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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교회가 관심가져야 할 것

작성자 늘푸른 댓글 / 조회: 246회 작성일 2024-08-25 22:11

*** 오늘 교회가 관심가져야 할 것 / 고린도전서 1:10-17

 

고린도전서 1:10-17, “10 형제들아,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모두가 같은 말을 하고 너희 가운데 분쟁이 없이 같은 마음과 같은 뜻으로 온전히 합하라. 11 내 형제들아, 글로에의 집편으로 너희에 대한 말이 내게 들리니 곧 너희 가운데 분쟁이 있다는 것이라. 12 내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너희가 각각 이르되 나는 바울에게, 나는 아볼로에게, 나는 게바에게, 나는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는 것이니 13 그리스도께서 어찌 나뉘었느냐? 바울이 너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혔으며 바울의 이름으로 너희가 세례를 받았느냐? 14 나는 그리스보와 가이오 외에는 너희 중 아무에게도 내가 세례를 베풀지 아니한 것을 감사하노니 15 이는 아무도 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 말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16 내가 또한 스데바나 집 사람에게 세례를 베풀었고 그 외에는 다른 누구에게 세례를 베풀었는지 알지 못하노라. 17 그리스도께서 나를 보내심은 세례를 베풀게 하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복음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로되 말의 지혜로 하지 아니함은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

 

※ 들어가는 말

 

사람들은 매일 순간마다 무엇인가를 생각하며, 무엇인가에는 관심을 두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관심은 행동으로 나타내게 됩니다. 요즘 인터넷에서 실시간으로 떠오르는 뜨거운 관심사를 찾아봤습니다. 가장 뜨거운 관심사는 digital nomad와 AI(Artificial Intelligence, 인공지능)였습니다. digital nomad는 digital과 nomad(유목민)의 합성어입니다. ‘디지털 장비를 이용하여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일하는 사람’을 뜻합니다. 즉 한곳에 정착하지 않고 여행 다니면서 온라인에서 생계를 유지하는 사람입니다. 그래픽디자이너, 앱 개발자, 프리랜스 카피라이터, 번역가, 등. 그다음 관심사로는 코로나 재유행, 엠폭스(원숭이 두창 바이러스로 인한 감염증), 일본 지진과 화산폭발, 중동지역 전운,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전쟁 등입니다. 여러분은 요즘 가장 관심을 두는 것은 무엇인가요? 영적으로 조금 깊은 관심이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아마도 종말, 환난, 재림 등. 영적인 관심사들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런데 혹시 여러분은 지금 우리 시대에 하나님께서 가지시는 관심사가 무엇인지에 관하여 생각해 보셨습니까? 많은 그리스도인이 놓치는 것이, 나를 향한 혹은 우리 가정과 교회, 이 시대를 향한 하나님의 관심입니다. 지금 우리 시대에 하나님께서 교회에 원하시는 것은 무엇일까요? 교회에 대한 하나님의 관심사를 알면, 우리 개인이나 가정, 이 시대에 관한 관심사도 짐작할 수 있습니다.

 

※ 본문 말씀의 배경과 의미를 봅시다.

 

고린도전서는 사도 바울일 고린도 교회에 보낸 첫 번째 편지입니다. 바울 시대의 고린도는 인구가 670만으로 알려진 그리스의 대도시입니다. 상업의 중심이었고, 각국의 인종이 모여 있었고, 학문도 대단히 성했습니다. 한편으로는 우상숭배가 성행하여, 도덕적으로 아주 퇴폐해 있었습니다. 고대 문헌에는 고린도를 방탕 생활의 대명사로 사용할 정도였습니다. 아 고린도에 바울이 온 것은 제2차 전도 여행 때였으며, 그때 고린도 교회가 세워졌습니다. 이 교회는 바울이 세운 교회 중 가장 큰 것이고, 또 문화의 중심지에 있는 중요한 것이었지만, 파벌 다툼과 세상적 풍토로 문제가 많았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교리를 말하기보다는 구체적인 신앙의 삶에 관한 실제적 해결점을 가르칩니다.

 

본문에서는 고린도 교회의 파벌적인 분쟁에 관하여 구체적인 예를 들면서 자세하게 파헤칩니다. 본문 12-13절입니다. “내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너희가 각각 이르되 나는 바울에게, 나는 아볼로에게, 나는 게바에게, 나는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는 것이니, 그리스도께서 어찌 나뉘었느냐? 바울이 너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혔으며 바울의 이름으로 너희가 세례를 받았느냐?” 바울은 직설적으로 파벌적인 분쟁의 부당함을 지적합니다. 그러면서 17절에서 교회의 궁극적인 목적과 그 목적을 수행하는 자세에 관하여 말씀합니다. “그리스도께서 나를 보내심은 세례를 베풀게 하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복음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로되 말의 지혜로 하지 아니함은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 이 말씀에서 오늘의 교회가 관심을 가져야 할 가장 중요한 관심사가 무엇이어야 하는지, 그리고 어떻게 수행해야 하는지를 가르칩니다.

 

※ 예수께서 몸 된 교회에 가지시는 관심은 무엇입니까?

 

우리 그리스도인은 예수님과 동행하는 사람이며, 모든 그리스도인은 인종과 문화와 나이와 남녀를 불문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향한 동행자들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세계의 어느 곳에 있는 사람이라도 같은 곳 즉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봅니다. 그런데 지금의 교회들이 파벌적인 분쟁과 이념적인 대립으로 분열되어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이유는 ‘마음이 하나를 이루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즉, 같은 곳을 바라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마치 현대판 고린도 교회가 되어 가고 있습니다. 본문 10-12절입니다. “형제들아,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모두가 같은 말을 하고 너희 가운데 분쟁이 없이 같은 마음과 같은 뜻으로 온전히 합하라. 내 형제들아, 글로에의 집편으로 너희에 대한 말이 내게 들리니 곧 너희 가운데 분쟁이 있다는 것이라. 내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너희가 각각 이르되 나는 바울에게, 나는 아볼로에게, 나는 게바에게, 나는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는 것이니” 이런 파벌적인 분쟁은 초대교회뿐만 아니라, 지금에 이르기까지 많은 교회에서 끊임없이 일어납니다. 마치, 교회마다 하나님이 다른 것처럼 그렇게 행동합니다(신학생 시절의 동래교회 탐방). 그래서 고린도 서신의 결론 부분인 고린도후서 13:5절에서 “너희는 믿음 안에 있는가?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는 버림받은 자니라.”라고 하십니다. 즉 예수께서 지금의 몸 된 교회에 원하시는 관심은 교회가 믿음 안에서 하나를 이루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2:12-13절을 봅시다. “몸은 하나인데 많은 지체가 있고, 몸의 지체가 많으나 한 몸임과 같이, 그리스도도 그러하니라.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 하나님의 나라에는 장로교, 감리교, 침례교, 하나님의 성회 등의 교파도 없고, 통합, 합동, 고신, 기장, 재건 등의 교단의 갈림도 없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로서의 성도만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 우리는 무엇보다 하나 되기를 힘써야 하며, 열정으로 하나 되도록 일해야 합니다. 이것이 예수께서 거듭 강조하신 중요한 일입니다. 요한복음 17:21-22절을 봅시다.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그들에게 주었사오니, 이는 우리가 하나가 된 것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 요한복음 17장은 예수께서 성부 하나님께 간구하신 대제사장적인 기도입니다. 예수께서 교회에 가지신 관심은 하나 됨입니다. 그만큼 하나 됨은 중요합니다.

 

하나 됨이 이렇게 중요한 이유와 목적이 있습니다. 본문 17절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나를 보내심은 세례를 베풀게 하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복음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로되 말의 지혜로 하지 아니함은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 예수께서 교회에 관심을 가지신 또 하나는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복음을 전하는 방법으로는 말의 지혜가 아니라, 삶으로 나타내는 행위 전도입니다. 예수께서도 세상에 계실 때, 말보다는 삶에서 나타나는 사랑과 관심으로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에게도 먼저 행동으로 본을 보이셨습니다. 요한복음 13:13-15절입니다. “너희가 나를 선생이라 또는 주라 하니 너희 말이 옳도다. 내가 그러하다.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었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는 것이 옳으니라.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 이처럼, 교회는 신앙의 본을 통하여 믿음의 대를 이어왔습니다. 이를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전한 편지에서 이렇게 표현합니다. 디모데후서 2:2절입니다. “또 네가 많은 증인 앞에서 내게 들은 바를 충성된 사람들에게 부탁하라. 그들이 또 다른 사람들을 가르칠 수 있으리라.” 대를 이어가는 복음 전달, 이것이 예수께서 지금 교회에, 우리 각 사람에게 기대하시는 관심사입니다. 이렇게 복음을 전달하는 방법으로는 유창한 말이 아니라 삶에서 나타내는 빛과 소금의 역할입니다.

 

※ 우리가 지금 가져야 할 구체적인 관심사는 무엇입니까?

 

헬렌 켈러(Helen Keller) 여사가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행복의 한쪽 문이 닫힐 때, 다른 한쪽 문은 열린다. 하지만 우리는 그 닫힌 문만 오래 바라보느라, 우리에게 열린 다른 문은 못 보곤 한다.” 이 말처럼 사람은 어느 한쪽에 관심이 일어나면 다른 쪽을 잘 보지 못합니다. 특히 영적으로는 더욱 그러합니다. 예수께서 마태복음 6:24절에서 말씀합니다.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한다.”라는 말씀은 ‘영적인 것과 세상의 것을 함께 관심 가질 수 없다.’라는 뜻입니다. 성도들은 이 말씀을 깊이 새기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세상적인 관심을 버릴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는 성도들이 말씀의 의미를 오해하기 때문에 이렇게 반응합니다. 우리가 너무도 잘 아는 마태복음 6:33절을 봅시다.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이 말씀에서 “더 하신다.”라는 말씀은 헬라어로 prostivqhmi(prostithemi)라는 단어인데, ‘더 놓다. 옆자리에 놓다.’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영적인 것, 즉 하나님께 관심을 가지면,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들을 더 주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에 관심을 가지면, 모든 것을 잃게 되지만, 하나님께 관심을 가지면 우리의 필요를 아시는 주께서 모든 것을 더해 주십니다.

 

젊은 군인과 결혼해서 사막 지역에 파병되어 살게 된 여인이 있었습니다. 젊은 새댁은 사막의 황량함과 외로움을 견디지 못하고, 결국 친정어머니에게 편지를 보냈습니다. “엄마, 나는 집으로 돌아가고 싶어요. 이 메마른 사막이 너무도 싫어요. 이곳은 사람이 살 곳이 아니에요.” 얼마 후, 친정엄마에게서 아주 짧은 답장이 왔습니다. “두 사람이 감옥에서 철창살 너머를 바라보고 있었단다. 한 사람은 진흙을 보았고, 한 사람은 별을 보았단다.” 엄마가 보내준 글의 의미를 깨닫게 된 새댁은 진흙이 아닌 별을 찾기로 했습니다. 그녀는 사막의 꽃인 선인장에 관하여 연구하기 시작했고, 그 근처 인디언의 말과 풍습과 전통을 연구했습니다. 그 결과, 그녀는 사막에 관한 전문가가 되어 사람들에게 유익하고 관심받는 책을 내기까지 했습니다.

 

우리는 같은 방향으로 보아도 어떻게, 무엇에 관심을 가지느냐에 따라 삶은 전혀 달라집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를 향하여 영적인 부모의 마음으로 모두가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삶을 이루기를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고린도교회는 교회로서의 사명은 잊어버리고, 세상적인 권력에 물들어 교회마저 파벌을 이루어 분쟁을 일으켰습니다. 그래서 고린도후서 5장에서는 ‘화목의 직분을 맡기셨다.’라고 했으며, 13:5절에서는 결론으로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께로 향하고 있는지를 스스로 점검하고 확증하라.’라고 합니다. 고린도교회처럼, 아무리 예수님을 따르는 그리스도인의 모임을 이루고 있다고 할지라도 그가 무엇을 보느냐에 따라서 생명과 죽음으로 갈라지게 됩니다. 영적인 관심과 시각이 없으면 세상의 것, 육신적인 관심이 나타나는 것은 당연합니다. 이 복잡하고 혼란한 현대를 사는 우리는 보아야 할 것도 많고, 생각해야 할 것도 많고, 해야 할 일도 많습니다. 그래서 디모데후서 4:3-4절에서는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따를 스승을 많이 두고, 또 그 귀를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따르리라.”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은 ‘종말의 때인 이 시대가 사람들의 관심을 끌어서 별로 쓸모도 없는 것들을 보고 따르게 할 것이다.’라는 뜻입니다.

 

그러면, 지금 우리는 무엇을 보며 어디에 관심을 두어야 합니까?

마태복음 14:28-31절을 봅시다.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만일 주님이시거든 나를 명하사 물 위로 걸어오라 하소서.’ 하니, ‘오라.’ 하시니 베드로가 배에서 내려 물 위로 걸어서 예수께로 가되, 바람을 보고 무서워 빠져 가는지라. 소리 질러 이르되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 하니 예수께서 즉시 손을 내밀어 그를 붙잡으시며 이르시되 믿음이 적은 자여, 왜 의심 하였느냐?하시니” 이 말씀은 예수께서 한밤중에 갈릴리 호수 물 위를 걸어서 제자들이 타고 가는 배로 오신 이적의 내용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말씀에 용기를 얻어서 자신도 바다로 뛰어내려 물 위를 걸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결정적인 실수를 했습니다. 30절에서 “바람을 보고”라고 했습니다. 물 위를 걸어오시는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하는데, 베드로는 바람이 몰고 오는 파도를 보았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을 살면서 세상을 다스리시는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만일 세상을 바라보면 베드로처럼 세상으로 빠져들어 영의 생명이 위태롭게 됩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히브리서 12:2절에서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라고 하십니다. 오늘의 많은 그리스도인이 앞서 가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보지 못하고, 세상의 환경만 보며 염려하고 두려워합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을 부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에게 맡기신 사명이 무엇인지 분명히 알고 순종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전하는 것이었습니다. 세례를 베푸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예수께서 자신에게 맡기신 일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지금 우리도 나를 부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맡기신 사명을 바라보고 관심을 두어야 합니다. 사명이 없는 그리스도인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우리에게 은사를 주시고 재능을 주신 것은 우리에게 맡기신 일을 하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지금 이 시대를 사는 그리스도인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에게 맡기신 일이 무엇인지를 찾고, 거기에 관심을 두고 행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본문 10절을 기억하십시오. “형제들아,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모두가 같은 말을 하고 너희 가운데 분쟁이 없이 같은 마음과 같은 뜻으로 온전히 합하라.” 그리스도인 공동체는 여러 개가 아니라, 오직 하나입니다. 나라와 민족과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입니다. 그래서 같은 말을 하고, 같은 마음과 같은 뜻으로 온전히 하나를 이루어야 합니다. 그리고 생활 속에서 영적인 일에 관심을 두고, 예수 그리스도를 나타내십시오. 고린도교회처럼, 사람들이 다른 것에 관심을 끌고 다른 곳을 보도록 유혹하더라도, 하나님만 바라보아야 합니다. 내게 주신 은사가 무엇이며, 내가 무엇을 해야 할지를 생각하십시오. 길을 잘 모를 때는 하나님께 기도로 물으십시오. 그리고 무슨 일이 있어도 하나님의 나라 바라보는 것을 포기하지 마십시오.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세상을 보지 말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십시오. 2차 세계대전 당시 영국의 수상이었던 윈스턴 처칠은 옥스퍼드 대학의 졸업식에서 가장 짧은 명연설을 했습니다. Don't give up. (포기하지 말라) Never give up! (절대 포기하지 말라!) Don't you ever and ever give up! (절대 절대 포기하지 말라!) 주님은 곧 오십니다. 포기하지 말고 영적인 일에 관심을 가지며, 주님을 바라보시기를 축복합니다.

 

마라나-타(μαράνα-θ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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