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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위험한 신앙 - 자기 확신

작성자 늘푸른 댓글 / 조회: 115회 작성일 2024-12-22 17:07

*** 가장 위험한 신앙 - 자기 확신 / 로마서 9:30-10:4

 

로마서 9:30-10:4, “30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의를 따르지 아니한 이방인들이 의를 얻었으니 곧 믿음에서 난 의요. 31 의의 법을 따라간 이스라엘은 율법에 이르지 못하였으니 32 어찌 그러하냐? 이는 그들이 믿음을 의지하지 않고 행위를 의지함이라. 부딪칠 돌에 부딪쳤느니라. 33 기록된바 보라 내가 걸림돌과 거치는 바위를 시온에 두노니 그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함과 같으니라. 1 형제들아, 내 마음에 원하는 바와 하나님께 구하는 바는 이스라엘을 위함이니, 곧 그들로 구원을 받게 함이라. 2 내가 증언하노니 그들이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지식을 따른 것이 아니라. 3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아니하였느니라. 4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

 

※ 들어가는 말

 

포도나무는 매년 가지의 마디마다 새순이 돋아나고, 다음 해에 새 가지가 자라며 그 새 가지에서 열매가 달리게 됩니다. 잘 관리하면 포도나무는 매년 첫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이때 농부들은 새순에 난 열매들이 더 잘 자랄 수 있도록, 이듬해 봄에 새순이 나기 전 해묵은 가지를 쳐내야 합니다. 만약 아깝게 생각되어 해묵은 가지를 정리하지 않으면, 새순이 제대로 자라지 못해 과실이 탐스럽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해묵은 가지를 쳐내야 새순이 돋아나고 새 열매를 맺는 것처럼 사람의 마음과 생각도 마찬가지입니다. 부지런한 농부가 알찬 열매를 맺게 하듯이, 우리 그리스도인도 현재에 안주하지 않고 자기를 정비하며 도약해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마태복음 9:17절에서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지 아니하나니, 그렇게 하면 부대가 터져 포도주도 쏟아지고 부대도 버리게 됨이라.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둘이 다 보전되느니라.”라고 하셨습니다. 4세기 북아프리카 알제리와 이탈리아에서 활동한 신학자이자 성직자인 아우구스티누스(Aurelius Augustinus)도 “새로운 시간 속에서 새로운 마음을 담아야 한다.”라고 했습니다. 우리도 새로운 마음과 새로운 삶으로 도약해야 한다는 생각은 있지만, 그렇게 실천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한다.”라고 하시면서, 누가복음 5:38절에서는 “묵은 포도주를 마시고 새것을 원하는 자가 없나니, 이는 묵은 것이 좋다.함이니라.”라고 부연(敷衍)하여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묵은 포도주의 숙성된 맛에 길들이면, 새로운 포도주를 찾지 않게 된다는 뜻입니다. 그만큼 새로운 도약을 실행하기가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이 시간에는 이렇게 자기의 익숙해진 환경에 안주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를 살펴보려 합니다.

 

※ 본문 말씀의 배경과 의미입니다.

 

로마서는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뉘는데, 1장부터 11장까지는 교리와 신앙의 이론적인 설명, 12장부터 끝까지는 구원받은 성도의 실제적인 삶의 부분을 말씀합니다. 본문 말씀은 신앙이론의 마지막 부분으로써 ‘하나님께서 택하신 민족인 이스라엘 자손들과 이방인들과의 관계’에 관한 말씀입니다. 이스라엘 자손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택함을 받은 선민이며 약속의 자녀들입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입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하나님의 은혜를 마음껏 누릴 수 있는 약속을 받은 백성입니다. 반면에 이방인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입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이들에게는 생명에 대한 약속도 소망도 없습니다. 에베소서에서 이 사실을 잘 표현합니다. 2:2-3절입니다. “그 때에 너희는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이 말씀이 이방인들의 영적 상황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약속을 보장받은 선민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법을 떠나서 오히려 하나님을 대적했습니다. 그 결과로 하나님께서 그 택하신 이스라엘의 가지 일부를 꺾어버리셨습니다. 그리고 그 잘려나간 빈자리에 이방인들을 접붙이셨습니다. 11:17-21절입니다. “또한, 가지 얼마가 꺾이었는데, 돌감람나무인 네가 그들 중에 접붙임이 되어 참감람나무 뿌리의 진액을 함께 받는 자가 되었은즉, 그 가지들을 향하여 자랑하지 말라. 자랑할지라도 네가 뿌리를 보전하는 것이 아니요, 뿌리가 너를 보전하는 것이니라. 그러면 네 말이 가지들이 꺾인 것은 나로 접붙임을 받게 하려 함이라.’ 하리니, 옳도다. 그들은 믿지 아니함으로 꺾이고 너는 믿음으로 섰느니라. 높은 마음을 품지 말고 도리어 두려워하라. 하나님이 원 가지들도 아끼지 아니하셨은즉 너도 아끼지 아니하시리라.” 이렇게 이스라엘 자손들의 일부가 잘려져 나간 이유는, 하나님을 불신하고 하나님의 뜻을 세우지 않고 자신의 뜻을 세웠기 때문입니다. 본문 2-3절입니다. “내가 증언하노니 그들이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지식을 따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아니하였느니라.” 쉽게 표현하면,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이스라엘 자손들은 차려 준 음식도 먹지 못하고 선민의 자리를 이방인들에게 빼앗겼습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 자손들이 마귀의 함정에 빠져서 하나님을 버렸기 때문입니다. 그 설명이 본문 30-33절입니다.

 

※ 지금 우리를 위협하는 신앙은 어떤 것입니까?

 

본문을 통하여 주께서 말씀하시는 의도를 봅시다. 먼저, 본문 31-32절입니다. “의의 법을 따라간 이스라엘은 율법에 이르지 못하였으니, 어찌 그러하냐? 이는 그들이 믿음을 의지하지 않고 행위를 의지함이라. 부딪칠 돌에 부딪쳤느니라.” 이스라엘이 실족한 원인은 ‘믿음을 버리고 행위를 따랐다.’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행위는 올바른 것이었겠습니까? 본문 2-3절입니다. “내가 증언하노니 그들이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지식을 따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아니하였느니라.” 이스라엘의 행위는 하나님의 의를 따르지 않고, 자기 의를 세웠던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를 위협하는 신앙 형태입니다. 즉, 자기 경험, 자기를 드러내는 의, 자기 확신을 따라 행하는 신앙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주인으로 인정하지 않는 외식적이고 형식적인 신앙입니다. 오늘의 많은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을 자기 삶의 주인으로 인정하지 않습니다. 다만, 힘들고 어려울 때 도우시는 분쯤으로 인식합니다. 내가 하나님을 내 주인이자 모든 피조물의 주권자이심을 믿는다면, 내 삶의 모든 과정은 하나님 중심으로 행하게 됩니다. 요한복음 10:2-5절을 봅니다. “문으로 들어가는 이는 양의 목자라. 문지기는 그를 위하여 문을 열고 양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 그가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 자기 양을 다 내놓은 후에 앞서가면 양들이 그의 음성을 아는 고로 따라오되, 타인의 음성은 알지 못하는 고로 타인을 따르지 아니하고 도리어 도망하느니라.” 예수님과 성도의 관계를 목자와 양의 관계로 표현한 이 말씀이, 하나님의 주권을 확실하게 나타냅니다. 그런데, 지금 교회의 실정은 이러하지를 못합니다.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에는 알지도 못하고 관심도 가지지 않습니다. 오직 자기 주관, 자기 경험, 자기 확신을 나타내는 자기중심적 생활로 가득합니다.

 

영국의 소설가이며, 영국 성공회 교인인 'C.S.루이스(Clive Staples Lewis)'의 글에 이런 풍자적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날, ‘푸쉬’라는 이름의 고양이 한 마리가 런던을 방문했습니다. 루이스는 런던을 방문하고 의기양양하게 돌아오는 고양이에게 물었습니다. “푸쉬야, 푸쉬야, 너 어디 갔다 오니?” 그러자 고양이는 “예, 나는 여왕을 만나러 런던에 갔다 오는 길입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루이스가 다시 물었습니다. “푸쉬야, 거기서 너는 무엇을 보았니?” 그러자 고양이는 “나는 여왕의 의자 밑에 있는 생쥐를 보았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루이스는 이 짧은 풍자를 통하여 ‘인간의 자기중심적인 사고방식’을 꼬집습니다. 고양이는 런던에서, 그것도 그 아름다운 왕궁에 가서 엘리자베스 여왕이나 찬란한 궁궐이나 아름다운 역사적인 사적들을 본 것이 아닙니다. 겨우 여왕의 의자 밑에 기어 다니는 생쥐를 보았습니다. 왜냐하면, 고양이에게는 가장 큰 관심거리가 생쥐였기 때문입니다. 루이스는 이 풍자를 통하여 사람들도 자신의 가장 큰 관심거리에 마음을 두게 되며 그것을 추구한다고 말합니다. 자기가 추구하는 것이 뜻대로 되지 않으면 불평하고 원망하고 짜증을 내게 됩니다. 우리는 능력의 하나님을 믿지만, 믿는 것만으로는 삶이 별로 달라지지 않습니다. 루이스 이야기의 고양이처럼, 궁궐에 있을지라도 고양이의 관심은 오직 먹이에 있듯이, 하나님을 믿지만 생활은 여전히 세상의 관심으로 채워져 있습니다. 이것이 자기중심적 신앙의 모습이며 가장 위험한 자기 확신의 신앙입니다. 본문 3절 말씀처럼,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않는 것’입니다.

 

또 다른 자기 확신의 죄를 경고하시는 비유적인 내용이 있습니다.

야고보서 4:13-17절입니다. “들으라. 너희 중에 말하기를 오늘이나 내일이나 우리가 어떤 도시에 가서 거기서 일 년을 머물며 장사하여 이익을 보리라.’ 하는 자들아,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냐?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 너희가 도리어 말하기를 주의 뜻이면 우리가 살기도 하고 이것이나 저것을 하리라.’ 할 것이거늘, 이제도 너희가 허탄한 자랑을 하니 그러한 자랑은 다 악한 것이라. 그러므로 사람이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하지 아니하면 죄니라.” 이 말씀은 예수께서 누가복음 12:16-21절에서 말씀하신 ‘부자 비유’와도 내용과 의미가 비슷합니다. 당장 내일, 아니 바로 몇 초 앞의 일도 알지 못하는 인생이 몇 년 앞의 일을 장담하는 것이 자기 확신입니다. 부자가 말합니다. “또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라고 장담하며, 야고보서의 장사꾼은 “오늘이나 내일이나 우리가 어떤 도시에 가서 거기서 일 년을 머물며 장사하여 이익을 보리라.”라고 장담합니다. 이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교만이며, 어리석은 자기 확신입니다.

 

※ 그렇다면, 자기 확신의 삶을 어떻게 벗어납니까?

 

본문에서는 4절에서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라고 하십니다. 즉 이러한 자기 확신적인 행위에서 벗어나는 길은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하는 것입니다. 쉽게 표현하면, 주님의 말씀에 마음을 두고, 생활에서 주님의 말씀을 적용하는 것입니다. 장사꾼 비유에서는 17절에서 “그러므로 사람이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하지 아니하면 죄니라.”라고 하십니다. 본문의 말씀처럼, 주님께서 가르치신 말씀을 아는데 그치지 않고 삶에서 실천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자 비유에서는 21절에서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하지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도 본문과 장사꾼에 관한 내용과 같습니다. 자기 삶을 하나님께 내어놓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모든 내용을 요약하면, 하나님 중심적인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프란시스’라는 이름 들어보셨지요?

‘앗시시의 성 프랜시스(St. Francis of Assis)’가 남긴 유명한 일화 중의 하나입니다.

어느 날, 프랜시스의 제자가 되기를 원하는 두 젊은이가 프랜시스를 찾아왔습니다. “선생님의 제자가 되어 신앙의 훈련을 받고 싶습니다.”라고 하자 프랜시스는 그에 관한 대답은 하지 않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 밭에 나가면 배추들이 많이 있는데, 그 배추를 뽑아서 뿌리를 하늘로 가도록 하여 다시 심고 오시오.” 한 젊은이는 말없이 밭으로 가서 배추를 뽑아서 거꾸로 심기를 시작했습니다. 다른 젊은이는 “참 이상도 하지. 이 성자가 오랫동안 도를 닦더니 머리가 이상해졌나 보다.”라며 떠나버렸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는 길도 이와 같습니다. 즉 예수님의 제자로서 살려고 하면, 자기 생각이나 자기 경험, 자기 확신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예수께서 어떤 말씀을 하시든 순종하고 따를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자기 확신의 삶에서 벗어나는 길입니다. 어렵겠지요? 지금 한국교회는 번영신앙이라는 늪에 빠졌습니다. 복 받고, 잘 되고, 형통하고, 성공하는 삶, 성공하는 목회에 빠져 있습니다. 이러한 가르침은 성경 어디에도 없습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십니다.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지금 시대에 이러한 마음가짐으로 주님을 따르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하지만, 이렇게 자기를 내려놓고 주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살면, 이 땅에서의 삶과 영원한 생명의 삶을 보장하십니다. 예수 안에 생명이 있고, 예수 안에 행복이 있고, 예수 안에 우리의 삶이 있습니다. 이렇게 위험한 시대를 사는 우리의 삶이 만물의 주권자이신 하나님의 보호와 보장 안에 살도록,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주인으로 모시고 사는 복된 삶을 이루시기를 축복합니다.

 

마라나-타(μαράνα-θ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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