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제하십시오(빌3:13-14)
작성자 배의신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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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01-03-18 20:52
*들어가는 말
사람들에게 어떤 특별한 일이 필요할 때는 사회에서 그들을 훈련시킵니다. 그런데 이런 특수 훈련을 하는 방법이 거의 비슷합니다. 일단은 일상적인 생활과 사회로부터 격리를 시킵니다. 그리고 잘 짜여진 조직과 시간의 틀 속에 집어넣습니다. 그리고는 강도 높은 훈련을 시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는 이유는 자기 훈련과 자기 절제를 위함입니다.
운동선수들은 어떤 중요한 대회를 앞두고 합숙훈련을 합니다. 이들은 짧은 영광의 순간을 얻기 위하여 오랜 기간을 훈련합니다. 이들에 비하여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하고 있는 이 경주는 비교할 수 없이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기 훈련과 자기 절제는 반드시 이루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ꁾ고전9:24-27, “운동장에서 달음질하는 자들이 다 달아날지라도 오직 상 얻는 자는 하나인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너희도 얻도록 이와 같이 달음질하라.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저희는 썩을 면류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 그러므로 내가 달음질하기를 향방 없는 것 같이 아니하고, 싸우기를 허공을 치는 것 같이 아니하여,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함이로라.”
뿐만 아니라,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진정한 자유를 누리기 원한다면 자기 훈련과 자기 절제가 필요합니다. 그리스의 철학자 ‘에픽테투스’는, ‘사람이 철저하게 자기 자신을 다스릴 때까지는 결코 자유롭지 못하다.’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요8:34)고 하시면서 죄악 된 행습에 대한 절제 훈련의 필요를 말씀하셨습니다. 삼손은 하나님의 택하심을 입어 세상에서 최고의 용사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자기 절제를 잃어버렸기 때문에 정욕과 욕심의 종이 되어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게 됩니다.
자기 훈련과 자기 절제를 위하여 몇 가지가 필요합니다.
1. 문제를 인정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종종 자신의 문제들을 무시하거나 부정하려고 애를 씁니다. “별 문제가 아닙니다.”라든지, “아무 문제도 없습니다.”라고 말입니다. 또는 자기 합리화를 통하여 피해보려고 합니다. “다른 사람들도 그러는걸요.”, “내가 좀 더 나은 환경에서 태어났더라면”, “누구 때문에” 등등. 이런 것은 나 자신을 발전시키지도 못하며, 자유로운 것이 아니라 오히려 비참함만 더하게 됩니다. 가인이 그러했으며, 사울 왕이 그러했습니다.
자신의 문제를 인정하십시오. 그리고 하나님께 그 사실을 내어 놓고 도움을 청하십시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문제를 해결한 다음에 하나님의 일을 하겠다고 하는 것을 봅니다. 우리는 자신의 문제를 스스로 해결할 수 있을 만한 능력이 없습니다. 아니, 우리 스스로가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면 하나님이 필요할리도 없겠지요.
‘탕자의 비유’에 보면, 인생의 많은 문제를 안고 있던 탕자가 자기 스스로 살길을 찾아보았지만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마지막에 택한 길은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었습니다. 탕자의 문제가 아버지께 맡겨졌을 때, 탕자는 영광을 회복했을 뿐만 아니라, 자유를 얻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탕자가 한 일은 단지 용기를 내어 아버지께 나아갔고, 자신을 인정한 것뿐입니다.
우리는 자신의 문제를 하나님께 인정하고 내어 놓기만 하면 됩니다. 여러분 자신이 가지고 있는 문제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기도하십시오. 애써 꾸미거나 변명을 준비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를 아뢰십시오.
2. 지난 일은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자신의 암울했던 기억이든, 좋게 생각되는 것이든 지나 간 모든 것은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다시 읽어봅시다.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나아가노라.”그렇습니다. 실패든 성공이든 지나간 것에 연연해 있다는 것은 마치 자동차를 운전하면서 항상 백미러만 보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내가 안전하게 앞으로 나아가기를 원한다면, 지나간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푯대를 향해야 합니다.
아이가 걸음마를 배울 때, 한 번 넘어졌다고 그냥 누워만 있다면 그는 결코 걸을 수 없을 것입니다. 아이는 자신이 걸을 수 있을 때까지 계속 시도할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지나간 과거에 사로잡혀서 그 환영 속에 살고 있습니다. ‘그 때가 좋았는데’라고 하면서 현실을 피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오히려 지나간 일을 잊고, 현실과 부딪쳐야 합니다.
주님은 결코 우리의 과거에 집착하지 않으십니다. 주님은 우리의 장래 생명에 대한 생각으로 충만하십니다.
ꁾ요8:10-12, “예수께서 일어나사 여자 외에 아무도 없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여자여, 너를 고소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 대답하되, ‘주여, 없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하시니라. 예수께서 또 일러 가라사대,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요10:10, “도적이 오는 것은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3. 자신의 감정에 도전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때때로 자신의 감정에 너무 얽매일 때가 있습니다. 잠언26:13절에서는 게으른 자가 자신의 감정에 충실해 있는 모습을 그리고 있습니다. “게으른 자는 길에 사자가 있다. 거리에 사자가 있다 하느니라.”고 했습니다. 자신의 감정에 치우쳐서 자신의 사명마저 저버렸던 사람도 있습니다. 앞서 보았던 사사 삼손과 요나 선지자입니다. 요나는 블레셋의 수도인 니느웨에 복음을 전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자신의 감정을 앞세워 거역했습니다. 블레셋은 자기 민족의 원수이기 때문에 차라리 망하는 편이 좋기 때문에 ‘회개를 선포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어긴 것입니다.
ꁾ욘4:1-3, “요나가 심히 싫어하고 노하여 여호와께 기도하여 가로되, 여호와여 내가 고국에 있을 때에 이러하겠다고 말씀하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러므로 내가 빨리 다시스로 도망하였사오니, 주께서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신 줄을 알았음이니이다. 여호와여 원컨대 이제 내 생명을 취하소서,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나음이니이다.”
만일 자신이 니느웨에 회개를 선포해서 그들이 회개한다면, 은혜로우신 하나님께서 그들을 용서하실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을 따를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차라리 죽여 달라고까지 했습니다. 얼마나 자신의 감정에 충실합니까? 여러분은 혹시 변화를 요구하시거나, 어떤 일을 요구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자신의 감정으로 막고 있지 않습니까? 즉흥적이거나 해묵은 자신의 감정에 도전하십시오. 자신의 지혜나 감정, 인간의 힘을 의지하지 말고 하나님의 뜻으로 자신을 제어해야 합니다.
ꁾ잠26:12, “네가 스스로 지혜롭게 여기는 자를 보느냐? 그보다 미련한 자에게 오히려 바랄 것이 있느니라.”/ 고전3:19-20, “이 세상 지혜는 하나님께 미련한 것이니 기록된바 지혜 있는 자들로 하여금 자기 궤휼에 빠지게 하시는 이라 하였고, 또 주께서 지혜 있는 자들의 생각을 헛것으로 아신다 하셨느니라.”/ 사2:22, “너희는 인생을 의지하지 말라. 그의 호흡은 코에 있나니 수에 칠 가치가 어디 있느뇨?”/ 사50:10, “너희 중에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 종의 목소리를 청종하는 자가 누구뇨? 흑암 중에 행하여 빛이 없는 자라도 여호와의 이름을 의뢰하며 자기 하나님께 의지할지어다.”
이 모든 일은 그리스도 안에서 가능합니다. 지금 당장 주님께 나의 감정과 삶을 주장해 주시기를 기도하십시오. 주님은 계획된 훈련을 통하여 변화시키시며 능력을 공급해 주십니다.
사람들에게 어떤 특별한 일이 필요할 때는 사회에서 그들을 훈련시킵니다. 그런데 이런 특수 훈련을 하는 방법이 거의 비슷합니다. 일단은 일상적인 생활과 사회로부터 격리를 시킵니다. 그리고 잘 짜여진 조직과 시간의 틀 속에 집어넣습니다. 그리고는 강도 높은 훈련을 시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는 이유는 자기 훈련과 자기 절제를 위함입니다.
운동선수들은 어떤 중요한 대회를 앞두고 합숙훈련을 합니다. 이들은 짧은 영광의 순간을 얻기 위하여 오랜 기간을 훈련합니다. 이들에 비하여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하고 있는 이 경주는 비교할 수 없이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기 훈련과 자기 절제는 반드시 이루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ꁾ고전9:24-27, “운동장에서 달음질하는 자들이 다 달아날지라도 오직 상 얻는 자는 하나인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너희도 얻도록 이와 같이 달음질하라.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저희는 썩을 면류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 그러므로 내가 달음질하기를 향방 없는 것 같이 아니하고, 싸우기를 허공을 치는 것 같이 아니하여,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함이로라.”
뿐만 아니라,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진정한 자유를 누리기 원한다면 자기 훈련과 자기 절제가 필요합니다. 그리스의 철학자 ‘에픽테투스’는, ‘사람이 철저하게 자기 자신을 다스릴 때까지는 결코 자유롭지 못하다.’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요8:34)고 하시면서 죄악 된 행습에 대한 절제 훈련의 필요를 말씀하셨습니다. 삼손은 하나님의 택하심을 입어 세상에서 최고의 용사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자기 절제를 잃어버렸기 때문에 정욕과 욕심의 종이 되어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게 됩니다.
자기 훈련과 자기 절제를 위하여 몇 가지가 필요합니다.
1. 문제를 인정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종종 자신의 문제들을 무시하거나 부정하려고 애를 씁니다. “별 문제가 아닙니다.”라든지, “아무 문제도 없습니다.”라고 말입니다. 또는 자기 합리화를 통하여 피해보려고 합니다. “다른 사람들도 그러는걸요.”, “내가 좀 더 나은 환경에서 태어났더라면”, “누구 때문에” 등등. 이런 것은 나 자신을 발전시키지도 못하며, 자유로운 것이 아니라 오히려 비참함만 더하게 됩니다. 가인이 그러했으며, 사울 왕이 그러했습니다.
자신의 문제를 인정하십시오. 그리고 하나님께 그 사실을 내어 놓고 도움을 청하십시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문제를 해결한 다음에 하나님의 일을 하겠다고 하는 것을 봅니다. 우리는 자신의 문제를 스스로 해결할 수 있을 만한 능력이 없습니다. 아니, 우리 스스로가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면 하나님이 필요할리도 없겠지요.
‘탕자의 비유’에 보면, 인생의 많은 문제를 안고 있던 탕자가 자기 스스로 살길을 찾아보았지만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마지막에 택한 길은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었습니다. 탕자의 문제가 아버지께 맡겨졌을 때, 탕자는 영광을 회복했을 뿐만 아니라, 자유를 얻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탕자가 한 일은 단지 용기를 내어 아버지께 나아갔고, 자신을 인정한 것뿐입니다.
우리는 자신의 문제를 하나님께 인정하고 내어 놓기만 하면 됩니다. 여러분 자신이 가지고 있는 문제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기도하십시오. 애써 꾸미거나 변명을 준비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를 아뢰십시오.
2. 지난 일은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자신의 암울했던 기억이든, 좋게 생각되는 것이든 지나 간 모든 것은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다시 읽어봅시다.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나아가노라.”그렇습니다. 실패든 성공이든 지나간 것에 연연해 있다는 것은 마치 자동차를 운전하면서 항상 백미러만 보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내가 안전하게 앞으로 나아가기를 원한다면, 지나간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푯대를 향해야 합니다.
아이가 걸음마를 배울 때, 한 번 넘어졌다고 그냥 누워만 있다면 그는 결코 걸을 수 없을 것입니다. 아이는 자신이 걸을 수 있을 때까지 계속 시도할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지나간 과거에 사로잡혀서 그 환영 속에 살고 있습니다. ‘그 때가 좋았는데’라고 하면서 현실을 피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오히려 지나간 일을 잊고, 현실과 부딪쳐야 합니다.
주님은 결코 우리의 과거에 집착하지 않으십니다. 주님은 우리의 장래 생명에 대한 생각으로 충만하십니다.
ꁾ요8:10-12, “예수께서 일어나사 여자 외에 아무도 없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여자여, 너를 고소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 대답하되, ‘주여, 없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하시니라. 예수께서 또 일러 가라사대,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요10:10, “도적이 오는 것은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3. 자신의 감정에 도전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때때로 자신의 감정에 너무 얽매일 때가 있습니다. 잠언26:13절에서는 게으른 자가 자신의 감정에 충실해 있는 모습을 그리고 있습니다. “게으른 자는 길에 사자가 있다. 거리에 사자가 있다 하느니라.”고 했습니다. 자신의 감정에 치우쳐서 자신의 사명마저 저버렸던 사람도 있습니다. 앞서 보았던 사사 삼손과 요나 선지자입니다. 요나는 블레셋의 수도인 니느웨에 복음을 전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자신의 감정을 앞세워 거역했습니다. 블레셋은 자기 민족의 원수이기 때문에 차라리 망하는 편이 좋기 때문에 ‘회개를 선포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어긴 것입니다.
ꁾ욘4:1-3, “요나가 심히 싫어하고 노하여 여호와께 기도하여 가로되, 여호와여 내가 고국에 있을 때에 이러하겠다고 말씀하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러므로 내가 빨리 다시스로 도망하였사오니, 주께서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신 줄을 알았음이니이다. 여호와여 원컨대 이제 내 생명을 취하소서,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나음이니이다.”
만일 자신이 니느웨에 회개를 선포해서 그들이 회개한다면, 은혜로우신 하나님께서 그들을 용서하실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을 따를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차라리 죽여 달라고까지 했습니다. 얼마나 자신의 감정에 충실합니까? 여러분은 혹시 변화를 요구하시거나, 어떤 일을 요구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자신의 감정으로 막고 있지 않습니까? 즉흥적이거나 해묵은 자신의 감정에 도전하십시오. 자신의 지혜나 감정, 인간의 힘을 의지하지 말고 하나님의 뜻으로 자신을 제어해야 합니다.
ꁾ잠26:12, “네가 스스로 지혜롭게 여기는 자를 보느냐? 그보다 미련한 자에게 오히려 바랄 것이 있느니라.”/ 고전3:19-20, “이 세상 지혜는 하나님께 미련한 것이니 기록된바 지혜 있는 자들로 하여금 자기 궤휼에 빠지게 하시는 이라 하였고, 또 주께서 지혜 있는 자들의 생각을 헛것으로 아신다 하셨느니라.”/ 사2:22, “너희는 인생을 의지하지 말라. 그의 호흡은 코에 있나니 수에 칠 가치가 어디 있느뇨?”/ 사50:10, “너희 중에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 종의 목소리를 청종하는 자가 누구뇨? 흑암 중에 행하여 빛이 없는 자라도 여호와의 이름을 의뢰하며 자기 하나님께 의지할지어다.”
이 모든 일은 그리스도 안에서 가능합니다. 지금 당장 주님께 나의 감정과 삶을 주장해 주시기를 기도하십시오. 주님은 계획된 훈련을 통하여 변화시키시며 능력을 공급해 주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