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로자를 찾는 세상(전도서4:1-6)
작성자 배의신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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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01-02-12 21:34
♣ 들어가는 말
사람이 살아가는 일은 미개한 문명을 가진 옛날이나 문명이 극도로 발달한 지금이나 별로 다를 것이 없는 가 봅니다. 인간의 역사에서 공통적인 것이 약육강식입니다. 이는 인간뿐만 아니라 동식물계를 막론하고 모든 생명체의 생존 방식입니다. 아마도 이러한 좋지 않는 생존방식은 인간의 조상인 아담과 하와의 범죄 이후에 생겨났을 것입니다.
이 시간의 본문에서 지혜자는 세상의 이러한 불합리성이 극심하다고 한탄합니다. 솔로몬은 왕으로써 또는 지헤자로서 자신이 보고 느낀 세상을 극단적으로 표현했습니다. “살아 있어서 이런 악을 보느니, 차라리 죽은 지 오래되어 악을 덜 본 자가 복되고, 이보다도 차라리 태어나지 않아서 이런 악을 보지 않은 사람이 더욱 복되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지혜자의 더한 탄식은 불합리한 세상에서 억압받는 자들이 위로를 받지 못하는 것에서 비롯됩니다. 즉 세상은 위로자를 구하지만 위로할 자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런 세상에서 지혜로운 대처 방안은 작은 것으로 만족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본문 6절에서, 지나친 욕심으로 두 손에 가득 들고도 더욱 얻으려고 수고하며, 헛된 바람을 잡으려고 하는 것보다. 한 손에만 가득하고 평온을 누리는 것이 좋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두 가지를 살펴보려고 합니다. 불합리한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은 하나님의 손길에 맡기고, 우리는 불합리한 세상에서 고통 받는 사람들의 고통을 조금이라도 상쇄시킬 수 있는 위로자의 역할을 하는 것이 첫 번째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하나님께 의뢰하는 삶으로 만족하며 그 삶을 누리는 것입니다.
1. 위로자로서의 길을 살펴봅시다.
‘위로’라는 말은 원어로 (나함, םꖏꗺ /파라칼레오, παρακαλὲω) 라는 말을 사용합니다. 이 말은 ‘부르다’, ‘동정하다’, ‘위로받다’, ‘격려하다’ 등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가까이서 불러줄 사람이 없음을 한탄하며, 동정을 구하지만 동정할 자가 없고, 위로와 격려를 기다리지만 그렇게 하는 사람이 없음으로 더욱 삶이 고통스러운 것입니다.
왜 이렇게 세상이 각박해집니까? 이유는 모두가 고갈되고 갈급하기 때문입니다. 만족과 평안이 없는 사람들이 어떻게 다른 사람들을 위로하며 격려하며 동정할 수 있겠습니까? 자신들의 만족을 찾기에 더 갈급한데 말입니다.
위로자의 일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몫입니다. 왜냐하면 세상을 위로하시고 인생을 위로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출애굽기2:23-25절을 보십시오. “여러 해 후에 애굽 왕은 죽었고 이스라엘 자손은 고역으로 인하여 탄식하며 부르짖으니, 그 고역으로 인하여 부르짖는 소리가 하나님께 상달한지라. 하나님이 그 고통 소리를 들으시고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세운 그 언약을 기억하사 이스라엘 자손을 권념하셨더라.”고 하셨습니다. “권념”이라는 말은 ‘돌아보아 생각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신약에서는 성도가 위로자의 역할을 해야 할 것을 더욱 확실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성령님께서 ‘위로자’이시며, 성령으로 사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이 위로를 맡기셨기 때문입니다.
- ꁾ고후1:3-5, “찬송하리로다.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요 자비의 아버지시요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며,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친 것 같이 우리의 위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치는도다.”/ 행9:31, “그리하여 온 유대와 갈릴리와 사마리아 교회가 평안하여 든든히 서 가고 주를 경외함과 성령의 위로로 진행하여 수가 더 많아지니라.”
이스라엘의 고통을 들으시고 살펴주셨던 하나님께서 지금도 나를 떠나지 않으시고 나와 함께 하시면서 붙잡으시고 격려하십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위로는 나 자신만을 위로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위로로 내가 힘을 얻고, 그로인하여 다른 사람까지 능히 위로하도록 하십니다. 그래서 우리 그리스도인이야말로 세상을 위로할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 ꁾ사66:13, “어미가 자식을 위로함 같이 내가 너희를 위로할 것인즉, 너희가 예루살렘에서 위로를 받으리니”
위로의 처소인 예루살렘은 하나님께서 임재하시는 곳입니다. 오늘로 말하면, 하나님과 함께하는 삶이 위로의 삶이 되는 것입니다. 삶을 하나님과 함께 한다는 것은, 삶을 공유하며 나눈다는 의미입니다. 즉 나의 삶을 하나님께 맡기고, 하나님의 일에 내가 함께 동참하는 것입니다.
위로로 충만해진 삶으로 이제 두 번째 주제를 살펴봅시다.
2. 하나님께 의뢰하는 삶으로 만족을 누리는 것을 살펴봅시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을 믿는데도 불구하고 좌절을 경험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이유는 간단합니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과 실제의 생활에서의 경영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일이 잘되고 삶이 형통하면 자신이 경영을 잘 해서 그런 줄로 생각합니다. 그러다가 일이 힘들어지고 경영이 벽에 부딪칠 때면 환경과 다른 어떤 원인을 찾으며 책임을 전가하려고 합니다. ‘잘 되면 내 탓, 안 되면 조상 탓’이라고 하는 우리의 옛말을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다가 더 이상 나아갈 수 없는 한계에 부딪칠 때에야 비로소 자신을 돌아봅니다. 더 이상 살 의욕을 잃어버리는 사람, 극단적인 행동으로 치닫는 사람,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자포자기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사람인 그리스도인에게는 새로운 자기발견의 기회가 주어집니다. 그것은 자신의 죄인 됨과 인간적인 한계를 인정하고 하나님을 의지하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어부들을 제자로 부르실 때와 생애의 깊은 좌절을 느낄 때 그러했습니다. 지금까지 자신들의 능력으로 살아왔던 제자들은 인간적인 한계를 느꼈습니다. 밤새도록 그물질을 했지만 허탕을 침으로서 좌절하게 되었습니다. 또한 그토록 믿고 따랐던 주님이 십자가의 형틀에서 비참하게 생애를 마쳤습니다. 제자들이 볼 때에는 모든 것이 끝나버린 좌절과 절망의 시간이었습니다.
인간의 좌절과 한계의 선상에서 능력의 주님이 손을 내미셨습니다. 주님을 만난 제자들은 기쁨과 환희보다는 죄인 된 자신의 모습을 보았으며, 주님을 의지하는 삶으로 재창조된 것입니다.
생애의 기쁨과 만족은 우리 하나님께 있습니다. 인간적인 지나친 욕구는 결코 만족을 모릅니다. 끝없이 행복의 파랑새를 쫓으며, 더 많은 소유와 권력과 지식과 명예를 추구합니다. 본문에서처럼, 두 손에 가득 들고서도 누릴 줄은 모르고 수고롭게 더 많은 것을 추구합니다. 그 행동은 바람을 잡으려고 하는 것처럼 하나님께는 어리석은 것입니다.
그렇다면 지금의 생활이 어떠하든지 마냥 즐거워하고 만족하면서 꿈도 희망도 없이 살라는 것입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 안에서 즐거워하고 만족한다는 것은 내 생활에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전적으로 인정하고 의지하는 삶의 표현입니다.
하나님을 인정하고 의지하는 삶에서 더 필요한 것은 감사함으로 아뢰면 됩니다. 그렇게 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우리의 삶을 돌아보십니다. 요한복음 10:14절에서는, “나는 선한 목자라. 내가 내 양을 안다”고 하셨으며, 마태복음 6:8절에서는,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신다.”고 하셨습니다. 바로 이런 의미에서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 4:6-7절에서,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고 했습니다.
지금 여러분의 필요가 무엇입니까? 그 필요를 요구하기 전에 먼저 하나님을 인정하고, 하나님께 삶을 의뢰하십시오. 곧 지금의 환경을 즐거워하며 만족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결코 시험하지 마십시오. 그런 척 하는 것이 아니라, 진정으로 하나님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런 다음에 무엇이든지 필요한 것은 감사하는 마음으로 아뢰십시오. 하나님의 뜻 안에서 이루어 주실 것입니다.
다시 한 번 묻겠습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의 주인이십니까?’그렇다면 지금의 생활을 인정하십시오. 지금의 생활도 하나님께서 조성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는 하나님을 인정하는 가운데서 담대하게 길을 나아가십시오. 사도 바울은 길이 막혔을 때 주저앉지 않았습니다. 기도하면서 담대하게 길을 나셨습니다. 잘못된 길은 주인이신 하나님께서 수정하게 하십니다.
나 자신의 삶이 즐겁지 않고 만족하지 않는데, 어떻게 남의 아픔을 위로하며 격려하겠습니까? 그래서 이 두 가지 주제는 함께 있는 것입니다. 이제 담대하게 나아가십시오. 장애물이 있다면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고 뛰어넘으십시오. 하나님의 나라는 적극적으로 도전하는 자에게 주어집니다.
여러분의 삶이 하나님을 인정하는 가운데 자신이 위로받으면서, 힘들어하고 고통 하는 이웃들의 위로자가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사람이 살아가는 일은 미개한 문명을 가진 옛날이나 문명이 극도로 발달한 지금이나 별로 다를 것이 없는 가 봅니다. 인간의 역사에서 공통적인 것이 약육강식입니다. 이는 인간뿐만 아니라 동식물계를 막론하고 모든 생명체의 생존 방식입니다. 아마도 이러한 좋지 않는 생존방식은 인간의 조상인 아담과 하와의 범죄 이후에 생겨났을 것입니다.
이 시간의 본문에서 지혜자는 세상의 이러한 불합리성이 극심하다고 한탄합니다. 솔로몬은 왕으로써 또는 지헤자로서 자신이 보고 느낀 세상을 극단적으로 표현했습니다. “살아 있어서 이런 악을 보느니, 차라리 죽은 지 오래되어 악을 덜 본 자가 복되고, 이보다도 차라리 태어나지 않아서 이런 악을 보지 않은 사람이 더욱 복되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지혜자의 더한 탄식은 불합리한 세상에서 억압받는 자들이 위로를 받지 못하는 것에서 비롯됩니다. 즉 세상은 위로자를 구하지만 위로할 자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런 세상에서 지혜로운 대처 방안은 작은 것으로 만족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본문 6절에서, 지나친 욕심으로 두 손에 가득 들고도 더욱 얻으려고 수고하며, 헛된 바람을 잡으려고 하는 것보다. 한 손에만 가득하고 평온을 누리는 것이 좋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두 가지를 살펴보려고 합니다. 불합리한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은 하나님의 손길에 맡기고, 우리는 불합리한 세상에서 고통 받는 사람들의 고통을 조금이라도 상쇄시킬 수 있는 위로자의 역할을 하는 것이 첫 번째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하나님께 의뢰하는 삶으로 만족하며 그 삶을 누리는 것입니다.
1. 위로자로서의 길을 살펴봅시다.
‘위로’라는 말은 원어로 (나함, םꖏꗺ /파라칼레오, παρακαλὲω) 라는 말을 사용합니다. 이 말은 ‘부르다’, ‘동정하다’, ‘위로받다’, ‘격려하다’ 등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가까이서 불러줄 사람이 없음을 한탄하며, 동정을 구하지만 동정할 자가 없고, 위로와 격려를 기다리지만 그렇게 하는 사람이 없음으로 더욱 삶이 고통스러운 것입니다.
왜 이렇게 세상이 각박해집니까? 이유는 모두가 고갈되고 갈급하기 때문입니다. 만족과 평안이 없는 사람들이 어떻게 다른 사람들을 위로하며 격려하며 동정할 수 있겠습니까? 자신들의 만족을 찾기에 더 갈급한데 말입니다.
위로자의 일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몫입니다. 왜냐하면 세상을 위로하시고 인생을 위로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출애굽기2:23-25절을 보십시오. “여러 해 후에 애굽 왕은 죽었고 이스라엘 자손은 고역으로 인하여 탄식하며 부르짖으니, 그 고역으로 인하여 부르짖는 소리가 하나님께 상달한지라. 하나님이 그 고통 소리를 들으시고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세운 그 언약을 기억하사 이스라엘 자손을 권념하셨더라.”고 하셨습니다. “권념”이라는 말은 ‘돌아보아 생각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신약에서는 성도가 위로자의 역할을 해야 할 것을 더욱 확실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성령님께서 ‘위로자’이시며, 성령으로 사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이 위로를 맡기셨기 때문입니다.
- ꁾ고후1:3-5, “찬송하리로다.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요 자비의 아버지시요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며,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친 것 같이 우리의 위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치는도다.”/ 행9:31, “그리하여 온 유대와 갈릴리와 사마리아 교회가 평안하여 든든히 서 가고 주를 경외함과 성령의 위로로 진행하여 수가 더 많아지니라.”
이스라엘의 고통을 들으시고 살펴주셨던 하나님께서 지금도 나를 떠나지 않으시고 나와 함께 하시면서 붙잡으시고 격려하십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위로는 나 자신만을 위로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위로로 내가 힘을 얻고, 그로인하여 다른 사람까지 능히 위로하도록 하십니다. 그래서 우리 그리스도인이야말로 세상을 위로할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 ꁾ사66:13, “어미가 자식을 위로함 같이 내가 너희를 위로할 것인즉, 너희가 예루살렘에서 위로를 받으리니”
위로의 처소인 예루살렘은 하나님께서 임재하시는 곳입니다. 오늘로 말하면, 하나님과 함께하는 삶이 위로의 삶이 되는 것입니다. 삶을 하나님과 함께 한다는 것은, 삶을 공유하며 나눈다는 의미입니다. 즉 나의 삶을 하나님께 맡기고, 하나님의 일에 내가 함께 동참하는 것입니다.
위로로 충만해진 삶으로 이제 두 번째 주제를 살펴봅시다.
2. 하나님께 의뢰하는 삶으로 만족을 누리는 것을 살펴봅시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을 믿는데도 불구하고 좌절을 경험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이유는 간단합니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과 실제의 생활에서의 경영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일이 잘되고 삶이 형통하면 자신이 경영을 잘 해서 그런 줄로 생각합니다. 그러다가 일이 힘들어지고 경영이 벽에 부딪칠 때면 환경과 다른 어떤 원인을 찾으며 책임을 전가하려고 합니다. ‘잘 되면 내 탓, 안 되면 조상 탓’이라고 하는 우리의 옛말을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다가 더 이상 나아갈 수 없는 한계에 부딪칠 때에야 비로소 자신을 돌아봅니다. 더 이상 살 의욕을 잃어버리는 사람, 극단적인 행동으로 치닫는 사람,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자포자기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사람인 그리스도인에게는 새로운 자기발견의 기회가 주어집니다. 그것은 자신의 죄인 됨과 인간적인 한계를 인정하고 하나님을 의지하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어부들을 제자로 부르실 때와 생애의 깊은 좌절을 느낄 때 그러했습니다. 지금까지 자신들의 능력으로 살아왔던 제자들은 인간적인 한계를 느꼈습니다. 밤새도록 그물질을 했지만 허탕을 침으로서 좌절하게 되었습니다. 또한 그토록 믿고 따랐던 주님이 십자가의 형틀에서 비참하게 생애를 마쳤습니다. 제자들이 볼 때에는 모든 것이 끝나버린 좌절과 절망의 시간이었습니다.
인간의 좌절과 한계의 선상에서 능력의 주님이 손을 내미셨습니다. 주님을 만난 제자들은 기쁨과 환희보다는 죄인 된 자신의 모습을 보았으며, 주님을 의지하는 삶으로 재창조된 것입니다.
생애의 기쁨과 만족은 우리 하나님께 있습니다. 인간적인 지나친 욕구는 결코 만족을 모릅니다. 끝없이 행복의 파랑새를 쫓으며, 더 많은 소유와 권력과 지식과 명예를 추구합니다. 본문에서처럼, 두 손에 가득 들고서도 누릴 줄은 모르고 수고롭게 더 많은 것을 추구합니다. 그 행동은 바람을 잡으려고 하는 것처럼 하나님께는 어리석은 것입니다.
그렇다면 지금의 생활이 어떠하든지 마냥 즐거워하고 만족하면서 꿈도 희망도 없이 살라는 것입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 안에서 즐거워하고 만족한다는 것은 내 생활에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전적으로 인정하고 의지하는 삶의 표현입니다.
하나님을 인정하고 의지하는 삶에서 더 필요한 것은 감사함으로 아뢰면 됩니다. 그렇게 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우리의 삶을 돌아보십니다. 요한복음 10:14절에서는, “나는 선한 목자라. 내가 내 양을 안다”고 하셨으며, 마태복음 6:8절에서는,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신다.”고 하셨습니다. 바로 이런 의미에서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 4:6-7절에서,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고 했습니다.
지금 여러분의 필요가 무엇입니까? 그 필요를 요구하기 전에 먼저 하나님을 인정하고, 하나님께 삶을 의뢰하십시오. 곧 지금의 환경을 즐거워하며 만족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결코 시험하지 마십시오. 그런 척 하는 것이 아니라, 진정으로 하나님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런 다음에 무엇이든지 필요한 것은 감사하는 마음으로 아뢰십시오. 하나님의 뜻 안에서 이루어 주실 것입니다.
다시 한 번 묻겠습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의 주인이십니까?’그렇다면 지금의 생활을 인정하십시오. 지금의 생활도 하나님께서 조성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는 하나님을 인정하는 가운데서 담대하게 길을 나아가십시오. 사도 바울은 길이 막혔을 때 주저앉지 않았습니다. 기도하면서 담대하게 길을 나셨습니다. 잘못된 길은 주인이신 하나님께서 수정하게 하십니다.
나 자신의 삶이 즐겁지 않고 만족하지 않는데, 어떻게 남의 아픔을 위로하며 격려하겠습니까? 그래서 이 두 가지 주제는 함께 있는 것입니다. 이제 담대하게 나아가십시오. 장애물이 있다면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고 뛰어넘으십시오. 하나님의 나라는 적극적으로 도전하는 자에게 주어집니다.
여러분의 삶이 하나님을 인정하는 가운데 자신이 위로받으면서, 힘들어하고 고통 하는 이웃들의 위로자가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