수 없게 됩니다. 사도 베드로는 그리스도인의 신성한 성품인 믿음, 덕, 지식, 절제, 인내, 경건, 형제우애, 사랑을 열거하고 이렇게 말합니다. 베드로후서 1:8-9절입니다. “이런 것이 너희에게 있어 흡족한즉 너희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알기에 게으르지 않고 열매 없는 자가 되지 않게 하려니와 이런 것이 없는 자는 맹인이라. 멀리 보지 못하고 그의 옛 죄가 깨끗하게 된 것을 잊었느니라.” 그리스도인이 신성한 성품의 삶을 살지 못하면 세상의 썩어질 것에 마음을 빼앗기게 되고 결국 독수리가 닭처럼 사는 것처럼 된다는 뜻입니다. “멀리 보지 못한다.”는 말은 ‘can not see afar off’ 라는 말로 ‘육신의 삶에 집착하여 하나님 나라의 영광을 보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즉 우리가 숲 속에 들어가서 나무와 동식물들의 개체만 보고 있으면 숲 전체를 볼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이 시대의 사탄은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일에 집착하여 영의 세계를 보지 못하게 하려고 온갖 방법으로 미혹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혹시 소소한 일에 매여 중요한 것, 생명의 길을 놓치고 있지는 않습니까?

※ 본문말씀의 배경과 의미를 살펴봅시다.

본문말씀은 ‘이 세상에서의 육신의 삶이 전부가 아니라 보다 더 중요한 보이지 않는 영의 삶이 있다.’고 말씀합니다. 즉 ‘그리스도인들이 주목해야 하는 것은 지금은 보이지 않지만 영원한 영의 삶을 소망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본문 4:18-5:1절을 봅시다.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 1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느니라.” 이 말씀은 ‘잠깐 있다가 없어질 보이는 것에 집착하지 말고,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을 소망하라.’는 의미입니다. 지금의 그리스도인들이 눈에 보이는 세상의 것에 집착하고 있습니다. 천국이든 지옥이든 지금 당장은 보이지도 않고 느낄 수도 없으니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천국과 지옥이 결코 멀리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예전에는 사람이 죽으면 시신을 상여에 실어서 사람들이 어께에 메고 장지로 갔습니다. 상여를 이끄는 선소리꾼이 요령을 흔들며 선소리를 넣으면 상여꾼들이 후렴으로 답을 합니다. “대대손손이 잘 살자더니. 어허 어야 어허 넘차 어야. 가신단 말씀이 웬 말씀이요. 어허 어야 어허 넘차 어야. 북망산이 멀다더니 대문 밖이 북망일세. 어허 어야 어허 넘차 어야…” 이 소리 속에서 세상 사람들도 죽음이 멀다고 생각했는데 바로 대문 밖에 죽음이 있다고 탄식합니다.

주님이 지금이라도 부르시면 우리는 당장 이 육신을 떠나야 합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너무나 태평스럽습니다. 주님을 만날 준비를 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이 육신은 그렇게 강하지 않습니다. 4:7절에서 표현한 대로 우리 육신은 깨지기 쉬운 ‘질그릇’과 같습니다. 질그릇 같은 이 육신은 나이가 들면서 낡아집니다. 하지만 우리의 영은 주님 만날 날이 다가올수록 더욱 새롭게 됩니다. 그래서 본문 9-10절에서 “그런즉 우리는 몸으로 있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가 되기를 힘쓰노라. 10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나타나게 되어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고 하십니다. 이 세상에서 육신이 누리는 잠깐의 즐거움을 위하여 영원한 고통을 택하시렵니까? 아니면 예수님께서 제물이 되시면서 까지 우리를 위하여 열어주신 영원한 행복을 누리는 영의 삶을 택하시겠습니까?

※ 숲을 보려면 높이 올라가야 합니다.

‘화석(化石)’이라는 제목의 영화가 있었습니다. 주인공은 자수성가하여 엄청난 재벌이 된 50대의 중년사업가입니다. 그는 유럽 여행 중에 자신의 주치의가 수행 비서에게 건  전화를 우연히 엿듣게 되었습니다. 주치의의 말은 ‘사업가가 말기 암이며 잘해야 앞으로 1년 정도밖에 더 살 수 없다.’는 내용이었습니다. 모든 것이 삽시간에 무너져 내렸습니다. 절망감이 온 몸을 감싸서 자포자기와 허무 속에서 방황하게 됩니다. 그는 자기가 지금까지 헛 살아온 것을 깨닫습니다. 정신없이 살면서 일구어놓은 일들이 사실은 별 것 아니었습니다. 돈을 벌기 위하여 그토록 바쁘게 뛰어다니다가 그 보다 더 귀하고 의미 있는 일들을 다 놓치고 살았음을 깨달았습니다.
그는 죽음을 1년 앞두고 비로소 정신을 차리고 자신을 보게 된 것입니다. 그는 참으로 오랜만에 자기를 키워 준 계모를 찾아가 고개를 숙여 감사했습니다. 하나밖에 없는 동생을 만나 나란히 누워 하룻밤을 지내며 형제의 우애를 되새겼습니다. 수십 년 만에 옛 전우도 방문했습니다. 그리고 아내가 죽은 이후로 의도적으로 잊으려 했던 말들도 떠올랐습니다. 그 말은 아내가 살아 있을 때에 늘 “예수 믿으라.”고 하면서 들려주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해 아래 있는 모든 것이 헛되도다.”라는 전도서 1장의 말씀이었습니다. 지금까지의 노력과 분투와 분주함은 오로지 자기 자신과 두 딸만을 위한 것이었음을 깨닫고 자신도 별 수 없는 인생임을 알게 됩니다. 죽음을 앞두고서야 그는 인생은 먹고 살기 위한 삶 그 이상이며, 창조자가 준 시간은 귀중한 선물이라는 것을 조금씩 깨닫게 됩니다. “그렇다면 앞으로 남은 몇 달을 어떻게 살 것인가?” 생각에 잠긴 채 이 영화는 막을 내립니다.

만약 여러분이 이 주인공이라면 ‘앞으로 남은 몇 달을 어떻게 사시겠습니까?’ 아마도 돈을 벌어야 되겠다고, 마지막 순간까지 돈벌이를 하겠다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정말 하루하루가 소중한 시간들일 것입니다. 사도 베드로는 이러한 심정으로 베드로전서 4:7절에서 성도들을 권면합니다.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이 왔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 삶의 시간들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정신을 차리고 마음을 동이고 기도하라고 하십니다. 이 말은 ‘세상의 끝이 다가 왔으니 우리의 삶을 하나님과 교통하는 영적인 높은 경지로 끌어올리라.’는 뜻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여러분이 사는 사회와 세상의 흐름을 어떻게 느끼십니까? 저는 요즘 사람들을 보면서 ‘왜 저렇게 눈앞에 있는 것에만 집착하고 좀 더 멀리 보지 못할까?’라는 당혹감과 실망감으로 힘이 빠질 때가 많습니다. “조금만 더 멀리 보면 그런 어리석은 결정을 하지 않을 텐데…”라는 안타까움으로 마음이 아픕니다. 사람들은 그 웅장한 숲 속에 들어가서 겨우 눈앞의 나무와 경치에 마음을 빼앗겨서 그 넓은 숲을 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눈앞의 아름다움과 이익에 빠져서 그 넓은 숲에서 길을 찾지 못하여 이리저리 헤매고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야 그렇다고 하지만, 그리스도인들마저 땅에서 썩어질 재물과 부귀영화에 마음을 빼앗기고 삽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 썩을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요한복음 6:26-27)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이적으로 배불리 먹게 해주고 병을 고쳐주니까 따라다녔습니다. 지금도 건강을 위하여, 잘 살기 위하여, 좀 더 나은 삶을 위하여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님을 따르는 이유는 영원한 생명이 예수님께 있기 때문입니다. 이 생명의 숲을 보려면 영의 삶이 하나님께로 높이 올라가야 합니다.

※ 어떻게 높이 올라갈 수 있습니까?

본문 1-3절을 읽어봅시다.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느니라. 2 참으로 우리가 여기 있어 탄식하며 하늘로부터 오는 우리 처소로 덧입기를 간절히 사모하노라. 3 이렇게 입음은 우리가 벗은 자들로 발견되지 않으려 함이라.” 내용을 살펴봅시다. “장막 집”이란, 일시적인 거주지인 ‘천막’을 말하는데, 이 말씀에서는 ‘인간의 육체’를 의미합니다. “무너지면”이라는 말은 ‘육신의 죽음’을 의미하고,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란 하나님의 나라에서 살게 될 영원히 썩지 아니하는 ‘신령한 육체’를 의미합니다. “벗은 자들로 발견되지 않으려 함”이란 ‘영원한 삶을 위한 예복을 준비해야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이 세상에서 육신으로 살 때에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서의 삶을 준비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이 예복은 요한계시록 19:8절에서 “그에게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 옷을 입도록 허락하셨으니 이 세마포 옷은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라고 하십니다. 지금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이 하나님 나라에서의 예복이 됩니다. 이처럼 비록 우리가 지금은 육신으로 세상에서 살지만 영원한 집을 위하여 사는 것이 높이 올라가는 삶입니다.

본문 6-9절에서 좀 더 사실적으로 높이 올라가는 삶을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항상 담대하여 몸으로 있을 때에는 주와 따로 있는 줄을 아노니 7 이는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행하지 아니함이로라. 8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있는 그것이라. 9 그런즉 우리는 몸으로 있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가 되기를 힘쓰노라.” 우리가 지금 이 육신으로 사는 동안에는 모든 일에 한계가 있습니다. “몸으로 있을 때에는 주와 따로 있는 줄을 아노니”라고 했는데, 이는 ‘육신으로 사는 동안에는 주님을 얼굴로 대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육신으로 세상에 살고 있는 동안에는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즉 눈으로 볼 수 없기 때문에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생명의 부활을 얻어 하나님의 나라에서 살 때에는 실제로 주님과 함께 살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3:12절에서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고 고백합니다. 히브리서 11:6절에서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라고 하셨듯이 이렇게 믿음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이 높이 올라가는 삶입니다.

우리 인생의 궁극적인 목적은 예수님과 함께 살면서 하나님 아버지를 기쁘시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를 어떻게 기쁘시게 할 수 있습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음으로 순종하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아 알고 생활 속에서 실천하는 삶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고 그 말씀 속에서 살면 멀리 우리가 사는 세계의 숲을 볼 수 있으며 내가 가야 할 길을 알게 됩니다. 우리가 이렇게 살 면 하나님 앞에서 부끄럽지 않게 설 수 있게 됩니다. 본문 10절입니다.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나타나게 되어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 이렇게 사는 것이 마음대로 된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우리 인간의 마음을 조변석개(朝變夕改)라고 했듯이 수시로 변하는 것이어서 매 삶의 순간을 주님만 바라보고 따라가지를 못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성령님을 보내주셨습니다. 본문 5절입니다. “곧 이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에게 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라.” 지금 우리와 함께 하시는 성령님께 도움을 구하면 됩니다.

밥을 먹고 물을 마시듯이 성경말씀을 읽는 것과 기도하는 일에 마음을 두십시오. 예배는 하나님께 나아가는 가장 좋은 길입니다. 매일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신만의 예배를 잊지 마십시오. 이것이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는 숲을 볼 수 있는 영적인 높은 자리가 됩니다.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잘 분별하고 따라가는 영적인 성숙된 삶을 이루시기를 축복합니다.
마라나-타(μαράνα-θ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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