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에 이르는 열심(로마서10:1-10)
작성자 배의신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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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00-11-06 13:47
★들어가는 말
오늘은 종교개혁 483주년 기념주일이다. 종교개혁이라고 하면 가장 먼저 떠올리는 이름이 「마틴 루터」(M.Luther)이다. 루터가 종교개혁의 깃발을 들기 160년 전인 1377년에 「존 위클리프」(John Wyclif, 1328-1384)가 이미 개혁을 진행하다가 교황에 의하여 정죄 되었고, 100여년 전인 1415년에는 「존 훗스」(John Huss, 1373-1415)가 뒤를 이어 개혁을 진행하다가 화형을 당하였다.
이처럼 이미 썩을 대로 썩어버린 중세의 교회의 타락상에 대하여 개혁을 외치며, 실제로 개혁을 단행하다가 죽임을 당한 개혁자들이 많이 있었다. 루터는 이들의 순교의 피를 바탕으로 삼아서 좀더 체계적으로 개혁을 시도하여 성공했을 뿐이다. 물론 하나님의 때가 이르렀기 때문인 것은 말할 것도 없다.
루터는 1517년 10월 31일 당시 부패한 카톨릭 교회를 대항하여 95개 조항에 이르는 반박문을 위텐베르그(Wittenberg) 교회당 게시판에 붙였다. 이 반박문은 11월 1일 만성절(All Saints Day)이면서 위텐베르그 교회당 창립기념일에 많은 사람이 오기 때문에 그 기회를 이용하여 토론하기 위함이었다. 제1조 '회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회개하라"고 외치셨는데, 이는 신자들의 전 생애가 회개되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렇게 시작하는 반박문은 종교개혁을 염두에 두고 붙인 것이 아니라, 단지 면죄부를 토론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 파장은 순식간에 온 유럽을 강타했고, 교황청을 흔들었다. 이러한 큰 파장을 일으킨 것은 그만큼 교회의 부패에 대한 성도들의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었음을 의미한다. 이 개혁 운동의 결과로 '로마 카톨릭 교회'(roman catholic church)로부터 protestant라고 이름 붙여진 '개혁교회'가 탄생한 것이다. protestant라는 이름을 붙인 이유는 카톨릭 교회에 대한 '저항자'였기 때문이다.
이제 그 종교개혁이 있은 지 500여 년이 지났다. 지금은 그 때 교회의 세속화와 부패에 대항하여 피 흘리며 싸웠던 터전에 세워진 그 개혁교회가 오히려 더 타락해 가고 있다. 교황과 성직자들의 타락을 대항했고, 세상의 금권 비방 타락 선거를 나무라던 그 교회가 총회장, 노회장, 심지어는 교회의 항존직을 뽑는 선거에서조차 금권, 비방, 타락, 고소, 고발을 일삼고 있다. 무엇인가 대단한 열성들이지만, 이는 잘못된 열심들이다.
아무리 오늘의 시대를 '상실의 시대'라고 하지만, 교회의 인간성 상실과 신앙심 상실은 정도를 지나치고 있다. 우리는 이러한 시대에 하나님의 부름 받은 사람들로서 종교개혁 정신을 생각하면서 다시 한 번 우리의 신앙 자세를 추슬러야 할 것이다.
종교개혁이 일어났던 중세 교회는 세상의 권력과 쾌락에 열심하고 있었다. 이 시간의 본문에는 하나님을 향한 올바른 열심이 어떤 것인지를 가르치고 있다. 진정한 인간은 피조물로서의 겸손과 순종을 갖추고,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진실한 삶의 열정을 가져야 한다. 즉, 피조물로서 창조주 하나님과의 관계 정립과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자연 세계를 다스리는 순수한 열정이 있어야 한다. 그러면 이러한 생각을 바탕으로 하고 본문으로 들어가 보자.
1. 성도들의 오해로 빗어진 잘못된 열심
'오해'라고 하는 것은 생각보다 심각한 결과를 초래할 때가 많이 있다. 특히 성도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하여 '오해'할 때에, 무서운 '이단'으로 돌변하게 되기도 한다. 그러면 본문에 나타나는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에 대하여 오해하고 있는 것을 보자.
본문1-3절을 다시 읽어보자.
유대인들은 여호와 하나님을 唯一神으로 섬겼다. 이들이 하나님을 唯一神으로 認識하고 있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주신 율법을 해석하는 과정에서 비롯되었다.
- 신6:4,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하나인 여호와시니…"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율법은 신앙의 척도였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은 율법을 잘 지키는 것이 하나님을 잘 섬기는 것으로 생각했다. 그래서 그들은 율법을 지키는 일에 온 마음을 쏟았던 것이다. 이러한 열심 있는 마음 자세는 바람직한 것이었다. 이들에게 있는 열심은 좋은 것이었지만, 그 열심이 목표를 벗어났기 때문에 잘못되었다는 말이다. 즉, 명분은 "하나님을 위한다"는 것이었으나, 실상은 자신들의 욕구를 위해서 열심을 내었던 것이다. 예수님께서도 이러한 사실을 깊이 있게 다루셨다.
- 막7:5-9, "이에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예수께 묻되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장로들의 유전을 준행치 아니하고 부정한 손으로 떡을 먹나이까? 가라사대, 이사야가 너희 외식하는 자에 대하여 잘 예언하였도다. 기록하였으되,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 하였느니라. 너희가 하나님의 계명은 버리고 사람의 유전을 지키느니라. 또 가라사대, 너희가 너희 유전을 지키려고 하나님의 계명을 잘 저버리는도다"/ 마7:22,23,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본문5절 말씀처럼, 율법에는 분명한 목적이 있었다. 그러나, 율법대로 살려고 노력했던 경건한 성도들은, 율법을 지키려고 하면 할수록 문제가 발생하는 것을 발견했다. 율법으로는 의롭게 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불완전한 인간이 완전하신 하나님의 법을 온전하게 지킬 수가 없었다. 율법을 완전하게 지키는 것이 어렵게 되자, 사람들은 두 가지로 나뉘어졌다.
한 부류는 세리처럼 율법을 지켜서 자신이 의롭게 된다는 것을 포기하고 하나님의 긍휼 하심을 의지하는 사람들이다.
- 눅18:13,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가로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다른 한 부류는 외식적인 형태로 변질되어 가는 사람들이다. 곤 바리새인이나 서기관, 율법사들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다. 율법을 향한 이들의 열심은 시간이 경과함에 따라서 변질되기 시작했다. 율법을 지키기 힘들어지자 이들은 율법을 사람의 말로 해설한 일종의 율법 해설서인 {토라}를 만들었다. 이는 좀더 쉽게 지켜보고자 하는 의도였다. 이것이 {장로의 유전}이라고 부르는 책이다. 하지만, 쉽게 지키려 하던 그들에게는 오히려 지켜야 할 법이 더욱 늘어나게 된 것이다. 점차 늘어가는 [토라]를 감당할 길이 없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점점 […척]하는 외식적인 행위로 바뀌어 갔다. …인척 하는 것은 사람의 눈을 의식한 행위이다.
- 본문3절
지금도 장로의 유전집인 {토라}를 지키는 사람들은 안식일이면 <전기 스위치>도 올리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고 한다. 꼭 올려야 될 경우에는 이방인을 사서 올리게 한다. 바울이 이런 율법주의자의 전형적인 인물이었다. 그는 스데반을 죽이는 일에 증인을 자청했고, 그리스도인을 핍박하는데 최고 선두에 섰던 사람이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잘못된 열심을 미리 지적하셨다.
- 요16:2,3, "사람들이 너희를 출회할 뿐 아니라, 때가 이르면 무릇 너희를 죽이는 자가 생각하기를, '이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예라' 하리라. 저희가 이런 일을 할 것은 아버지와 나를 알지 못함이라"
이러한 신앙을 바울은 본문에서 '지식을 쫓지 않은 열심'이라고 했다. 즉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하면서 자신이 보고들은 경험을 바탕으로 한 인간적인 열심이라는 것이다. 이들은 하나님의 의에 대해서는 모른다고 말한다(3절).
하나님의 의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다. 4절에 보면, '그리스도는 모든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에 마침이 되셨다'고 하셨다. 예수님은 인간들이 지키지 못하는 율법을 모두 이루셔서 그 율법에 종지부를 찍으셨다. 율법의 가장 핵심이 성전이다. 이는 거룩하지 못한 사람은 결코 하나님 앞에 나올 수 없도록 한 것이다. 그런데, 이 성전의 거룩하고 비밀스러운 장소인 지성소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공개가 되었다. 즉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셔서 죽으심으로 지성소를 가리고 있던 휘장이 위로부터 찢어져 길이 열린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기 희생으로 율법을 이루신 예수님의 공로의 믿으면 되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의이다. 즉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예수님의 공로를 믿고 의지하는 믿음을 보시고 의롭다고 여겨주시는 것이다. 이것이 '칭의'라는 것이다.
이와 같이 우리의 열심은 하나님의 말씀을 바탕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이어야 한다. 나의 뜻과 계획을 위한 열심은 결코 하나님의 의를 이룰 수가 없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의에 이르는 열심은 어떤 것인가?
2. 하나님의 의에 이르는 열심의 조건
본문9-10절을 보자.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열심 있는 삶의 조건을 보여주신다.
첫 번째 조건은 시인하는 삶이다.
시인하는 삶이란? 입으로나 생활로나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임을 숨기지 않음을 말한다. 많은 성도들이 자신이 그리스도 인임을 부끄러워하는 것을 본다. 또는 사람들 앞에서 자신이 그리스도 인임을 나타내기를 꺼린다는 말이다.
- 막8:38, "누구든지 이 음란하고 죄 많은 세대에서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 인자도 아버지의 영광으로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올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러워하리라"
예전에 일제 치하에서 신사 참배 문제로 교회가 떠들썩할 때, 신사 참배를 허락한 지도자들의 변명은 '마음으로만 하나님을 부인하지 않으면 된다.'라는 것이었다. 여러분도 옳다고 생각하는가? 몸은 우상에게 절하면서 마음은 하나님을 향한다고? 그렇다면 순교자들은 모두 목숨을 헛되게 버린 어리석은 사람들인가? 이는 자기 기만이다.
여러분의 신앙을 입으로 또는 생활로 표현하기를 힘쓰라. 입으로 시인하는 것은 진리를 증거하는 전도가 되며, 생활로 시인하는 것은 자신의 믿음을 표현하는 증거가 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외적으로 나타내는 것은 사람들 앞에서의 하나님을 시인하는 것이다.
두 번째 조건은 믿음의 삶이다.
여기서의 믿음은 하나님께 대한 완전한 믿음을 말한다. 즉, 하나님 말씀에 대한 일부를 믿는 것이 아니라, 전부를 믿는 것이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 자신의 구세주이심을 마음으로나 생활로나 믿는 것이다.
만일 입으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면서, 생활 속에서 근심하고, 염려하고, 두려워하고 의심한다면, 이는 실제로 믿음이 없는 것이다.
- 약2:14,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이러한 믿음이 없이 행하는 모든 것이 죄이다.
- 롬14:23, "의심하고 먹는 자는 정죄되었나니 이는 믿음으로 좇아 하지 아니한 연고라. 믿음으로 좇아 하지 아니하는 모든 것이 죄니라"
운동 경기에는 따라야 할 규율이 있다. 그 규율을 어긴다면 메달을 딸 수도 없을 뿐만 아니라 혹시 땄다고 하더라도 곧 빼앗기게 된다. 이처럼, 믿음과 그 믿음을 표현하는 입술과 생활의 시인이 따르는 것이 구원의 조건이자, 하나님의 의를 이루는 진정한 열심이다. 여러분의 삶에서 항상 믿음을 바탕으로 주님을 시인하는 삶으로써 하나님의 의를 이루시기를 축원한다.
오늘은 종교개혁 483주년 기념주일이다. 종교개혁이라고 하면 가장 먼저 떠올리는 이름이 「마틴 루터」(M.Luther)이다. 루터가 종교개혁의 깃발을 들기 160년 전인 1377년에 「존 위클리프」(John Wyclif, 1328-1384)가 이미 개혁을 진행하다가 교황에 의하여 정죄 되었고, 100여년 전인 1415년에는 「존 훗스」(John Huss, 1373-1415)가 뒤를 이어 개혁을 진행하다가 화형을 당하였다.
이처럼 이미 썩을 대로 썩어버린 중세의 교회의 타락상에 대하여 개혁을 외치며, 실제로 개혁을 단행하다가 죽임을 당한 개혁자들이 많이 있었다. 루터는 이들의 순교의 피를 바탕으로 삼아서 좀더 체계적으로 개혁을 시도하여 성공했을 뿐이다. 물론 하나님의 때가 이르렀기 때문인 것은 말할 것도 없다.
루터는 1517년 10월 31일 당시 부패한 카톨릭 교회를 대항하여 95개 조항에 이르는 반박문을 위텐베르그(Wittenberg) 교회당 게시판에 붙였다. 이 반박문은 11월 1일 만성절(All Saints Day)이면서 위텐베르그 교회당 창립기념일에 많은 사람이 오기 때문에 그 기회를 이용하여 토론하기 위함이었다. 제1조 '회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회개하라"고 외치셨는데, 이는 신자들의 전 생애가 회개되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렇게 시작하는 반박문은 종교개혁을 염두에 두고 붙인 것이 아니라, 단지 면죄부를 토론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 파장은 순식간에 온 유럽을 강타했고, 교황청을 흔들었다. 이러한 큰 파장을 일으킨 것은 그만큼 교회의 부패에 대한 성도들의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었음을 의미한다. 이 개혁 운동의 결과로 '로마 카톨릭 교회'(roman catholic church)로부터 protestant라고 이름 붙여진 '개혁교회'가 탄생한 것이다. protestant라는 이름을 붙인 이유는 카톨릭 교회에 대한 '저항자'였기 때문이다.
이제 그 종교개혁이 있은 지 500여 년이 지났다. 지금은 그 때 교회의 세속화와 부패에 대항하여 피 흘리며 싸웠던 터전에 세워진 그 개혁교회가 오히려 더 타락해 가고 있다. 교황과 성직자들의 타락을 대항했고, 세상의 금권 비방 타락 선거를 나무라던 그 교회가 총회장, 노회장, 심지어는 교회의 항존직을 뽑는 선거에서조차 금권, 비방, 타락, 고소, 고발을 일삼고 있다. 무엇인가 대단한 열성들이지만, 이는 잘못된 열심들이다.
아무리 오늘의 시대를 '상실의 시대'라고 하지만, 교회의 인간성 상실과 신앙심 상실은 정도를 지나치고 있다. 우리는 이러한 시대에 하나님의 부름 받은 사람들로서 종교개혁 정신을 생각하면서 다시 한 번 우리의 신앙 자세를 추슬러야 할 것이다.
종교개혁이 일어났던 중세 교회는 세상의 권력과 쾌락에 열심하고 있었다. 이 시간의 본문에는 하나님을 향한 올바른 열심이 어떤 것인지를 가르치고 있다. 진정한 인간은 피조물로서의 겸손과 순종을 갖추고,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진실한 삶의 열정을 가져야 한다. 즉, 피조물로서 창조주 하나님과의 관계 정립과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자연 세계를 다스리는 순수한 열정이 있어야 한다. 그러면 이러한 생각을 바탕으로 하고 본문으로 들어가 보자.
1. 성도들의 오해로 빗어진 잘못된 열심
'오해'라고 하는 것은 생각보다 심각한 결과를 초래할 때가 많이 있다. 특히 성도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하여 '오해'할 때에, 무서운 '이단'으로 돌변하게 되기도 한다. 그러면 본문에 나타나는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에 대하여 오해하고 있는 것을 보자.
본문1-3절을 다시 읽어보자.
유대인들은 여호와 하나님을 唯一神으로 섬겼다. 이들이 하나님을 唯一神으로 認識하고 있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주신 율법을 해석하는 과정에서 비롯되었다.
- 신6:4,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하나인 여호와시니…"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율법은 신앙의 척도였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은 율법을 잘 지키는 것이 하나님을 잘 섬기는 것으로 생각했다. 그래서 그들은 율법을 지키는 일에 온 마음을 쏟았던 것이다. 이러한 열심 있는 마음 자세는 바람직한 것이었다. 이들에게 있는 열심은 좋은 것이었지만, 그 열심이 목표를 벗어났기 때문에 잘못되었다는 말이다. 즉, 명분은 "하나님을 위한다"는 것이었으나, 실상은 자신들의 욕구를 위해서 열심을 내었던 것이다. 예수님께서도 이러한 사실을 깊이 있게 다루셨다.
- 막7:5-9, "이에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예수께 묻되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장로들의 유전을 준행치 아니하고 부정한 손으로 떡을 먹나이까? 가라사대, 이사야가 너희 외식하는 자에 대하여 잘 예언하였도다. 기록하였으되,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 하였느니라. 너희가 하나님의 계명은 버리고 사람의 유전을 지키느니라. 또 가라사대, 너희가 너희 유전을 지키려고 하나님의 계명을 잘 저버리는도다"/ 마7:22,23,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본문5절 말씀처럼, 율법에는 분명한 목적이 있었다. 그러나, 율법대로 살려고 노력했던 경건한 성도들은, 율법을 지키려고 하면 할수록 문제가 발생하는 것을 발견했다. 율법으로는 의롭게 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불완전한 인간이 완전하신 하나님의 법을 온전하게 지킬 수가 없었다. 율법을 완전하게 지키는 것이 어렵게 되자, 사람들은 두 가지로 나뉘어졌다.
한 부류는 세리처럼 율법을 지켜서 자신이 의롭게 된다는 것을 포기하고 하나님의 긍휼 하심을 의지하는 사람들이다.
- 눅18:13,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가로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다른 한 부류는 외식적인 형태로 변질되어 가는 사람들이다. 곤 바리새인이나 서기관, 율법사들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다. 율법을 향한 이들의 열심은 시간이 경과함에 따라서 변질되기 시작했다. 율법을 지키기 힘들어지자 이들은 율법을 사람의 말로 해설한 일종의 율법 해설서인 {토라}를 만들었다. 이는 좀더 쉽게 지켜보고자 하는 의도였다. 이것이 {장로의 유전}이라고 부르는 책이다. 하지만, 쉽게 지키려 하던 그들에게는 오히려 지켜야 할 법이 더욱 늘어나게 된 것이다. 점차 늘어가는 [토라]를 감당할 길이 없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점점 […척]하는 외식적인 행위로 바뀌어 갔다. …인척 하는 것은 사람의 눈을 의식한 행위이다.
- 본문3절
지금도 장로의 유전집인 {토라}를 지키는 사람들은 안식일이면 <전기 스위치>도 올리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고 한다. 꼭 올려야 될 경우에는 이방인을 사서 올리게 한다. 바울이 이런 율법주의자의 전형적인 인물이었다. 그는 스데반을 죽이는 일에 증인을 자청했고, 그리스도인을 핍박하는데 최고 선두에 섰던 사람이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잘못된 열심을 미리 지적하셨다.
- 요16:2,3, "사람들이 너희를 출회할 뿐 아니라, 때가 이르면 무릇 너희를 죽이는 자가 생각하기를, '이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예라' 하리라. 저희가 이런 일을 할 것은 아버지와 나를 알지 못함이라"
이러한 신앙을 바울은 본문에서 '지식을 쫓지 않은 열심'이라고 했다. 즉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하면서 자신이 보고들은 경험을 바탕으로 한 인간적인 열심이라는 것이다. 이들은 하나님의 의에 대해서는 모른다고 말한다(3절).
하나님의 의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다. 4절에 보면, '그리스도는 모든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에 마침이 되셨다'고 하셨다. 예수님은 인간들이 지키지 못하는 율법을 모두 이루셔서 그 율법에 종지부를 찍으셨다. 율법의 가장 핵심이 성전이다. 이는 거룩하지 못한 사람은 결코 하나님 앞에 나올 수 없도록 한 것이다. 그런데, 이 성전의 거룩하고 비밀스러운 장소인 지성소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공개가 되었다. 즉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셔서 죽으심으로 지성소를 가리고 있던 휘장이 위로부터 찢어져 길이 열린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기 희생으로 율법을 이루신 예수님의 공로의 믿으면 되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의이다. 즉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예수님의 공로를 믿고 의지하는 믿음을 보시고 의롭다고 여겨주시는 것이다. 이것이 '칭의'라는 것이다.
이와 같이 우리의 열심은 하나님의 말씀을 바탕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이어야 한다. 나의 뜻과 계획을 위한 열심은 결코 하나님의 의를 이룰 수가 없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의에 이르는 열심은 어떤 것인가?
2. 하나님의 의에 이르는 열심의 조건
본문9-10절을 보자.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열심 있는 삶의 조건을 보여주신다.
첫 번째 조건은 시인하는 삶이다.
시인하는 삶이란? 입으로나 생활로나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임을 숨기지 않음을 말한다. 많은 성도들이 자신이 그리스도 인임을 부끄러워하는 것을 본다. 또는 사람들 앞에서 자신이 그리스도 인임을 나타내기를 꺼린다는 말이다.
- 막8:38, "누구든지 이 음란하고 죄 많은 세대에서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 인자도 아버지의 영광으로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올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러워하리라"
예전에 일제 치하에서 신사 참배 문제로 교회가 떠들썩할 때, 신사 참배를 허락한 지도자들의 변명은 '마음으로만 하나님을 부인하지 않으면 된다.'라는 것이었다. 여러분도 옳다고 생각하는가? 몸은 우상에게 절하면서 마음은 하나님을 향한다고? 그렇다면 순교자들은 모두 목숨을 헛되게 버린 어리석은 사람들인가? 이는 자기 기만이다.
여러분의 신앙을 입으로 또는 생활로 표현하기를 힘쓰라. 입으로 시인하는 것은 진리를 증거하는 전도가 되며, 생활로 시인하는 것은 자신의 믿음을 표현하는 증거가 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외적으로 나타내는 것은 사람들 앞에서의 하나님을 시인하는 것이다.
두 번째 조건은 믿음의 삶이다.
여기서의 믿음은 하나님께 대한 완전한 믿음을 말한다. 즉, 하나님 말씀에 대한 일부를 믿는 것이 아니라, 전부를 믿는 것이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 자신의 구세주이심을 마음으로나 생활로나 믿는 것이다.
만일 입으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면서, 생활 속에서 근심하고, 염려하고, 두려워하고 의심한다면, 이는 실제로 믿음이 없는 것이다.
- 약2:14,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이러한 믿음이 없이 행하는 모든 것이 죄이다.
- 롬14:23, "의심하고 먹는 자는 정죄되었나니 이는 믿음으로 좇아 하지 아니한 연고라. 믿음으로 좇아 하지 아니하는 모든 것이 죄니라"
운동 경기에는 따라야 할 규율이 있다. 그 규율을 어긴다면 메달을 딸 수도 없을 뿐만 아니라 혹시 땄다고 하더라도 곧 빼앗기게 된다. 이처럼, 믿음과 그 믿음을 표현하는 입술과 생활의 시인이 따르는 것이 구원의 조건이자, 하나님의 의를 이루는 진정한 열심이다. 여러분의 삶에서 항상 믿음을 바탕으로 주님을 시인하는 삶으로써 하나님의 의를 이루시기를 축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