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예수교 장로회
설교모음

헌신으로 이루는 천국

작성자 늘푸른 댓글 / 조회: 5,429회 작성일 2017-01-25 17:42

*** 헌신으로 이루는 천국 / 마태복음 5:13-16

마태복음 5:13-16, “13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 데 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14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 15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 안 모든 사람에게 비치느니라. 16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 들어가는 말

본문말씀은 특별한 설명이 필요 없을 정도로 잘 알고 있을 말씀입니다. 그런데 설교의 인용문으로는 많이 사용을 했지만 설교본문으로 사용한 적은 별로 없습니다. 지난해 1월에도 본문말씀으로 말씀을 전했었습니다. 오늘은 본문말씀이 가지는 가장 강력한 주제인 ‘헌신’을 내용으로 하나님의 뜻을 찾아보려 합니다. ‘헌신’이라는 주제 또한 그리스도인에게는 많이 강조되는 것이어서 주제만 들어도 어떤 내용인지 짐작하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헌신에 대한 진정한 의미를 본다면 아무리 강조해도 과하지 않습니다. 이 시간의 제목이 ‘헌신으로 이루는 하나님의 나라’라고 했는데, 이유는 그리스도인의 제 일 순위 소망인 ‘하나님의 나라 시민이 되는데 필수요소’가 되기 때문입니다. 근거 말씀인 마태복음 16:24-25절입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이 말씀은 두 말할 필요도 없이 ‘주님께 대한 적극적인 헌신의 삶’을 말씀합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나라를 얻고자 한다면 나를 온전하게 드리는 전적인 헌신이 있어야 합니다.

어느 마을에 양을 치는 목동이 있었습니다. 저녁때가 되면 산에 방목했던 양을 몰고 우리로 돌아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양들의 등에 긁힌 상처가 있었습니다. 이런 일이 계속 반복되자 목동은 유심히 관찰했습니다. 그런데 산에서 내려오는 좁은 길목에 작은 가시나무가 있었는데 그곳을 지나오면서 그 가시에 등이 긁히는 것이었습니다. 목동은 다음 날 그 가시나무를 베어버리려고 톱을 가지고 갔습니다. 그러나 목동은 그 가시나무를 자를 수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가시나무에 가까이 가려는 순간 작은 새들이 가시나무에 걸려 있는 양털을 물고 날아가는 것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새들이 가시나무에 걸린 양틀을 모아서 둥지를 만들었던 것입니다. 목동은 가시나무를 베지 못한 채 돌아섰습니다.

양들의 작은 희생과 헌신이 다른 동물들에게 행복의 재료가 되었습니다. 우리 사람들도 누군가의 희생과 헌신으로 매일의 행복을 누리게 됩니다. 우리가 먹는 음식, 입는 옷, 따뜻한 집, 안전한 환경 등. 무엇 하나 희생과 헌신 없이 이루어진 것은 없습니다. 알고 보면 행복은 누군가의 희생과 헌신으로 생겨난 것입니다. 무엇보다 가장 큰 행복인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행복’은 예수님의 희생과 헌신 그리고 나의 영의 생명을 위해 일하고 기도하는 누군가에 의하여 주어진 것입니다. 이 사실을 이사야 53:5-6절에서 이렇게 표현합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예수님의 희생과 헌신이 나를 살린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일서 3:16절에서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고 하십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는 헌신이겠습니까?

※ 무엇을 진정한 헌신이라고 합니까?

예수님께서는 헌신의 중요성을 본문에서 빛과 소금을 비유로 설명하셨습니다. 왜냐하면 빛과 소금이 생명 유지에 필수이듯이 헌신도 영적인 생명유지에 필수적이기 때문입니다. 빛과 소금은 헌신을 설명하기에 가장 적절한 재료입니다. 빛의 필요성은 더 설명할 필요가 없겠지요. 소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몸에 흐르는 혈액과 양수, 세포에는 모두 0.9%의 염분이 있고 피를 돌게 하는 엔진인 심장은 소금덩어리입니다. 그래서 옛날에는 심장을 염통(鹽桶, 소금통)라고 불렀습니다. 그래서 심장은 암이 걸릴 확률이 가장 적은 곳입니다. 만일 염분이 공급되지 못하면 생명을 유지할 수 없습니다. 동물도 마찬가지입니다. 바닷물에는 보통 3% 정도의 염분이 있습니다. 이 말은 우리가 사용하는 소금을 만들려면 97%의 물을 증발시켜야 함을 뜻합니다. 즉 절대다수인 물의 희생으로 소금이 만들어집니다. 만약 소금이 녹지 않고 그대로 있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생선을 절이거나 김치를 담을 때, 혹은 나물을 무치거나 국을 끓일 때도 음식의 조화로운 맛을 내지 못하게 됩니다. 하지만 소금은 자신을 녹여서 형체도 없이 다른 것들을 조화시켜 음식을 맛깔스럽게 합니다.

이처럼 빛이나 소금이 자신을 태우거나 녹여서 밝히고 맛을 내는 것을 우리는 희생 또는 헌신의 모범으로 삼습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빛과 소금이라고 하신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는 무엇을 헌신이라고 합니까? 사전적인 의미로는 “몸을 바쳐 있는 힘을 다함”, “당신 자신을 한 가지 목표에 완전히 쏟는 것. 그리고 그 목표에 이르는 데 방해되는 모든 것을 포기해 버리는 것”이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요구되는 것은 하나님께 대한 전적인 헌신입니다. 예수님께서 요한복음에서는 전적인 헌신을 ‘밭에 뿌려진 한 알의 밀알이 되는 것’으로 설명하셨습니다. 12:24절입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즉 밀알이 땅에 뿌려져서 싹이 나게 되면 씨앗에 저장되어 있는 양분을 먹고 땅에 뿌리를 내립니다. 어느 정도 자란 식물의 싹을 뽑아보면 뿌리가 시작되는 지점에 씨앗의 껍질만 붙어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것이 헌신입니다. 새로운 열매를 위하여 자신을 온전히 내어놓는 것입니다.

‘란스 헤브너’라는 유명한 신학자는 ‘진정한 헌신의 의미’를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헌신은 85%로 만족할 수가 없다.” 만일 여러분의 남편이나 아내가 여러분에게 “여보, 내가 당신에 대하여 전부는 못해도 85% 정도는 성실할게요.” 라고 말한다면 기분이 어떻겠습니까? 85% 정도만 성실하겠다면 나머지 15%는 성실하지 못하겠다는 말입니다. 그 성실하지 못한 15% 속에는 온갖 것이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래서 헌신은 자신의 100%를 드리는 것이며, ‘삶의 전 영역’을 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헌신된 삶의 가장 큰 특징은 ‘예배’에 있습니다. 헌신된 사람은 예배를 즐거워하며, 적극적인 예배자가 됩니다. 그러나 예배는 주일에 한두 번 모여서 순서에 따라 찬송하고 기도하고 헌금하고 말씀 듣는 그런 행위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영과 진리’로 하는 예배는 매일 내 삶의 전 영역에서 드려져야 합니다. 즉 모든 생활 속에서 주님과 동행하며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본문 16절에서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고 하시고, 고린도전서 10:31절에서는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 하십니다. 주일 예배에 한 번 참석한 것으로 책임을 완수했다고 생각한다면 큰 오산입니다. 이것은 마치 하나님께 “내가 드리는 10%의 헌신에 만족하십시오.”라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 이야기를 듣고 자신의 경우를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일터에서 정년퇴임한 나이 든 성도가 있었습니다. 이분은 나름대로 자신의 생애가 하나님께 헌신된 삶이었다고 자부했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늙은 목사에 대한 전설’을 듣고는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 전설은 이렇습니다.
한 늙은 목사가 천사를 만났습니다. 그 천사는 하늘 창고에서 세상에서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휘황찬란한 면류관을 가지고 나왔습니다. 그 면류관은 수많은 보석과 다이아몬드로 장식되어 있었습니다. 천사가 말합니다.
“이것은 당신이 젊었을 때, 당신을 위해 만든 면류관이오. 하지만 당신은 당신의 삶을 주님께 완전히 바치기를 거부했기 때문에 이 면류관은 이제 당신 것이 아니오.”
그러더니 천사는 그 면류관을 가지고 창고로 들어갔습니다. 천사의 손에는 여전히 아름답기는 하지만 보석이 조금 밖에 없는 다른 면류관을 가지고 나왔습니다.
“이것은 당신이 중년일 때 만든 면류관이오. 하지만 당신은 당신의 삶 일부를 세상적인 추구에 사용했기 때문에 이것도 받을 수 없게 되었소.”
천사는 그 면류관을 가지고 다시 창고로 갔습니다. 이번에는 보석이 하나도 없는 단순한 털모자가 손에 들려 있었습니다. 천사가 말합니다.
“이것이 당신이 지금 받을 면류관이오. 영원히 당신 것이오.”
이 이야기를 들은 노년의 성도는 남은 생애를 주님만을 의지하는 삶으로 헌신하여 갈 곳 없는 노인들과 고아들을 위한 섬김의 삶을 살았다고 합니다.

이렇게 희생과 헌신이 중요한 이유는 하나님이 잊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서 6:10절에서 “하나님은 불의하지 아니하사 너희 행위와 그의 이름을 위하여 나타낸 사랑으로 이미 성도를 섬긴 것과 이제도 섬기고 있는 것을 잊어버리지 아니하시느니라.”고 하시며, 요한복음 12:26절에서도 “사람이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 나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자도 거기 있으리니 사람이 나를 섬기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귀히 여기시리라.”고 하십니다. 아무런 대가를 기대하지 않고 희생과 헌신된 삶으로 주님을 따르면 하나님께서 영원한 영광의 면류관으로 보상해 주십니다.

그런데 해결해야 할 문제가 하나 있습니다. 하나님께 헌신 된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에 동조하는 것입니다. 쉽게 말하면 ‘신분이 다르고 소속이 다른 그리스도인들이 세상 사람과 똑같이 산다.’는 것입니다. 단지 다르다면 그들은 하나님을 믿지 않고 나는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뿐입니다. 이들의 생활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향기가 전혀 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이라고 세상 사람들과 사귀지도 말고 세상적인 일을 하지도 말라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여기에 대하여 사도 바울이 고린도전서 5:9-11절에서 잘 설명했습니다. 함께 읽어 봅시다. “내가 너희에게 쓴 편지에 음행하는 자들을 사귀지 말라 하였거니와, 이 말은 이 세상의 음행하는 자들이나 탐하는 자들이나 속여 빼앗는 자들이나 우상 숭배하는 자들을 도무지 사귀지 말라 하는 것이 아니니 만일 그리하려면 너희가 세상 밖으로 나가야 할 것이라. 이제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만일 어떤 형제라 일컫는 자가 음행하거나 탐욕을 부리거나 우상 숭배를 하거나 모욕하거나 술 취하거나 속여 빼앗거든 사귀지도 말고 그런 자와는 함께 먹지도 말라 함이라.” 이 말씀에서 “형제”는 ‘주님 안에서의 형제’ 즉 같은 성도를 말합니다. 그리스도인도 육신으로 세상에 살기 때문에 세상의 일도 하고 세상 사람과 사귀기도 하여 조화롭게 삽니다. 그러나 그들의 삶에 동조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면 조화와 동조가 무엇이 다릅니까? 여기에 대한 좋은 예화가 있습니다.

중국 춘추시대 제나라의 안영이라는 사람은 아부하는 다른 신하들과는 달리 담대하게 왕에게 간언하는 재상이었습니다. 이 사실을 잘 아는 왕이 어느 날 한 신하를 보면서 안영에게 물었습니다. “저 사람은 어떤 사람 같은가?”그러자 안영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습니다. “저 사람은 전하의 의견에 장단을 맞추지 않고 단순히 동조할 뿐입니다.” 왕이 궁금한 듯 다시 물었습니다. “장단을 맞추는 것과 동조하는 것은 어떻게 다른가?” 안영은 “장단을 맞추는 것은 조화를 뜻하는 것으로 서로 다른 것들이 모여 이루어집니다. 비유컨대 국물과 같습니다. 고기, 양념, 소금 등을 넣어 끓여 지나치거나 모자람 없는 맛을 내는 것이지요.” 왕은 더 궁금해져서 말했습니다. “음…계속해 보아라.” 안영은 이어서 대답했습니다. “사람의 관계도 이와 같습니다. 전하가 옳다고 하는 것 속에서 거부할 것이 있으면 그것을 가려내서 전하가 진정으로 옳고 완전하게 해야 합니다. 반대로 전하가 거부하는 것 속에서 옳은 것이 있으면 그것을 가려내서 올바로 진언하여 전하를 부정에서 구하는 것이 조화입니다. 그러나 저 사람은 옳고 부정한 것을 가리지 않고 전하가 긍정하는 것은 긍정하고 부정하는 것을 부정하니 그것은 동조하는 것이지 조화가 아닙니다.”

이해가 되십니까? 그리스도인은 세상이 옳은 것을 거부할 때는 ‘잘못되었다.’고 말하며, 잘못된 것을 따를 때에는 ‘그것이 옳지 않다.’고 말하며 바른 것을 말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 조화를 이루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물에 물 타듯이 단순히 세상이 가는대로 따라가는 것은 그들의 일과 사상에 동조하는 것입니다. 세상에 동조하면 하나님께 버림받는다는 것은 성경의 진리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세상적인 사상과 일에 희생하고 헌신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우리의 희생과 헌신은 오직 하나님께 드려져야 합니다. 즉 하나님의 뜻을 세상에 나타내는 일에 헌신해야 하는 것입니다. 자녀를 양육하거나 세상 사람을 만날 때나 세상의 일을 할 때에도 그 일속에서 나타내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수행하는 것과 하나님의 뜻에 기꺼이 자신을 내 드리는 것이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는 헌신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을 빛이며 소금이라고 하시며,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하십니다. 아마도 앞으로는 세상이 이런 그리스도인들을 싫어하고 박해할 때가 올 것입니다. 그럴지라도 끝까지 예수님께서 가신 희생과 헌신의 길을 따라간다면 그 길 끝에서 우리가 바라는 하나님의 나라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이 길을 우리 모두 함께 갈 수 있기를 진심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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