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은혜를 받으라(고린도후서 6:1-10)
작성자 배의신 댓글
/ 조회: 12,759회
작성일
2000-11-05 20:57
- 들어가는 말
본문 말씀은 말세를 사는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것을 권면하고 있다. 이 '은혜'라고 하는 말은 우리가 신앙 생활을 하면서 많이 사용하는 말 중에서도 몇 손가락 안에 드는 것이다.
'은혜'를 성경 원어에서 《카리스》라고 하는데, '감사', '친절', '호의', '은혜'등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우리에게는 《카리스마》라는 말로 더 많이 알려져 있다. '카리스마'는 '카리스'에서 유래된 말로서, '호의를 베풀다', '은혜를 베풀다', '선물을 주다', '은사' 등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은혜'라는 말을 간단하게 정의할 수는 없지만,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에게 값없이 무제한으로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역사가 넘쳐흐르는 선물'이라고 할 수 있다.
사도 바울은 말세의 성도들에게 하나님께서 값없이 주시는 은혜를 충만하게 받으라고 권면하고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만드는 사람들이 많이 있기 때문이다. 본문 1절에의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는 말씀에서 "헛되이"라는 말은 '공허한'이라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은혜를 공허한 것으로 만들지 말라'는 의미가 된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으로 주어진 새로운 생명을 위하여 결단하고 선택하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의미이다.
고린도 교회는 영과 육신을 더럽게 하는 것으로부터 자신을 깨끗하게 지키는 선택과 결단이 필요했다. 고린도 시는 고대 그리이스 시대의 유명한 상업도시였으며, 무역항이었다. 고린도 시민의 대부분이 상인계급이었기 때문에 《부》를 숭배했고, 항구도시의 특성인 향락과 퇴폐, 그리고 자유분방함이 있었다. 이러한 풍토는 고린도 교회에도 자연스럽게 형성이 되어, 서로 당을 짓고, 세상의 부를 쫓는 것과 거짓 선생들의 가르침이 난무했다. 그러므로 고린도 교인들이 바른 신앙을 지키기 위해서는 날마다 새롭게 결단하고 올바른 신앙의 길을 선택하는 것이 필요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의 경험을 간증하면서 신실한 그리스도의 일꾼이 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야 하고, 고난과 인내의 길을 가야함을 말씀한다. 그렇다면 오늘의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1. 인내로 구원을 이루어야 한다
많은 사람들이 기독교를 마치 자신의 소망을 성취할 수 있는 좋은 도구처럼 생각한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길은 자신의 소망을 이룰 수 있고, 만사형통과 세상적 편안함을 누리는 오아시스가 아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베풀어지는 구원의 길은 완성에 이르기까지 많은 인내와 고난이 동반되는 길이다. 주님께서는 너희의 인내로 너희 영혼을 얻겠다고 하셨다./ 눅21:19, "너희의 인내로 너희 영혼을 얻으리라"
누구나 구경꾼이 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구경꾼은 아무 부담감도 없이 편안히 앉아서 눈 앞에 펼쳐지는 일들을 바라보기만 하면 된다. 말꾼이나 싸움꾼이 되는 것도 별로 어렵지 않다. 자기 마음대로 떠들고 닥치는 대로 부딪치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일꾼이 되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일꾼이 되려면 많은 수고와 인내와 희생이 따르기 때문이다. 특히 하나님의 일꾼이 된다는 것은 더더욱 힘든다. 왜냐하면 매사에 모든 목적을 하나님께 두어야 하고, 일하는 방법도 하나님의 뜻에 맞추어야 하기 때문이다. 급하다고 하나님보다 앞서서도 안 되고, 피곤하다고 멈추어 서서 쉴 수도 없고, 늘 하나님의 뜻에 보조를 맞추며 동행해야만 한다.
이렇게 하기 위하여 바울은 모든 일에 많이 견디는 것과 환난과 궁핍과 고난과 매맞음과 갇힘과 수고로움과 자지 못함과 먹지 못함과 깨끗함과 지식과 오래 참음과 자비함과 성령의 감화와 거짓이 없는 사랑과 진리의 말씀과 의의 병기로 무장하여 영광과 욕됨을 당하면서도 일꾼의 자세를 지켰다고 고백한다.
그래서 다른 사람이 보기에는 무명한 자 같고, 죽은 자 같고, 징계를 받는 자 같고, 근심하는 자 같고, 가난한 자 같고, 아무것도 없는 자 같았다. 그러나 실상은 그리스도 안에서 유명한 자이며, 오히려 영생하고, 항상 기뻐하고,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모든 것을 가진 사람인 것이다. 그래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 모든 것을 이루기까지 오래 참고 견디는 것이다.
--약1:4,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이처럼 구원의 길을 가는 오래 참음과 견딤의 생활도 하나님의 은혜로만 가능한 것이다.
2. 창조적인 신앙을 가져야 한다.
본문9,10절을 다시 한 번 읽어보자.
못생기고 말주변도 없는 천막 수리공인 바울이 어떻게 이처럼 위대한 능력자가 될 수 있었겠는가? 이는 오로지 하나님을 향하는 깊은 신앙 때문이었다. 다메섹을 향하는 길에서 주님을 만났으며, 광야에서 3년 동안 오직 하나님만을 바라보는 신앙의 단련이후 그의 생애는 완전히 바뀌었다. 자신의 의를 이루려고 그리스도를 핍박했던 그가 오직 하나님만을 의뢰하며 신뢰하는 생활로 새롭게 창조된 것이다.
하나님을 향하는 진실한 신앙은 삶을 재창조하는 능력을 가지게 한다. 불행을 행복으로, 슬픔을 기쁨으로, 근심을 찬송으로 바뀌게 한다.
--사61:3, "무릇 시온에서 슬퍼하는 자에게 화관을 주어 그 재를 대신하며, 희락의 기름으로 그 슬픔을 대신하며, 찬송의 옷으로 그 근심을 대신하시고, 그들로 의의 나무 곧 여호와의 심으신 바 그 영광을 나타낼 자라 일컬음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정복 왕인 「나폴레옹」의 학교 성적은 42명 중 42등이었다. 과학자 「뉴톤」은 뒤에서 둘째였다. 문학가인 「엘리어트」는 국어 시간에 글짓기를 너무 못해서 줄곧 야단을 맞았다. 발명가 「에디슨」은 학교를 전전해야 할 만큼 문제아였다. 「베토벤」은 음악가로서는 치명적인 귀머거리가 되었었다. 「화니 제인 크로스비」는 맹인이었으며, 온갖 질병을 앓았음에도 불구하고 9000여 편의 찬송시를 남겼다. 하나님을 향하는 진실한 신앙 앞에서는 어떠한 여건과 환경이라 할지라도 극복될 수 있는 것이다.
이처럼 환경과 여건을 극복하는 정신도 하나님의 은혜가 충만할 때 가능한 것이다. 우리가 전혀 불가능하게 보는 것에서도, 하나님의 은혜는 그 속에서 가능성과 가치를 보게 하신다. 가치를 발견하게 되면 새로운 창조가 이루어진다.
평범한 진흙도 도공의 손에 들어가면 전혀 새로운 것으로 재창조되게 된다. 도공은 평범한 흙에서 훌륭한 도기로서의 가치를 찾아내는 것이다. 우리가 평범하게 보는 나무에서 조각가는 훌륭한 조각품을 만들어낸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눈에 무가치하게 보이는 것에서부터 가치를 발견하고 재창조할 수 있는 능력을 성도들에게 주시는 것이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세인들의 멸시를 받던 갈릴리의 어부였으며, 세리였으며, 무가치한 존재들이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들의 가치를 찾아내셨고, 훌륭한 제자로 재창조하셨다. 이렇게 재창조 된 제자들은 역시 세상의 무가치한 것에서부터 가치를 창출해 내기 시작했다.
--행10:34-35, "베드로가 입을 열어 가로되, 내가 참으로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취하지 아니하시고, 각 나라 중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를 행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받으시는 줄 깨달았도다"
그렇다. 세상 사람들의 삶과 진부한 우리의 삶을 새롭게 재창출할 수 있는 능력이 곧 하나님의 충만하신 은혜로 말미암는다. 그러면 언제 그 은혜가 임하는가?
3. 지금 은혜를 구해야 한다.
바울은 이사야의 말씀을 인용하면서 은혜를 사모하고 구해야 할 때가 다름 아닌 《지금》이라고 강조한다. 본문 2절 하반절에서,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라고 했다.
이 말씀은 상황의 긴박성을 내포하고 있다. 구원을 이룰 수 있는 《때》는 항상 지속되지 않는다. 더 이상 구원의 기회가 없어지는 날, 곧 주님께서 재림하실 날은 생각하지 않은 때에 도적 같이 임할 것이다. 굳이 주님의 재림의 날이 아니라 하더라도, 사람에게 주어진 생명의 기회는 언제 끝이 날는지 아무도 알 수가 없다. 그러므로 은혜를 구할 때도 지금이요, 결단할 때도 지금인 것이다.
--히3:13, "오직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매일 피차 권면하여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의 유혹으로 강퍅케 됨을 면하라"/ 마6:34,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 한 날 괴로움은 그 날에 족하니라"/ 약4:14,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뇨?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 잠27:1, "너는 내일 일을 자랑하지 말라. 하루 동안에 무슨 일이 날는지 네가 알 수 없음이니라"
사람들은 내일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우리는 오늘이 있는 것처럼 내일도 항상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오늘만 날이냐?'라고 생각하면서, 내일로 미룰 때가 종종 있다.
어느 젊은 그리스도인이 자선 기관에서 일하다가 그만두고 나왔다. 그에게 친구들이 갑자기 사직한 사유를 물어보았다. 그랬더니 뜻밖에 이런 말을 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아무 것도 말 할 것이 없습니다. 다만 내 자신이 염려되어 나왔을 뿐입니다. 더 있다가는 뼈에 때가 묻겠기에, 피부에 때가 묻었을 때 그만 두어야 하겠다고 생각이 들어 나온 것입니다."
무슨 일에서도 손을 쓸만한 때에 손을 쓰고, 또 손을 뗄만한 때에 손을 거두는 것은 용기 있는 자기 결단이다.
지금은 우리가 하나님의 충만한 은혜를 사모해야 할 때이다. 어느 날 갑자기 기회가 끝나기 전에 지금 해야한다. 지금의 생명과 건강과 재능과 기회의 때가 있을 때에 은혜의 자리로 나아가자.
사모하는 자에게 만족하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충만하시기를 축원한다.
본문 말씀은 말세를 사는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것을 권면하고 있다. 이 '은혜'라고 하는 말은 우리가 신앙 생활을 하면서 많이 사용하는 말 중에서도 몇 손가락 안에 드는 것이다.
'은혜'를 성경 원어에서 《카리스》라고 하는데, '감사', '친절', '호의', '은혜'등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우리에게는 《카리스마》라는 말로 더 많이 알려져 있다. '카리스마'는 '카리스'에서 유래된 말로서, '호의를 베풀다', '은혜를 베풀다', '선물을 주다', '은사' 등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은혜'라는 말을 간단하게 정의할 수는 없지만,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에게 값없이 무제한으로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역사가 넘쳐흐르는 선물'이라고 할 수 있다.
사도 바울은 말세의 성도들에게 하나님께서 값없이 주시는 은혜를 충만하게 받으라고 권면하고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만드는 사람들이 많이 있기 때문이다. 본문 1절에의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는 말씀에서 "헛되이"라는 말은 '공허한'이라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은혜를 공허한 것으로 만들지 말라'는 의미가 된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으로 주어진 새로운 생명을 위하여 결단하고 선택하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의미이다.
고린도 교회는 영과 육신을 더럽게 하는 것으로부터 자신을 깨끗하게 지키는 선택과 결단이 필요했다. 고린도 시는 고대 그리이스 시대의 유명한 상업도시였으며, 무역항이었다. 고린도 시민의 대부분이 상인계급이었기 때문에 《부》를 숭배했고, 항구도시의 특성인 향락과 퇴폐, 그리고 자유분방함이 있었다. 이러한 풍토는 고린도 교회에도 자연스럽게 형성이 되어, 서로 당을 짓고, 세상의 부를 쫓는 것과 거짓 선생들의 가르침이 난무했다. 그러므로 고린도 교인들이 바른 신앙을 지키기 위해서는 날마다 새롭게 결단하고 올바른 신앙의 길을 선택하는 것이 필요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의 경험을 간증하면서 신실한 그리스도의 일꾼이 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야 하고, 고난과 인내의 길을 가야함을 말씀한다. 그렇다면 오늘의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1. 인내로 구원을 이루어야 한다
많은 사람들이 기독교를 마치 자신의 소망을 성취할 수 있는 좋은 도구처럼 생각한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길은 자신의 소망을 이룰 수 있고, 만사형통과 세상적 편안함을 누리는 오아시스가 아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베풀어지는 구원의 길은 완성에 이르기까지 많은 인내와 고난이 동반되는 길이다. 주님께서는 너희의 인내로 너희 영혼을 얻겠다고 하셨다./ 눅21:19, "너희의 인내로 너희 영혼을 얻으리라"
누구나 구경꾼이 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구경꾼은 아무 부담감도 없이 편안히 앉아서 눈 앞에 펼쳐지는 일들을 바라보기만 하면 된다. 말꾼이나 싸움꾼이 되는 것도 별로 어렵지 않다. 자기 마음대로 떠들고 닥치는 대로 부딪치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일꾼이 되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일꾼이 되려면 많은 수고와 인내와 희생이 따르기 때문이다. 특히 하나님의 일꾼이 된다는 것은 더더욱 힘든다. 왜냐하면 매사에 모든 목적을 하나님께 두어야 하고, 일하는 방법도 하나님의 뜻에 맞추어야 하기 때문이다. 급하다고 하나님보다 앞서서도 안 되고, 피곤하다고 멈추어 서서 쉴 수도 없고, 늘 하나님의 뜻에 보조를 맞추며 동행해야만 한다.
이렇게 하기 위하여 바울은 모든 일에 많이 견디는 것과 환난과 궁핍과 고난과 매맞음과 갇힘과 수고로움과 자지 못함과 먹지 못함과 깨끗함과 지식과 오래 참음과 자비함과 성령의 감화와 거짓이 없는 사랑과 진리의 말씀과 의의 병기로 무장하여 영광과 욕됨을 당하면서도 일꾼의 자세를 지켰다고 고백한다.
그래서 다른 사람이 보기에는 무명한 자 같고, 죽은 자 같고, 징계를 받는 자 같고, 근심하는 자 같고, 가난한 자 같고, 아무것도 없는 자 같았다. 그러나 실상은 그리스도 안에서 유명한 자이며, 오히려 영생하고, 항상 기뻐하고,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모든 것을 가진 사람인 것이다. 그래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 모든 것을 이루기까지 오래 참고 견디는 것이다.
--약1:4,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이처럼 구원의 길을 가는 오래 참음과 견딤의 생활도 하나님의 은혜로만 가능한 것이다.
2. 창조적인 신앙을 가져야 한다.
본문9,10절을 다시 한 번 읽어보자.
못생기고 말주변도 없는 천막 수리공인 바울이 어떻게 이처럼 위대한 능력자가 될 수 있었겠는가? 이는 오로지 하나님을 향하는 깊은 신앙 때문이었다. 다메섹을 향하는 길에서 주님을 만났으며, 광야에서 3년 동안 오직 하나님만을 바라보는 신앙의 단련이후 그의 생애는 완전히 바뀌었다. 자신의 의를 이루려고 그리스도를 핍박했던 그가 오직 하나님만을 의뢰하며 신뢰하는 생활로 새롭게 창조된 것이다.
하나님을 향하는 진실한 신앙은 삶을 재창조하는 능력을 가지게 한다. 불행을 행복으로, 슬픔을 기쁨으로, 근심을 찬송으로 바뀌게 한다.
--사61:3, "무릇 시온에서 슬퍼하는 자에게 화관을 주어 그 재를 대신하며, 희락의 기름으로 그 슬픔을 대신하며, 찬송의 옷으로 그 근심을 대신하시고, 그들로 의의 나무 곧 여호와의 심으신 바 그 영광을 나타낼 자라 일컬음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정복 왕인 「나폴레옹」의 학교 성적은 42명 중 42등이었다. 과학자 「뉴톤」은 뒤에서 둘째였다. 문학가인 「엘리어트」는 국어 시간에 글짓기를 너무 못해서 줄곧 야단을 맞았다. 발명가 「에디슨」은 학교를 전전해야 할 만큼 문제아였다. 「베토벤」은 음악가로서는 치명적인 귀머거리가 되었었다. 「화니 제인 크로스비」는 맹인이었으며, 온갖 질병을 앓았음에도 불구하고 9000여 편의 찬송시를 남겼다. 하나님을 향하는 진실한 신앙 앞에서는 어떠한 여건과 환경이라 할지라도 극복될 수 있는 것이다.
이처럼 환경과 여건을 극복하는 정신도 하나님의 은혜가 충만할 때 가능한 것이다. 우리가 전혀 불가능하게 보는 것에서도, 하나님의 은혜는 그 속에서 가능성과 가치를 보게 하신다. 가치를 발견하게 되면 새로운 창조가 이루어진다.
평범한 진흙도 도공의 손에 들어가면 전혀 새로운 것으로 재창조되게 된다. 도공은 평범한 흙에서 훌륭한 도기로서의 가치를 찾아내는 것이다. 우리가 평범하게 보는 나무에서 조각가는 훌륭한 조각품을 만들어낸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눈에 무가치하게 보이는 것에서부터 가치를 발견하고 재창조할 수 있는 능력을 성도들에게 주시는 것이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세인들의 멸시를 받던 갈릴리의 어부였으며, 세리였으며, 무가치한 존재들이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들의 가치를 찾아내셨고, 훌륭한 제자로 재창조하셨다. 이렇게 재창조 된 제자들은 역시 세상의 무가치한 것에서부터 가치를 창출해 내기 시작했다.
--행10:34-35, "베드로가 입을 열어 가로되, 내가 참으로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취하지 아니하시고, 각 나라 중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를 행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받으시는 줄 깨달았도다"
그렇다. 세상 사람들의 삶과 진부한 우리의 삶을 새롭게 재창출할 수 있는 능력이 곧 하나님의 충만하신 은혜로 말미암는다. 그러면 언제 그 은혜가 임하는가?
3. 지금 은혜를 구해야 한다.
바울은 이사야의 말씀을 인용하면서 은혜를 사모하고 구해야 할 때가 다름 아닌 《지금》이라고 강조한다. 본문 2절 하반절에서,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라고 했다.
이 말씀은 상황의 긴박성을 내포하고 있다. 구원을 이룰 수 있는 《때》는 항상 지속되지 않는다. 더 이상 구원의 기회가 없어지는 날, 곧 주님께서 재림하실 날은 생각하지 않은 때에 도적 같이 임할 것이다. 굳이 주님의 재림의 날이 아니라 하더라도, 사람에게 주어진 생명의 기회는 언제 끝이 날는지 아무도 알 수가 없다. 그러므로 은혜를 구할 때도 지금이요, 결단할 때도 지금인 것이다.
--히3:13, "오직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매일 피차 권면하여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의 유혹으로 강퍅케 됨을 면하라"/ 마6:34,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 한 날 괴로움은 그 날에 족하니라"/ 약4:14,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뇨?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 잠27:1, "너는 내일 일을 자랑하지 말라. 하루 동안에 무슨 일이 날는지 네가 알 수 없음이니라"
사람들은 내일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우리는 오늘이 있는 것처럼 내일도 항상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오늘만 날이냐?'라고 생각하면서, 내일로 미룰 때가 종종 있다.
어느 젊은 그리스도인이 자선 기관에서 일하다가 그만두고 나왔다. 그에게 친구들이 갑자기 사직한 사유를 물어보았다. 그랬더니 뜻밖에 이런 말을 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아무 것도 말 할 것이 없습니다. 다만 내 자신이 염려되어 나왔을 뿐입니다. 더 있다가는 뼈에 때가 묻겠기에, 피부에 때가 묻었을 때 그만 두어야 하겠다고 생각이 들어 나온 것입니다."
무슨 일에서도 손을 쓸만한 때에 손을 쓰고, 또 손을 뗄만한 때에 손을 거두는 것은 용기 있는 자기 결단이다.
지금은 우리가 하나님의 충만한 은혜를 사모해야 할 때이다. 어느 날 갑자기 기회가 끝나기 전에 지금 해야한다. 지금의 생명과 건강과 재능과 기회의 때가 있을 때에 은혜의 자리로 나아가자.
사모하는 자에게 만족하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충만하시기를 축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