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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심으로 믿을 수 있는 사람

작성자 늘푸른 댓글 / 조회: 86회 작성일 2024-10-26 15:23

*** 진심으로 믿을 수 있는 사람 / 빌립보서 2:19-27

 

빌립보서 2:19-27, “19 내가 디모데를 속히 너희에게 보내기를 주 안에서 바람은 너희의 사정을 앎으로 안위를 받으려 함이니, 20 이는 뜻을 같이하여 너희 사정을 진실히 생각할 자가 이밖에 내게 없음이라. 21 그들이 다 자기 일을 구하고 그리스도 예수의 일을 구하지 아니하되, 22 디모데의 연단을 너희가 아나니 자식이 아버지에게 함같이 나와 함께 복음을 위하여 수고하였느니라. 23 그러므로 내가 내 일이 어떻게 될지를 보아서 곧 이 사람을 보내기를 바라고, 24 나도 속히 가게 될 것을 주 안에서 확신하노라. 25 그러나 에바브로디도를 너희에게 보내는 것이 필요한 줄로 생각하노니, 그는 나의 형제요 함께 수고하고 함께 군사 된 자요. 너희 사자로 내가 쓸 것을 돕는 자라. 26 그가 너희 무리를 간절히 사모하고 자기가 병든 것을 너희가 들은 줄을 알고 심히 근심한지라. 27 그가 병들어 죽게 되었으나 하나님이 그를 긍휼히 여기셨고, 그뿐 아니라 또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내 근심 위에 근심을 면하게 하셨느니라.

 

※ 들어가는 말

 

예전에 인터넷 동영상에서 감동되는 영상이 있었습니다.

어느 식당 겸 판매점 같은 곳으로 보였습니다. 안에는 가장자리로 돌아가면서 상품들이 진열되어 있고, 가운데는 4인용 식탁이 서너 개가 있습니다. 어느 점잖은 신사가 문을 열고 들어옵니다. 식탁에는 안쪽에 두 명의 남성이, 가운데는 커플로 보이는 젊은 남녀가 만두를 한 접시씩 시켜서 먹고 있습니다. 들어온 신사는 커플이 앉아 있는 식탁 맞은편에 합석했습니다. 신사는 상의를 벗어서 자신의 의자에 걸쳐두고 메뉴판을 들고 음식을 고릅니다. 그 사이에 앞의 커플이 무언가 속삭이다가 일어나서 계산하고 나갑니다. 그런데 커플이 먹던 접시에는 만두가 거의 삼 분의 이 이상이 남아 있습니다. 메뉴를 보던 신사는 메뉴판을 접고는 작은 접시에 간장을 따르더니, 자연스럽게 커플이 먹고 남긴 만두를 먹기 시작합니다. 안쪽에 있던 손님도, 매장 판매대에 있던 두 남성도 그 신사의 행동을 이상하다는 듯, 말을 주고받으며 주시합니다. 하지만 신사는 전혀 개의치 않고 만두를 다 먹고는 벗어서 의자에 걸어 두었던 상의를 입고, 안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더니 계산대 위의 기부금 함으로 보이는 곳에 음식값 정도의 돈을 넣고는 매장을 나갔습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매장의 두 남성이 한 사람은 신사가 나간 곳을 향하여 거수경례를 붙이고, 다른 한 사람은 엄지손가락을 세우며 최고라는 표현을 합니다. 안쪽의 두 손님도 멋진 사람이라는 표현을 합니다.

 

저 역시 그 동영상을 보면서 ‘아무나 하지 못하는 행동을 한 정말 멋진 사람’이라는 감동을 받았습니다. 사람의 시선에 상관없이 자기 신념을 따르는 사람, 아무도 보는 사람이 없어도 정직하고 신실한 사람, 이런 사람은 진심으로 믿음이 가는 사람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이 이런 사람이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서는 디모데와 에바브로디도 라는 신실한 사역자가 등장합니다. 우상숭배와 황제숭배, 유대인의 위협으로 복음 전도뿐만 아니라, 신앙생활마저 힘든 상황에서 사도 바울이 가장 믿을 수 있는 사람으로 지명된 사역자들입니다. 오늘 우리가 사는 사회에서도 진실한 믿음을 지키기가 많이 어려운 환경입니다. 이 시점에서 꼭 기억해야 할 말씀이 있습니다. 예수께서 간절한 기도에 관하여 ‘불의한 재판관 비유’로 가르치시면서 말씀하십니다. 누가복음 18:7-8절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지 아니하시겠느냐? 그들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주시리라.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볼 수 있겠느냐?” 이렇게 주님을 향하여 우리의 믿음을 보여드려야 하는데, 우리는 진실한 믿음을 찾기가 어려운 시대를 삽니다. 그렇다면, 지금 나는 어떤 믿음이 있어야 하겠습니까?

 

※ 본문 말씀의 내용과 의미를 봅시다.

 

빌립보서는 사도 바울이 유럽의 관문인 빌립보 지역의 교회에 보낸 편지입니다. 이 편지는 바울이 복음을 전하다가 감옥에 갇혔을 때 기록한 것입니다. 그래서 옥중서신(獄中書信)이라고 부릅니다. 바울은 빌립보 교회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참 소망과 기쁨을 전하고 고난까지도 은혜로 받아 능히 이겨내도록 격려’합니다. 그래서 1:29절에서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려 하심이라.”라고 하십니다. 특히 본문 이하에서는 초대교회의 신실한 사역자 두 사람에 관하여 대단히 신뢰할 사람으로 소개합니다.

 

디모데는 일찍이 사도 바울을 따라 복음을 전하는 전도자로서 또는 목회자로서 충성스러운 동역자가 되었습니다. 바울은 디모데를 에베소 교회에 남아 있도록 하여 사역을 맡기기도 했습니다(딤전 1:3, “내가 마게도냐로 갈 때에 너를 권하여 에베소에 머물라 한 것은 어떤 사람들을 명하여 다른 교훈을 가르치지 말며”). 또 한 사람인 에바브로디도는 사도 바울이 “나의 형제” “함께 수고하고 함께 군사 된 자” “나의 쓸 것을 돕는 자”로 표현합니다. 그는 빌립보 교회의 성도로서, 교회의 대표로 바울에게 모은 헌금을 전하기도 했습니다. 사도 바울이 이 두 사람을 특별하게 언급한 이유는, 이들이 신실한 신앙인으로 본이 되며, 교회에 꼭 필요한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본문 20절입니다. “이는 뜻을 같이하여 너희 사정을 진실히 생각할 자가 이밖에 내게 없음이라.” 이들이 왜 하나님께나 교회에나 꼭 필요한 사람이 되었겠습니까? 그 이유를 본문 21-22절에서 말씀합니다. “그들이 다 자기 일을 구하고 그리스도 예수의 일을 구하지 아니하되, 디모데의 연단을 너희가 아나니 자식이 아버지에게 함같이 나와 함께 복음을 위하여 수고하였느니라.” 이들은 다른 사람들과는 다르게 오직 하나님의 일을 구하는 진실한 일꾼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람이 하나님과 사람에게 인정받게 되고 쓰임 받게 됩니다.

 

※ 어떤 사람이 진심으로 믿을 수 있겠습니까?

 

본문 말씀에는 사도 바울의 영적인 외로움을 느낄 수 있습니다. 바울은 빌립보 교회의 사정을 알아보기 위해 사람을 보내고 싶은데 ‘디모데 밖에 없다.’라고 합니다. 다른 사람이 없다는 것이 아니라, 사도 바울과 함께 빌립보 교회의 사정에 대하여 진실한 마음을 가진 사람이 디모데 뿐이라고 하는 말입니다. 본문 21절에서 “그들이 다 자기 일을 구하고 그리스도 예수의 일을 구하지 아니하되”라고 했습니다. 즉 다른 사람들은 모두 자기 일에 바빠서 하나님의 뜻에 마음을 두지 않았던 것입니다. 요즘처럼 바쁘게 사는 세상에서 자기 일을 제쳐놓고 하나님의 일이나 다른 사람의 일에 마음을 두기가 어렵습니다. 내 일만 하기에도 지치는데 다른 사람의 일을 살피고, 하나님의 일에 관심을 가지겠습니까? 그래서 세상은 종말로 갈수록 이기적으로 변해가게 됩니다. 종말의 시대에 관하여 이렇게 말씀합니다. 디모데후서 3:1-5절입니다.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러,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감사하지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라고 하시며, 4:3-4절에서는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따를 스승을 많이 두고, 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따르리라.”라고 하십니다. 지금뿐만 아니라 앞으로의 시대에는 믿을 수 있는 사람 찾기가 정말 어렵게 됩니다. 하지만, 변하지 않는 진리가 있습니다. 사람을 찾으시는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아무리 시대가 바뀌고 환경이 변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진정한 믿음의 사람을 찾으십니다.

 

진정한 믿음은 사람의 생각 속에 갇혀 있는 것이 아닙니다. 입으로는 믿음을 말하면서도 생활에서는 전혀 행하지 않는 것이라면, 그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우리는 가끔 주변에서 신앙이 정말 좋아 보이는 사람들을 만나게 됩니다. 교회에서 만난다든지, 가끔 어떤 모임에서 만나면 정말 신앙이 좋아 보입니다. 그런데 막상 일상생활에서 교제하면, ‘그 사람의 이웃으로 살고 싶지 않다.’라는 마음이 듭니다. 그렇다면, 신앙이 좋아 보이는데, 깊이 교제하거나 이웃으로 살고 싶지 않은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그 대답은 “잘못된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야고보서 2:14절에서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라고 묻습니다. 이렇게 우리의 믿음이 마음속에 갇혀서 행동으로 나타나지 않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말씀을 듣지만 반신반의하며 순종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주님, 조금 더 확신할 수 있도록 설명해 주십시오. 증거를 보여주십시오.”라고 요구합니다. 예수께서 물 위를 걸어오실 때, 베드로가 “주여, 만일 주님이시거든 나를 명하사 물 위로 오라 하소서.”(마 14:28)라고 했습니다. 그때 주님은 베드로에게 물 위를 걸어와도 빠지지 않게 하겠다는 어떤 설명이나 약속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다만 “오라.”라는 명령뿐이었습니다. ‘빈 수레가 요란하다.’라는 속담이 있습니다. 하지만, 빈 깡통이나 무언가가 가득 찬 깡통은 소리가 안 납니다. 어중간하게 들어 있는 깡통이 소리가 납니다. 진정한 믿음이 있는 사람은 변명이나 불신의 소리를 내지 않습니다. 한 달란트 받았던 종처럼, 어중간한 믿음을 가진 사람이 변명도 많고 의혹도 많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보고 싶어 하시는 믿음은 어떤 환경이나 증거 때문에 믿는 것이 아닙니다. 이런 믿음은 증거가 사라지고, 환경이 변하면 무너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직 하나님을 바라보는 믿음을 원하십니다.

 

미국 남침례교 신학 학장을 역임한 ‘스카보로’라는 유명한 박사가 있습니다. 어느 날, 박사님의 어린 아들이 학교에서 선생님의 이야기를 듣고 와서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아버지, 아버지는 정말 물고기가 요나를 삼켰다고 믿으세요? 과학적으로 얼른 받아들이기가 어려운 그 이야기를 말이에요.” 이때, 스카보로 박사는 사랑하는 아들에게 이런 유명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아들아, 나는 물고기가 요나를 삼켰다는 사실을 믿는단다. 그뿐만 아니라, 만약 성경에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능력으로 요나가 물고기를 삼키게 하셨다고 기록되어 있다면 나는 그대로 믿을 것이다. 전능하신 하나님을 신뢰한다면 그 일이 왜 불가능하겠니.”

 

스키보로 박사의 믿음은 아브라함의 믿음을 보는 듯합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람을 아브라함이라고 부르시면서 ‘믿음의 조상’이라는 칭호를 붙이셨습니다. 아브라함은 세상의 이치, 과학적인 지식 모두를 동원해도 불가능한 상황에서 “네 자손을 하늘의 별처럼 많게 해 주겠다.”라고 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100세에 주신 아들 이삭을 제물로 바치라고 하셨을 때, 그는 일말의 주저함 없이 제물로 내놓았습니다. 이것이 어떤 환경에서도 변하지 않는 절대적 믿음입니다. 이 믿음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믿음이며, 이런 믿음의 사람이 진심으로 믿을 수 있는 사람입니다. 예수께서 누가복음 18:8절에서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볼 수 있겠느냐?”라고 하신 ‘믿음’이 바로 이런 절대적인 믿음입니다. 그리고 지금 우리가 가져야 할 믿음입니다.

 

※ 그렇다면, 어떻게 절대적인 믿음을 가질 수 있겠습니까?

 

한 랍비가 제자 가운데 한 사람을 저녁 식사에 초대했습니다. 랍비는 이 제자에게 “포도주를 마시기 전에 하는 기도문을 외워보시오.”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학생은 처음 몇 줄밖에 외우지 못했습니다. 다른 기도문에 대해서도 모두 그랬고, 지금까지 가르친 것도 거의 외우지 못했습니다. 랍비는 그 제자를 나무랐습니다. 젊은이는 식사가 끝나자마자 고개를 푹 숙인 채 돌아갔습니다. 며칠 뒤, 랍비는 그 젊은이가 병으로 앓고 있는 사람이 있으면 그 집에 가서 일을 도와주고, 가난한 사람이 있으면 스스로 일하여 돈을 보내는 등. 선한 일을 많이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랍비는 부끄러웠습니다. 그리고 그는 제자들을 모아놓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마음에 생각한 건 이내 행위로 들어간다. 그러나 여러 권의 책을 읽어 많이 알고 있다고 해도, 마음을 밭 갈지 않는다면 알고 있는데 머물고 만다. 마음을 밭갈이함은 두뇌를 밭갈이함보다 더 값지다.”

 

랍비의 가르침은 ‘바른 것을 배우기보다 바른 것을 행하는 편이 훨씬 더 낫다.’라는 의미입니다. 절대적인 믿음은 말씀을 많이 아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말씀을 생활 속에서 행동으로 실천할 때 나타나게 됩니다. 본문 20절에서 “이는 뜻을 같이하여 너희 사정을 진실히 생각할 자가 이밖에 내게 없음이라.”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에서 “뜻을 같이한다.”라는 말은 ‘같은 마음을 가진다.’라는 의미입니다. 사람과 뜻을 같이하면 사람의 신뢰를 받을 수 있고, 하나님과 뜻을 같이하면 하나님의 신뢰를 받게 됩니다. 사도 바울은 자기와 뜻을 같이하는 사람으로 디모데와 에비브로디도를 꼽았습니다.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 관하여 이렇게 말합니다. 디모데후서 1:5절입니다. “이는 네 속에 거짓이 없는 믿음이 있음을 생각함이라. 이 믿음은 먼저, 네 외조모 로이스와 네 어머니 유니게 속에 있더니, 네 속에도 있는 줄을 확신하노라.” 이렇게 대를 이은 믿음을 가진 디모데에게 명령합니다. 13-14절입니다. “너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으로써 내게 들은바 바른말을 본받아 지키고,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네게 부탁한 아름다운 것을 지키라.” 이 말씀에서 우리가 절대적인 믿음을 가질 수 있는 길을 보이십니다. 즉, 지금까지 가르침을 받은 말씀을 지키고, 성령께서 인도하시는 일들을 지켜 행하는 것입니다. 가르침을 받은 말씀이란, 하나님 말씀을 듣거나, 읽고 깨달은 말씀들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령께서 인도하시는 길이란, 내가 믿음으로 기도한 것을 믿고 실천하는 것이며, 영적인 감동으로 주신 일들을 생활에서 순종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사람을 사용하시며,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게 하십니다. 마치 에바브로디도가 병들어 죽게 되었지만, 하나님께서 그를 긍휼히 여기심과 같습니다. 우리의 믿음은 환경과 상황에 따라 변하지 않는 절대적인 믿음이어야 합니다. 이러한 믿음을 가지기 위하여 내게 주신 말씀들을 생활에서 실천하여 순종해야 합니다. 그리고 성령의 역사하심 따라 믿음으로 기도한 것이나, 영적인 감동으로 주신 일들을 믿음으로 순종하여 삶에서 나타내야 합니다. 기도하지만 믿음의 행동이 따르지 않으면 불신일 뿐입니다. 내가 진심으로 믿음을 따라 행동하면, 하나님의 손길이 나를 주관하시고 인도하시며 나를 사용하십니다. 이렇게 하나님과 사람에게 진심으로 믿을 수 있는 사람이 되어 이 시대에 하나님의 그릇으로 쓰임 받는 능력의 사람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마라나-타(μαράνα-θ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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