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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사랑 - 용서

작성자 늘푸른 댓글 / 조회: 450회 작성일 2024-08-04 20:54

*** 위대한 사랑 - 용서 / 마태복음 18:23-35

 

마태복음 18:23-35, “23 그러므로 천국은 그 종들과 결산하려 하던 어떤 임금과 같으니 24 결산할 때에 만 달란트 빚진 자 하나를 데려오매 25 갚을 것이 없는지라. 주인이 명하여 그 몸과 아내와 자식들과 모든 소유를 다 팔아 갚게 하라.’ 한 대 26 그 종이 엎드리어 절하며 이르되 내게 참으소서 다 갚으리이다.하거늘 27 그 종의 주인이 불쌍히 여겨 놓아 보내며 그 빚을 탕감하여 주었더니 28 그 종이 나가서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 빚진 동료 한 사람을 만나 붙들어 목을 잡고 이르되 빚을 갚으라.’ 하매 29 그 동료가 엎드려 간구하여 이르되 나에게 참아 주소서 갚으리이다.’ 하되 30 허락하지 아니하고 이에 가서 저가 빚을 갚도록 옥에 가두거늘 31 그 동료들이 그것을 보고 몹시 딱하게 여겨 주인에게 가서 그 일을 다 알리니 32 이에 주인이 그를 불러다가 말하되 악한 종아 네가 빌기에 내가 네 빚을 전부 탕감하여 주었거늘 33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료를 불쌍히 여김이 마땅하지 아니하냐?하고 34 주인이 노하여 그 빚을 다 갚도록 그를 옥졸들에게 넘기니라. 35 너희가 각각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

 

※ 들어가는 말

 

기독교의 가장 중심 단어는 ‘사랑’입니다. 구약 율법의 실행 조항이 613가지이며, 이것을 요약한 것이 ‘십계명’입니다. 예수께서는 이 십계명을 요약하여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제일은 사랑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사랑은 너무 광범위하여 콕 집어서 ‘이것이 사랑이다.’라고 할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사랑은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선택 조항이 아니라, 반드시 나타내야 하는 필수 조항이어서 우리 생활에서 나타내야만 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3:34-35절에서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즉, 예수님의 제자 된 표징이 사랑이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세상의 마지막 때에 나타날 징조들을 말씀하시면서 “불법이 성하므로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지리라.”(마 24:12)라고 하셨습니다. 잃어버려서는 안 되는 사랑이 어쩔 수 없이 식어가는 때가 있다는 말씀입니다. 어떤 이유에서든지 사랑이 식든지, 잃어버리면 동시에 구원도 잃어버리게 됩니다. 바로 다음의 말씀인 13절입니다.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어떤 경우에도 사랑 실천하기를 잊지 않는다면, 구원에 참여할 수 있음을 말씀합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 2:2:4-5절에서 주님은 에베소 교회에 이렇게 경고하십니다.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희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가서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 당시의 에베소에는 거짓과 불법이 판을 치고 있어서 에베소 교회마저 거짓과 불법을 적발하느라 의심과 감시하는 마음으로 사랑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지금 우리의 상황과 닮았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러한 시대를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 본문 말씀의 배경과 의미를 봅시다.

 

예수께서 가버나움에 계실 때, 죄에 대한 가르침을 듣고 있던 베드로가 예수께 물었습니다.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 이 내용은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제안입니다. 왜냐하면, 유대인 사회에서는 세 번을 용서하면 위대한 사람으로 여겼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베드로가 ‘일곱 번을 용서하면 되겠습니까?’라는 말은 정말 대단한 발상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그 발상을 뛰어넘어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용서하라.’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당연히 ‘무제한적인 용서’를 뜻합니다. 그러면서 ‘용서할 줄 모르는 종의 비유’로 가르치셨습니다.

이 비유 중에서 왕의 종이 빚진 일만 달란트는 오늘의 통화가치로는 약 1조 원 정도입니다. 왕은 결산하면서 1조 원을 빚진 종을 불쌍하게 여겨 탕감해 주었습니다. 엄청난 빚을 탕감받은 종은 발걸음도 가볍게 집으로 돌아가던 중 자신에게 100데나리온을 빚진 동료를 만났습니다. 아마 그 기분이면 100데나리온쯤은 없는 것과 같으니 당연히 탕감해 주겠지요. 100데나리온의 오늘의 가치는 약 천만 원 정도입니다. 그러나 그 종은 조금만 기다려달라는 동료의 멱살을 잡고는 감옥에 넣어버렸습니다. 1조 원과 천만 원, 비교할 수 있겠습니까? 이 광경을 본 다른 동료들이 민망한 마음으로 왕에게 사실을 아뢰었습니다. 왕은 그 종을 불러들여 “악한 종아, 네가 빌기에 내가 네 빚을 전부 탕감하여 주었거늘,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료를 불쌍히 여김이 마땅하지 아니하냐?”라고 책망하면서 감옥에 넣어버렸습니다. 이 용서할 줄 모르는 종의 비유가 의미하는 핵심은 35절에 있습니다. “너희가 각각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 이것이 진정한 용서입니다.

 

※ 용서는 위대한 사랑의 표현입니다.

 

왜 용서가 위대한 사랑의 표현이겠습니까?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이를 사도 바울은 로마서 5:8절에서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죄로 죽은 우리를 살리시려고 우리의 죄를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께 지우시고 우리를 용서하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이를 사도 요한은 요한일서 4:10절에서 이렇게 표현합니다.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부부동반 모임에 참석한 어느 부부의 이야기입니다. 모임 중에 어느 부인이 큰 실수를 범했습니다. 남편은 대범하게 아내의 실수를 용서하고 그 일을 잊도록 하겠다고 했습니다. 아내는 정말 고마워했습니다. 그러나 남편은 몇 달이 지나도 몇 년이 지나도 그 일을 잊을 만하면 다시 그 이야기를 들춰냈습니다. 참다못한 아내가 남편에게 따졌습니다. “도대체 나한테 왜 이러는 거예요? 용서하고 잊어주겠다면서요?” 남편은 “물론 용서했소. 하지만 내가 용서해 준 것을 당신이 잊지 않았으면 해요.”라고 했습니다.

 

참, 어처구니없다고 생각되지요? 그런데, 많은 사람이 이런 용서를 합니다. ‘용서는 하겠지만 잊을 수는 없다.’라는 말은 ‘용서하지 못하겠다.’라는 또 다른 표현일 뿐입니다. 오늘의 많은 사람이 이렇게 가식적인 용서를 합니다. 진정한 용서는 마치 그릇을 깨끗이 비워 씻은 것처럼 그 일 자체를 깨끗하게 잊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용서하실 때에 이렇게 용서하십니다. 이사야 43:25절입니다. “나 곧 나는 나를 위하여 네 허물을 도말하는 자니 네 죄를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여기서 “도말하다.”라는 말은 ‘지우다. 없애다.’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회개할 때, 우리의 죄를 지워 버리시고 기억하지 않으십니다. 이 용서가 하나님께서 하신 용서이며, 우리에게 가르치시고 원하시는 용서입니다. 그래서 사랑의 표현 가운데 가장 기본적이고 중요한 덕목이 용서입니다. ‘용서’라는 말은 참 아름다운 말이며 아주 큰 사랑의 표현입니다. 하지만 무척 하기 어려운 것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용서는 용기 있는 사람이 아니면 할 수가 없다.’라고도 합니다.

 

용서라는 단어와 연결되는 유명한 소설이 있습니다. 19세기 프랑스의 거장 작가이자 시인이며 정치가였던 ‘빅토르 위고(Victor Hugo)’가 쓴 ‘레미제라블’입니다. 위고는 장발장이라는 인물을 통하여 혼란스럽던 사회에 ‘사랑과 용서’를 불어넣었습니다. 이 소설은 1789년에 일어난 프랑스 대혁명을 배경으로 합니다. 굶주린 누이와 일곱 명의 조카들을 위해 빵 한 조각을 훔친 죄로 19년의 감옥살이를 했습니다. 출옥한 후 전과자라는 낙인으로 온갖 불이익과 차별을 받았습니다. 갈 곳 없는 그를 받아 준 성당에서 그는 또 은그릇과 은 촛대를 훔쳤습니다. 그러나 밀리에르 신부의 용서를 받은 그는 양심의 눈을 떴고 속죄의 삶을 살게 됩니다. 이 사람이 주인공 장발장입니다. 그는 파란만장한 삶을 통하여 사랑과 용서, 관용이라는 큰 주제를 독자들에게 보여줍니다. 소설 중의 명대사가 있습니다. “삶의 고통에서 울어보지 않은 사람은 세상 사물을 제대로 볼 수 없다.” “깊은 고독과 절망을 사랑과 관용, 용서로 바꾸는 힘은 어디서 나오는가? 사랑만이 나를 구원할 수 있는 힘이다.” 소설의 마지막 부분에서 독자들에게 도전적인 생각을 불러일으킵니다. “무쇠가 뜨거운 용광로에서 단련된 후 강철이 되듯이 우리 인생 역시 고통과 시련을 어떻게 견뎌내느냐에 따라 강철이 되기도 하고, 허물어 녹아버리기도 합니다. 오늘도 만나게 될 온갖 시련들, 그 시련 앞에서 무릎을 꿇고 굴복할 것인가? 아니면 구원의 출발점을 만들 것인가?

 

밀리에르 신부나 장발장의 사랑과 용서가 위대한 것이라면,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용서는 가히 세상의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위대한 것입니다. 우리는 이 사랑과 용서를 받은 사람들로서 이와 닮은 사랑과 용서를 해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골로새서 3:13-14절에서 “누가 누구에게 불만이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라고 하십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본문에서 표현한 일만 달란트보다 더 큰 사랑과 용서를 우리 하나님으로부터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일만 달란트 빚진 왕의 종처럼, 세상적인 작은 잘못을 용서하지 못하게 되면,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용서도 무효가 됩니다.

 

※ 나는 어떤 용서를 해야 합니까?

 

주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용서는 어떤 것이겠습니까?

앞서 보았던 골로새서 3:13-14절입니다. “누가 누구에게 불만이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 이는 온전하게 매는 띠니라.” 주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용서는 ‘주님이 나를 용서하신 것같이’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해야 할 용서입니다. 그 이유는 본문 35절에서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각각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 그리고 마태복음 6:14-15절입니다.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면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시려니와,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 본문의 비유 이야기처럼, 자신은 탕감을 받았으면서 자신에게 빚진 다른 사람을 용납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진노를 부르는 행위입니다. 너무도 당연한 이치로 ‘내가 용서받았기 때문에 용서하라.’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남을 용서하기 전에 먼저 생각해야 하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자신을 용서하는 것입니다. 많은 그리스도인이 자기 죄책감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죄책감이란, 하나님의 용서의 은혜를 받아들이지 못한 불신입니다. 죄책감은 절대 회개가 아닙니다. 예수님을 은 30에 팔았던 가룟 유다가 ‘죄 없는 스승을 팔았다.’라는 죄책감에 시달리다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가룟 유다는 회개하지 않았고 용서를 구하지 않았습니다. 한편 자기만 살겠다고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했던 베드로도 죄책감에 빠져 회한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하지만 베드로는 회개하고 다시 주님께로 돌아왔습니다. 만일 베드로도 죄책감에서 헤어 나오지 못했다면 그도 주님으로부터 떨어졌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죄책감이 아니라, 잘못은 하나님께 회개하고 돌이켜야 하며, 자신은 하나님의 용서를 확신하고 죄책감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죄책감에서 벗어나는 것이 하나님의 약속과 은혜를 의심하지 않고 신뢰하는 길입니다. 요한일서 1:9절에서 말씀하십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이렇게 주님의 용서하심을 확신하면 영혼도 양심도 자유롭게 됩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용서는 사랑의 위대한 표현이며, 하나님의 사랑과 용서를 경험한 사람들이 할 수 있는 믿음의 산물입니다. 그리고 진정한 용서는 지나간 잘못을 기억하지 않습니다. 꼭 기억해야 할 것은, 진정으로 회개하여 하나님의 용서를 믿고 자기 죄책감을 떨치는 것입니다. 용서는 삶을 아름답게 합니다. ‘톰 소여의 모험’을 쓴 소설가인 마크 트웨인(Mark Twain)이 남긴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용서란 제비꽃이 자신을 밟은 사람의 뒤꿈치에서 부서지며 풍기는 향기이다.” 이 용서의 향기는 하나님께도 기쁨이 되며, 나를 구원에 이르게 하는 길이 됩니다. 여러분의 마음 깊이 남아 있는 미움이나 원망이 있다면, 나를 용서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생각하며 진정으로 용서하십시오. 진정한 용서는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는 통로입니다. 이 위대한 용서의 삶으로 진정한 자유와 기쁨의 삶을 누리시기를 축복합니다.

 

마라나-타(μαράνα-θ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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