즐거움을 누리십시오(롬5:1-4)
작성자 배의신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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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01-03-18 20:44
◈들어가는 말
사람은 누구나 행복하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나름대로의 행복을 추구하기도 하며, 행복한 것처럼 꾸미기도합니다.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현실 그대로 살기 보다는 행복을 가장해서 삽니다. 과연 진정으로 행복을 누리고 사는 사람은 얼마나 되겠습니까?
톨스토이의 명작 중 하나인 "이반 일리히의 생애와 죽음"이라는 책의 마지막 장면은 주인공인 ‘이반’이 "억울하다!" 하고 중얼거리며 화를 내면서 죽는 것입니다. ‘이반 일리히’는 정직한 남편이며, 정직한 아버지로서 정직하게 살고 평생을 바쁘게 살았습니다. 그렇지만 죽음이 다가온 시간에 지나온 생애를 생각해 보니, 정말 행복다운 행복도 못 느꼈고 보람 있는 시간들을 가진 것 같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생의 마지막 순간을 화가 난 채 죽은 것입니다.
사람들은 지금도 무엇인가를 추구하면서 바쁘게 살아갑니다. 그러나 참다운 만족도 기쁨도 행복도 누리지는 못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행복하게 사는 비결을 많이 제시하십니다. 뿐만 아니라, 항상 기쁨과 즐거움을 누리면서 살 것을 바라십니다.
우리가 ‘팔복’이라고 부르는 마태복음 5:3-10절은 모두 “-한 사람은 행복하다”라고 전제합니다. 여기서 사용된 ‘복’이라는 단어는 μακάριοι인데, 영어 성경에서는 'happy'라고 번역했으며, ‘행복’을 말합니다. 그러나 단순한 행복보다는 ‘무한히 좋고 고위한 것’ 즉 ‘최고의 행복’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최고의 행복을 누리면서 살기를 원하시며 그 길을 제시하셨습니다.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 중에도 두 번째가 ‘희락’이며, 빌립보서 4:4절에서는 “주 안에서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고 하십니다.
ꁾ신26:11,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와 네 집에 주신 모든 복을 인하여 너는 레위인과 너의 중에 우거하는 객과 함께 즐거워할지니라.”/ 사61:10, “내가 여호와로 인하여 크게 기뻐하며 내 영혼이 나의 하나님으로 인하여 즐거워하리니, 이는 그가 구원의 옷으로 내게 입히시며 의의 겉옷으로 내게 더하심이 신랑이 사모를 쓰며 신부가 자기 보물로 단장함 같게 하셨음이라.”/ 합3:18,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 본문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인들이 행복하고 즐겁게 살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나 행복과 기쁨은 의미하는 바라 조금 다릅니다. 행복은 환경에 의해 지배받는 것입니다. 즉 내가 행복하려고 마음먹는다고 해서 행복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조성되는 환경에 의하여 행복을 느끼는 것입니다. 그러나 기쁨은 환경에 좌우되지 않는 내적인 것입니다. 기쁨은 내가 즐거워하려고 선택하는 것입니다. 환경에 상관없이 기뻐하기로 선택할 수 있습니다.
기쁨은 인생을 즐길 수 있게 하는 것입니다. 인생을 즐겁게 산다는 것은 긍정적인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바울을 통하여 우리에게 제시하신 즐거움을 누릴 수 있는 이유가 무엇인지 살펴봅시다.
1. 소망이 있기 때문에 즐거워합니다.
본문에서 바울은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한 결과로, “하나님의 영광을 소망하면서 즐거워한다.”고 말합니다. 그리스도인에게는 어떤 환경도 절망적인 것이 아니기 때문에 즐거워할 수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도 소망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소망은 든든한 기초가 없습니다. 인위적이고 스스로 키우는 소망입니다. 그들의 소망의 근거도 또한 일시적인 것입니다. 좋은 직장, 많은 봉급, 좋은 가정, 잘 생긴 외모 등등. 이 모든 것은 일시적인 것입니다. 이러한 것들이 사라질 때 소망도 함께 사라집니다.
얼마 전 신문에 보도된 바 있는 복권 당첨 이야기를 아시지요? 중국 음식점을 하는 사람이 복권에 당첨되었습니다. 행운이라면서 기뻐하며 돈을 찾아서 서로 나누기로 하고 냉장고에 넣어 두었는데, 그만 한 사람이 몰래 가지고 도망쳐 버렸습니다. 나머지 사람들이 낙담이 되어 일도 하지 않고 술만 마신다고 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자녀들에게 소망을 두기도하며, 부귀영화에 소망을 두기도 합니다. 이런 것은 잠시 머무는 것일 뿐입니다.
우리는 변하지 않는 영원한 소망을 가지고 있습니다. 로마서 12:12절에서, “소망 중에 기뻐하라.”고 했는데, 그 소망은 그리스도 안에서 가지고 있는 소망입니다. 우리에게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약속을 소망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기뻐할 수 있는 첫째 이유입니다.
2. 목적이 있기 때문에 기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일에 목적을 가지고 계십니다. 전도서3:1절에서, “천하에 범사가 기한이 있고 목적이 이룰 때가 있나니”라고 했습니다. 마태복음24:34-35절에서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 이 일이 다 이루리라. 천지는 없어지겠으나 내 말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고 하셨습니다.
본문 3절에서는 우리가 기뻐할 수 있는 이유를 “환난 중에서”라고 말씀합니다. 고통과 시련의 삶이 어떻게 기쁨과 즐거움이 됩니까? 그 이유를 알기 위해서 말씀 속에 있는 의미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그것은 환난의 목적에 대한 것입니다. 환난 중에 기뻐한다는 것은 현실을 애써 잊으려하거나 기쁜 체 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순교자 콤플렉스를 갖는 것도 아닙니다. 순교자 콤플렉스란, 환난을 당할수록 더 영적인 사람이 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환난 중에 기뻐하라는 것은, 환난 속에 목적이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환난 중에”라는 말에서 “중”이라는 말이 그것을 의미합니다.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에 환난을 기뻐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환난 속에는 하나님께서 숨겨두신 목적이 있기 때문에 그 목적을 기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성도에게 환난을 허용하시는 것은 환난이 목적이 아니라, 환난 후에 주어지는 목적 때문입니다.
본문에서는 환난 후에 주어지는 것이 “인내”와 “연단”과 “소망”이라고 했습니다. “인내”는 ‘곤란한 일을 처리하는 능력’을 의미하며, “연단”은 ‘믿을 수 있는 것으로 증명된 것’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소망”은 ‘바란다’는 것이나 ‘원한다’는 일반적인 의미가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능력을 확신한다.’는 의미입니다. 즉 하나님의 약속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능히 이루심을 확신하는 것입니다.
3. 하나님이 함께 하시기 때문에 기뻐합니다.
이는 그리스도인의 기쁨의 근원에 대한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의 기쁨은 문제가 있고 고통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의 기쁨의 근원은 하나님의 임재하심에 있기 때문입니다. 즉 우리의 어떤 상황과 환경 속에서도 하나님이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ꁾ사43:2,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함께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치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행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
결론입니다. 기쁨은 근육과도 같습니다. 훈련하면 할수록 더 강해집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즐거워하고 누리는 것은 사람의 행복을 위한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항상 기뻐함으로서 주님의 기쁨과 즐거움을 마음껏 누리시기를 축원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행복하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나름대로의 행복을 추구하기도 하며, 행복한 것처럼 꾸미기도합니다.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현실 그대로 살기 보다는 행복을 가장해서 삽니다. 과연 진정으로 행복을 누리고 사는 사람은 얼마나 되겠습니까?
톨스토이의 명작 중 하나인 "이반 일리히의 생애와 죽음"이라는 책의 마지막 장면은 주인공인 ‘이반’이 "억울하다!" 하고 중얼거리며 화를 내면서 죽는 것입니다. ‘이반 일리히’는 정직한 남편이며, 정직한 아버지로서 정직하게 살고 평생을 바쁘게 살았습니다. 그렇지만 죽음이 다가온 시간에 지나온 생애를 생각해 보니, 정말 행복다운 행복도 못 느꼈고 보람 있는 시간들을 가진 것 같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생의 마지막 순간을 화가 난 채 죽은 것입니다.
사람들은 지금도 무엇인가를 추구하면서 바쁘게 살아갑니다. 그러나 참다운 만족도 기쁨도 행복도 누리지는 못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행복하게 사는 비결을 많이 제시하십니다. 뿐만 아니라, 항상 기쁨과 즐거움을 누리면서 살 것을 바라십니다.
우리가 ‘팔복’이라고 부르는 마태복음 5:3-10절은 모두 “-한 사람은 행복하다”라고 전제합니다. 여기서 사용된 ‘복’이라는 단어는 μακάριοι인데, 영어 성경에서는 'happy'라고 번역했으며, ‘행복’을 말합니다. 그러나 단순한 행복보다는 ‘무한히 좋고 고위한 것’ 즉 ‘최고의 행복’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최고의 행복을 누리면서 살기를 원하시며 그 길을 제시하셨습니다.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 중에도 두 번째가 ‘희락’이며, 빌립보서 4:4절에서는 “주 안에서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고 하십니다.
ꁾ신26:11,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와 네 집에 주신 모든 복을 인하여 너는 레위인과 너의 중에 우거하는 객과 함께 즐거워할지니라.”/ 사61:10, “내가 여호와로 인하여 크게 기뻐하며 내 영혼이 나의 하나님으로 인하여 즐거워하리니, 이는 그가 구원의 옷으로 내게 입히시며 의의 겉옷으로 내게 더하심이 신랑이 사모를 쓰며 신부가 자기 보물로 단장함 같게 하셨음이라.”/ 합3:18,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 본문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인들이 행복하고 즐겁게 살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나 행복과 기쁨은 의미하는 바라 조금 다릅니다. 행복은 환경에 의해 지배받는 것입니다. 즉 내가 행복하려고 마음먹는다고 해서 행복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조성되는 환경에 의하여 행복을 느끼는 것입니다. 그러나 기쁨은 환경에 좌우되지 않는 내적인 것입니다. 기쁨은 내가 즐거워하려고 선택하는 것입니다. 환경에 상관없이 기뻐하기로 선택할 수 있습니다.
기쁨은 인생을 즐길 수 있게 하는 것입니다. 인생을 즐겁게 산다는 것은 긍정적인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바울을 통하여 우리에게 제시하신 즐거움을 누릴 수 있는 이유가 무엇인지 살펴봅시다.
1. 소망이 있기 때문에 즐거워합니다.
본문에서 바울은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한 결과로, “하나님의 영광을 소망하면서 즐거워한다.”고 말합니다. 그리스도인에게는 어떤 환경도 절망적인 것이 아니기 때문에 즐거워할 수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도 소망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소망은 든든한 기초가 없습니다. 인위적이고 스스로 키우는 소망입니다. 그들의 소망의 근거도 또한 일시적인 것입니다. 좋은 직장, 많은 봉급, 좋은 가정, 잘 생긴 외모 등등. 이 모든 것은 일시적인 것입니다. 이러한 것들이 사라질 때 소망도 함께 사라집니다.
얼마 전 신문에 보도된 바 있는 복권 당첨 이야기를 아시지요? 중국 음식점을 하는 사람이 복권에 당첨되었습니다. 행운이라면서 기뻐하며 돈을 찾아서 서로 나누기로 하고 냉장고에 넣어 두었는데, 그만 한 사람이 몰래 가지고 도망쳐 버렸습니다. 나머지 사람들이 낙담이 되어 일도 하지 않고 술만 마신다고 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자녀들에게 소망을 두기도하며, 부귀영화에 소망을 두기도 합니다. 이런 것은 잠시 머무는 것일 뿐입니다.
우리는 변하지 않는 영원한 소망을 가지고 있습니다. 로마서 12:12절에서, “소망 중에 기뻐하라.”고 했는데, 그 소망은 그리스도 안에서 가지고 있는 소망입니다. 우리에게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약속을 소망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기뻐할 수 있는 첫째 이유입니다.
2. 목적이 있기 때문에 기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일에 목적을 가지고 계십니다. 전도서3:1절에서, “천하에 범사가 기한이 있고 목적이 이룰 때가 있나니”라고 했습니다. 마태복음24:34-35절에서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 이 일이 다 이루리라. 천지는 없어지겠으나 내 말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고 하셨습니다.
본문 3절에서는 우리가 기뻐할 수 있는 이유를 “환난 중에서”라고 말씀합니다. 고통과 시련의 삶이 어떻게 기쁨과 즐거움이 됩니까? 그 이유를 알기 위해서 말씀 속에 있는 의미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그것은 환난의 목적에 대한 것입니다. 환난 중에 기뻐한다는 것은 현실을 애써 잊으려하거나 기쁜 체 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순교자 콤플렉스를 갖는 것도 아닙니다. 순교자 콤플렉스란, 환난을 당할수록 더 영적인 사람이 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환난 중에 기뻐하라는 것은, 환난 속에 목적이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환난 중에”라는 말에서 “중”이라는 말이 그것을 의미합니다.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에 환난을 기뻐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환난 속에는 하나님께서 숨겨두신 목적이 있기 때문에 그 목적을 기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성도에게 환난을 허용하시는 것은 환난이 목적이 아니라, 환난 후에 주어지는 목적 때문입니다.
본문에서는 환난 후에 주어지는 것이 “인내”와 “연단”과 “소망”이라고 했습니다. “인내”는 ‘곤란한 일을 처리하는 능력’을 의미하며, “연단”은 ‘믿을 수 있는 것으로 증명된 것’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소망”은 ‘바란다’는 것이나 ‘원한다’는 일반적인 의미가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능력을 확신한다.’는 의미입니다. 즉 하나님의 약속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능히 이루심을 확신하는 것입니다.
3. 하나님이 함께 하시기 때문에 기뻐합니다.
이는 그리스도인의 기쁨의 근원에 대한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의 기쁨은 문제가 있고 고통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의 기쁨의 근원은 하나님의 임재하심에 있기 때문입니다. 즉 우리의 어떤 상황과 환경 속에서도 하나님이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ꁾ사43:2,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함께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치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행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
결론입니다. 기쁨은 근육과도 같습니다. 훈련하면 할수록 더 강해집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즐거워하고 누리는 것은 사람의 행복을 위한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항상 기뻐함으로서 주님의 기쁨과 즐거움을 마음껏 누리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