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예수교 장로회
설교모음

자신의 때를 아는 지혜

작성자 늘푸른 댓글 / 조회: 6,833회 작성일 2017-03-06 22:25

*** 자신의 때를 아는 지혜 / 요한복음 7:1-9

요한복음 7:1-9, “1 그 후에 예수께서 갈릴리에서 다니시고 유대에서 다니려 아니하심은 유대인들이 죽이려 함이러라. 2 유대인들의 명절인 초막절이 가까운지라. 3 그 형제들이 예수께 이르되 ‘당신이 행하는 일을 제자들도 보게 여기를 떠나 유대로 가소서. 4 스스로 나타나기를 구하면서 묻혀서 일하는 사람이 없나니 이 일을 행하려 하거든 자신을 세상에 나타내소서.’하니 5 이는 그 형제들까지도 예수를 믿지 아니 함이러라. 6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때는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거니와 너희 때는 늘 준비되어 있느니라. 7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지 아니하되 나를 미워하나니 이는 내가 세상의 일들을 악하다고 증언함이라. 8 너희는 명절에 올라가라. 내 때가 아직 차지 못하였으니 나는 이 명절에 아직 올라가지 아니하노라.’ 9 이 말씀을 하시고 갈릴리에 머물러 계시니라.”

** 들어가는 말

성경을 읽을 때에 주의해서 읽고 생각해야 할 단어 중 하나는 ‘때’와 ‘시기’입니다. 이 단어와 의미를 생각하면서 성경을 읽으면 하나님의 역사하심과 섭리 그리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뜻을 보다 깊이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 사실을 깨달은 솔로몬은 전도서에서 이렇게 표현합니다. 3:1, 11절입니다. “범사에 기한이 있고 천하만사가 다 때가 있나니 …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들에게는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이 하시는 일의 시종을 사람으로 측량할 수 없게 하셨도다.” 하나님의 사람 모세도 시편 90:12절에서 “우리에게 우리 날 계수함을 가르치사 지혜로운 마음을 얻게 하소서.”라고 기도합니다. 이렇게 사람이 자신에게 주어진 때나 시기를 안다는 것은 가장 효과적인 삶을 이룰 수 있기 때문에 중요합니다. 특히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하나님께서 정하신 때와 시기를 안다는 것은 영원한 생명과 연관된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에게 주어진 때와 시기, 자신의 자리를 아는 지혜를 가져야 합니다.

※ 본문의 배경과 의미를 봅시다.

본문말씀의 지리적인 배경은 갈릴리와 예루살렘입니다. 역사적인 배경은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 중반부 정도인 초막절입니다. 초막절은 율법이 규정한 유대인이 반드시 지켜야 하는 삼대 절기 중 하나입니다. 초막절은 이스라엘 자손들이 출애굽 후 광야에서 지낼 때 초막에서 살던 때를 기억하며 일주일 동안 하나님의 은혜와 인도하심을 감사하는 절기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벳세다 들판에서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먹이신 이적을 행하신 후 고향인 갈릴리로 돌아오셨습니다. 초막절이 다가오자 예수님의 형제들이 예수님께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이 행하는 이 큰 일을 많은 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넓은 유대로 가서 행하소서. 자신을 나타내려면 이 좁은 갈릴리에 묻혀서는 안 됩니다.” 아마도 예수님의 동생들이 보기에는 예수님이 큰 능력을 행하면서도 시골에 묻혀 지내는 것이 답답했는지도 모릅니다. 마침 초막절이 되어 전국에서 수많은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으로 모이는 최적의 기회가 왔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아직 내 때가 이르지 않았다.”고 하시면서 동생들의 제안을 거절하셨습니다. 그 동생들이 초막절을 지키기 위하여 예루살렘으로 떠난 후, 예수님께서도 비밀리에 예루살렘으로 가셨습니다.

예루살렘에 모인 사람들은 최근에 두각을 나타내는 예수님의 가르침과 이적에 대하여 말하면서 예수님을 두루 찾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신을 나타내지 않으셨습니다. 명절의 중간 쯤 되었을 때, 예수님은 예루살렘 성전으로 가셔서 사람들을 가르치셨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놀랍게 여기면서도 받아들이지를 않았습니다. 갈릴리 시골 출신에 배우지도 못한 무식한 사람으로 여겼으며 심지어 귀신이 들렸다고까지 비난했습니다. 그 때나 지금이나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사람을 평가하는 기준은 비슷했나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이 말씀을 중심으로 하여 영원한 생명을 얻는 길과 성령님의 역사하심을 전하시며 가르치셨습니다. 본문 아래의 37-39절을 봅시다. “명절 끝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이르시되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하시니 이는 그를 믿는 자들이 받을 성경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않으셨으므로 성령이 아직 그들에게 계시지 아니하시더라).” 이렇게 예수님을 배척한 유대인들은 2000년이 지난 아직까지도 돌이키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결국 이들이 잃어버린 구원의 때가 이방인들에게 주어졌습니다. 그 덕분에 지금의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이처럼 우리에게 주어지는 때와 시기는 자신의 생명과 연관된 중요한 것임을 잊지 않아야 합니다.

※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때와 시기는 무엇입니까?

우리 속담에 ‘말은 제주도로 보내고 사람은 서울로 보내라.’는 말이 있습니다. 즉 ‘사람은 큰물에서 활동해야 하며, 큰 무대에서 인정을 받아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출세의 기회가 많이 주어지는 대도시로 몰리며, 인정을 받기 위하여 세계의 무대로 진출하려고 합니다. 넓은 무대에서 인정을 받으면 그만큼 유명해지고 유명해지는 만큼 자신의 삶이 보장되기 때문이겠지요. 이것이 세상적인 관점이고 가치관인 ‘출세 지향적 삶’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출세의 기회 즉 자신의 계획을 이루는 때를 스스로 만들려고 노력합니다. 본문말씀에 나오는 예수님의 동생들이 이렇게 세상적인 가치관을 가지고 예수님께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절기에 예루살렘으로 가라고 한 것입니다. 본문 3-4절입니다. “당신이 행하는 일을 제자들도 보게 여기를 떠나 유대로 가소서. 4 스스로 나타나기를 구하면서 묻혀서 일하는 사람이 없나니 이 일을 행하려 하거든 자신을 세상에 나타내소서.” 여러분의 가치관도 이러하지는 않습니까?

성경에는 하나님의 의뢰하는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하나님의 섭리의 때가 절묘하게 표현됩니다. 에스더의 이야기를 예로 봅시다. 에스더가 아버지처럼 모시던 모르드개가 에스더를 왕후로 보내고는 날마다 대궐 문에서 에스더의 동정을 살폈습니다. 그 때에 대궐 문지기인 두 내시가 왕에게 원한을 품고 왕을 암살하려고 모의하는 것을 알았습니다. 이 사실을 에스더에게 알렸고 에스더는 모르드개의 이름으로 왕에게 알렸습니다. 왕이 그들을 심문하여 자백을 받았고 그 둘은 처형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일은 곧 잊혔습니다. 시간이 지나 거만스러운 하만이 총리가 되었고 모든 사람에게 절하도록 명령했습니다. 모르드개는 하나님 외에 누구에게도 절할 수 없는 유대인이라고 하면서 절하지 않았습니다. 하만은 분개하여 모르드개만 아니라 유대인 전부를 죽이도록 왕에게 허락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모르드개를 죽이려고 20미터나 되는 장대를 마당에 세우고 왕에게 모르드개를 죽일 수 있도록 허락을 받으려고 어전에 막 이른 때였습니다. 한편 아하수에로 왕은 왕후 에스더가 베푼 잔치에 초대를 받고 그 밤에 잠이 오지를 않았습니다. 에스더 6:1-4절을 봅시다. “그날 밤에 왕이 잠이 오지 아니하므로 명령하여 역대 일기를 가져다가 자기 앞에서 읽히더니 그 속에 기록하기를 ‘문을 지키던 왕의 두 내시 빅다나와 데레스가 아하수에로 왕을 암살하려는 음모를 모르드개가 고발하였다.’하였는지라. 왕이 이르되 ‘이 일에 대하여 무슨 존귀와 관작을 모르드개에게 베풀었느냐?’하니 측근 신하들이 대답하되 ‘아무것도 베풀지 아니하였나이다.’하니라. 왕이 이르되 ‘누가 뜰에 있느냐?’하매 마침 하만이 자기가 세운 나무에 모르드개를 달기를 구하고자 하여 왕궁 바깥뜰에 이른지라.” 짜릿하도록 절묘하지 않습니까? 모르드개는 죽임을 당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높여졌고, 하만이 죽임을 당했습니다. 이런 일이 성경에 즐비합니다.

다니엘 7:25절을 봅시다. “그가 장차 지극히 높으신 이를 말로 대적하며, 또 지극히 높으신 이의 성도를 괴롭게 할 것이며, 그가 또 때와 법을 고치고자 할 것이며, 성도들은 그의 손에 붙인 바 되어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를 지내리라.” 이 말씀은 마지막 때에 일어날 하나님을 대적하는 세력에 대한 말씀입니다. 이들은 ‘때와 법을 고치고자 한다.’고 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정하신 때와 말씀을 바꾸어 사람들을 현혹하려 합니다. 이들은 진리를 가려서 사람들이 알지 못하게 하며 자신들이 계획한 것을 이루려고 때와 시기까지도 바꾸려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지막 때에는 사탄과 그의 하수인들이 사람들의 눈과 마음을 미혹하여 진리에서 돌이키려 합니다. 이 사실을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 24:24절입니다.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 큰 표적과 기사를 보여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도 미혹하리라.” 지금 사탄은 우리의 영을 어둡게 하여 자신에게 주어진 때와 시기뿐만 아니라 자신의 자리까지도 찾지 못하도록 미혹합니다. 예수님의 동생들조차 예수님을 믿지 않고 이렇게 세상의 이치로 때를 바꾸려고 했습니다. 우리도 미혹되지 않으려면 자신의 때와 시기를 놓치지 않도록 깨어 있어야 합니다.

※ 지금 찾아야 할 것은 자신의 때와 시기, 자신의 자리입니다.

올해가 종교개혁 50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여러 기독교 공동체에서 종교개혁 500주년 기념행사를 기획하고 시행하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는 종교개혁을 기념할 때가 아니라 새로운 개혁을 이루어야 할 때입니다. 고린도후서 6:2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이르시되 ‘내가 은혜 베풀 때에 너에게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 하셨으니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 이 말씀처럼 놓쳐서는 안 되는 은혜와 구원의 때가 지금 우리 앞에 있습니다. 때와 시기에 관한 좋은 예가 교회사에 있습니다. 교회의 타락이 극에 달하고, 종교개혁의 바람이 일어나고 있을 때인 중세기의 일입니다.

스위스의 ‘바젤(Basel)’에 살던 경건한 믿음의 사람 ‘마틴(Martin)’은 성경의 진리를 깨달았습니다. 그런데 마틴은 부패하고 타락했던 당시 교회의 권세가 두려워서 감히 그 깨달은 바를 공개적으로 발표하거나 주장하지 못했습니다. 그는 자신이 깨달은 내용을 양피지(가죽종이)에 기록했습니다. 그리고 그 양피지를 접어서 자신의 집 거실 벽의 벽돌 하나를 빼내고 숨겼습니다. 그 내용은 이렇습니다. “오. 자비로우신 예수여. 나는 주님의 보혈의 공로로만 구원받을 수 있음을 압니다. 오직 주님의 십자가의 은혜를 믿음으로써만 구원을 받음을 압니다. 거룩하신 예수여. 나를 위해 희생하신 것을 감사드립니다. 나는 주님을 사랑합니다. 나는 주님을 사랑합니다.” 이 글은 약 200년 후에 발견되었습니다.
거의 같은 시대에 같은 이름의 사람이 독일의 작센에 있었습니다. 그의 이름은 ‘마틴 루터(Martin Luther)’입니다. 마틴 루터는 그리스도의 진리를 깨달았을 때 단호하게 말했습니다. “나의 주님은 천사들과 사람들 앞에서 그리고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나를 시인하셨는데 왜 내가 세상의 군왕들 앞에서 나의 주님을 시인하기를 두려워하리오.” 그리고 목숨을 건 결단의 행동으로 결국 세계의 종교개혁을 일으켰습니다.

물론 마틴 루터보다 100여 년 전부터 개혁을 단행했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의 희생이 바탕이 되어 개혁의 의지가 무르익었을 때 마틴 루터의 95개 조항의 반박문이 계기가 되어 개혁의 불길이 일어났던 것입니다. 이 개혁으로 오늘의 개혁교회가 탄생했습니다. 이처럼 때라고 하는 것은 사람의 생사(生死)와 일의 성패(成敗)를 가름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내 때”라는 말은 ‘하나님의 뜻이 이루는 순간’이며, 곧 ‘인류의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심’의 때입니다. 예수님께서 당신 자신을 나타내시는 것은 동생들의 생각처럼 능력을 나타냄으로서 유명해지는 것이나, 출세를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오직 성부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한 때를 생각하셨습니다. 이것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때이며 시기이며 삶의 방식입니다. 이 방식에서 벗어나면 세상에서는 인정받고 유명해 질지 모르지만 하나님께는 전혀 인정받을 수가 없습니다. 지금 여러분이 그토록 수고하며 애쓰는 일들은 무슨 때를 위한 것입니까?

우리는 자신에게 주어진 때와 나 자신의 자리를 찾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이 시대에 살게 하시고 이 자리를 주신 것은 여기에 우리의 일이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신 것이 이 세상과 함께 즐거워하고 그들 가운데 인정받고 높아지기 위해서가 아니듯이, 그리스도인의 삶도 세상적인 명예나 권력이나 또는 육신적인 풍요함과 즐거움과 자신의 만족을 위해서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왜곡되고 비뚤어진 사람들의 생각과 삶의 방식을 하나님 중심으로 바꾸셨습니다. 그리스도인의 때와 시기는 하나님께서 결정하시며 우리가 머물러야 할 자리도 하나님께서 정하십니다. 이 때와 자리는 내가 예수님 안에 있고 예수님이 내 안에 계실 때에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삶의 아름다운 열매도 맺게 됩니다. 요한복음 15:4-5절입니다.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

여러분이 하나님이 정하신 때와 시기에 순종하는 생활을 합니까? 그리고 지금 머물고 있는 자리가 하나님께서 주신 자리입니까? 세상적인 자신의 삶을 가리기 위하여 형식적인 믿음만을 나타내고 있는 자리는 아닙니까? 여러분도 혹시 예수님의 동생들처럼 겉으로는 예수님과 가까이 있지만 마음은 세상적인 생각을 가지고 살고 있지 않습니까? 사탄이 여러분의 마음을 미혹하고 속여서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때와 시기 그리고 자리까지 왜곡하고 바꾸지 못하도록 깨어 있으십시오. 그리하여 매일의 삶에서 하나님께 인정받는 열매를 맺는 삶을 이루시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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