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문
빛으로 오신 예수님, 빛으로 사는 성도
*** 빛으로 오신 예수님, 빛으로 사는 성도 / 에베소서 5:8-17
에베소서 5:8-17, “8 너희가 전에는 어둠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9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 10 주를 기쁘시게 할 것이 무엇인가 시험하여 보라. 11 너희는 열매 없는 어둠의 일에 참여하지 말고 도리어 책망하라. 12 그들이 은밀히 행하는 것들은 말하기도 부끄러운 것들이라. 13 그러나 책망을 받는 모든 것은 빛으로 말미암아 드러나나니 드러나는 것마다 빛이니라. 14 그러므로 이르시기를 ‘잠자는 자여, 깨어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나라. 그리스도께서 너에게 비추이시리라.’ 하셨느니라. 15 그런즉 너희가 어떻게 행할지를 자세히 주의하여 지혜 없는 자같이 하지 말고, 오직 지혜 있는 자 같이 하여 16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 17 그러므로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라.”
※ 들어가는 말
어느 CCTV영상을 인터넷에 올린 내용입니다. 어떤 젊은 청년이 두리번거리며 길을 가다가 무언가 열심히 통화 중인 사람을 발견하고 가까이 갑니다. 한 손에는 가방을 들었고, 한 손으로는 휴대 전화를 들고 통화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가방에는 지갑처럼 보이는 작은 가방이 들어있었습니다. 청년은 스쳐 지나가듯 하면서 가방 속에서 작은 지갑을 빼내고는 얼른 자리를 피했습니다. 그러다가 갑자기 청년이 멈춰 섰습니다. 그러면서 위를 쳐다보면서 머리를 연신 조아리면서 손을 모아 비는듯한 손짓을 하고는 지갑 주인에게 다가갑니다. 전화하던 사람의 뒤에 지갑을 떨어뜨리고는 그 사람을 툭툭치고는 땅에 지갑이 떨어져 있다고 말합니다. 청년이 갑자기 왜 그랬을까요? 청년은 전봇대에 설치된 감시카메라를 본 것입니다(우리나라 영상이 아닙니다.).
이처럼, 세상에는 강제적인 방법에 의하여 지켜지는 도적이나 윤리성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의 눈을 의식하거나 법에 대한 두려움에 의하여 지켜지는 질서입니다. 이런 것을 선행이라고 부르지는 않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에게는 눈에 보이는 물리적인 빛이 아니라. 삶을 통하여 드러나는 밝음이 있습니다. “너희가 전에는 어둠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라고 하신 말씀이 이러한 상황을 말합니다. 예수께서 세상에 오심은 사람의 삶에 깔린 어둠을 거두시려고 오신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1:9절에서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라고 하십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오심을 기리며 장식할 때, 빛을 많이 사용하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죄 때문에 온 세상에 덮인 어둠을 빛으로 거두어 내시고, 택하신 백성을 빛으로 모이도록 부르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빛으로 사는 그리스도인은 어떤 삶을 이루어야 합니까?
※ 본문 말씀의 배경과 의미를 봅시다.
에베소서는 교회의 성격과 교회가 해야 하는 일에 관하여 소상하게 밝히는 내용으로, 사도 바울이 에베소 교회에 보낸 편지입니다, 에베소라는 도시는 소아시아의 서해안에 있는 에게해에 접한 항구도시입니다. 그래서 고대로부터 교통이 발달하고 교역이 활발하여, 상업과 정치와 종교의 중심지로, 고대 아시아 최대의 도시를 이루었습니다. 에베소는 종종 그리스도 신앙의 셋째 가는 도시라고 불렸습니다. 예루살렘이 첫째이고 안디옥이 둘째였는데, 이 중에서 에베소는 가장 부유한 도시였습니다. 그래서 이곳에는 다이아나(Diana, 로마신화의 ‘사냥의 여신, 달의 여신, 자연의 여신’) 신전을 비롯한 거대한 신전들이 있으며, 난잡한 우상 숭배가 생활처럼 이루어지고 있었습니다. 이런 곳에 있는 에베소 교회는 신앙을 지키기가 정말 어려웠습니다. 사도 바울은 2차와 3차전도 여행 때, 이곳에 들러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세웠습니다. 바울은 다른 어떤 도시보다 오래 에베소에 머물면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예수께서는 에베소 교회에 관하여 요한계시록 2:2절에서 “내가 네 행위와 수고와 인내를 알고”라고 하셨는데, 이는 ‘부귀영화가 있고 타락한 도시에서 신앙을 지킨다는 것이 그만큼 힘들고 어려웠기 때문’이었습니다. 에베소 성도들은 신앙에 대하여 조금만 눈감고 세상과 타협하면 부와 쾌락을 누리며 평안하게 살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을 잘 아는 사도 바울은 로마의 감옥에 갇혀 있으면서도 에베소 교회를 염려하며 편지를 썼습니다. 바울의 에베소 교회를 염려하는 마음이 사도행전 20:31절에 나타납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일 깨어 내가 삼 년이나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하던 것을 기억하라.” 이 편지가 바로 에베소서입니다. 사도 바울은 본문에서 ‘빛 가운데 사는 생활’과 ‘하나님의 지혜를 받아 적극적으로 기회를 활용하고, 성령의 지배를 받는 생활’을 강조합니다.
※ 예수께서 빛으로 오셨음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요한복음 8:12절입니다.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예수께서는 자신을 빛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빛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한 마디로 빛은 ‘예수 그리스도’이시며, 예수께로 말미암는 ‘생명’입니다. 육신적인 생명이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영적인 생명입니다. 본문 14절에서 “잠자는 자여, 깨어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나라. 그리스도께서 너에게 비추이시리라.”라고 하십니다. “죽은 자들”이란 ‘영적으로 생명이 없는 자들’을 뜻합니다. 이 말씀은 ‘도덕적인 감각도 없이 무의미하게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영적인 생명도 없이 살아가는 세상 사람들과 구별된 자로 살아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영생을 가진 사람은 하나님의 임재 안에서 사는 사람입니다. 요한복음 14:16-17절입니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그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아나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이렇게 성령께서 임재 하시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을 성전(聖殿)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고린도전서 3:16절에서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라고 하십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말하는 빛은 하나님의 임재이며,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영적인 생명입니다.
이 생명의 빛이 죽음으로 덮인 세상에 비추어 생기를 불어넣으시려고 세상에 임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요한복음 10:10절에서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라고 하시며, 요한복음 12:47절에서는 “사람이 내 말을 듣고 지키지 아니할지라도 내가 그를 심판하지 아니하노라. 내가 온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함이 아니요, 세상을 구원하려 함이로라.”라고 하십니다. 우리가 지금 기념하는 성탄의 기쁨은 예수께서 생명의 빛으로 우리를 살리러 오셨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기다리는 다시 오실 예수님은 심판하시는 주로 오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냥 구원 주로 오신 주님만 생각하고 기뻐할 것이 아니라, 심판의 주로 오실 주님을 맞이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진정한 기다림입니다. 만일, 준비되지 않은 채 주님을 기다린다면, 이는 두려운 심판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잠자는 자여, 깨어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나라. 그리스도께서 너에게 비추이시리라.”라고 하십니다. 즉, 하나님을 알지 아니하는 세상 사람들 속에서 떨치고 일어나서 영으로 깨어나라고 우리에게 생명의 빛을 비추시는 것입니다.
※ 성도가 빛으로 산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본문 8-9절에서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라고 하십니다. 이 빛의 열매를 맺을 구체적인 방법으로 15-17절에서 제시하십니다. “그런즉 너희가 어떻게 행할지를 자세히 주의하여 지혜 없는 자같이 하지 말고, 오직 지혜 있는 자 같이 하여 16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 17 그러므로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라.”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깨달아서, 삶의 방향을 주의 깊게 결정하라고 하십니다. 이는 그리스도인으로서 방종하지 않고 신중한 삶의 자세를 견지할 것을 강조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것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이는 우리의 소속을 의미하는데, 사람이 어디엔가 소속이 되어 있다는 것은 그가 속한 공동체와 뜻을 함께한다는 것입니다. 즉,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이며, 예수님의 뜻에 동참하는 사람들입니다. 마태복음 5:14절에서 주님을 따르는 자들에게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라고 하셨는데, 이는 우리가 이 땅에서 ‘빛의 공동체’를 이루고 있는 사람들임을 나타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 된 우리는 당연히 빛의 자녀로서 빛다운 삶의 행위가 나타나야 합니다.
빛다운 삶의 행위가 무엇입니까?
본문 9절을 좀 더 자세하게 살펴봅시다.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 열매는 ‘나타난 삶’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빛의 열매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영원한 생명을 가진 사람의 생활 모습’입니다. 즉 주님을 따르는 빛의 사람들이 나타내야 할 삶은 ‘모든 착함과 진실함과 의로움’입니다. “착함”을 뜻하는 헬라어 '아가토수네'라는 말은 선행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관대한 정신’을 의미합니다. 즉 넓은 아량과 폭넓은 이해심, 모든 이를 품에 안을 수 있는 포용력과 아낌없이 주는 사랑, 이런 착함을 의미합니다. 이처럼 빛으로서의 착함은 부드러움과 온유함으로 모든 사람을 위로하며 희망을 주는 사랑의 실천자가 되는 것입니다. “의로움”을 뜻하는 '디카이오수네'라는 말은 '하나님과 인류에 대한 자신의 의무를 다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빛으로서의 의로움은 자신이 행해야 할 의무를 온전하게 수행하는 것입니다. “진실함”을 뜻하는 '알레데이아'는 ‘실제로 행하는 도덕적인 진실’을 의미합니다. 곧 예수께서 자신의 목숨을 버림으로서 자신의 사랑을 증명하신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인이 나타내야 할 진실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행하는 거짓 없는 참된 행위’입니다. 정리해보면, 빛다운 행위는 넓은 아량과 폭넓은 이해심, 모든 이를 품에 안을 수 있는 포용력과 아낌없이 주는 사랑입니다. 그리고 자신이 행해야 할 의무를 온전하게 수행하는 것이며,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행하는 거짓 없는 참된 행위입니다. 예수께서 마태복음 5:16절에서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라고 하신 말씀과 같습니다.
믿음의 사람이며, 기도의 사람인 ‘해리 아이언 싸이드’ 박사는 소년 시절에 양화점의 직공으로 일했습니다. 그가 하는 일은 소가죽을 구두본에 맞추어 재단하고, 물에 담가서 흠뻑 적신 후, 가죽이 단단해지고 건조해질 때까지 계속 두드리는 것입니다. 그 후에 구두본에 맞추어 구두창에 못을 박는 일이었습니다. 한번은 거리에 나갔다가 다른 양화점에 들린 일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거기에서 일하는 직공은 가죽을 두드리지도 않고, 바로 물에서 꺼내어 구두본에 대고 못을 박고 있었습니다. 호기심이 생긴 해리는 가게로 들어가서 직공에게 물었습니다. “가죽을 단단해지도록 두드리지 않아도 품질 좋은 구두가 됩니까?” 그의 대답은 간단했습니다. “빠른 시간에 많이 만들어 내야지. 두드릴 시간이 어디 있어.” 해리는 빨리 자기네 주인에게 달려가서 자기가 본 것을 말하면서 “우리도 그렇게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라고 제안했습니다. 그러자 주인은 성경책을 펴서 골로새서 3:23절을 읽어주었습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 그리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돈을 벌기 위해 구두를 만드는 게 아니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만들고 있다. 나는 심판 날에 주님 앞에서 ‘넌 참으로 비열한 짓을 했어. 최선을 다하지도 못했어.’라는 말을 듣고 싶지 않아.”
우리 그리스도인은 하나님 앞에서 책임 있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책임감(責任感, responsibility)’이라는 말은 ‘반응(response)’이라는 말과 ‘능력(ability)’이라는 말의 합성어입니다. 의미는 ‘반응할 줄 아는 능력’이 되겠지요. 즉 자신이 맡은 일에 반응할 줄 아는 능력을 책임감이라고 합니다. 자신이 행한 일에 대한 정당한 책임을 지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요한계시록 22:12절에서 말씀하십니다.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가 행한 대로 갚아주리라.” 그러므로 우리는 빛으로 오신 주님을 따라서 빛의 삶을 이루어야 합니다. 세상이 어두워가고 있고, 지금 우리나라는 혼란이 극에 달하고 있습니다. 지금이 빛을 나타내야 할 때입니다. 이제 우리의 삶의 자리에서 빛의 삶을 나타냄으로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행복한 성탄의 계절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마라나-타(μαράνα-θ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