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문
내가 사는 이유
*** 내가 사는 이유 / 고린도전서 10:23-33
고린도전서 10:23-33, “23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이 아니요,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덕을 세우는 것이 아니니 24 누구든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말고 남의 유익을 구하라. 25 무릇 시장에서 파는 것은 양심을 위하여 묻지 말고 먹으라. 26 이는 땅과 거기 충만한 것이 주의 것임이라. 27 불신자 중 누가 너희를 청할 때에 너희가 가고자 하거든, 너희 앞에 차려 놓은 것은 무엇이든지 양심을 위하여 묻지 말고 먹으라. 28 누가 너희에게 ‘이것이 제물이라.’ 말하거든, 알게 한 자와 그 양심을 위하여 먹지 말라. 29 내가 말한 양심은 너희의 것이 아니요 남의 것이니, 어찌하여 내 자유가 남의 양심으로 말미암아 판단을 받으리요. 30 만일 내가 감사함으로 참여하면 어찌하여 내가 감사하는 것에 대하여 비방을 받으리요. 31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32 유대인에게나 헬라인에게나 하나님의 교회에나 거치는 자가 되지 말고 33 나와 같이 모든 일에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여, 나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고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하여 그들로 구원을 받게 하라.”
※ 들어가는 말
대복교회가 대복마을에서 공식적으로 예배를 시작한 것이, 1994년 9월 4일 주일이었습니다. 이 마을에서 교회가 처음 설립되었고, 첫 예배가 드려진 것입니다. 예배 처소는 지금 이곳이 아니라, 길 건너편 마을 끝자락에 있는 5평 남짓한 창고를 개조한 곳이었습니다. 그날, 예배를 마치자마자 마을 이장과 사람들이 교회로 왔습니다. “이 마을에는 교회가 있을 수 없다.”라면서 “당장 나가라.”라고 했습니다. “지금까지 몇 년 동안 예배당을 하려고 대여섯 사람이 왔었지만, 모두 쫓겨나갔다.”라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교회의 부당함을 이야기했습니다. 저는 “진짜 교회를 한 번 경험해 보세요. 여러분이 동의하기 전에는 교회 간판도 십자가도 세우지 않겠다.”라고 약속했습니다. 그때부터 마을의 초등학생들을 교회 차량으로 등하교를 시켰고, 선교원을 개원하여 마을의 아이들을 가르쳤습니다. 마을의 냉장고, 텔레비전, 보일러 등. 전기, 전자 제품을 무상으로 수리하는 일을 했습니다. 그렇게 10개월이 지난 어느 날, 마을 이장 영감님이 오셔서 “점심 먹으러 가자.”라며 웅촌으로 갔습니다. 그리고 그날, 마을 이장님은 “교회를 하려면, 간판도 달고 십자가도 달아야 하지 않겠느냐?”라고, 마을에 교회를 받아들이셨습니다. 그 후, 1999년 2월에 지금의 이 교회당을 임대하여 3천여만 원을 들여 리모델링 공사를 하고, 옮겨왔습니다. 그리고 2004년 8월 10일 교회 명의로 소유권 이전이 되었습니다.
지금까지 이곳에서 교회를 섬기며, 많은 성도가 거쳐서 갔습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저의 목회 이념은 한 가지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존재해야 한다.”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31절 말씀을 저의 목회 이념이며, 교회의 근본으로 삼고 있습니다. 대복교회가 여기까지 이르게 된 것은 오직 하나님의 역사이자 은혜이며, 교회가 추구하는 것은 오직 하나님께 영광입니다. 왜냐하면, 이것이 교회의 존재 이유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본문 말씀을 중심으로 내가 사는 이유에 관하여 살펴보려 합니다.
※ 본문 말씀의 내용과 의미를 봅시다.
고린도교회가 있던 고린도 시는 부요한 도시였으며, 특히 우상숭배가 만연한 곳이었습니다. 시 중앙에는 태양신인 ‘아폴로’ 신의 신전이 있었으며, 고린도 정상에는 ‘아프로디테(Aphrodite)’여신의 신전이 있었습니다. 신전에는 1,000명에 달하는 여 사제들이 살면서 신전 매창(賞娼)이 행해졌습니다. 그래서 고린도 시는 대단히 문란했습니다. 당시에는 ‘고린도 식으로 산다.(korinqiavzomai)’라는 말이 유행했었는데, 이 말은 ‘행실이 나쁘다.’란 뜻이었습니다. 이 음란한 문화는 고린도 교회에까지 들어와서 큰 문제를 일으키고 있었습니다(고전 5장). 그리고 신전 제사 후에 나오는 고기들이 시장에서 매매되고 있었습니다. 바로 이 고기가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에게 문제가 되었습니다. 즉 ‘우상에게 바쳐졌던 고기를 성도들이 사 먹어도 되는지?’에 대한 문제였습니다. 바로 본문에서 말씀하는 내용입니다.
사도 바울은 ‘음식 때문에 성도가 영향받을 것은 전혀 없다.’라고 말씀합니다. 즉 우상에게 바쳐졌던 음식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성도들의 신앙에 문제를 일으키는 것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다만 문제가 되는 것은 믿음이 약한 성도들이 ‘우상의 제물을 먹는 것은 곧 우상숭배에 참여하는 것과 같다.’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즉 나는 믿음이 있어서 우상의 제물이라 할지라도 아무런 거리낌이 없이 먹을 수 있지만, 믿음이 약한 사람이 그것을 보고 시험에 들게 된다면, 먹지 않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중요한 것은, 먹거나 먹지 않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그리스도인은 세상에서 하나님의 영광의 통로이기 때문입니다.
※ 하나님 영광의 통로인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하심으로 자유를 얻은 사람들입니다. 갈라디아서 5:1절에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매지 말라.”라고 하십니다. 우리는 어떤 것이든지 믿음 안에서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내게 주어진 자유로 내 마음대로 하는 것이, 다른 사람의 걸림돌이 된다면 그것은 옳지 않은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자기 유익을 구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많은 사람의 유익을 위하여 사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많은 사람에게 덕을 세워 하나님께 영광이 되게 해야 합니다. 즉 그리스도인은 세상에 하나님의 영광을 이루는 ‘하나님 영광의 통로’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본문 23-24절에서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이 아니요,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덕을 세우는 것이 아니니 24 누구든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말고 남의 유익을 구하라.”라고 했으며, 31절에서는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라고 하십니다.
영국의 목회자이며 대설교가였던 ‘스펄젼’ 목사는 그의 설교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십일조를 바치지 아니하고 자신이 사용하는 것은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는 것이요, 드려야 할 것을 드리지 않은 것도 도적질하는 것이요, 주일 지키지 않는 것은 주일 도둑놈이요, 예배시간에 예배하지 않은 것은 예배 도둑놈이요, 하나님께 드릴 영광을 가로채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 도둑놈이다.”
이사야 42:8절에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나는 여호와이니 이는 내 이름이라. 나는 내 영광을 다른 자에게, 내 찬송을 우상에게 주지 아니하리라.”라고 하시며, 48:11절에서는 “나는 나를 위하며, 나를 위하여 이를 이룰 것이라. 어찌 내 이름을 욕되게 하리요. 내 영광을 다른 자에게 주지 아니하리라.”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이유는 모든 영광이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 그리스도인이 하나님 영광의 통로가 되어야 하는 이유는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창조되었기 때문입니다. 이사야 43:7절입니다. “내 이름으로 불려지는 모든 자 곧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를 오게 하라. 그를 내가 지었고 그를 내가 만들었느니라.” 하나님께서는 나를 통하여 세상에 영광을 나타내시며, 나를 통하여 영광을 받으십니다. 그래서 사도 베드로는 베드로전서 2:9절에서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라고 하십니다. 이처럼, 우리 그리스도인은 존귀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 된 우리는 이름에 걸맞게 살아야 합니다.
어느 자그마한 교회에서 교인들이 서로 헐뜯고 욕하고 싸워서 교회가 잠잠할 날이 없었습니다. 목사님이 새로 부임해 왔는데도 싸움은 그칠 줄을 몰랐습니다. 부임한 목사님이 이 일을 위하여 깊이 생각하고 기도한 후, 주일에 강단 앞에 탁자를 놓고 그 위에 관을 하나 올려놓았습니다. 설교하기에 앞서 목사님이 교인들에게 말했습니다. “여러분, 이 앞에는 관이 하나 놓여 있습니다. 한 사람씩 나와서 이 관 속에 누가 있는지 확인해 보시기 바랍니다.” 교인들이 한 사람씩 나와서 관을 들여다보고는 깜짝 놀랐습니다. 왜냐하면, 관 안에 있는 사람이 바로 자신이었기 때문입니다. 목사님이 관 바닥에 큰 거울을 넣어놓았던 것입니다. 교인들이 관을 다 본 후에 말씀을 시작했습니다.
“우리는 모두 언젠가 저 관에 들어갈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믿는 우리는 이미 우리 자신은 죽고 내 안에 예수님이 사셔야 합니다. 교회가 이렇게 시끄러운 것은 우리가 죽지 못해서 예수님이 사실 수가 없어서 그렇습니다.…” 이 말씀에 깊이 깨달은 교인들이 한 사람씩 삶이 바뀌면서 교회가 전혀 다르게 변화되었다고 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리는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계셔서 살아가는 모습이 예수님을 닮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나를 주님의 일꾼으로 삼으시고 나를 통하여 일하십니다. 그뿐만 아니라, 내가 세상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일하도록 힘이 되시고 능력이 되십니다. 요한복음 15:5절에서 말씀하십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 내 삶에서 열매를 맺게 하시는 분, 내 삶을 통하여 결과를 내시는 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우리 삶이 예수 그리스도를 떠나면 아무 의미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내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산다는 것은, 어떤 의미입니까?
예수님과 공명하는 것입니다. 공명(共鳴)이란, ‘어떤 소리를 내는 물건이 외부 음파(音波)에 자극되어 이와 동일한 진동수의 소리를 내는 현상’을 말합니다(공명체에 대한 설명). 즉 ‘다른 사람의 사상이나 감정, 행동 따위에 공감하여 찬성하는 것’을 뜻합니다. 그러면 예수 그리스도와 공명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쉽게 말해서 하나님과 같은 소리를 낸다는 것입니다. 어떻게요? 주님께서 가르치시고 본을 보이신 삶을 우리가 따라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생애를 보면, 이 사실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서 사실 때에 ‘말씀하시는 것이나 행하는 모든 것이 오직 하나님 아버지의 뜻만을 행한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피땀 흘리며 기도하실 때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고 하셨습니다. 요한복음 6:38-39절에서 “내가 하늘로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라고 하셨으며, 5:30절에서는 “내가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노라. 듣는 대로 심판하노니, 나는 나의 원대로 하려 하지 않고, 나를 보내신 이의 원대로 하려는 고로 내 심판은 의로우니라.”라고 하십니다. 심지어 예수님은 요한복음 4:34절에서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라고 하십니다. 예수께서 하나님의 뜻 행하는 것을 자기 양식으로 삼으셨듯이, 우리는 예수님의 가르치심을 행하는 삶을 이루어야 합니다.
대복교회가 존재하는 이유, 그리고 내가 사는 이유는 오직 하나,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는 것입니다. 장로교 신조 제 일번이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과 영원토록 그를 즐거워하는 것이라.”라고 했습니다. 예수께서는 마태복음 7:21절에서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라고 하십니다. 대복교회는 하나님의 나라를 향하여 나아가며, 하나님의 뜻을 생명으로 삼은 교회입니다. 지금까지 주님의 뜻의 길로 살아왔듯이, 앞으로 주님이 다시 오시는 그날까지 한 사람도 낙오하지 않고, 주님의 지체로 담대하게 살아가기를 축복합니다.
마라나-타(μαράνα-θ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