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가지고 있는 것(빌립보서4:13)
작성자 배의신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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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00-12-23 22:42
♣들어가는 말
대강절에 생각하는 말씀 시리즈로, 예수님을 깊이 생각해보는 네 번째 시간입니다. 이 시간에는 그리스도인의 능력의 원천이 어디에서 나오는 것인지에 대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자 합니다.
여러분은 자신 속에 성령께서 계심을 믿습니까? 아마 아동부 어린이들에게, "예수님이 어디계셔요?"라고 묻는다면, 절반 이상이 "내 마음 속에요!"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우리는 기독교를 접하면서,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을 내 마음에 영접하는 것'이라고 수도 없이 들어왔습니다. 그래서 어느 정도 신앙 생활을 해 온 사람이라면, 거의 기계적으로 '하나님이 내 안에 계신다'고 고백을 합니다.
그러나 실상은 '하나님이 내 안에 계신다'는 사실과 '하나님이 내 안에 계시는 것을 느낀다'는 감정과 혼동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예배가 아주 은혜스럽다고 느꼈을 때, 사람들은 흔히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예배였다'고 감격스러워 합니다. 그렇다면, 예배가 은혜스럽지 않다고 느꼈을 때, 하나님은 그 예배 중에 함께 하지 않으셨다는 것인데, 과연 그렇습니까? 또는, '이 교회에는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느꼈습니다.' 라고 말한다면, 평상시에는 하나님이 어디에 계셨습니까?
하나님은 은혜롭게 예배하는 곳에만 계십니까? 아니면 부르짖어 기도하시는 곳에만 계십니까? 그렇다면 초라하고 가난한 집에서 드리는 가정 예배에는 하나님이 계시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나 혼자 있을 때나, 많은 사람이 있을 때나, 은혜로운 예배 처소에나, 은혜롭게 느끼지 못하는 예배 처소에나, 누구를 만날 때에나, 슬픔으로 가슴이 무너지는 때에나, 언제든지 어느 곳에서든지 하나님은 성도들과 함께 계십니다. 심지어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의 죽음조차도 귀하게 여기신다고 하셨습니다.
- 시116:15, "성도의 죽는 것을 여호와께서 귀중히 보시는도다"
이렇게 우리는 하나님이 항상 함께 하시는 실제 상황을, 확실하지 않은 자신의 느낌에 의존하려 합니다. 이는 마치 맑은 강 한 가운데서 목이 말라 애타하는 것과 같습니다. 영원히 목마르지 않게 하는 생명의 샘물을 소유하고 있는 성도들이 늘 무엇인가 갈급해 하고 있습니다.
탕자 비유에는 탕자인 둘째 아들과 착실하게 아버지를 돕고 있는 맏아들이 있습니다. 탕자가 돌아 왔을 때, 아버지는 그를 위해 살진 송아지를 잡고 성대한 잔치를 베풀었습니다. 마침 일터에서 돌아오던 맏아들이 집에서 들려오는 시끌벅적한 사람들 소리와 노래 소리를 들었습니다. 곧 그 소동이 동생이 돌아와 잔치를 베푸는 것임을 알았습니다. 맏아들은 화가 나서 집으로 들어가지도 않았습니다. 아버지가 그 사실을 알고 밖으로 나와 맏아들을 달랬습니다. 맏아들은, "아버지, 저는 아버지와 내내 함께 있었지만 제 친구들과 잔치하도록 염소 새끼 한 마리 안 주셨지 않습니까? 그런데 유산을 챙겨서 몽땅 까먹고 돌아 온 저 망나니를 위해서 살진 송아지를 잡고 잔치를 벌립니까?" 하며 불만을 토로했습니다. 그 때 아버지는, "얘야,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었고 내 것은 무엇이든지 다 네 것이 아니냐!"라고 하셨습니다. 즉 '네가 잔치를 벌리고 싶거든 얼마든지 하려무나. 이 집의 모든 것이 다 네 것이지 않느냐?'라고 하신 것입니다.
맏아들은 모든 것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잔치를 벌이든 무엇을 하든지 얼마든지 허용되어 있었습니다. 다만 사용하지를 못했을 뿐입니다. 맏아들에게 모든 것을 허용하신 하나님은 우리에게도 아버지이십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모든 것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다만 내가 소유한 것을 사용하면 되는 것입니다.
1. 그러면 내게 주어진 것을 어떻게 사용해야 합니까?
우리는 무엇이 부족한 사람처럼 자꾸만 하나님께 요구하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 속에는 모든 것의 주인이신 하나님이 계십니다. 즉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사람에게 부족함이란 없습니다. 다만 내가 소유하고 있는 것을 어떻게 사용할 것이냐가 문제입니다.
본문을 함께 암송해 봅시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믿습니까? 내게 능력 주시는 자가 지금 어디에 계십니까? 지금 내 안에 계십니다. 그리고 나는 주님 안에 있습니다. 왜냐하면, 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받은 사람은 이미 주님 안에 있는 것입니다. 요15:10,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 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
그러므로 우리는 '내가 어떻게 하면 하나님으로부터 많은 것을 얻어낼 수 있을까!' 라고 고민하고 기도할 것이 아닙니다. 진짜 기도하고 배워야 할 것은 '내게 주어진 것을 어떻게 사용할 수 있을까!'라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하나님, 다른 사람을 사랑하고 도울 수 있도록 사랑과 물질을 보다 많이 주십시오'라고 기도한다고 합시다. 이 기도는 성경적이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미 충분한 사랑도 물질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혹 이 말에 의의를 제기하고 싶은 분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가서 생각해 봅시다.
내 안에는 모든 것으로 충만하신 성령께서 계십니다. 뿐만 아니라 성령께서는 모든 환경과 여건을 조성하시고 인도하시는 분이십니다.
- 고전10:26, "이는 땅과 거기 충만한 것이 주의 것임이니라"/ 엡1:23,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의 충만이니라" / 골2:10, "너희도 그 안에서 충만하여졌으니 그는 모든 정사와 권세의 머리시라"
이 사실에는 의의가 없습니까? 그렇습니다. 우리는 이미 충만한 사랑도 있고, 현재 하나님 안에서 충만한 물질도 있습니다. 주의할 것은 내가 생각하는 충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우리가 해야 할 것은 내 속에 있는 것을 충분하게 사용하는 것입니다. 만약 내가 무엇을 하고자 하지만 도무지 없는 것이 있을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내게 허락하지 않은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내가 할 수 없는 것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내게 허락하지 않은 능력을 나타내라고 요구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누구에게나 모든 것을 허락하지는 않으셨습니다. 우리 몸에 많은 기관들이 있지만 각자의 역할은 다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성도들 각자에게 재능과 은사를 주셨습니다. 성도는 이 은사를 서로 합함으로서 교회를 세워 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은사론입니다.
- 롬12:6,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받은 은사가 각각 다르니…" / 고전7:7, "나는 모든 사람이 나와 같기를 원하노라. 그러나 각각 하나님께 받은 자기의 은사가 있으니 하나는 이러하고 하나는 저러하니라" / 고전12:11-12, "이 모든 일은 같은 한 성령이 행하사 그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눠 주시느니라. 몸은 하나인데 많은 지체가 있고 몸의 지체가 많으나 한 몸임과 같이 그리스도도 그러하니라"
그러므로 지금 내게 주어진 것을 십분 활용하도록 힘쓰십시오. 내게 주어진 것이 보잘것없는 것이라고 사용하지 않는다면, 그것마저 빼앗길 것입니다. 달란트 비유에서 한 달란트 받은 사람과 므나의 비유에서 주어진 한 므나를 사용하지 않았던 사람의 결과를 알고 계시지요? 그들은 주어진 것을 사용하지 않으므로 인하여 그 있던 것까지 빼앗기고, 결국 쫓겨났습니다.
여러분, 주어지지 않은 것을 얻으려고 애쓰기 보다 주어진 것에 충실하십시오. 더 풍성하게 채우시는 것은 하나님께서 하십니다.
2. 내게 주어진 것을 가장 효과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방법을 따르십시오
하나님께서 내게 허락하신 것들을 가장 효과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방법은 성령 안에서 걷는 것입니다. 성령 안에서 행하는 것에 대하여는 지난 시간에 이미 말씀드렸습니다. 다시 한 번 요약해서 말씀드리면, 성령 안에서 걷는다는 것은 계속적으로 성령의 임재를 의식하는 것입니다. 즉 성령께서 나와 함께 계신다는 것을 항상 생각하라는 말씀입니다.
성령님은 내가 지난날의 죄악을 회개하고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는 순간 내 속에 들어오십니다. 그리고 항상 나와 함께 하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자주 하나님께서 내 속에 임재해 주실 것을 구합니다. 이는 이미 임재해 계시는 하나님을 다시 임재해 달라고 요청하는 과실을 범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런 과실을 범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임재를 감각적으로 느끼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이를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초대 교회의 성령 임재 사실을 준비해 두셨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후, 제자와 성도들은 예수님께서 약속하신 성령을 받기 위하여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 기도에 열중하고 있었습니다. 그 때 성령께서 성도들에게 오셨습니다. 성경은 성령께서 처음으로 사람들에게 임재하시는 모습을 그리고 있습니다. 성령은 바람처럼 오셔서 불의 혀 같은 모습으로 사람들의 위에 나타나셨습니다. 그렇다고 불의 혀 같은 모습이 성령의 형상은 아닙니다. 처음으로 사람들에게 임하시는 성령님을 깨닫고 믿게 하기 위한 하나님의 배려였습니다. 곧 불의 혀 같은 형상이 사람의 머리 위에 나타난 것은 성령께서 오셨다는 표징이었습니다. 광야에서 불기둥과 구름 기둥으로 하나님의 임재를 나타내셨듯이 말입니다.
- 행2:2-4,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저희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불의 혀같이 갈라지는 것이 저희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임하여 있더니,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 민14:14, "이 땅 거민에게 고하리이다. 주 여호와께서 이 백성 중에 계심을 그들도 들었으니, 곧 주 여호와께서 대면하여 보이시며, 주의 구름이 그들 위에 섰으며, 주께서 낮에는 구름기둥 가운데서 밤에는 불기둥 가운데서 그들 앞에서 행하시는 것이니이다"
이처럼 성령께서 성도들에게 임재하신 확실한 사실 앞에서, 그 사실을 느끼지 못하거나 불신하는 대는 이유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후, 제자들은 기대하던 모든 희망이 사라져서 실의에 빠져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그 중에 엠마오가 고향인 두 제자도 역시 실의에 빠져 고향으로 가고 있었습니다. 주님께서 부활하셨다는 소문을 들었지만, 그들은 믿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길을 가는 도중에 어떤 분이 그들과 합류했습니다. 그분은 제자들의 실망에 찬 이야기를 듣고 계셨습니다. 그 제자들은 그 분이 주님이신 줄 전혀 깨닫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은 어리석은 제자들에게 성경 말씀을 풀이해 주셨지만 제자들은 여전히 예수님을 알지 못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제자들이 주님을 느끼지 못한 이유를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 눅24:15-16, "저희가 서로 이야기하며 문의할 때에 예수께서 가까이 이르러 저희와 동행하시나, 저희의 눈이 가리워져서 그 인줄 알아보지 못하거늘"/ 24:21, "우리는 이 사람이 이스라엘을 구속할 자라고 바랐노라…"
제자들은 자신의 욕망과 기대로 인하여 영적인 눈이 가려졌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성도가 하나님의 말씀에 믿음을 걸지 못하고, 자신의 욕망과 기대에 충실하게 되면 영적인 감각이 마비됩니다. 성령 안에서 걷는다는 것은 내 안에 거하셔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는 성령의 인도하심에 깨어 있는 것입니다.
항상 깨어서 성령님과 함께 걸을 수 있는 가장 쉬운 방법은, 옆 사람과 대화하듯이 그렇게 이야기를 나누십시오. 이것이 곧 생활 속의 기도입니다. 이렇게 할 때 성령의 능력이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의 모든 삶이 성령님과 함께 걷는 생활이 되셔서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허락하신 것을 충분하게 사용하시기를 축원합니다.
대강절에 생각하는 말씀 시리즈로, 예수님을 깊이 생각해보는 네 번째 시간입니다. 이 시간에는 그리스도인의 능력의 원천이 어디에서 나오는 것인지에 대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자 합니다.
여러분은 자신 속에 성령께서 계심을 믿습니까? 아마 아동부 어린이들에게, "예수님이 어디계셔요?"라고 묻는다면, 절반 이상이 "내 마음 속에요!"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우리는 기독교를 접하면서,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을 내 마음에 영접하는 것'이라고 수도 없이 들어왔습니다. 그래서 어느 정도 신앙 생활을 해 온 사람이라면, 거의 기계적으로 '하나님이 내 안에 계신다'고 고백을 합니다.
그러나 실상은 '하나님이 내 안에 계신다'는 사실과 '하나님이 내 안에 계시는 것을 느낀다'는 감정과 혼동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예배가 아주 은혜스럽다고 느꼈을 때, 사람들은 흔히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예배였다'고 감격스러워 합니다. 그렇다면, 예배가 은혜스럽지 않다고 느꼈을 때, 하나님은 그 예배 중에 함께 하지 않으셨다는 것인데, 과연 그렇습니까? 또는, '이 교회에는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느꼈습니다.' 라고 말한다면, 평상시에는 하나님이 어디에 계셨습니까?
하나님은 은혜롭게 예배하는 곳에만 계십니까? 아니면 부르짖어 기도하시는 곳에만 계십니까? 그렇다면 초라하고 가난한 집에서 드리는 가정 예배에는 하나님이 계시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나 혼자 있을 때나, 많은 사람이 있을 때나, 은혜로운 예배 처소에나, 은혜롭게 느끼지 못하는 예배 처소에나, 누구를 만날 때에나, 슬픔으로 가슴이 무너지는 때에나, 언제든지 어느 곳에서든지 하나님은 성도들과 함께 계십니다. 심지어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의 죽음조차도 귀하게 여기신다고 하셨습니다.
- 시116:15, "성도의 죽는 것을 여호와께서 귀중히 보시는도다"
이렇게 우리는 하나님이 항상 함께 하시는 실제 상황을, 확실하지 않은 자신의 느낌에 의존하려 합니다. 이는 마치 맑은 강 한 가운데서 목이 말라 애타하는 것과 같습니다. 영원히 목마르지 않게 하는 생명의 샘물을 소유하고 있는 성도들이 늘 무엇인가 갈급해 하고 있습니다.
탕자 비유에는 탕자인 둘째 아들과 착실하게 아버지를 돕고 있는 맏아들이 있습니다. 탕자가 돌아 왔을 때, 아버지는 그를 위해 살진 송아지를 잡고 성대한 잔치를 베풀었습니다. 마침 일터에서 돌아오던 맏아들이 집에서 들려오는 시끌벅적한 사람들 소리와 노래 소리를 들었습니다. 곧 그 소동이 동생이 돌아와 잔치를 베푸는 것임을 알았습니다. 맏아들은 화가 나서 집으로 들어가지도 않았습니다. 아버지가 그 사실을 알고 밖으로 나와 맏아들을 달랬습니다. 맏아들은, "아버지, 저는 아버지와 내내 함께 있었지만 제 친구들과 잔치하도록 염소 새끼 한 마리 안 주셨지 않습니까? 그런데 유산을 챙겨서 몽땅 까먹고 돌아 온 저 망나니를 위해서 살진 송아지를 잡고 잔치를 벌립니까?" 하며 불만을 토로했습니다. 그 때 아버지는, "얘야,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었고 내 것은 무엇이든지 다 네 것이 아니냐!"라고 하셨습니다. 즉 '네가 잔치를 벌리고 싶거든 얼마든지 하려무나. 이 집의 모든 것이 다 네 것이지 않느냐?'라고 하신 것입니다.
맏아들은 모든 것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잔치를 벌이든 무엇을 하든지 얼마든지 허용되어 있었습니다. 다만 사용하지를 못했을 뿐입니다. 맏아들에게 모든 것을 허용하신 하나님은 우리에게도 아버지이십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모든 것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다만 내가 소유한 것을 사용하면 되는 것입니다.
1. 그러면 내게 주어진 것을 어떻게 사용해야 합니까?
우리는 무엇이 부족한 사람처럼 자꾸만 하나님께 요구하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 속에는 모든 것의 주인이신 하나님이 계십니다. 즉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사람에게 부족함이란 없습니다. 다만 내가 소유하고 있는 것을 어떻게 사용할 것이냐가 문제입니다.
본문을 함께 암송해 봅시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믿습니까? 내게 능력 주시는 자가 지금 어디에 계십니까? 지금 내 안에 계십니다. 그리고 나는 주님 안에 있습니다. 왜냐하면, 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받은 사람은 이미 주님 안에 있는 것입니다. 요15:10,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 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
그러므로 우리는 '내가 어떻게 하면 하나님으로부터 많은 것을 얻어낼 수 있을까!' 라고 고민하고 기도할 것이 아닙니다. 진짜 기도하고 배워야 할 것은 '내게 주어진 것을 어떻게 사용할 수 있을까!'라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하나님, 다른 사람을 사랑하고 도울 수 있도록 사랑과 물질을 보다 많이 주십시오'라고 기도한다고 합시다. 이 기도는 성경적이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미 충분한 사랑도 물질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혹 이 말에 의의를 제기하고 싶은 분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가서 생각해 봅시다.
내 안에는 모든 것으로 충만하신 성령께서 계십니다. 뿐만 아니라 성령께서는 모든 환경과 여건을 조성하시고 인도하시는 분이십니다.
- 고전10:26, "이는 땅과 거기 충만한 것이 주의 것임이니라"/ 엡1:23,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의 충만이니라" / 골2:10, "너희도 그 안에서 충만하여졌으니 그는 모든 정사와 권세의 머리시라"
이 사실에는 의의가 없습니까? 그렇습니다. 우리는 이미 충만한 사랑도 있고, 현재 하나님 안에서 충만한 물질도 있습니다. 주의할 것은 내가 생각하는 충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우리가 해야 할 것은 내 속에 있는 것을 충분하게 사용하는 것입니다. 만약 내가 무엇을 하고자 하지만 도무지 없는 것이 있을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내게 허락하지 않은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내가 할 수 없는 것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내게 허락하지 않은 능력을 나타내라고 요구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누구에게나 모든 것을 허락하지는 않으셨습니다. 우리 몸에 많은 기관들이 있지만 각자의 역할은 다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성도들 각자에게 재능과 은사를 주셨습니다. 성도는 이 은사를 서로 합함으로서 교회를 세워 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은사론입니다.
- 롬12:6,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받은 은사가 각각 다르니…" / 고전7:7, "나는 모든 사람이 나와 같기를 원하노라. 그러나 각각 하나님께 받은 자기의 은사가 있으니 하나는 이러하고 하나는 저러하니라" / 고전12:11-12, "이 모든 일은 같은 한 성령이 행하사 그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눠 주시느니라. 몸은 하나인데 많은 지체가 있고 몸의 지체가 많으나 한 몸임과 같이 그리스도도 그러하니라"
그러므로 지금 내게 주어진 것을 십분 활용하도록 힘쓰십시오. 내게 주어진 것이 보잘것없는 것이라고 사용하지 않는다면, 그것마저 빼앗길 것입니다. 달란트 비유에서 한 달란트 받은 사람과 므나의 비유에서 주어진 한 므나를 사용하지 않았던 사람의 결과를 알고 계시지요? 그들은 주어진 것을 사용하지 않으므로 인하여 그 있던 것까지 빼앗기고, 결국 쫓겨났습니다.
여러분, 주어지지 않은 것을 얻으려고 애쓰기 보다 주어진 것에 충실하십시오. 더 풍성하게 채우시는 것은 하나님께서 하십니다.
2. 내게 주어진 것을 가장 효과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방법을 따르십시오
하나님께서 내게 허락하신 것들을 가장 효과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방법은 성령 안에서 걷는 것입니다. 성령 안에서 행하는 것에 대하여는 지난 시간에 이미 말씀드렸습니다. 다시 한 번 요약해서 말씀드리면, 성령 안에서 걷는다는 것은 계속적으로 성령의 임재를 의식하는 것입니다. 즉 성령께서 나와 함께 계신다는 것을 항상 생각하라는 말씀입니다.
성령님은 내가 지난날의 죄악을 회개하고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는 순간 내 속에 들어오십니다. 그리고 항상 나와 함께 하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자주 하나님께서 내 속에 임재해 주실 것을 구합니다. 이는 이미 임재해 계시는 하나님을 다시 임재해 달라고 요청하는 과실을 범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런 과실을 범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임재를 감각적으로 느끼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이를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초대 교회의 성령 임재 사실을 준비해 두셨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후, 제자와 성도들은 예수님께서 약속하신 성령을 받기 위하여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 기도에 열중하고 있었습니다. 그 때 성령께서 성도들에게 오셨습니다. 성경은 성령께서 처음으로 사람들에게 임재하시는 모습을 그리고 있습니다. 성령은 바람처럼 오셔서 불의 혀 같은 모습으로 사람들의 위에 나타나셨습니다. 그렇다고 불의 혀 같은 모습이 성령의 형상은 아닙니다. 처음으로 사람들에게 임하시는 성령님을 깨닫고 믿게 하기 위한 하나님의 배려였습니다. 곧 불의 혀 같은 형상이 사람의 머리 위에 나타난 것은 성령께서 오셨다는 표징이었습니다. 광야에서 불기둥과 구름 기둥으로 하나님의 임재를 나타내셨듯이 말입니다.
- 행2:2-4,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저희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불의 혀같이 갈라지는 것이 저희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임하여 있더니,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 민14:14, "이 땅 거민에게 고하리이다. 주 여호와께서 이 백성 중에 계심을 그들도 들었으니, 곧 주 여호와께서 대면하여 보이시며, 주의 구름이 그들 위에 섰으며, 주께서 낮에는 구름기둥 가운데서 밤에는 불기둥 가운데서 그들 앞에서 행하시는 것이니이다"
이처럼 성령께서 성도들에게 임재하신 확실한 사실 앞에서, 그 사실을 느끼지 못하거나 불신하는 대는 이유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후, 제자들은 기대하던 모든 희망이 사라져서 실의에 빠져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그 중에 엠마오가 고향인 두 제자도 역시 실의에 빠져 고향으로 가고 있었습니다. 주님께서 부활하셨다는 소문을 들었지만, 그들은 믿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길을 가는 도중에 어떤 분이 그들과 합류했습니다. 그분은 제자들의 실망에 찬 이야기를 듣고 계셨습니다. 그 제자들은 그 분이 주님이신 줄 전혀 깨닫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은 어리석은 제자들에게 성경 말씀을 풀이해 주셨지만 제자들은 여전히 예수님을 알지 못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제자들이 주님을 느끼지 못한 이유를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 눅24:15-16, "저희가 서로 이야기하며 문의할 때에 예수께서 가까이 이르러 저희와 동행하시나, 저희의 눈이 가리워져서 그 인줄 알아보지 못하거늘"/ 24:21, "우리는 이 사람이 이스라엘을 구속할 자라고 바랐노라…"
제자들은 자신의 욕망과 기대로 인하여 영적인 눈이 가려졌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성도가 하나님의 말씀에 믿음을 걸지 못하고, 자신의 욕망과 기대에 충실하게 되면 영적인 감각이 마비됩니다. 성령 안에서 걷는다는 것은 내 안에 거하셔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는 성령의 인도하심에 깨어 있는 것입니다.
항상 깨어서 성령님과 함께 걸을 수 있는 가장 쉬운 방법은, 옆 사람과 대화하듯이 그렇게 이야기를 나누십시오. 이것이 곧 생활 속의 기도입니다. 이렇게 할 때 성령의 능력이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의 모든 삶이 성령님과 함께 걷는 생활이 되셔서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허락하신 것을 충분하게 사용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