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하는 것이 복입니다.(야고보서1:19-27)
작성자 배의신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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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01-01-23 21:54
★ 들어가는 말
여러분, 하나님께서 사람에 대하여 가장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근거로 보면, 그것은 사람을 악에서 구출해 내어 구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신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사람으로 이 땅에 보내시고, 인간들의 죄의 대가로 생명을 내어주신 것이 바로 가장 큰 증거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을 통하여 이 사실을 알고 또 믿습니다. 즉 하나님은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한 도구로서 진리의 말씀을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 하나님의 말씀은 사람들의 귀만 즐겁게 하라고 주신 것이 아닙니다. 생명이 되는 진리의 말씀을 듣고 행하라고 주신 것입니다.
오늘의 세상을 보면, 아마도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귀만 즐겁게 하는 것으로 여기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야고보 선생을 통하여, 사람이 말을 많이 하는 것은 위험하고, 듣기는 먼저하고, 들은 다름에 행해야 할 것을 강조하십니다. 그러나 이것은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것이 아닙니다. 만일 말씀을 듣기만 하고 실천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헛된 경건이며, 죽은 믿음이라고 경고하십니다. 뿐만 아니라 이러한 믿음은 자신의 구원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
어느 목사와 이발사가 서울의 빈민거리를 나란히 걷게 되었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이 사는 그 주변은 몹시 지저분하여 악취가 풍겼습니다. 그때 회의론자인 이발사, "만약 하나님이 살아 계시고 그가 사랑의 하나님이시라면 어찌 저렇게 처참하게 살도록 내버려 두신단 말입니까?" 라고 말했습니다. 목사님은 묵묵히 주변을 둘러보다가 때마침 옆을 지나가는 히피족을 가리키면서 이발사에게 말했습니다. "저 친구를 보십니까? 저 친구는 수염도 깍지 않고, 머리는 어깨를 덮으니 어찌 당신 같은 이발사가 젊은이들이 저렇게 지저분하게 거리를 활보하도록 내버려 두십니까?" 이발사는, "그야 저 친구들이 이발도 하지 않고 거리를 활보하니까 그렇죠. 이발소에 오기만 하면 멋진 신사로 만들어 줄 텐데 말입니다." 목사님은, "하나님도 당신과 마찬가지 생각을 가지고 계십니다. 인간들이 하나님께로 나아와서 하나님께 기회를 드린다면, 하나님은 그들의 삶을 완전히 바꾸어 놓으실 것입니다."
분명,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시며, 말씀으로 천지를 지으신 능력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실천하지 않는다면 아무런 능력이 되지 못합니다. 예수님께서 고향인 갈릴리 지역에서 능력을 행하지 못하셨다는 사실을 기억하십니까?
- ꁾ막6:1-6상, “예수께서 거기를 떠나사 고향으로 가시니 제자들도 좇으니라. 안식일이 되어 회당에서 가르치시니 많은 사람이 듣고 놀라 가로되, ‘이 사람이 어디서 이런 것 을 얻었느뇨? 이 사람의 받은 지혜와 그 손으로 이루어지는 이런 권능이 어찌 됨이뇨? 이 사람이 마리아의 아들 목수가 아니냐? 야고보와 요셉과 유다와 시몬의 형제가 아니냐? 그 누 이들이 우리와 함께 여기 있지 아니하냐?’ 하고 예수를 배척한지라.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선지자가 자기 고향과 자기 친척과 자기 집 외에서는 존경을 받지 않음이 없느니라.’ 하시며, 거기서는 아무 권능도 행하실 수 없어, 다만 소수의 병인에게 안수하여 고치실뿐이었고, 저희의 믿지 않음을 이상히 여기셨더라.”
말씀을 듣고 실천하지 않는 것은 차라리 아무런 믿음이 없는 것보다 못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야고보를 통하여 이 사실을 증거하십니다.
1. 먼저, 본문은 말하는 것과 화내는 것의 위험성에 대하여 말씀하십니다.
이는 본문 이전에 이미 다루었던, 사람이 당하는 시험의 근원에 대한 말씀에 이어서 나오는 말씀입니다. 사람이 시험을 당하는 것은 자신의 욕심 때문이며, 그 욕심이 유혹을 부르고 결국 죄에 빠지게 되며, 죄의 결과는 죽음이라고 했습니다. 즉 사람이 당하는 시험은 스스로가 부르는 것임을 말씀합니다. 그렇다면, 이런 시험 당하는 것과 말이나 화내는 것, 혹은 행함과는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관계가 많이 있습니다. 사람이 욕심을 품게 되는 것과 그 욕심이 유혹을 부르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떠났기 때문에 일어나는 것입니다. 즉 진리이신 하나님의 말씀과 대조되는 인간의 말이 얼마나 위험한 것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말을 많이 하면 결국 사람의 생각이 주도하게 되고, 화를 부르게 됩니다. 그래서 ‘혀는 불이요, 불의의 세계라’(3:6)고 했으면‘화를 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한다.’고 하신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인간의 분냄’은 사람의 일상적인 감정의 표출을 말합니다.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사회적 불의에 대한 의분을 포함하는 모든 ‘화냄’을 말합니다. 사람이 화를 내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고 파괴적입니다. 그래서 잠언에서는 “노하기를 더디 하는 자는 용사보다 낫고,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앗는 자보다 나으니라.”(잠16:32)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을 통해서도,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엡4:26)라고 하셨습니다.
이처럼, 사람이 자신의 마음을 다스리지 못하고 ‘분을 품는 것’은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의에 이르지 못한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요구에 이르지 못한다는 것은 생명의 상실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21절의 내용대로 성도는“모든 더러운 것과 넘치는 악을 내어 버려야ꀞ”합니다. ‘내어 버린다’는 말은 원래‘옷을 벗어버리는 것’을 의미하는데, ‘삶의 양식을 완전히 변화시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성도가 하나님의 말씀을 대하는 태도로서 ‘온유함’을 말씀하십니다. 온유함은 분을 내는 것과 반대되는 특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성도들이 혈기왕성하여 자신의 목적을 이루기 위하여 바쁘게 움직이기 보다는, 온유함 가운데 하나님으로부터 받아야 합니다. 사람이 자신의 목적에 바쁘다보면, 욕심이 발동하고, 말을 많이 하게 되고, 화를 낼 일이 많아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하나님의 말씀은 온유함으로 받아야 합니다. 이제 주제가 한 단계 더 나아갑니다.
2. 하나님의 말씀은 듣고 행하는 자에게 복이 됩니다.
구원하는 능력이 되는 하나님의 말씀을 온유함으로 받는다는 것은 자칫 듣는 행위만을 의미하는 것으로 오해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듣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며 반드시 실천이 뒤따라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야고보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염두에 두고 “말씀을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는 자가 되지 말라.”고 가르칩니다. 이 주제에 대하여는 예수님께서 자세하게 가르치셨습니다.
- ꁾ마7:15-27(그의 열매로 그들을 안다./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하나님나라를 차지한다./ 모래 위의 집과 반석 위의 집)
듣기만 하고 행하지 않는 사람은 ‘자기 자신을 속이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야고보는 스스로를 속이는 것에 대하여 ‘거울 비유’를 사용하여 좀 더 사실적으로 설명합니다. 즉 듣기만 하고 실천하지 않는 사람은, 마치 거울로 자기 얼굴을 보고 난 후 일단 떠나면 그 보았던 바를 잊어버리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깨달음이 순간적일 뿐이며, 그 깨달음이 아무런 효과도 나타내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깨달음은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따라서 듣기만 하는 것은 그 듣는 사람에게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합니다.
이제, 듣고 행하는 자에 대하여 25절에서 부연 설명합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자유하게 하는 온전한 율법”은 곧 ‘복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나타난 이 복음은 듣고 실행하는 자에게 효력을 나타냅니다. 그 효력은 행하는 일에 복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거짓 경건과 참된 경건은 성도의 행위를 통하여 나타나게 됩니다. 26, 27절에서 의미하는 것은 말로만 나타나는 거짓 경건과 생활 속에서 절제와 말씀에 대한 행함으로 나타나는 참된 경건입니다.
어느 부흥회에서 성도들의 간증 시간이 있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간증을 하는 중에 두 사람이 일어나서 열정적으로 간증했습니다. 그 간증을 들은 많은 사람들이 감동을 받았는데, 유독 한 부인만은 아주 경멸하는 표정으로 간증하는 두 사람을 쳐다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옆에 있는 사람이 “왜 그렇게 분해 하십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 부인의 말이, 오래 전에 저 두 사람이 자신의 돈을 많이 빌려 갔는데 전혀 갚아주지 않아서 자신은 지금 먹을 것이 없을 정도로 망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저렇게 예수 믿고 은혜를 받았다고 간증을 하니 가증스럽지 않느냐?’ 는 것입니다.
세상이 불법으로 가득 차고, 유혹과 시련이 많을수록 믿음에 대한 행함은 강조되어 왔습니다. 그 이유는 어두움이 깊을수록 불이 더욱 밝아야 하며, 날씨가 추워질수록 더 많은 군불을 지펴야 하는 이치일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이 그러합니다. 이런 복음송 가사가 생각납니다.
- ꍔ에바다ꍕ 어두워진 세상길을 주님 없이 걸어가다 나의 영혼 어두워졌네. 어느 것이 길인지 어느 것이 진리인지 아무 것도 알 수 없었네. 주님 없이 살아가는 모든 삶 실패와 좌절뿐이네ꀞ”/
주님 없이 걷는 세상길은 어두움 그 자체입니다. 화를 내며, 원망하며, 자기 힘으로 나아가고자 한다면, 더욱 깊은 수렁에 빠질 뿐입니다. 인생길이 힘들고 어렵고, 어두울수록 마음을 낮추고 주님을 바라보십시오. 그리고 주님의 뜻을 겸허하게 받아들이고 묵묵히 따라가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이 엉터리 같고 세상의 이치에 맞지 않는 것 같더라도 순종하고 실천하십시오.
베드로와 안드레 그리고 그의 친구들이 갈릴리 호수에서 밤새도록 그물질을 했지만, 아무것도 얻지 못했습니다. 허탈감에 빠져 힘없이 항구로 돌아 온 그들에게 예수님은 저기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던져보라고 하셨습니다. 어부로는 전문가들인 그들이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었지만, 베드로는 “말씀에 의지하여”순종했습니다. 순종의 결과는 그물이 찢어질 정도의 수확이었으며, 두 배에 가득 채우는 분량이었습니다.
주님의 말씀에 순종한 베드로와 그 형제들이 그물이 찢어지도록 물고기를 잡은 것처럼, 말씀에 순종하고 실천하여 여러분의 삶에 하나님의 복으로 채움을 받기를 축원합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사람에 대하여 가장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근거로 보면, 그것은 사람을 악에서 구출해 내어 구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신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사람으로 이 땅에 보내시고, 인간들의 죄의 대가로 생명을 내어주신 것이 바로 가장 큰 증거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을 통하여 이 사실을 알고 또 믿습니다. 즉 하나님은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한 도구로서 진리의 말씀을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 하나님의 말씀은 사람들의 귀만 즐겁게 하라고 주신 것이 아닙니다. 생명이 되는 진리의 말씀을 듣고 행하라고 주신 것입니다.
오늘의 세상을 보면, 아마도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귀만 즐겁게 하는 것으로 여기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야고보 선생을 통하여, 사람이 말을 많이 하는 것은 위험하고, 듣기는 먼저하고, 들은 다름에 행해야 할 것을 강조하십니다. 그러나 이것은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것이 아닙니다. 만일 말씀을 듣기만 하고 실천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헛된 경건이며, 죽은 믿음이라고 경고하십니다. 뿐만 아니라 이러한 믿음은 자신의 구원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
어느 목사와 이발사가 서울의 빈민거리를 나란히 걷게 되었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이 사는 그 주변은 몹시 지저분하여 악취가 풍겼습니다. 그때 회의론자인 이발사, "만약 하나님이 살아 계시고 그가 사랑의 하나님이시라면 어찌 저렇게 처참하게 살도록 내버려 두신단 말입니까?" 라고 말했습니다. 목사님은 묵묵히 주변을 둘러보다가 때마침 옆을 지나가는 히피족을 가리키면서 이발사에게 말했습니다. "저 친구를 보십니까? 저 친구는 수염도 깍지 않고, 머리는 어깨를 덮으니 어찌 당신 같은 이발사가 젊은이들이 저렇게 지저분하게 거리를 활보하도록 내버려 두십니까?" 이발사는, "그야 저 친구들이 이발도 하지 않고 거리를 활보하니까 그렇죠. 이발소에 오기만 하면 멋진 신사로 만들어 줄 텐데 말입니다." 목사님은, "하나님도 당신과 마찬가지 생각을 가지고 계십니다. 인간들이 하나님께로 나아와서 하나님께 기회를 드린다면, 하나님은 그들의 삶을 완전히 바꾸어 놓으실 것입니다."
분명,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시며, 말씀으로 천지를 지으신 능력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실천하지 않는다면 아무런 능력이 되지 못합니다. 예수님께서 고향인 갈릴리 지역에서 능력을 행하지 못하셨다는 사실을 기억하십니까?
- ꁾ막6:1-6상, “예수께서 거기를 떠나사 고향으로 가시니 제자들도 좇으니라. 안식일이 되어 회당에서 가르치시니 많은 사람이 듣고 놀라 가로되, ‘이 사람이 어디서 이런 것 을 얻었느뇨? 이 사람의 받은 지혜와 그 손으로 이루어지는 이런 권능이 어찌 됨이뇨? 이 사람이 마리아의 아들 목수가 아니냐? 야고보와 요셉과 유다와 시몬의 형제가 아니냐? 그 누 이들이 우리와 함께 여기 있지 아니하냐?’ 하고 예수를 배척한지라.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선지자가 자기 고향과 자기 친척과 자기 집 외에서는 존경을 받지 않음이 없느니라.’ 하시며, 거기서는 아무 권능도 행하실 수 없어, 다만 소수의 병인에게 안수하여 고치실뿐이었고, 저희의 믿지 않음을 이상히 여기셨더라.”
말씀을 듣고 실천하지 않는 것은 차라리 아무런 믿음이 없는 것보다 못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야고보를 통하여 이 사실을 증거하십니다.
1. 먼저, 본문은 말하는 것과 화내는 것의 위험성에 대하여 말씀하십니다.
이는 본문 이전에 이미 다루었던, 사람이 당하는 시험의 근원에 대한 말씀에 이어서 나오는 말씀입니다. 사람이 시험을 당하는 것은 자신의 욕심 때문이며, 그 욕심이 유혹을 부르고 결국 죄에 빠지게 되며, 죄의 결과는 죽음이라고 했습니다. 즉 사람이 당하는 시험은 스스로가 부르는 것임을 말씀합니다. 그렇다면, 이런 시험 당하는 것과 말이나 화내는 것, 혹은 행함과는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관계가 많이 있습니다. 사람이 욕심을 품게 되는 것과 그 욕심이 유혹을 부르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떠났기 때문에 일어나는 것입니다. 즉 진리이신 하나님의 말씀과 대조되는 인간의 말이 얼마나 위험한 것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말을 많이 하면 결국 사람의 생각이 주도하게 되고, 화를 부르게 됩니다. 그래서 ‘혀는 불이요, 불의의 세계라’(3:6)고 했으면‘화를 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한다.’고 하신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인간의 분냄’은 사람의 일상적인 감정의 표출을 말합니다.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사회적 불의에 대한 의분을 포함하는 모든 ‘화냄’을 말합니다. 사람이 화를 내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고 파괴적입니다. 그래서 잠언에서는 “노하기를 더디 하는 자는 용사보다 낫고,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앗는 자보다 나으니라.”(잠16:32)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을 통해서도,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엡4:26)라고 하셨습니다.
이처럼, 사람이 자신의 마음을 다스리지 못하고 ‘분을 품는 것’은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의에 이르지 못한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요구에 이르지 못한다는 것은 생명의 상실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21절의 내용대로 성도는“모든 더러운 것과 넘치는 악을 내어 버려야ꀞ”합니다. ‘내어 버린다’는 말은 원래‘옷을 벗어버리는 것’을 의미하는데, ‘삶의 양식을 완전히 변화시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성도가 하나님의 말씀을 대하는 태도로서 ‘온유함’을 말씀하십니다. 온유함은 분을 내는 것과 반대되는 특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성도들이 혈기왕성하여 자신의 목적을 이루기 위하여 바쁘게 움직이기 보다는, 온유함 가운데 하나님으로부터 받아야 합니다. 사람이 자신의 목적에 바쁘다보면, 욕심이 발동하고, 말을 많이 하게 되고, 화를 낼 일이 많아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하나님의 말씀은 온유함으로 받아야 합니다. 이제 주제가 한 단계 더 나아갑니다.
2. 하나님의 말씀은 듣고 행하는 자에게 복이 됩니다.
구원하는 능력이 되는 하나님의 말씀을 온유함으로 받는다는 것은 자칫 듣는 행위만을 의미하는 것으로 오해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듣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며 반드시 실천이 뒤따라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야고보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염두에 두고 “말씀을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는 자가 되지 말라.”고 가르칩니다. 이 주제에 대하여는 예수님께서 자세하게 가르치셨습니다.
- ꁾ마7:15-27(그의 열매로 그들을 안다./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하나님나라를 차지한다./ 모래 위의 집과 반석 위의 집)
듣기만 하고 행하지 않는 사람은 ‘자기 자신을 속이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야고보는 스스로를 속이는 것에 대하여 ‘거울 비유’를 사용하여 좀 더 사실적으로 설명합니다. 즉 듣기만 하고 실천하지 않는 사람은, 마치 거울로 자기 얼굴을 보고 난 후 일단 떠나면 그 보았던 바를 잊어버리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깨달음이 순간적일 뿐이며, 그 깨달음이 아무런 효과도 나타내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깨달음은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따라서 듣기만 하는 것은 그 듣는 사람에게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합니다.
이제, 듣고 행하는 자에 대하여 25절에서 부연 설명합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자유하게 하는 온전한 율법”은 곧 ‘복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나타난 이 복음은 듣고 실행하는 자에게 효력을 나타냅니다. 그 효력은 행하는 일에 복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거짓 경건과 참된 경건은 성도의 행위를 통하여 나타나게 됩니다. 26, 27절에서 의미하는 것은 말로만 나타나는 거짓 경건과 생활 속에서 절제와 말씀에 대한 행함으로 나타나는 참된 경건입니다.
어느 부흥회에서 성도들의 간증 시간이 있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간증을 하는 중에 두 사람이 일어나서 열정적으로 간증했습니다. 그 간증을 들은 많은 사람들이 감동을 받았는데, 유독 한 부인만은 아주 경멸하는 표정으로 간증하는 두 사람을 쳐다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옆에 있는 사람이 “왜 그렇게 분해 하십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 부인의 말이, 오래 전에 저 두 사람이 자신의 돈을 많이 빌려 갔는데 전혀 갚아주지 않아서 자신은 지금 먹을 것이 없을 정도로 망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저렇게 예수 믿고 은혜를 받았다고 간증을 하니 가증스럽지 않느냐?’ 는 것입니다.
세상이 불법으로 가득 차고, 유혹과 시련이 많을수록 믿음에 대한 행함은 강조되어 왔습니다. 그 이유는 어두움이 깊을수록 불이 더욱 밝아야 하며, 날씨가 추워질수록 더 많은 군불을 지펴야 하는 이치일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이 그러합니다. 이런 복음송 가사가 생각납니다.
- ꍔ에바다ꍕ 어두워진 세상길을 주님 없이 걸어가다 나의 영혼 어두워졌네. 어느 것이 길인지 어느 것이 진리인지 아무 것도 알 수 없었네. 주님 없이 살아가는 모든 삶 실패와 좌절뿐이네ꀞ”/
주님 없이 걷는 세상길은 어두움 그 자체입니다. 화를 내며, 원망하며, 자기 힘으로 나아가고자 한다면, 더욱 깊은 수렁에 빠질 뿐입니다. 인생길이 힘들고 어렵고, 어두울수록 마음을 낮추고 주님을 바라보십시오. 그리고 주님의 뜻을 겸허하게 받아들이고 묵묵히 따라가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이 엉터리 같고 세상의 이치에 맞지 않는 것 같더라도 순종하고 실천하십시오.
베드로와 안드레 그리고 그의 친구들이 갈릴리 호수에서 밤새도록 그물질을 했지만, 아무것도 얻지 못했습니다. 허탈감에 빠져 힘없이 항구로 돌아 온 그들에게 예수님은 저기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던져보라고 하셨습니다. 어부로는 전문가들인 그들이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었지만, 베드로는 “말씀에 의지하여”순종했습니다. 순종의 결과는 그물이 찢어질 정도의 수확이었으며, 두 배에 가득 채우는 분량이었습니다.
주님의 말씀에 순종한 베드로와 그 형제들이 그물이 찢어지도록 물고기를 잡은 것처럼, 말씀에 순종하고 실천하여 여러분의 삶에 하나님의 복으로 채움을 받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