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를 위한 경영입니까?(렘45:1-5)
작성자 배의신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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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01-03-18 20:55
*들어가는 말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크다.’고 했습니다. 어떤 것에 대한 기대가 크면 클수록 그 기대가 좌절될 때 더 큰 절망감을 맛보기 마련입니다. 현대인들은 쉽게 좌절하고 쾌락이나 자포자기한 상태로 빠져듭니다. 이는 ‘보다 큰 것’, ‘보다 나은 것’을 선호하는 병적인 증상 때문일 것입니다. 보다 큰 집, 더 나은 자동차, 더 많은 물질, 더 높은 명예, 보다 더 나은 자식들의 위치 등등. 마치 경쟁이나 남보다 무조건 위에 있어야 한다는 강박증에 사로잡힌 것 같습니다.
이처럼 크고 높은 것을 선호하거나 추구하는 것이 나쁜 것은 아닙니다. 다만, 자기 본분을 망각하고 이러한 것들에 매어 달리는 것이 문제입니다. 사람은 하나님께서 주신 자신의 본분을 따라서 서로 협력하며 더불어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땅히 생각할 이상의 생각을 하지 말라”(롬12:3,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중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바로 오늘 본문에는 이와 같은 하나님의 경고와 명령이 전달되고 있습니다.
본문에 등장하는 주인공은 ‘바룩’이라는 사람입니다. ‘바룩’은 ‘예레미야’선지자의 오랜 친구이자 서기관으로서, 예레미야와 더불어 살아 온 사람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예레미야를 통하여 ‘바룩’에게 뜻을 전하셨습니다. “네가 너를 위하여 대사를 경영하느냐? 그것을 경영하지 말라.”고 말입니다. 바룩이 어떤 큰일을 꾸미고 있는 것을 하나님께서 막으시는 것입니다.
1. 말씀의 배경을 살펴봅시다.
본문의 배경이 되는 시기는 남 유다가 멸망하기 직전인 ‘여호야김’(B.C609-598)왕 때입니다. ‘여호야김’은 애굽 왕 ‘바로느고’가 섭정하여 세운 왕입니다. 남 유다는 이미 이 때에 애굽의 간섭에 들어가 있었으며, 자치권을 잃고 있었습니다.
한편,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뜻을 예언하다가, 거짓 선지자들의 참소에 의하여 갇혀 있었습니다. 성전 출입을 하지 못하는 예레미야를 대신하여 ‘바룩’이 하나님의 말씀을 기록하고 낭독했습니다. 백성들은 ‘이스라엘이 바벨론의 포로가 되겠고, 그들을 섬기게 될 것이라’는 하나님의 뜻에 대하여 심각한 반발을 했습니다. 바룩은 백성들의 위협적인 반응과 ‘여호야김’왕과 최후의 왕인 ‘시드기야’왕의 반응에 더욱 두려웠을 것입니다.
이처럼, 시대적인 형편은 신앙인으로 하여금 두렵게 하고 위축되게 합니다. 당당하던 예수님의 제자들도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고, 생명을 위협하는 살벌한 상황이 되자 두려움에 떨었습니다. 은밀한 장소에 모여 온통 문을 걸어 잠그고 은둔했습니다.
이러한 때에 신앙인들은 자신의 생명을 위하여 육신적인 일을 도모하기가 쉽습니다. 생명을 유지하고자 하는 것이 인간의 본능이기 때문입니다.
2. 인간적인 경영을 계획하지 마십시오.
바룩은 하나님의 뜻에 의하여 예루살렘이 바벨론에 멸망당할 것을 알았습니다. 시대적인 어수선함과 주변의 위협적인 세력들은 바룩을 더욱 위축되게 했습니다. 바룩은 자신의 생명을 위하여 모종의 계획을 세웠습니다. 그 계획이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지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도피처를 마련한다든지, 일신의 영달을 계획한다든지 아니면 하나님의 뜻을 선포하는 일을 포기하는 것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ꁾ본문3절(바룩의 생각을 아시는 하나님)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를 통하여 바룩에게 경고를 포함하는 명령을 내리셨습니다. “네가 너를 위하여 대사를 경영하느냐? 그것을 경영하지 말라.”고 말입니다. 이는 자신의 생명 보전을 위하여 자구책을 강구하지 말라는 명령입니다. 그 대신에 하나님께서 친히 그의 생명을 보전해 주시겠다고 약속 하셨습니다.
지금 우리 시대에는 주님께서 하신 더욱 확실한 하나님의 뜻이 이미 선포되어 있습니다. 주님을 따르는 사람들이 자신의 생명을 사랑하면 잃어버릴 것이고, 생명을 미워하면 보존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ꁾ요12:25,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존하리라.”
이 말씀은 사람들의 ‘자기애’(自己愛)에 대한 경고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생명을 박탈당하게 되는 自己愛는 하나님보다 자신의 생명을 더 사랑하는 것입니다.
ꁾ마10:37-39,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니라.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
하나님께서 모든 생명에 대하여 징계를 결정하신 상황에서 자신의 생명을 스스로 보존할 수 있는 존재는 없습니다. 그같이 계획한다면 그 보다 더 어리석은 일이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징계의 결정을 내리셨기 때문에 바룩의 자기 경영은 어리석을 뿐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룩의 생각을 환기시켰습니다.
3.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십시오.
바룩은 두려운 나머지 하나님께서 나라와 민족의 일들을 결정하시고 시행하신다는 사실을 잊고 있습니다. 그래서 자신에게 닥친 이 위기의 상황을 스스로의 경영으로 벗어나 보고자 계획했습니다. 자기 경영은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도전 행위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 말세의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뜻에 대하여 항상 깨어 있으라고 하신 것입니다.
ꁾ눅21:36, “이러므로 너희는 장차 올 이 모든 일을 능히 피하고 인자 앞에 서도록 항상 기도하며 깨어 있으라.”/ 골4:2, “기도를 항상 힘쓰고 기도에 감사함으로 깨어 있으라.”
바룩은 자신의 계획에 몰두한 나머지 하나님의 뜻에 대하여 닫혀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를 통하여 바룩의 생각을 환기시키셨습니다(4절).
“보라, 나는 나의 세운 것을 헐기도 하며, 나의 심은 것을 뽑기도 하나니, 온 땅에 이러하거늘”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온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 선언입니다. 세상을 지으신 분도 하나님이시며, 세상만사를 경영하시는 분도 하나님이시며, 때를 따라 배치하는 일도, 생명을 거두고 일을 그치도록 하시는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ꁾ전3:11,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에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의 하시는 일의 시종을 사람으로 측량할 수 없게 하셨도다.”
이 일은 오늘 우리들에게도 변함없는 진리입니다. 나를 이 시대에 태어나게 하신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지금의 삶의 환경과 자리와 일을 주신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상황과 환경이 어떠하든지 주관자는 여전히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 하나님의 주권을 무시하고 일산상의 영달에 연연하는 바룩을 깨우치시는 것입니다.
바룩이 두려워하고 피하고 싶어 하는 그 시대의 상황은 하나님으로부터 비롯된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선택받은 언약의 백성임에도 불구하고 고의적인 불순종과 배반의 길을 걸었기 때문에 징계를 피할 수가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포로생활을 계획하셨는데, 누가 포로에서 벗어날 수 있겠습니까? 피하려고 한다면 더욱 가혹한 환경이 기다릴 뿐입니다.
ꁾ사30:15-17, “주 여호와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자가 말씀하시되, 너희가 돌이켜 안연히 처하여야 구원을 얻을 것이요, 잠잠하고 신뢰하여야 힘을 얻을 것이어늘, 너희가 원치 아니하고 이르기를, ‘아니라 우리가 말 타고 도망하리라’ 한고로 너희가 도망할 것이요, 또 이르기를, ‘우리가 빠른 짐승을 타리라’ 한고로 너희를 쫓는 자가 빠르리니, 한 사람이 꾸짖은즉 천 사람이 도망하겠고, 다섯이 꾸짖은즉 너희가 다 도망하고 너희 남은 자는 겨우 산꼭대기의 깃대 같겠고 영 위의 기호 같으리라 하셨느니라.”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것은 주어진 상황에 순복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의 길을 인도하실 것입니다. 비록 포로 생활이라 할지라도 순종하는 남은 백성들을 위하여 하나님의 선하시고 인자하신 은혜는 계속될 것입니다.
상황과 환경을 바꾸어보려고 경영하는 자신의 계획을 주님 앞에 내려놓으십시오. 사람의 경영의 특징은 마음의 평안이 없을 뿐만 아니라 순탄하지를 않습니다. 하나님의 뜻에 대한 순복은 상황과 여건에 관계없이 마음의 평안이 주어지며 순조로운 진행을 보이는 것이 특징입니다.
ꁾ요14:27,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본문5절하
‘술피시우스와 세베루스의 대화’라는 책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집트의 한 수도원에 어떤 남자가 찾아와서 수도원에 입회하기를 간청했습니다. 그 때 수도원장은 그에게 수도원의 으뜸가는 규칙은 ‘복종’이라고 말하자, 그는 어떠한 명령이라 할지라도 행하겠다고 약속했습니다. 수도원장에게는 좋은 기회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말라버린 버드나무 막대기를 가져와 땅에 꽂고 지원자에게, ‘막대기에서 잎이 날 때까지 물을 주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확실히 억지였습니다. 그러나 유순하게도 새로 들어온 수사는 매일 2마일이나 떨어진 나일 강까지 걸어가서 어깨에다 물을 지고 와 마른 막대기에 물을 주었습니다. 1년이 지났습니다. 그는 약간 지쳤지만 성실히 그 일을 계속했습니다. 또 1년이라는 세월이 지났습니다. 그는 계속 그 일을 쉬지 않고 해냈습니다. 3년째 접어들었지만 그는 막대기에 물을 주기 위해 여전히 나일 강을 왕복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가 막대기에 싹이 트기 시작한 것입니다.
순종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알게 하는 이야기입니다.
지금 여러분들이 경영하는 일들이 있다면, 깊이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의 뜻을 벗어난 자신의 경영이 아닌지, 아니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삶인지를 돌아보십시오.
여러분의 삶에서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함으로서, 하나님의 평안과 인도하심이 여러분의 삶을 주관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크다.’고 했습니다. 어떤 것에 대한 기대가 크면 클수록 그 기대가 좌절될 때 더 큰 절망감을 맛보기 마련입니다. 현대인들은 쉽게 좌절하고 쾌락이나 자포자기한 상태로 빠져듭니다. 이는 ‘보다 큰 것’, ‘보다 나은 것’을 선호하는 병적인 증상 때문일 것입니다. 보다 큰 집, 더 나은 자동차, 더 많은 물질, 더 높은 명예, 보다 더 나은 자식들의 위치 등등. 마치 경쟁이나 남보다 무조건 위에 있어야 한다는 강박증에 사로잡힌 것 같습니다.
이처럼 크고 높은 것을 선호하거나 추구하는 것이 나쁜 것은 아닙니다. 다만, 자기 본분을 망각하고 이러한 것들에 매어 달리는 것이 문제입니다. 사람은 하나님께서 주신 자신의 본분을 따라서 서로 협력하며 더불어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땅히 생각할 이상의 생각을 하지 말라”(롬12:3,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중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바로 오늘 본문에는 이와 같은 하나님의 경고와 명령이 전달되고 있습니다.
본문에 등장하는 주인공은 ‘바룩’이라는 사람입니다. ‘바룩’은 ‘예레미야’선지자의 오랜 친구이자 서기관으로서, 예레미야와 더불어 살아 온 사람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예레미야를 통하여 ‘바룩’에게 뜻을 전하셨습니다. “네가 너를 위하여 대사를 경영하느냐? 그것을 경영하지 말라.”고 말입니다. 바룩이 어떤 큰일을 꾸미고 있는 것을 하나님께서 막으시는 것입니다.
1. 말씀의 배경을 살펴봅시다.
본문의 배경이 되는 시기는 남 유다가 멸망하기 직전인 ‘여호야김’(B.C609-598)왕 때입니다. ‘여호야김’은 애굽 왕 ‘바로느고’가 섭정하여 세운 왕입니다. 남 유다는 이미 이 때에 애굽의 간섭에 들어가 있었으며, 자치권을 잃고 있었습니다.
한편,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뜻을 예언하다가, 거짓 선지자들의 참소에 의하여 갇혀 있었습니다. 성전 출입을 하지 못하는 예레미야를 대신하여 ‘바룩’이 하나님의 말씀을 기록하고 낭독했습니다. 백성들은 ‘이스라엘이 바벨론의 포로가 되겠고, 그들을 섬기게 될 것이라’는 하나님의 뜻에 대하여 심각한 반발을 했습니다. 바룩은 백성들의 위협적인 반응과 ‘여호야김’왕과 최후의 왕인 ‘시드기야’왕의 반응에 더욱 두려웠을 것입니다.
이처럼, 시대적인 형편은 신앙인으로 하여금 두렵게 하고 위축되게 합니다. 당당하던 예수님의 제자들도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고, 생명을 위협하는 살벌한 상황이 되자 두려움에 떨었습니다. 은밀한 장소에 모여 온통 문을 걸어 잠그고 은둔했습니다.
이러한 때에 신앙인들은 자신의 생명을 위하여 육신적인 일을 도모하기가 쉽습니다. 생명을 유지하고자 하는 것이 인간의 본능이기 때문입니다.
2. 인간적인 경영을 계획하지 마십시오.
바룩은 하나님의 뜻에 의하여 예루살렘이 바벨론에 멸망당할 것을 알았습니다. 시대적인 어수선함과 주변의 위협적인 세력들은 바룩을 더욱 위축되게 했습니다. 바룩은 자신의 생명을 위하여 모종의 계획을 세웠습니다. 그 계획이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지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도피처를 마련한다든지, 일신의 영달을 계획한다든지 아니면 하나님의 뜻을 선포하는 일을 포기하는 것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ꁾ본문3절(바룩의 생각을 아시는 하나님)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를 통하여 바룩에게 경고를 포함하는 명령을 내리셨습니다. “네가 너를 위하여 대사를 경영하느냐? 그것을 경영하지 말라.”고 말입니다. 이는 자신의 생명 보전을 위하여 자구책을 강구하지 말라는 명령입니다. 그 대신에 하나님께서 친히 그의 생명을 보전해 주시겠다고 약속 하셨습니다.
지금 우리 시대에는 주님께서 하신 더욱 확실한 하나님의 뜻이 이미 선포되어 있습니다. 주님을 따르는 사람들이 자신의 생명을 사랑하면 잃어버릴 것이고, 생명을 미워하면 보존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ꁾ요12:25,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존하리라.”
이 말씀은 사람들의 ‘자기애’(自己愛)에 대한 경고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생명을 박탈당하게 되는 自己愛는 하나님보다 자신의 생명을 더 사랑하는 것입니다.
ꁾ마10:37-39,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니라.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
하나님께서 모든 생명에 대하여 징계를 결정하신 상황에서 자신의 생명을 스스로 보존할 수 있는 존재는 없습니다. 그같이 계획한다면 그 보다 더 어리석은 일이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징계의 결정을 내리셨기 때문에 바룩의 자기 경영은 어리석을 뿐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룩의 생각을 환기시켰습니다.
3.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십시오.
바룩은 두려운 나머지 하나님께서 나라와 민족의 일들을 결정하시고 시행하신다는 사실을 잊고 있습니다. 그래서 자신에게 닥친 이 위기의 상황을 스스로의 경영으로 벗어나 보고자 계획했습니다. 자기 경영은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도전 행위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 말세의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뜻에 대하여 항상 깨어 있으라고 하신 것입니다.
ꁾ눅21:36, “이러므로 너희는 장차 올 이 모든 일을 능히 피하고 인자 앞에 서도록 항상 기도하며 깨어 있으라.”/ 골4:2, “기도를 항상 힘쓰고 기도에 감사함으로 깨어 있으라.”
바룩은 자신의 계획에 몰두한 나머지 하나님의 뜻에 대하여 닫혀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를 통하여 바룩의 생각을 환기시키셨습니다(4절).
“보라, 나는 나의 세운 것을 헐기도 하며, 나의 심은 것을 뽑기도 하나니, 온 땅에 이러하거늘”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온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 선언입니다. 세상을 지으신 분도 하나님이시며, 세상만사를 경영하시는 분도 하나님이시며, 때를 따라 배치하는 일도, 생명을 거두고 일을 그치도록 하시는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ꁾ전3:11,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에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의 하시는 일의 시종을 사람으로 측량할 수 없게 하셨도다.”
이 일은 오늘 우리들에게도 변함없는 진리입니다. 나를 이 시대에 태어나게 하신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지금의 삶의 환경과 자리와 일을 주신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상황과 환경이 어떠하든지 주관자는 여전히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 하나님의 주권을 무시하고 일산상의 영달에 연연하는 바룩을 깨우치시는 것입니다.
바룩이 두려워하고 피하고 싶어 하는 그 시대의 상황은 하나님으로부터 비롯된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선택받은 언약의 백성임에도 불구하고 고의적인 불순종과 배반의 길을 걸었기 때문에 징계를 피할 수가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포로생활을 계획하셨는데, 누가 포로에서 벗어날 수 있겠습니까? 피하려고 한다면 더욱 가혹한 환경이 기다릴 뿐입니다.
ꁾ사30:15-17, “주 여호와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자가 말씀하시되, 너희가 돌이켜 안연히 처하여야 구원을 얻을 것이요, 잠잠하고 신뢰하여야 힘을 얻을 것이어늘, 너희가 원치 아니하고 이르기를, ‘아니라 우리가 말 타고 도망하리라’ 한고로 너희가 도망할 것이요, 또 이르기를, ‘우리가 빠른 짐승을 타리라’ 한고로 너희를 쫓는 자가 빠르리니, 한 사람이 꾸짖은즉 천 사람이 도망하겠고, 다섯이 꾸짖은즉 너희가 다 도망하고 너희 남은 자는 겨우 산꼭대기의 깃대 같겠고 영 위의 기호 같으리라 하셨느니라.”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것은 주어진 상황에 순복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의 길을 인도하실 것입니다. 비록 포로 생활이라 할지라도 순종하는 남은 백성들을 위하여 하나님의 선하시고 인자하신 은혜는 계속될 것입니다.
상황과 환경을 바꾸어보려고 경영하는 자신의 계획을 주님 앞에 내려놓으십시오. 사람의 경영의 특징은 마음의 평안이 없을 뿐만 아니라 순탄하지를 않습니다. 하나님의 뜻에 대한 순복은 상황과 여건에 관계없이 마음의 평안이 주어지며 순조로운 진행을 보이는 것이 특징입니다.
ꁾ요14:27,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본문5절하
‘술피시우스와 세베루스의 대화’라는 책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집트의 한 수도원에 어떤 남자가 찾아와서 수도원에 입회하기를 간청했습니다. 그 때 수도원장은 그에게 수도원의 으뜸가는 규칙은 ‘복종’이라고 말하자, 그는 어떠한 명령이라 할지라도 행하겠다고 약속했습니다. 수도원장에게는 좋은 기회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말라버린 버드나무 막대기를 가져와 땅에 꽂고 지원자에게, ‘막대기에서 잎이 날 때까지 물을 주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확실히 억지였습니다. 그러나 유순하게도 새로 들어온 수사는 매일 2마일이나 떨어진 나일 강까지 걸어가서 어깨에다 물을 지고 와 마른 막대기에 물을 주었습니다. 1년이 지났습니다. 그는 약간 지쳤지만 성실히 그 일을 계속했습니다. 또 1년이라는 세월이 지났습니다. 그는 계속 그 일을 쉬지 않고 해냈습니다. 3년째 접어들었지만 그는 막대기에 물을 주기 위해 여전히 나일 강을 왕복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가 막대기에 싹이 트기 시작한 것입니다.
순종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알게 하는 이야기입니다.
지금 여러분들이 경영하는 일들이 있다면, 깊이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의 뜻을 벗어난 자신의 경영이 아닌지, 아니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삶인지를 돌아보십시오.
여러분의 삶에서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함으로서, 하나님의 평안과 인도하심이 여러분의 삶을 주관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