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친백성(디도서2:11-14)
작성자 배의신 댓글
/ 조회: 11,695회
작성일
2000-11-23 22:16
♡들어가는 말
숲 속에 들어가 있으면서 산 전체를 모르고, 바다 한 복판에 떠 있는 표류자가 그 바다를 모르듯이,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은혜와 하나님이 나에게 원하시는 '부르심의 방향'을 모를 때가 많이 있습니다.
톨스토이 우화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물고기들이 한 번은 사람들의 대화를 엿 들었는데, '물고기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오직 물이다'라는 이야기였습니다. 물고기들은 그토록 중요하다는 물이 도대체 무엇인가 하여, 나이 많은 물고기에게 물어보기로 했습니다. 늙은 물고기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물이란, 우리가 그 속에 살고 있는 것이다. 결국 우리의 생명이라고 말할 수 있다. 우리 온 몸이 언제나 그 물에 적셔 있으며, 그 속에서 날마다 살기 때문에 우리가 느끼지 못하고, 생각조차 하지 않고 있었을 뿐이다."
톨스토이는 믿음이 독실한 크리스천으로서, 이 우화를 하나님의 사랑과 섭리를 설명하는 이야기로 썼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지금까지 살아왔으며, 지금도 살고 있으며, 또한 주님이 부르실 때까지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갈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늘 숨쉬는 공기처럼 하나님의 은혜가 주어지지만,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거나 감사하지 못하는 것이 우리들입니다. 오히려 섭섭하고 고통스러웠던 일들을 더 많이 생각한다. 이제 한 회기를 마감하는 주일에 하나님의 친 백성으로서 합당한 삶의 자세가 어떤 것인지 말씀을 경청합시다.
오늘 본문을 포함하는 『디도서』는 사도 바울이 목회자인 「디도」에게 보낸 서신입니다. 이 말씀을 통하여 목회자가 성도들에게 가르쳐야 하는 '바른 교훈'이 무엇인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바꾸어 말하면, 성도가 배우고 따라야할 '진리의 길'이 무엇인지를 가르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목회자인 「디도」에게 교회의 여러 계층의 사람들에게 "바른 교훈에 합한 것"을 가르치라고 본문을 기록하고 있습니다(1절). 1-10절까지는 성도의 바른 생활을 위한 교훈으로 주어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시간의 본문에서는 성도가 바른 생활을 할 수 있도록 하는 유일한 길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기독교 교리의 근본이며 핵심입니다.
성도의 신앙이 그리스도를 닮도록 성장시키는 힘은, 목회자의 능력이나 자질 또는 훈련받는 성도들의 수준이나, 교육 방법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죄인 된 사람을 지극히 사랑하시며 온전케 되기를 날마다 기대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는 것입니다.
- 슥4:6하, "… 만군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신으로 되느니라"
이렇게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은혜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베푸시는 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구원의 은혜를 입은 자들에게 지속적인 훈련을 통한 양육의 은혜를 더하십니다(본문12상). 이러한 사실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통하여 더욱 명백하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 요10:10하, "…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양육의 은혜를 더하시는 목적은 뒷 부분에서 살펴보겠습니다.
1. 이처럼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고 살아가는 성도에게 요구되는 훈련은 무엇이겠습니까?
훈련을 알아보기 전에 먼저 훈련이 요구되는 대상이 누구인지를 알아야합니다. 11절에서 그 대상이 "모든 사람"이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세상 사람 전부'를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인종이나 사회적 지위, 성별이나 나이를 초월하여 주어지는 하나님의 은혜의 보편성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훈련의 대상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입은 모든 사람이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입은 자들에게 주어지는 훈련은 어떤 것입니까?
1) 단절과 절제의 훈련입니다.
본문12절 상반절에서, "경건치 않은 것과 이 세상의 정욕을 다 버리고…"라고 했습니다. 이는 이 세상의 죄악 된 모든 습관과의 단절을 의미하며, 또한 지속적으로 절제하는 훈련입니다.
세상에 속한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들은 지극히 감각적이며 한 순간의 것입니다. 이러한 것은 구원받은 사람들에게는 합당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경건치 않은 모든 행위와 불신앙적인 행위를 끊어버려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 나라에 이르기까지 계속적으로 절제하며 인내해야 합니다.
- 벧전1:13-15, "그러므로 너희 마음의 허리를 동이고 근신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너희에게 가져올 은혜를 온전히 바랄지어다. 너희가 순종하는 자식처럼 이전 알지 못할 때에 좇던 너희 사욕을 본 삼지 말고,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자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
그러나 과거의 습성과의 단절과 절제는 그리 쉬운 일이 아닙니다.
오래 전, 1.21사태 때 청와대를 습격하려고 무장공비로 내려왔다가 붙잡혀 유일하게 생존한 김신조 씨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자유의 품에 안겨서 한동안 편안하게 살았지만 이것만으로는 삶의 진정한 의미를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자유는 얻었지만 이전의 생활과 너무도 다른 생활로 인하여 '이것이 과연 참된 자유인가?'를 고민했습니다. 그러다가 술을 마시기 시작해서 술고래가 되었습니다.
그러한 고민 중에 교회를 찾게 되었고,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고민을 주님께 토로했고, 그의 마음이 새로운 기쁨으로 충만했습니다. 그 후부터는 길에서 혹시 자신을 알아보고, "저 사람, 김신조 아니야?"라고 하면, 그는 "할렐루야, 할렐루야!" 라고 응답하면서 기뻐했다고 합니다.
인간적인 단절과 절제는 더욱 깊은 고민과 좌절을 안겨주기 쉽습니다. 가장 확실한 단절과 절제는 내 영의 삶에 예수 그리스도로 충만 되게 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두 번째 훈련인 경건의 훈련입니다.
2) 경건의 훈련입니다.
12절 하반절에서 "…근심함과 의로움과 경건함으로 이 세상에 살고"라고 했습니다. 이는 날마다 하나님을 향하여 단정한 생활을 할 수 있도록 자신의 악한 본성을 쳐서 복종시키는 영적 훈련입니다.
"근신함"이란, 자기 자신과의 관계에서 내면의 욕망을 제어하는 신중함을 의미합니다. "의로움"이란,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공정하고 진리에 입각하여 행동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경건함"이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하나님을 경외하고 순종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성도를 양육하시는 훈련은 자신과 다른 사람과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추구하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렇게 사는 삶의 현장은 천국이 아니라 현재 살아가고 있는 '이 세상'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성도가 험난한 세상을 이길 수 있는 길을 주셨습니다. 이것이 세 번째 훈련입니다.
3) 소망으로 인내하는 훈련입니다.
13절 상반절에서, "복스러운 소망과 우리의 크신 하나님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심을 기다리게 하셨으니…"라고 했습니다. 이는 성도가 이 세상에서 살면서 절망하거나 좌절하지 않도록 하기 위한 훈련입니다. 이 훈련은 두 가지로 나타납니다. 하나는, "복스러운 소망"으로써 영생에 대한 소망입니다. 다른 하나는,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실 것"을 기다리는 것으로서 예수님의 재림에 대한 소망입니다.
운동 경기에 임하는 선수가 자신이 목표하는 영광을 얻으려면, 훈련이나 경기 도중의 고통과 어려움을 이겨내야만 합니다. 바꾸어 말하면, 운동 선수가 고통스러운 훈련이나 경기를 이길 수 있는 것은 마지막 순간의 영광을 바라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성도들도 역시 생명의 면류관과 영광의 나라를 소망하면서 나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주님이 재림하시는 그 때에는 지금껏 세상의 죄악과 고통으로 탄식하며 기다리던 모든 성도들이 즐거움으로 영광의 자리에 참여할 것입니다.
- 롬8:21-23,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 노릇 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하는 것을 우리가 아나니, 이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될 것 곧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리느니라"
하나님께서 성도들에게 이러한 양육의 은혜를 베푸시는 이유가 있습니다.
2. 그러면 하나님께서 양육의 은혜를 베푸시는 목적이 무엇입니까?
14절을 읽어봅시다.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구속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에 열심하는 친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께서는 더러움에 있던 인간을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속전으로 지불하시고 우리를 놓아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친히 우리의 죄의 대가를 치르는 속전이 되셨으며, 우리를 자신의 소유로 삼으셨습니다. 이렇게 큰 대가를 치르시고 우리를 친백성으로 삼으신 목적은 '선한 일에 열심을 내게 하기 위함'입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소유된 백성들은 하나님의 뜻과 교훈에 맞는 행위에 열심을 내어 따라가야 합니다.
탈무드에 있는 이야기입니다. 한 랍비가 제자 가운데 한 사람을 저녁 식사에 초대했습니다. 랍비는 이 제자에게, "포도주를 마시기 전에 하는 기도문을 외워보시오."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학생은 처음 몇 줄밖에 외우지 못했습니다. 다른 기도문에 대해서도 모두 그랬고, 지금까지 가르친 것도 거의 외우지 못했습니다. 랍비는 그 제자를 나무랐습니다. 젊은 그 제자는 식사가 끝나자마자 고개를 푹 숙인 채 돌아갔습니다.
얼마 후, 랍비는 그 때 그 제자가, 앓고 있는 사람이 있으면 그 집에 가서 거들어 주고, 가난한 사람이 있으면 스스로 일해서 번 돈을 보내는 등. 선한 일을 많이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랍비는 부끄러웠습니다. 그리고 랍비는 모든 제자들을 모아놓고 이렇게 말했다.
"마음에 생각한 것은 곧 바로 행동하게 됩니다. 그러나 여러 권의 책을 읽어 많이 알고있다고 해도, 마음을 밭 갈지 않는다면 알고 있는데 머물고 맙니다. 마음을 밭갈이함은 두뇌를 밭갈이함보다 더 값진 것입니다. 이것은 '바른 것을 배우기보다 바른 것을 행하는 편이 훨씬 더 낫다.'는 말과 같은 뜻입니다.
그렇습니다. 신앙의 연륜이 오랜 성도들이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지만, 행함은 많지 않음을 봅니다. 신앙은 지식이 아니라 믿음과 믿음으로 비롯된 행함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이제 한 회기를 마감하고, 다시 한 회기를 시작하게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그 큰 은혜를 입은 하나님의 친백성으로서 합당하게 살아 왔던가를 돌아보며, 동시에 새로운 마음으로 하나님의 은혜의 자리로 더욱 가까이 다가갈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숲 속에 들어가 있으면서 산 전체를 모르고, 바다 한 복판에 떠 있는 표류자가 그 바다를 모르듯이,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은혜와 하나님이 나에게 원하시는 '부르심의 방향'을 모를 때가 많이 있습니다.
톨스토이 우화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물고기들이 한 번은 사람들의 대화를 엿 들었는데, '물고기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오직 물이다'라는 이야기였습니다. 물고기들은 그토록 중요하다는 물이 도대체 무엇인가 하여, 나이 많은 물고기에게 물어보기로 했습니다. 늙은 물고기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물이란, 우리가 그 속에 살고 있는 것이다. 결국 우리의 생명이라고 말할 수 있다. 우리 온 몸이 언제나 그 물에 적셔 있으며, 그 속에서 날마다 살기 때문에 우리가 느끼지 못하고, 생각조차 하지 않고 있었을 뿐이다."
톨스토이는 믿음이 독실한 크리스천으로서, 이 우화를 하나님의 사랑과 섭리를 설명하는 이야기로 썼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지금까지 살아왔으며, 지금도 살고 있으며, 또한 주님이 부르실 때까지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갈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늘 숨쉬는 공기처럼 하나님의 은혜가 주어지지만,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거나 감사하지 못하는 것이 우리들입니다. 오히려 섭섭하고 고통스러웠던 일들을 더 많이 생각한다. 이제 한 회기를 마감하는 주일에 하나님의 친 백성으로서 합당한 삶의 자세가 어떤 것인지 말씀을 경청합시다.
오늘 본문을 포함하는 『디도서』는 사도 바울이 목회자인 「디도」에게 보낸 서신입니다. 이 말씀을 통하여 목회자가 성도들에게 가르쳐야 하는 '바른 교훈'이 무엇인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바꾸어 말하면, 성도가 배우고 따라야할 '진리의 길'이 무엇인지를 가르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목회자인 「디도」에게 교회의 여러 계층의 사람들에게 "바른 교훈에 합한 것"을 가르치라고 본문을 기록하고 있습니다(1절). 1-10절까지는 성도의 바른 생활을 위한 교훈으로 주어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시간의 본문에서는 성도가 바른 생활을 할 수 있도록 하는 유일한 길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기독교 교리의 근본이며 핵심입니다.
성도의 신앙이 그리스도를 닮도록 성장시키는 힘은, 목회자의 능력이나 자질 또는 훈련받는 성도들의 수준이나, 교육 방법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죄인 된 사람을 지극히 사랑하시며 온전케 되기를 날마다 기대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는 것입니다.
- 슥4:6하, "… 만군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신으로 되느니라"
이렇게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은혜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베푸시는 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구원의 은혜를 입은 자들에게 지속적인 훈련을 통한 양육의 은혜를 더하십니다(본문12상). 이러한 사실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통하여 더욱 명백하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 요10:10하, "…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양육의 은혜를 더하시는 목적은 뒷 부분에서 살펴보겠습니다.
1. 이처럼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고 살아가는 성도에게 요구되는 훈련은 무엇이겠습니까?
훈련을 알아보기 전에 먼저 훈련이 요구되는 대상이 누구인지를 알아야합니다. 11절에서 그 대상이 "모든 사람"이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세상 사람 전부'를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인종이나 사회적 지위, 성별이나 나이를 초월하여 주어지는 하나님의 은혜의 보편성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훈련의 대상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입은 모든 사람이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입은 자들에게 주어지는 훈련은 어떤 것입니까?
1) 단절과 절제의 훈련입니다.
본문12절 상반절에서, "경건치 않은 것과 이 세상의 정욕을 다 버리고…"라고 했습니다. 이는 이 세상의 죄악 된 모든 습관과의 단절을 의미하며, 또한 지속적으로 절제하는 훈련입니다.
세상에 속한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들은 지극히 감각적이며 한 순간의 것입니다. 이러한 것은 구원받은 사람들에게는 합당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경건치 않은 모든 행위와 불신앙적인 행위를 끊어버려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 나라에 이르기까지 계속적으로 절제하며 인내해야 합니다.
- 벧전1:13-15, "그러므로 너희 마음의 허리를 동이고 근신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너희에게 가져올 은혜를 온전히 바랄지어다. 너희가 순종하는 자식처럼 이전 알지 못할 때에 좇던 너희 사욕을 본 삼지 말고,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자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
그러나 과거의 습성과의 단절과 절제는 그리 쉬운 일이 아닙니다.
오래 전, 1.21사태 때 청와대를 습격하려고 무장공비로 내려왔다가 붙잡혀 유일하게 생존한 김신조 씨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자유의 품에 안겨서 한동안 편안하게 살았지만 이것만으로는 삶의 진정한 의미를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자유는 얻었지만 이전의 생활과 너무도 다른 생활로 인하여 '이것이 과연 참된 자유인가?'를 고민했습니다. 그러다가 술을 마시기 시작해서 술고래가 되었습니다.
그러한 고민 중에 교회를 찾게 되었고,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고민을 주님께 토로했고, 그의 마음이 새로운 기쁨으로 충만했습니다. 그 후부터는 길에서 혹시 자신을 알아보고, "저 사람, 김신조 아니야?"라고 하면, 그는 "할렐루야, 할렐루야!" 라고 응답하면서 기뻐했다고 합니다.
인간적인 단절과 절제는 더욱 깊은 고민과 좌절을 안겨주기 쉽습니다. 가장 확실한 단절과 절제는 내 영의 삶에 예수 그리스도로 충만 되게 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두 번째 훈련인 경건의 훈련입니다.
2) 경건의 훈련입니다.
12절 하반절에서 "…근심함과 의로움과 경건함으로 이 세상에 살고"라고 했습니다. 이는 날마다 하나님을 향하여 단정한 생활을 할 수 있도록 자신의 악한 본성을 쳐서 복종시키는 영적 훈련입니다.
"근신함"이란, 자기 자신과의 관계에서 내면의 욕망을 제어하는 신중함을 의미합니다. "의로움"이란,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공정하고 진리에 입각하여 행동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경건함"이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하나님을 경외하고 순종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성도를 양육하시는 훈련은 자신과 다른 사람과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추구하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렇게 사는 삶의 현장은 천국이 아니라 현재 살아가고 있는 '이 세상'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성도가 험난한 세상을 이길 수 있는 길을 주셨습니다. 이것이 세 번째 훈련입니다.
3) 소망으로 인내하는 훈련입니다.
13절 상반절에서, "복스러운 소망과 우리의 크신 하나님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심을 기다리게 하셨으니…"라고 했습니다. 이는 성도가 이 세상에서 살면서 절망하거나 좌절하지 않도록 하기 위한 훈련입니다. 이 훈련은 두 가지로 나타납니다. 하나는, "복스러운 소망"으로써 영생에 대한 소망입니다. 다른 하나는,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실 것"을 기다리는 것으로서 예수님의 재림에 대한 소망입니다.
운동 경기에 임하는 선수가 자신이 목표하는 영광을 얻으려면, 훈련이나 경기 도중의 고통과 어려움을 이겨내야만 합니다. 바꾸어 말하면, 운동 선수가 고통스러운 훈련이나 경기를 이길 수 있는 것은 마지막 순간의 영광을 바라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성도들도 역시 생명의 면류관과 영광의 나라를 소망하면서 나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주님이 재림하시는 그 때에는 지금껏 세상의 죄악과 고통으로 탄식하며 기다리던 모든 성도들이 즐거움으로 영광의 자리에 참여할 것입니다.
- 롬8:21-23,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 노릇 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하는 것을 우리가 아나니, 이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될 것 곧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리느니라"
하나님께서 성도들에게 이러한 양육의 은혜를 베푸시는 이유가 있습니다.
2. 그러면 하나님께서 양육의 은혜를 베푸시는 목적이 무엇입니까?
14절을 읽어봅시다.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구속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에 열심하는 친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께서는 더러움에 있던 인간을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속전으로 지불하시고 우리를 놓아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친히 우리의 죄의 대가를 치르는 속전이 되셨으며, 우리를 자신의 소유로 삼으셨습니다. 이렇게 큰 대가를 치르시고 우리를 친백성으로 삼으신 목적은 '선한 일에 열심을 내게 하기 위함'입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소유된 백성들은 하나님의 뜻과 교훈에 맞는 행위에 열심을 내어 따라가야 합니다.
탈무드에 있는 이야기입니다. 한 랍비가 제자 가운데 한 사람을 저녁 식사에 초대했습니다. 랍비는 이 제자에게, "포도주를 마시기 전에 하는 기도문을 외워보시오."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학생은 처음 몇 줄밖에 외우지 못했습니다. 다른 기도문에 대해서도 모두 그랬고, 지금까지 가르친 것도 거의 외우지 못했습니다. 랍비는 그 제자를 나무랐습니다. 젊은 그 제자는 식사가 끝나자마자 고개를 푹 숙인 채 돌아갔습니다.
얼마 후, 랍비는 그 때 그 제자가, 앓고 있는 사람이 있으면 그 집에 가서 거들어 주고, 가난한 사람이 있으면 스스로 일해서 번 돈을 보내는 등. 선한 일을 많이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랍비는 부끄러웠습니다. 그리고 랍비는 모든 제자들을 모아놓고 이렇게 말했다.
"마음에 생각한 것은 곧 바로 행동하게 됩니다. 그러나 여러 권의 책을 읽어 많이 알고있다고 해도, 마음을 밭 갈지 않는다면 알고 있는데 머물고 맙니다. 마음을 밭갈이함은 두뇌를 밭갈이함보다 더 값진 것입니다. 이것은 '바른 것을 배우기보다 바른 것을 행하는 편이 훨씬 더 낫다.'는 말과 같은 뜻입니다.
그렇습니다. 신앙의 연륜이 오랜 성도들이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지만, 행함은 많지 않음을 봅니다. 신앙은 지식이 아니라 믿음과 믿음으로 비롯된 행함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이제 한 회기를 마감하고, 다시 한 회기를 시작하게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그 큰 은혜를 입은 하나님의 친백성으로서 합당하게 살아 왔던가를 돌아보며, 동시에 새로운 마음으로 하나님의 은혜의 자리로 더욱 가까이 다가갈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