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뜻에 순응하십시오(누가복음10:38-42)
작성자 배의신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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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00-11-17 17:48
♥들어가는 말
슈바이처 박사라고 하면 가장 먼저 '아프리카'가 떠오르고, '희생', '평화'라는 말들이 떠오른다. 슈바이처 박사는 누가복음 16장을 읽다가 그의 인생이 바뀌었다. 그는 '부자와 나사로'에 대한 말씀에서, '부자는 백인이요, 나사로는 흑인을 가리키는 게 아니겠느냐?'라고 생각하여, 흑인들에게 온갖 못할 짓을 한 백인들의 죄를 속죄하는 마음으로 아프리카로 향했다. 그는 아프리카에서 90평생 흑인들의 고름주머니를 만지며 봉사의 생활을 했다.
우리나라의 여행가 '김찬삼' 씨가 아프리카에서 그 슈바이처 박사를 만나, 일주일 동안 사랑의 현장에 함께 있었다. 슈바이처 박사는 김찬삼 씨의 남루한 옷차림을 보더니,
"바지가 몹시 낡았구려! 괜찮으시다면 제 바지를 드릴 테니 갈아입으시지요."하며 자신의 바지를 내 주더라는 것이다. 그래서 김찬삼씨는 슈바이처 박사를 통해 그리스도의 사랑의 삶을 그릴 수 있었다고 한다. 김찬삼씨가 그곳을 떠날 때 슈바이처 박사에게 질문을 했다.
"인생을 살아가는 데 가장 중요한 말씀 한 마디만 해주시겠습니까?" 박사는,
"우물을 파되 한 우물을 파시오!" 라고 했다. 그리고 떠나는 김찬삼 씨에게 손을 흔들면서, "인류에게 평화를! 인류에게 사랑을!"하며 마지막 인사를 하더라는 것이다.
사람들은 평화를 원하면서도 평화를 만들기보다는 투쟁과 불화를 자아낸다. 참된 평화는 사람의 내부에서부터 이루어져야 한다. 이러한 내적인 평화는 자기 희생이 없이는 이루어질 수가 없는 것이다. 슈바이처 박사와 같은 수고와 희생의 삶을 통해서 오늘날 이 세계는 어느 구석에서든지 어떤 모양으로든 평화가 유지되고 또 번져나가고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의 참된 평화는 내적인 것이며, 하나님과의 관계를 통하여 이루어질 수 있다. 하나님을 거역하는 사람에게는 결코 평화가 있을 수 없다. 우리가 추구하는 영혼의 평화는 하나님의 뜻에 자신을 전적으로 맡기는 것을 말한다.
하나님의 뜻은 우리가 생각하듯이 그렇게 어렵고 복잡한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뜻은 오히려 단순한 것이다. 우리를 복잡하고 어렵게 만드는 것은 자신의 포기하지 못하는 욕망이다. 본문에서 예수님이 마르다에게 하시는 말씀이 그것을 의미한다.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 그러나 몇 가지만 하든지 혹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참으로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마르다처럼 자신이 스스로의 주인이 되어, 자신의 기쁨을 위하여 일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자신이 주도권을 쥐고서 선을 행하며 하나님을 사랑하고 있다. 이들은 하나님을 위하여 규칙을 만들어 놓고 지키려 애쓰면서 잘 지킨 열매들을 하나님께로 가지고 간다. 이들은 하나님을 섬기고 또 하나님을 소유하기를 원한다. 이러한 것이 뜻대로 되지 않으면 실망하고 주님을 떠나게 된다. 이것은 결코 하나님의 뜻도 아니며, 섬기는 것도 아니다. 오로지 자신을 섬기는 것이다.
- 막7:10-13, "모세는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고, 또 '아비나 어미를 훼방하는 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가로되, '사람이 아비에게나 어미에게나 말하기를 내가 드려 유익하게 할 것이 고르반 곧 하나님께 드림이 되었다고 하기만 하면 그만이라' 하고, 제 아비나 어미에게 다시 아무것이라도 하여 드리기를 허하지 아니하여, 너희의 전한 유전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며, 또 이같은 일을 많이 행하느니라 하시고"
하나님의 뜻은 우리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며, 하나님께 소유되는 것이다. 마리아는 "주의 발아래 앉아 그의 말씀을 들었고" 주님께서는,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고 마리아의 손을 들어 주셨다.
하나님의 뜻에 순응한다는 것은 많은 것을 아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위대한 재능을 가지고 있는 것을 말하는 것도 아니다. 심지어 위대한 일들을 행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도 아니다. 다만 우리 마음으로 의를 추구하며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것이다.
- 신12:7, "거기 곧 너희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먹고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 손으로 수고한 일에 복 주심을 인하여 너희와 너희 가족이 즐거워할지니라"/ 시68:3, " 의인은 기뻐하여 하나님 앞에서 뛰놀며 기뻐하고 즐거워할지어다"/ 전5:19, "어떤 사람에게든지 하나님이 재물과 부요를 주사 능히 누리게 하시며, 분복을 받아 수고함으로 즐거워하게 하신 것은 하나님의 선물이라"/ 사61:10, "내가 여호와로 인하여 크게 기뻐하며, 내 영혼이 나의 하나님으로 인하여 즐거워하리니, 이는 그가 구원의 옷으로 내게 입히시며, 의의 겉옷으로 내게 더하심이 신랑이 사모를 쓰며 신부가 자기 보물로 단장함 같게 하셨음이라"/ 계18:20, "하늘과 성도들과 사도들과 선지자들아 그를 인하여 즐거워하라. 하나님이 너희를 신원하시는 심판을 그에게 하셨음이라 하더라"
우리는 하나님이 마음에 들고자, 또는 하나님의 복을 받고자 얼마나 고심하며, 자신이 생각하는 선을 행하려고 애를 쓰는가?! 그래서 의도적으로 사람에게 보이려고, 인정을 받으려고 많은 일을 계획하고 시행하려한다. 많은 성도와 교회들이 이렇게 하나님이 뜻을 행하고 있다고 나타내며 선전한다. 마치 마르다가 예수님을 대접하기 위하여 혼자 분주하며 힘들어하듯이 말이다. 마르다는 주님께 자신의 노력을 인정받고 싶어서 하소연했다. "주여 내 동생이 나 혼자 일하게 두는 것을 생각지 아니하시나이까? 저를 명하사 나를 도와 주라 하소서"
하나님을 즐거워한다는 것, 즉 하나님의 뜻 안에서 즐거워한다는 것은, 모든 일을 기쁨과 즐거움으로 행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반대와 핍박과 고난이 따른다 할지라도 영혼의 평화를 누릴 수 있다는 말이다.
『더 받을 것이 없습니다. 그리스도만으로 충분합니다』라는 책을 쓴 「후안까를로스 오르띠즈」목사는 그 책에서 자신의 이야기를 썼다.
수년 전에 내 아들 녀석이 돈이 많이 드는 사립대학에 가려고 조르던 때를 나는 기억합니다. 그 학교는 아주 좋은 기독교 학교였지만 등록금이 무척이나 비쌌습니다. 나의 아내는 한마디로 딱 잘라 말했습니다.
"네가 그런 학교에 다닐 생각을 하다니, 말도 안 돼." 우리에게는 아들을 그 학교에 보낼 여유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아내는 그 문제로 걱정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보다못해 나는 아내에게 말했습니다.
"염려하지 맙시다. 그런다고 해결 될 일이 아니지 않소. 그러니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한번 생각해봅시다. 가장 우선적인 것은 아이가 그 학교에 갈 수 없다는 거요."
"하지만 여보, 저 애는 그 학교에 무척이나 가고 싶어한단 말이에요"
"그럼 둘째로, 우리의 피아노를 파는 방법이 있소"
"안돼요, 그것은 우리 가족의 공동 소유예요."
그러나 우리는 그 문제에 대해 무언가 해결책을 찾아야 했습니다. 내가 제안한 모든 것을 아내는 안 된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러면 해결책은 무엇입니까? 염려하는 것일까요? 아내는 계속해서 걱정했기 때문에 결국 나는 대출을 받기로 결정을 내렸습니다. 아내는 어떻게 그 빚을 갚을거냐고 근심스럽게 물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대출을 받았고, 4년이 지난 지금도 그 빚을 갚아가고 있습니다. 비록 빚을 갚느라고 지금도 경제적으로 어렵긴 하지만, 그러한 해결책은 우리 가정에 평화를 가져왔습니다.
카를로스 목사님은 덧붙였다. "염려하는 것은 죄입니다. 그것은 우리를 무력하게 만듭니다. 우리가 계속 염려에 빠져들게 되면 아무것에도 유익이 없습니다."
그렇다. 하나님을 즐거워하며,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성도가 근심한다는 것은 아무런 유익도 이루어 낼 수 없다. 그리고 염려와 근심과 좌절은 하나님의 뜻에 순응하는 결과가 아니다. 이는 성도들이 미래를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일을 하면서도 미래를 생각하고 불안해하며, 미래를 꿰뚫어 보려고 애를 쓴다. 미래는 결코 우리에게 속한 것이 아니다. 미래는 하나님께 속한 것이다.
하나님의 뜻에 순응한다는 것은 매일매일을 선용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믿으면서 주어지는 환경과 생활에 감사하며 기쁨으로 삶을 누리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뜻에 순응하기 위해서는 자신을 하나님께 완전히 헌신 되도록 해야 한다. 마르다의 문제점은 자신에게 주어진 모든 일을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많은 일에 바쁜 우리들에게 있어서의 문제점은, 첫째, 하나님께 우리 자신을 완전히 의탁하지 않는다는 것과 둘째, 우리에게 찾아오는 모든 일들을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완전한 헌신이란, 하나님이 주신 일을 주저함 없이 받아들이는 것이다. 아무것도 숨기려 할 필요도 없고, 스스로 경영하려고 애를 쓸 필요도 없다. 만일 하나님께 완전히 헌신되지 않는다면, 다른 사람들에 대하여 쉽게 불만을 갖게 된다. 뿐만 아니라 자신에 대해서도 만족하지 못하며, 주저와 불신으로 가득 찬 사람이 될 것입니다. 완전한 헌신은 우리를 단순하게 만든다. 이것저것 따지지 않고, 모든 일에 하나님을 인정함으로서 하나님이 주관하시는 평화를 맛볼 것이다.
주님께 우리를 맡길 수 있겠는가? 하나님은 우리를 너무나 잘 알고 계신다. 하나님은 우리가 흙으로 지어진 연약한 존재임을 알고 계신다. 그래서 우리를 세상에서부터 찾아내시고, 품에 안으시며 우리의 약점까지도 모두 떠맡으셨다. 그리고 우리의 평화와 자유를 위하여 십자가에 죽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셨다.
이러한 주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삶을 준비하셨고, 우리의 걸음을 인도하신다. 우리는 다만 우리를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뜻에 순응하면 되는 것이다. 모든 결과를 하나님께 맡기고 말이다. 주님께 여러분의 생애를 맡길 수 있겠는가?
주님의 인도하심이 성도 여러분의 삶에 충만하시기를 축원한다.
슈바이처 박사라고 하면 가장 먼저 '아프리카'가 떠오르고, '희생', '평화'라는 말들이 떠오른다. 슈바이처 박사는 누가복음 16장을 읽다가 그의 인생이 바뀌었다. 그는 '부자와 나사로'에 대한 말씀에서, '부자는 백인이요, 나사로는 흑인을 가리키는 게 아니겠느냐?'라고 생각하여, 흑인들에게 온갖 못할 짓을 한 백인들의 죄를 속죄하는 마음으로 아프리카로 향했다. 그는 아프리카에서 90평생 흑인들의 고름주머니를 만지며 봉사의 생활을 했다.
우리나라의 여행가 '김찬삼' 씨가 아프리카에서 그 슈바이처 박사를 만나, 일주일 동안 사랑의 현장에 함께 있었다. 슈바이처 박사는 김찬삼 씨의 남루한 옷차림을 보더니,
"바지가 몹시 낡았구려! 괜찮으시다면 제 바지를 드릴 테니 갈아입으시지요."하며 자신의 바지를 내 주더라는 것이다. 그래서 김찬삼씨는 슈바이처 박사를 통해 그리스도의 사랑의 삶을 그릴 수 있었다고 한다. 김찬삼씨가 그곳을 떠날 때 슈바이처 박사에게 질문을 했다.
"인생을 살아가는 데 가장 중요한 말씀 한 마디만 해주시겠습니까?" 박사는,
"우물을 파되 한 우물을 파시오!" 라고 했다. 그리고 떠나는 김찬삼 씨에게 손을 흔들면서, "인류에게 평화를! 인류에게 사랑을!"하며 마지막 인사를 하더라는 것이다.
사람들은 평화를 원하면서도 평화를 만들기보다는 투쟁과 불화를 자아낸다. 참된 평화는 사람의 내부에서부터 이루어져야 한다. 이러한 내적인 평화는 자기 희생이 없이는 이루어질 수가 없는 것이다. 슈바이처 박사와 같은 수고와 희생의 삶을 통해서 오늘날 이 세계는 어느 구석에서든지 어떤 모양으로든 평화가 유지되고 또 번져나가고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의 참된 평화는 내적인 것이며, 하나님과의 관계를 통하여 이루어질 수 있다. 하나님을 거역하는 사람에게는 결코 평화가 있을 수 없다. 우리가 추구하는 영혼의 평화는 하나님의 뜻에 자신을 전적으로 맡기는 것을 말한다.
하나님의 뜻은 우리가 생각하듯이 그렇게 어렵고 복잡한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뜻은 오히려 단순한 것이다. 우리를 복잡하고 어렵게 만드는 것은 자신의 포기하지 못하는 욕망이다. 본문에서 예수님이 마르다에게 하시는 말씀이 그것을 의미한다.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 그러나 몇 가지만 하든지 혹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참으로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마르다처럼 자신이 스스로의 주인이 되어, 자신의 기쁨을 위하여 일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자신이 주도권을 쥐고서 선을 행하며 하나님을 사랑하고 있다. 이들은 하나님을 위하여 규칙을 만들어 놓고 지키려 애쓰면서 잘 지킨 열매들을 하나님께로 가지고 간다. 이들은 하나님을 섬기고 또 하나님을 소유하기를 원한다. 이러한 것이 뜻대로 되지 않으면 실망하고 주님을 떠나게 된다. 이것은 결코 하나님의 뜻도 아니며, 섬기는 것도 아니다. 오로지 자신을 섬기는 것이다.
- 막7:10-13, "모세는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고, 또 '아비나 어미를 훼방하는 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가로되, '사람이 아비에게나 어미에게나 말하기를 내가 드려 유익하게 할 것이 고르반 곧 하나님께 드림이 되었다고 하기만 하면 그만이라' 하고, 제 아비나 어미에게 다시 아무것이라도 하여 드리기를 허하지 아니하여, 너희의 전한 유전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며, 또 이같은 일을 많이 행하느니라 하시고"
하나님의 뜻은 우리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며, 하나님께 소유되는 것이다. 마리아는 "주의 발아래 앉아 그의 말씀을 들었고" 주님께서는,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고 마리아의 손을 들어 주셨다.
하나님의 뜻에 순응한다는 것은 많은 것을 아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위대한 재능을 가지고 있는 것을 말하는 것도 아니다. 심지어 위대한 일들을 행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도 아니다. 다만 우리 마음으로 의를 추구하며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것이다.
- 신12:7, "거기 곧 너희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먹고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 손으로 수고한 일에 복 주심을 인하여 너희와 너희 가족이 즐거워할지니라"/ 시68:3, " 의인은 기뻐하여 하나님 앞에서 뛰놀며 기뻐하고 즐거워할지어다"/ 전5:19, "어떤 사람에게든지 하나님이 재물과 부요를 주사 능히 누리게 하시며, 분복을 받아 수고함으로 즐거워하게 하신 것은 하나님의 선물이라"/ 사61:10, "내가 여호와로 인하여 크게 기뻐하며, 내 영혼이 나의 하나님으로 인하여 즐거워하리니, 이는 그가 구원의 옷으로 내게 입히시며, 의의 겉옷으로 내게 더하심이 신랑이 사모를 쓰며 신부가 자기 보물로 단장함 같게 하셨음이라"/ 계18:20, "하늘과 성도들과 사도들과 선지자들아 그를 인하여 즐거워하라. 하나님이 너희를 신원하시는 심판을 그에게 하셨음이라 하더라"
우리는 하나님이 마음에 들고자, 또는 하나님의 복을 받고자 얼마나 고심하며, 자신이 생각하는 선을 행하려고 애를 쓰는가?! 그래서 의도적으로 사람에게 보이려고, 인정을 받으려고 많은 일을 계획하고 시행하려한다. 많은 성도와 교회들이 이렇게 하나님이 뜻을 행하고 있다고 나타내며 선전한다. 마치 마르다가 예수님을 대접하기 위하여 혼자 분주하며 힘들어하듯이 말이다. 마르다는 주님께 자신의 노력을 인정받고 싶어서 하소연했다. "주여 내 동생이 나 혼자 일하게 두는 것을 생각지 아니하시나이까? 저를 명하사 나를 도와 주라 하소서"
하나님을 즐거워한다는 것, 즉 하나님의 뜻 안에서 즐거워한다는 것은, 모든 일을 기쁨과 즐거움으로 행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반대와 핍박과 고난이 따른다 할지라도 영혼의 평화를 누릴 수 있다는 말이다.
『더 받을 것이 없습니다. 그리스도만으로 충분합니다』라는 책을 쓴 「후안까를로스 오르띠즈」목사는 그 책에서 자신의 이야기를 썼다.
수년 전에 내 아들 녀석이 돈이 많이 드는 사립대학에 가려고 조르던 때를 나는 기억합니다. 그 학교는 아주 좋은 기독교 학교였지만 등록금이 무척이나 비쌌습니다. 나의 아내는 한마디로 딱 잘라 말했습니다.
"네가 그런 학교에 다닐 생각을 하다니, 말도 안 돼." 우리에게는 아들을 그 학교에 보낼 여유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아내는 그 문제로 걱정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보다못해 나는 아내에게 말했습니다.
"염려하지 맙시다. 그런다고 해결 될 일이 아니지 않소. 그러니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한번 생각해봅시다. 가장 우선적인 것은 아이가 그 학교에 갈 수 없다는 거요."
"하지만 여보, 저 애는 그 학교에 무척이나 가고 싶어한단 말이에요"
"그럼 둘째로, 우리의 피아노를 파는 방법이 있소"
"안돼요, 그것은 우리 가족의 공동 소유예요."
그러나 우리는 그 문제에 대해 무언가 해결책을 찾아야 했습니다. 내가 제안한 모든 것을 아내는 안 된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러면 해결책은 무엇입니까? 염려하는 것일까요? 아내는 계속해서 걱정했기 때문에 결국 나는 대출을 받기로 결정을 내렸습니다. 아내는 어떻게 그 빚을 갚을거냐고 근심스럽게 물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대출을 받았고, 4년이 지난 지금도 그 빚을 갚아가고 있습니다. 비록 빚을 갚느라고 지금도 경제적으로 어렵긴 하지만, 그러한 해결책은 우리 가정에 평화를 가져왔습니다.
카를로스 목사님은 덧붙였다. "염려하는 것은 죄입니다. 그것은 우리를 무력하게 만듭니다. 우리가 계속 염려에 빠져들게 되면 아무것에도 유익이 없습니다."
그렇다. 하나님을 즐거워하며,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성도가 근심한다는 것은 아무런 유익도 이루어 낼 수 없다. 그리고 염려와 근심과 좌절은 하나님의 뜻에 순응하는 결과가 아니다. 이는 성도들이 미래를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일을 하면서도 미래를 생각하고 불안해하며, 미래를 꿰뚫어 보려고 애를 쓴다. 미래는 결코 우리에게 속한 것이 아니다. 미래는 하나님께 속한 것이다.
하나님의 뜻에 순응한다는 것은 매일매일을 선용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믿으면서 주어지는 환경과 생활에 감사하며 기쁨으로 삶을 누리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뜻에 순응하기 위해서는 자신을 하나님께 완전히 헌신 되도록 해야 한다. 마르다의 문제점은 자신에게 주어진 모든 일을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많은 일에 바쁜 우리들에게 있어서의 문제점은, 첫째, 하나님께 우리 자신을 완전히 의탁하지 않는다는 것과 둘째, 우리에게 찾아오는 모든 일들을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완전한 헌신이란, 하나님이 주신 일을 주저함 없이 받아들이는 것이다. 아무것도 숨기려 할 필요도 없고, 스스로 경영하려고 애를 쓸 필요도 없다. 만일 하나님께 완전히 헌신되지 않는다면, 다른 사람들에 대하여 쉽게 불만을 갖게 된다. 뿐만 아니라 자신에 대해서도 만족하지 못하며, 주저와 불신으로 가득 찬 사람이 될 것입니다. 완전한 헌신은 우리를 단순하게 만든다. 이것저것 따지지 않고, 모든 일에 하나님을 인정함으로서 하나님이 주관하시는 평화를 맛볼 것이다.
주님께 우리를 맡길 수 있겠는가? 하나님은 우리를 너무나 잘 알고 계신다. 하나님은 우리가 흙으로 지어진 연약한 존재임을 알고 계신다. 그래서 우리를 세상에서부터 찾아내시고, 품에 안으시며 우리의 약점까지도 모두 떠맡으셨다. 그리고 우리의 평화와 자유를 위하여 십자가에 죽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셨다.
이러한 주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삶을 준비하셨고, 우리의 걸음을 인도하신다. 우리는 다만 우리를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뜻에 순응하면 되는 것이다. 모든 결과를 하나님께 맡기고 말이다. 주님께 여러분의 생애를 맡길 수 있겠는가?
주님의 인도하심이 성도 여러분의 삶에 충만하시기를 축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