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문
하나님을 감동하시게 하는 사람
*** 하나님을 감동하시게 하는 사람 / 사도행전 10:24-35
사도행전 10:24-35, “24 이튿날 가이사랴에 들어가니 고넬료가 그의 친척과 가까운 친구들을 모아 기다리더니 25 마침 베드로가 들어올 때에 고넬료가 맞아 발 앞에 엎드리어 절하니 26 베드로가 일으켜 이르되 ‘일어서라. 나도 사람이라.’ 하고 27 더불어 말하며 들어가 여러 사람이 모인 것을 보고 28 이르되 ‘유대인으로서 이방인과 교제하며 가까이하는 것이 위법인 줄은 너희도 알거니와, 하나님께서 내게 지시하사 아무도 속되다 하거나 깨끗하지 않다 하지 말라 하시기로 29 부름을 사양하지 아니하고 왔노라. 묻노니 무슨 일로 나를 불렀느냐?’ 30 고넬료가 이르되 ‘나흘 전 이맘때까지 내 집에서 제 구시 기도를 하는데 갑자기 한 사람이 빛난 옷을 입고 내 앞에 서서 31 말하되 고넬료야, 하나님이 네 기도를 들으시고 네 구제를 기억하셨으니 32 사람을 욥바에 보내어 베드로라 하는 시몬을 청하라. 그가 바닷가 무두장이 시몬의 집에 유숙하느니라. 하시기로 33 내가 곧 당신에게 사람을 보내었더니 오셨으니 잘하였나이다. 이제 우리는 주께서 당신에게 명하신 모든 것을 듣고자 하여 다 하나님 앞에 있나이다.’ 34 베드로가 입을 열어 말하되 내가 참으로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보지 아니하시고 35 각 나라 중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를 행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다 받으시는 줄 깨달았도다.”
※ 들어가는 말
고사성어에 ‘지성감천(至誠感天)’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지극한 정성에는 하늘도 감동한다.’라는 의미이지요. 그만큼 어떤 일이든지 정성을 다하면, 하늘이 감동하여 좋은 결과를 가져온다는 것입니다. 바로 지성감천의 성경 버전이 오늘 본문 말씀입니다. 세상에는 수많은 종교가 있고, 모든 종교에는 숭배의 대상이 있습니다. 그런데 기독교를 제외한 모든 종교의 숭배 대상들은, 단 한 번도 직접 나타나서 계시한다든지 인간 세상에 개입한 적이 없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그 숭배의 대상들은 인간이 만든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섬기는 여호와 하나님은 살아계신 참 신이시기 때문에, 직접적으로나 간접적으로 나타나 보이시기도 하며 계시하시기도 합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체험적 종교라고 합니다. 만일, 자기 삶에서 영적 체험이 전혀 없다면 확신하기도 힘들며, 능력도 기대하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로마서 10:17절에서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라고 하십니다. 처음에는 복음을 듣고 믿게 되지만, 후에는 직접 주님을 만나거나 경험함으로써 흔들리지 않는 신앙으로 세워져 갑니다. 여러분은 영적인 체험이 있습니까? 아니면, 아직 다른 사람의 말을 듣고 믿는 것으로 만족하고 있습니까? 오늘 말씀을 통하여 내 삶에 나타나신 하나님을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 본문 말씀의 배경과 의미를 봅시다.
이 사건은 ‘가이사랴’라는 도시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가이사랴는 예루살렘 서북쪽 104Km 정도 떨어진 지중해 연안의 항구도시이며, 로마 총독이 주재하던 행정 중심지였습니다. 이곳에 주재 중인 이달리아 군대의 백부장인 ‘고넬료’가 주인공입니다. 사도행전 10:2절에 의하면 고넬료는 “경건하여 온 집안과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하며 백성을 많이 구제하고 하나님께 항상 기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하루는 제 구시(오후3시) 기도하는 시간에 환상이 보였습니다. 환상 중에 천사가 나타나서 고넬료에게 “네 기도와 구제가 하나님 앞에 상달되어 기억하신 바가 되었으니, 네가 지금 사람을 욥바에 보내어 베드로라 하는 시몬을 청하라. 그는 무두장이 시몬의 집에 유숙하니 그 집은 해변에 있다.”라고 지시했습니다. 고넬료는 즉시 믿음직한 종을 베드로의 집으로 보냈습니다. 고넬료가 보낸 사람들이 베드로의 집에 도착할 무렵에 베드로는 정오 기도시간이 되어 옥상에서 기도 중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환상을 보여주셨습니다. 같은 환상을 세 번 연거푸 보이셨는데, 그 환상은 하늘에서 큰 그릇 같은 것이 네 귀를 매어 땅에 드리웠고, 그 안에는 각종 네 발 가진 짐승과 기는 것과 공중에 나는 것들이 들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소리가 들리기를 ‘베드로야, 일어나 잡아먹으라.’라고 했습니다. 그 속에 들어 있는 것들은 유대인들이 먹어서는 안 되는 율법이 금하는 것들이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주여 그럴 수 없나이다. 속되고 깨끗하지 아니한 것을 내가 결코 먹지 아니 하였나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때 두 번째 소리가 들려 이르기를 “하나님이 깨끗하게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라고 했습니다. 똑같은 이 일이 세 번 거듭되고는 그 그릇이 하늘로 올려졌습니다. 이 환상의 내용은 이방인을 맞아들이도록 하기 위한 하나님의 준비 작업이었습니다. 베드로가 그 환상이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몰라 궁금해할 때, 고넬료가 보낸 사람들이 베드로의 집 문을 두드렸습니다. 생각에 잠겨있는 베드로에게 성령께서 “두 사람이 너를 찾으니 일어나 내려가 의심하지 말고 함께 가라. 내가 그들을 보내었느니라.”라고 말씀하십니다. 고넬료가 보낸 사람들은 유대인이 상종하지 않는 이방인이었지만, 베드로는 환상을 생각하면서 그들을 영접했으며, 두 사람의 설명을 듣고 다음 날에 두어 성도와 함께 가이사랴로 갔습니다.
이 이야기 다음 내용이 이 시간의 본문 말씀입니다. 가이사랴에 도착한 베드로는 고넬료에게 자신을 청한 이유를 물었습니다. 고넬료는 베드로를 영접하면서 초청하게 된 동기를 설명했습니다. 베드로는 자신에게 보여주신 환상과 고넬료의 기도를 들으시고 자신을 보내신 하나님의 섭리를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복음 즉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전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는 고넬료와 그 가정을 구원하시려고 고넬료의 삶에 들어오셨고, 베드로의 삶에도 들어오셨습니다. 이 내용이 10:1-48절 전체에 걸쳐 소개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왜 이 일을 중요하게 다루셨을까요?
※ 하나님께서는 간절하게 바라는 사람에게 감동하십니다.
어떤 유명한 철학자가 휴가를 얻어 시골에 머물고 있었습니다. 하루는 그 머무는 집의 일을 도우면서 암소를 외양간에 집어넣으려 했습니다. 그런데 암소는 앞발로 버티면서 도대체 움직이질 않았습니다. 때리고 끌고 아무리 힘을 써도 암소를 움직이게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 모습을 구경하던 어린 소녀가 그 모양이 안돼 보였던지 그에게 다가왔습니다. 소녀는 소의 콧잔등을 천천히 몇 번을 쓰다듬더니 자기 뺨을 암소의 뺨에 대고는 비볐습니다. 그리고는 암소의 고삐를 잡고 부드럽게 외양간으로 들어가는 것이었습니다.
철학자는 그 일에서 중요한 것을 깨달았습니다. 사람이든 동물이든 마음을 움직이게 하는 것은 외부의 힘이 아니라, 내부의 동기라는 것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예레미야 29:11-13절입니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을 내가 아나니, 평안이요 재앙이 아니니라. 너희에게 미래와 희망을 주는 것이니라. 너희가 내게 부르짖으며 내게 와서 기도하면, 내가 너희들의 기도를 들을 것이요. 너희가 온 마음으로 나를 구하면, 나를 찾을 것이요 나를 만나리라.”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만나는 길이 부르짖어 기도하고, 온 마음으로 구하고 찾는 것’이라고 하십니다. 간단하게 줄이면, ‘간절함’입니다. 하나님이신 예수께서도 성부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밤새도록 하셨고, 땀방울에 피가 배도록 하셨습니다. 그리고 마태복음 7:7절에서는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요즘 그리스도인들은 마음이 조급해져서인지, 끈기 있게 기다린다든지, 시간을 들여서 간절하게 구하는 것을 잘하지 못합니다. 그저 모든 일을 속전속결(速戰速決) 하려고 합니다. 하지만, 진실함이나 진정성은 꾸준하게 한 길을 갈 때 인정받게 됩니다. 일이든지 사랑이든지 진실함과 진정한 간절함 없이는 하나님도, 사람도 감동하시게 할 수 없습니다.
주인공인 고넬료를 봅시다.
고넬료는 이방인으로서 로마군의 백부장이었습니다. 우리나라 군으로 치면, 중대장입니다. 본문 앞쪽의 1-3절입니다. “가이사랴에 고넬료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이달리야 부대라 하는 군대의 백부장이라. 그가 경건하여 온 집안과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하며 백성을 많이 구제하고 하나님께 항상 기도하더니, 하루는 제 구시쯤 되어 환상 중에 밝히 보매 하나님의 사자가 들어와 이르되 고넬료야 하니” 어느 모로 보더라도 고넬료는 이렇게 할 여유가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고넬료가 제 구시쯤 기도했다고 했는데, 이는 유대인들의 기도시간을 따라 했음을 나타냅니다. 유대인들은 율법에 따라 하루에 세 번, 제 3시(오전 9시), 제 6시(정오), 제 9시(오후 3시)에 기도했습니다. 유대교로 개종한 것도 아니면서 하나님께 예배하고, 성경 묵상하고, 유대인의 기도시간을 따라 기도하는 일은 진정성과 간절함이 없이는 할 수 없는 일입니다. 더욱이 백성을 많이 구제했다고 했습니다. 박한 군인 급료로 다른 민족을 구제하기까지 했습니다. 고넬료의 이런 진실하고 간절한 삶이 하나님을 감동하시게 했습니다. 4절에서 “네 기도와 구제가 하나님 앞에 상달 되어 기억하신 바가 되었으니”라고 하십니다. 이처럼, 우리 그리스도인은 기도든지 예배든지 구제나 봉사든지 하나님께 상달 되어 기억하시도록 해야 합니다.
※ 하나님께서 감동하시면 기적이 일어납니다.
하나님께서 감동하시면, 불가능한 일도 가능하게 바꾸십니다. 유대인들은 이방인과 상종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이방인의 집에 들어가거나 식사조차 함께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베드로를 고넬료의 집에 보내기 위하여 환상을 준비하셨습니다. 베드로가 유대인의 기도시간을 따라 제 6시, 정오 기도를 위하여 옥상으로 올라갔습니다. 기도 중에 하늘이 열리고 각종 짐승과 새들이 들어 있는 보자기 같은 큰 그릇이 내려왔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베드로야 일어나 잡아먹으라.”라고 하셨습니다. 베드로는 율법이 금지한 먹어서는 안 되는 짐승들과 새들을 먹을 수 없어서 “주여, 그럴 수 없나이다. 속되고 깨끗하지 아니한 것을 내가 결코 먹지 아니하였나이다.”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라고 하셨습니다. 이런 일이 세 번 있은 후 환상이 끝났습니다. 이런 환상이 없이 고넬료가 보낸 사람들이 찾아 왔다면, 당연히 베드로는 그들과 함께 가지 않을 뿐만 아니라 만나주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베드로를 고넬료의 집에 보내시기 위하여 이 환상을 보이신 것입니다. 본문 28절에서 “유대인으로서 이방인과 교제하며 가까이하는 것이 위법인 줄은 너희도 알거니와, 하나님께서 내게 지시하사 아무도 속되다 하거나 깨끗하지 않다 하지 말라 하시기로”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후에 유대인 성도들이 베드로가 이방인의 집에 갔었다는 사실을 알고 비난할 때, 하나님께서 보내셨다는 정당성을 나타내기도 합니다. 고넬료의 집에 이른 베드로는 세례요한부터 시작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구원의 복음을 전했습니다. 바로 그 순간 성령께서 고넬료와 그와 함께한 모든 사람에게 임하셨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이 그 가정에 이른 것입니다. 고넬료가 하나님을 감동하시게 한 삶으로 그 가정과 주변 사람들까지 구원에 이르는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유대인 사회에서의 고넬료는 이방인이자, 억압과 착취의 대명사 격인 로마 군인입니다. 유대인들은 결코 고넬료를 반기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를 받으셨습니다. 야고보서 1:27절입니다.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에서 돌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그것이니라.”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진정한 경건은 생활 속에서 어려운 이들을 돌보고, 자기 마음이 세속에 물들지 않게 하는 것입니다.
인터넷에 올라온 동영상입니다.
팔에 문신을 한 젊은 청년이 길거리에서 지나가는 사람에게 글을 쓴 종이를 보여줍니다. “Can you give me a hug?(나 한 번 안아주세요)” 사람들의 반응은 그리 좋지가 않습니다. ‘뭐야?’라는 듯 이상하다는 표정으로 지나가는 사람, 단호하게 no! 라며 경계하는 몸짓으로 피해 가는 사람, 무관심한 눈빛으로 지나치는 사람 등. 모두가 고개를 흔들며 거부합니다. 그 청년을 안아주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
청년이 자리를 옮겨 거리에 앉아 있거나 누워있는 노숙인들에게 다가가서 똑같이 요청합니다. 그러자 아까와는 다른 상황이 벌어졌습니다. 기꺼이 안아주었고, 누워있던 사람은 벌떡 일어나서 안아주고 악수까지 합니다. 어떤 노숙인은 청년을 안아준 후 너무나 기쁜 표정으로 떠나는 청년을 바라보았습니다.
옛 속담에 “홀아비 사정은 과부가 안다(남의 사정은 같은 처지에 있는 사람이라야 알 수 있다.).”라고 했습니다. 외로움과 어려움을 아는 노숙인들이 ‘안아 달라.’고 호소하는 청년을 안아주었던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차별하지 않으십니다. 그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진정으로 경외하여 하나님 마음을 감동하시게 하면, 놀라운 역사를 이루십니다. 베드로가 고백합니다. “내가 참으로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보지 아니하시고, 각 나라 중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를 행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다 받으시는 줄 깨달았도다.” 그렇습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을 가까이하고 관심과 사랑으로 다가오면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풀어주십니다. 내가 하나님으로부터 관심이 멀어지게 되면, 기쁨이 사라지고 감사도 사라지고 세상의 것들이 좋아지며, 염려와 근심과 두려움들이 몰려듭니다. 어둡고 혼란이 더하는 세상에서 하나님을 감동하시도록, 모든 일을 진실함과 진정한 간절함으로 행하여 삶에서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하시기를 축복합니다.
마라나-타(μαράνα-θ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