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문
예수님의 마음으로 살기
*** 예수님의 마음으로 살기 / 베드로전서 2:18-25
베드로전서 2:18-25, “18 사환들아, 범사에 두려워함으로 주인들에게 순종하되, 선하고 관용하는 자들에게만 아니라 또한 까다로운 자들에게도 그리하라. 19 부당하게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이는 아름다우나 20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그러나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 21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 22 그는 죄를 범하지 아니하시고, 그 입에 거짓도 없으시며 23 욕을 당하시되 맞대어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당하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이에게 부탁하시며, 24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25 너희가 전에는 양과 같이 길을 잃었더니, 이제는 너희 영혼의 목자와 감독 되신 이에게 돌아왔느니라.”
※ 들어가는 말
저의 경건의 일기 표제(標題)가 ‘오늘’입니다. 좌우명(座右銘) 중의 하나는 ‘오늘, 이 하루 후회는 없는가?’라는 것입니다. 이 표제나 좌우명을 세우게 된 동기가 있습니다. 히브리서 3:13절 “오직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매일 피차 권면하여,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의 유혹으로 완고하게 되지 않도록 하라.”라는 말씀이 주된 원인입니다. 그리고 군대 제대 후, 얼마 지나지 않아 교통사고로 잃었던 친구 때문이기도 합니다. 내일로 미루었던 만남이 영원한 이별이 되었었습니다. 그리고 무디 목사님의 이야기도 있습니다. 드와이트 무디 목사는 미국 침례교 평신도 설교자이며, 19세기 가장 영향력 있는 미국의 복음 전도자였습니다. 그는 기도의 사람이었고, 주님의 마음으로 살기를 힘썼던 그리스도인이었습니다.
1871년 10월 8일 주일이었습니다. 시카고의 어느 교회당에서 무디(Dwight L.Moody) 목사님이 “그리스도라 불리는 예수와 나는 무엇을 할 것인가?”라는 주제로 설교를 했습니다. 이 설교가 거의 끝날 즈음, 목사님은 교인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집으로 가서 이 중요한 일을 신중히 생각하여 보고, 다음 시간에 와서 그리스도께 여러분의 결심을 하십시오!” 그런데 그날 저녁 8시가 지난 즈음, 온 시내가 소방차의 요란한 소리로 소란했습니다. 시카고 외곽 농가에서 시작된 불이 3일간 시카고를 잿더미로 만들었습니다. 이 대화재로 인하여 시의 중요한 모든 시설이 불에 탔으며, 공식 발표된 사망자만 300명이었고, 10만 명 이상의 이재민이 발생했습니다. 예배에 참석했던 사람 중 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었거나 이재민이 되었습니다. 무디 목사님은 이 일이 일평생 동안 마음에 걸렸습니다. 목사님은 그때를 생각하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큰 교훈을 배웠습니다. 이제는 그리스도께 오늘 결심하도록 초청하고 강권하겠습니다.”
저는 지금도 오늘 해야 할 일이나 만나야 할 사람, 소통해야 할 사람, 이러한 일을 다음으로 미루지 않으려고 애쓰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루, 한순간의 일들을 신중하게 결정하고, 결심한 것은 미루지 말고 실천해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주님이신 예수님의 생애였습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6:34절에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 한 날 괴로움은 그날로 족하니라.”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열 처녀의 비유에서는 ‘오늘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라고 깨닫게 하십니다. 지금 우리는 이러한 주님의 마음으로 살기를 힘써야 합니다.
※ 본문 말씀의 배경과 의미를 봅시다.
베드로전서는 사도 베드로가 당시의 박해와 핍박 때문에 여러 지역으로 흩어진 그리스도인들에게 보낸 첫 번째 편지입니다. 당시는 로마의 황제숭배와 유대인들의 박해와 우상 숭배자들의 박해 등. 3대 박해가 극심했습니다. 그 혹독한 시련과 환난 속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을 위로하고 격려하며 용기를 갖도록 보낸 내용입니다. 그중에서도 본문 말씀은 믿지 않는 상전을 둔 종들에게 주는 내용입니다. 왜냐하면, 당시에는 종이나 노예들이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한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지는 자유를 ‘믿지 않는 자신들의 잔인한 상전들로부터 자유롭게 되는 것’으로 오해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는 종들과 믿지 않는 상전들 사이에서 불미스러운 일들이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이 일에 대하여 사도 베드로는 “사환들아, 범사에 두려워함으로 주인들에게 순종하되, 선하고 관용하는 자들에게만 아니라 또한 까다로운 자들에게도 그리하라.”라고 권면했습니다. 하지만, 이런 고난을 이해하지 못하는 교인들을 위하여 베드로는 좀 더 자세하게 신앙의 본질을 가르칩니다. 21절입니다.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 이 말씀이 본문 말씀의 핵심입니다. 이후의 말씀은 우리의 영적인 모델이 되시는 예수님의 삶을 설명하는 내용입니다. 마지막 25절입니다. “너희가 전에는 양과 같이 길을 잃었더니 이제는 너희 영혼의 목자와 감독 되신 이에게 돌아왔느니라.” 이 말씀은 예수께 돌아온 그리스도인이 따라야 할 삶의 자취임을 암시합니다. 즉 본문 말씀은 이 시대의 모든 그리스도인이 따라야 할 삶의 자취이며, 이를 순종하고 따르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사는 사람임을 가르칩니다.
※ 예수님의 마음으로 산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공원이나 공공시설들에 가끔 붙어 있는 글이 있습니다. “아름다운 사람은 머문 자리도 아름답습니다.”라는 글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이 머문 자리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삶의 향취가 나게 됩니다. ‘큰 바위 얼굴’이라는 소설을 아시지요? 미국의 소설가 ‘너새니얼 호손(Nathaniel Hawthorne:1804∼1864)’이 만년에 쓴 단편소설입니다.
남북전쟁 직후, 어니스트란 소년은 어머니로부터 마을에서 전해 내려오는 전설(傳說)을 듣습니다. 그 전설은 ‘마을 뒤 바위 언덕에 새겨진 큰 바위 얼굴을 닮은 아이가 태어나 훌륭한 인물이 될 것이다.’라는 것입니다. 어니스트는 커서 그런 사람을 만나보았으면 하는 기대를 품고, 자신도 어떻게 살아야 큰 바위 얼굴처럼 될까 생각하면서 진실하고 겸손하게 삽니다. 세월이 흐르는 동안 돈 많은 부자, 전투를 잘하는 장군, 말을 잘하는 정치인, 글을 잘 쓰는 시인들을 만났지만, 큰 바위 얼굴처럼 훌륭한 사람으로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어니스트의 설교를 듣던 시인이 갑자기 “어니스트가 바로 큰 바위 얼굴이다.”라고 소리칩니다. 하지만, 할 말을 다 마친 어니스트는 집으로 돌아가면서, 자기보다 더 현명하고 나은 사람이 큰 바위 얼굴과 같은 용모를 가지고 나타나기를 마음속으로 바라는 것으로 소설은 끝이 납니다.
어니스트가 항상 큰 바위 얼굴을 바라보면서 ‘어떻게 살아야 큰 바위 얼굴처럼 될까?’라고 생각하며 진실하고 겸손하게 살았던 삶이 곧 큰 바위 얼굴의 삶이 되었습니다. 우리도 항상 예수님을 생각하면서 진실하고 겸손하게 살기를 힘쓰는 것이, 예수님의 마음으로 사는 삶을 이루게 됩니다. 사도 베드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산다는 것을 본문 18-21절에서 표현합니다. “사환들아, 범사에 두려워함으로 주인들에게 순종하되, 선하고 관용하는 자들에게만 아니라 또한 까다로운 자들에게도 그리하라. 부당하게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이는 아름다우나,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그러나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 이 말씀처럼, 예수님의 마음으로 산다는 것은, 예수께서 가신 생애의 자취를 따라가는 삶을 말합니다. 요한복음 14:2-6절을 봅시다.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내가 어디로 가는지 그 길을 너희가 알리라. 도마가 이르되 ‘주여, 주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거늘 그 길을 어찌 알겠사옵나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6절의 말씀은 예수님의 생애의 자취를 따르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좀 더 쉽게 23절에서 풀어주십니다.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그에게 가서 거처를 그와 함께 하리라.” 주님의 말씀을 지켜 행하는 것이 주님의 생애의 자취를 따르는 길입니다.
우리가 흔히 “저 사람, 참 멋있다.”라고 말할 때가 있습니다. 이 ‘멋스러움’은 여러 가지 상황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외적인 모습의 멋일 수도 있고, 내면의 풍기는 인품의 멋일 수도 있고, 말이나 행동이나 삶의 모습의 멋스러움일 수도 있습니다. 특히 그리스도인에게서는 영적인 멋스러움도 있습니다. 영적인 삶의 멋은 그 사람의 말과 행동이 하나를 이루는 인품과 그로 인한 삶이 어우러져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외모가 잘 생기지는 않았을지라도 내면의 인품이 묻어나는 선한 모습의 아름다움도 갖게 됩니다. 스데반 집사가 돌에 맞아서 죽임을 당하는 순간에도 그의 모습이 천사와 같았던 바로 그 모습입니다. 예수님의 생애가 이렇게 진정으로 멋스러운 삶이었고, 최고의 아름다움을 가진 분이십니다. 그래서 본문에서는 우리가 닮아야 할 본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자취를 말씀하십니다.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 그러므로 그를 따르는 우리 그리스도인도 예수 그리스도의 멋을 닮은 아름다움을 이루어야 합니다.
※ 어떻게 예수님의 마음을 닮은 멋스러운 삶을 이룰 수 있습니까?
본문 18-20절을 봅시다. “사환들아, 범사에 두려워함으로 주인들에게 순종하되, 선하고 관용하는 자들에게만 아니라 또한 까다로운 자들에게도 그리하라. 19 부당하게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이는 아름다우나 20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그러나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 이 말씀을 따른다는 것은, 참으로 어렵게 느껴집니다. 부당한 고난에 관용하는 것은 결단코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예수께서 본으로 남기신 삶의 모습은 이보다 더한 경우까지를 생각하게 합니다. 본문 22-24상반절입니다. “그는 죄를 범하지 아니하시고, 그 입에 거짓도 없으시며 23 욕을 당하시되 맞대어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당하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이에게 부탁하시며, 24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렇게 살아갈 엄두가 나지 않지요? 사실 우리가 예수님을 따르는 그 자체가 어려운 일입니다. 가만히 앉아서 평안하고 안전하게만 살기를 원한다면, 예수님을 따를 수도 없고 하나님의 나라를 소망할 수도 없습니다. 배가 항구에 정박에 있으면 폭풍이나 거친 풍랑이 일어도 안전하지만, 그렇게 되면 배가 존재해야 할 이유가 없게 됩니다. 배는 거친 풍랑을 헤치고 항해하여 사람과 물자를 운송하는 것이 존재 목적입니다. 그리스도인들도 이 거친 세상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이유로 손해를 보고, 고난과 어려움을 당하고, 자신의 마땅한 권리조차 포기하면서까지 선을 행하도록 힘쓰는 것입니다. 등불은 밝은 곳에서는 아무 쓸모가 없으며, 간이 잘 맞는 음식에는 소금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정말 그리스도인을 필요로 하는 곳은 어두운 곳, 맛을 내지 못하는 곳입니다. 즉 가난한 사람들, 소외된 사람들, 자신의 권리조차 찾지 못하는 사람들, 병들고 고통 중에 있는 사람들. 그들에게 생명의 빛을 비추어 소망을 주며, 삶의 맛을 알게 해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우리에게 이렇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25 너희가 전에는 양과 같이 길을 잃었더니, 이제는 너희 영혼의 목자와 감독 되신 이에게 돌아왔느니라.” 예수님의 마음을 닮은 멋스러운 삶을 이루는 길은 예수께서 본으로 남기신 그 삶의 길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이렇게 살려면, 하나님께서 내게 은사와 모든 것을 주신 뜻을 깨닫고 성실하고 진실하게 내게 주신 삶을 최선으로 아름답게 만들어 가야 합니다.
1828년 러시아에서 한 아이가 태어났습니다. 그런데 아이의 외모는 부모조차도 실망할 정도로 못생겼습니다. 넓적한 코, 두꺼운 입술, 작은 회색 눈, 큰 손과 발 때문에 아이는 자라면서 늘 비관했습니다. “나는 못생겨서 행복하지 못할 거야. 만약 하나님께서 나를 아름답게만 해주신다면 내가 지금 가진 모든 것, 미래에 가질 것도 모두 바치겠습니다.” 소년의 간절한 기도하고는 달리 외모는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 행복은 외모에 있지 않고, 참 아름다움이란 마음에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소년은 깨달음을 얻고 열심히 글을 쓰며 앞날을 개척해 나아갔습니다. 그리고는 '전쟁과 평화', '부활' 같은 작품을 집필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바로 세계적으로 유명한 작가 '톨스토이'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외적인 멋도 중요하지만, 내면의 멋, 즉 영적인 아름다운 삶이 최상의 멋스러움입니다. 이 내면의 아름다움은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사는 삶입니다. 즉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생활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수행하고 마음의 계획과 말과 행동이 하나 되어 신실하고 충성된 삶을 이루는 것입니다. 사람을 포함한 동물들도 젊음이 강인하고 아름답지만, 연륜의 지혜나 원숙한 삶의 맛을 내지는 못합니다. ‘토지’로 유명한 소설가 ‘박경리’ 여사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다시 젊어지고 싶지 않다. 모진 세월 가고… 아~ 편안하다. 늙어서 이렇게 편안한 것을…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주님과 동행하는 깊은 연륜이 주님의 마음을 닮은 아름다운 멋스러움을 만들어냅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본으로 남기신 삶을 깊이 생각하면서 내 삶에 잘 접목하여 우리의 생애가 주님 보시기에 멋스러운 삶을 이루시기를 축복합니다.
마라나-타(μαράνα-θ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