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를 입는 길(대상15:1-15)
작성자 배의신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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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01-05-23 11:23
* 들어가는 말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영광을 위하여 특정한 민족을 선택하여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으셨습니다. 이 택함 받은 민족을 ‘선민’이라고 부릅니다. 이 선민의 시작이 누구로부터 시작되었는지 기억하십니까? ‘믿음의 조상’이라고 불리는 ‘아브라함’입니다. 아브라함은 ‘믿음’과 ‘순종’의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선민으로서의 출발을 믿음과 순종의 사람으로 시작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택하시고 선민으로서의 출발을 알리셨지만, 웬일인지 오랜 세월동안 이곳저곳으로 인도하시면서 정작 대를 이을 자손을 주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다가 아브라함과 사라 부부가 다 늙어 더 이상 자식을 낳을 수 없는 시점에서야 하나님께서 일을 시작하셨습니다. 이는 그들의 믿음을 보고자 하셨으며, 오직 하나님을 의지하고 순종하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100세에 낳은 아들 ‘이삭’, 아마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소중한 자손이었습니다. 그런데 아이가 자라서 부모를 알 때쯤, 하나님께서는 그 아이를 제물로 삼아 번제를 드리라고 하셨습니다. 성경에 표현은 되어 있지는 않지만 얼마나 고민되고 쓰라린 마음이었겠습니까? 그러나 아브라함은 지체하지 않았고 삼일 길을 걸어서 ‘모리아 산’에 올랐습니다. 돌단을 쌓고 아들을 제물로 드리기 위하여 결박하여 막 죽이려는 찰나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급하게 부르셨습니다. 이삭은 죽음의 찰나에서 생명을 건졌습니다. 아마도 이 때만큼은 하나님께서도 다급한 순간이었습니다.
무엇이 하나님으로 하여금 다급하게 했습니까?
하나님께 대한 절대적인 믿음과 신속한 순종이었습니다. 이처럼 철저한 믿음과 신속한 순종은 하나님의 다급한 응답을 받아냅니다. 반면에 지체된 순종은 불순종과도 같습니다. 민수기 14장에 보면, 12정탐꾼의 보고를 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낙담하여 하나님과 모세를 원망하면서 애굽으로 돌아가고자 했습니다. 그 때에 하나님께서 진노하셨고, 하나님을 믿지 않고 원망한 사람들을 40년 동안 광야에서 방황하며 모두 죽게 하겠다고 선언하셨습니다. 그 때야 비로소 사람들은 자신들의 어리석음을 한탄하며 백성들 스스로 대열을 정비하고 싸우러 나갔습니다. 그러나 이미 하나님의 결정은 내려졌고, 때늦게 싸우고자 하는 것은 오히려 불순종만 더하는 것이 되었습니다. 물론 때늦은 순종으로 전쟁에 나선 사람들은 패망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크신 은혜를 입어 애굽에서 벗어나 자유를 얻었고, 하나님의 선민이 되는 영광까지도 얻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을 제대로 알지 못했고, 하나님을 알지 못함으로 인하여 믿음도 없었으며 순종하지도 못했습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 대한 불신을 낳았으며, 불신은 불순종을 낳았습니다. 불순종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은혜의 길을 막아버렸습니다.
그렇다면, 오늘의 우리는 어떻게 해야 계속해서 하나님의 은혜를 입을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이미 애굽, 즉 죄의 세상으로부터 구원하시고 자유를 주신 하나님의 크신 은혜를 입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는 이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우리를 더 풍성하게 하시고, 우리를 위하여 예비하신 하나님의 나라에 이르기까지 은혜 베푸시는 것을 계속하십니다. 내 삶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계속 얻을 수 있는 길은 무엇입니까?
물론 하나님께 대한 철저한 믿음과 신속한 순종입니다. 이제 본문을 중심으로 하여 철저한 믿음과 신속한 순종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구체적으로 살펴봅시다.
본문의 내용은 다윗이 왕이 된 후, 하나님의 법궤를 예루살렘으로 모셔오는 광경입니다. 그런데 그 모습이 대단히 신중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뜻을 제대로 알지 못해서 이미 한 번 실패한 후였기 때문입니다.
1. 실패할 수밖에 없었던 상황을 봅시다.
13장의 내용이 하나님의 법궤를 옮기던 첫 번째 시도였습니다. 다윗이 왕위에 올랐을 때에는 하나님의 법궤가 <기럇여아림>에 있었습니다. 이미 100년 전, <엘리> 제사장 시절에 블레셋과의 전쟁에 가지고 나갔다가 빼앗긴 후, 지금까지 <기럇여아림>에 머물고 있었습니다. 다윗이 왕으로 등극한 후, 이스라엘의 수도를 예루살렘으로 확정했습니다. 그리고는 하나님의 율법의 중심이자 온 이스라엘의 사상과 정신의 집약이 될 하나님의 법궤를 예루살렘으로 모셔 오기로 생각했습니다.
여기에서 빌2:13절 말씀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어떤 일을 이루시려고 하실 때, 그 사람으로 하여금 그 일에 대하여 간절한 소원이 생기게 하신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성도는 기도로 깨어 있어야 하며, 자신에게 나타나는 소원을 경솔하게 대하여서는 안 됩니다.
다윗은 모든 일을 하나님께 묻고 의지하기 위하여 <기럇여아림>에 있는 <하나님이 법궤>를 모셔 올 것을 제안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는 하나님의 법궤를 모셔오는 일에 대하여 천부장과 백부장, 그리고 이스라엘의 모든 회중에게 그 뜻을 물어서 의견을 모았습니다. 즉, 다윗은 혼자 단독으로 처리하지 않고, 군부와 민중의 여론을 합한 민주적인 방법으로 일을 처리했습니다. 이에 뭇 백성이 이일을 선히 여기므로 온 회중이 그대로 행하겠다고 응답했습니다.
여기서 잠시 멈추어 서서, 다윗의 계획을 재정리해 봅시다.
질문1 ꁾ 다윗이 하나님의 법궤를 모셔 오는 일을 위해서 하나님께 무엇을 물었습니까? / 아무것도 물은 것이 없습니다. “여호와께로 말미암았으면…” 이라는 가정법만 썼을 뿐입니다.
질문2 ꁾ 다윗이 법궤를 모셔 오기 위해서 신앙적으로 준비한 것이 무엇입니까? / 역시 아무것도 없습니다. 기도를 하지도 않았고, 선지자를 부르지도 않았고, 제사를 드리지도 않았습니다. 다만, 군부와 백성의 뜻을 물었을 뿐입니다.
많은 신학자들이나 목회자들이 다윗이 여론을 수렴한 것을 민주주의적인 정치 형태라고 찬사를 보냅니다. 하지만 다윗의 처세가 세상적인 정치 형태에 있어서는 바람직한 민주주의적인 방법인지는 몰라도, 하나님 앞에서는 옳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것이 현대인들이 오해하기 쉬운 함정입니다.
성도나 사람들의 다수가 옳다고 여긴다고 해서 바른 길은 아닙니다. 적어도 신앙의 일에 있어서는 말입니다. 다윗은 당연히 하나님께 물었어야 했습니다. 그리고 선지자를 불러서 이 일에 대한 하나님의 뜻과 법을 알아보았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용의주도한 다윗도 한 순간에 인간적인 실수를 범했습니다. 뜻이 좋다고 해서 어떻게 진행하든지 좋은 것은 결코 아닙니다.
다윗은 새 수레를 만들어 언약궤를 싣고, <유다 자손> 아비나답의 손자인 <웃사>와 <아히오>가 수레를 몰고, 법궤가 20년 동안 머물렀던 기럇여아림에서 출발했습니다. 하나님의 언약궤를 모시는 다윗과 백성들의 모습은 너무나 진지하고, 기쁨이 넘쳤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일 자체를 거부하셨습니다. 왜냐하면, 다윗이 하나님의 법대로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법에 대하여 무지했습니다.
언약궤는 사람이 메도록 하셨습니다. 그런데, 수레에 실었습니다. 그것이 새 수레라고 해서 달라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리고 레위인 중에서도 고핫 자손이 메도록 했는데, 수레를 몰았던 사람은 둘 다 유다 자손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궤는 어떤 경우에도 만지지 못하도록 하셨습니다. 그런데, 소가 날뛰므로 언약궤가 넘어지려고 하자 <웃사>가 붙잡았습니다. 이는, 충분히 정상이 참작될 만도 한 일이지만 역시 하나님의 뜻이 우선입니다.
2. 그렇다면, 하나님의 은혜를 입는 길은 무엇입니까?
본문 말씀은 한 번의 실패를 경험한 다윗이 하나님의 뜻을 묻고 그 뜻대로 다시 시작하는 모습입니다. 이 본문의 광경에서 다윗은 하나님이 세우신 법도와 하나님의 뜻대로 일을 처리하고 있음을 봅니다.
ꁾ 본문 2, 11-13절
하나님의 법궤는 사람의 어깨에 메고 섬기도록 하셨습니다. 즉 하나님의 말씀은 보기 좋고, 편리한 방법으로 따르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다른 사람도 아닌 자신의 어깨에 메고 따라야 합니다.
우리는 흔히 말씀을 들으면서 ‘이 말씀은 누구누구에게 딱 맞는 말씀이야!’, 혹은 ‘우리가 꼭 그렇게 살아야 할 필요가 있을까?’라고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이러한 생각이 수레를 만드는 것입니다. 잊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은 내게 주시는 것이며, 내가 따르고 지키고 순종해야 하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편하게 수레에 싣고 가는 것이 아니라, 어깨에 메고 가는 것입니다.
말씀을 정리해 봅시다.
하나님의 은혜를 계속적으로 입을 수 있는 길은 하나님께 대한 철저한 믿음과 신속하게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믿음과 순종은 철저하게 하나님의 뜻에 근거해야 합니다. 이렇게 하려면 하나님의 뜻을 잘 알아야 하며, 항상 깨어있어야 합니다.
옛 말에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고 했는데, 하나님의 나라에는 결코 그렇게 갈 수 없으며, 하나님의 은혜를 입지도 못합니다. 진정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나,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는 삶에 있어서는, 사람의 기발한 아이디어나 요령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 철저하게 하나님의 방법대로 해야만 합니다.
여러분이 지금 소망하는 것이나, 기도로 준비하고 있는 것이 있습니까? 있다면 그것을 오늘의 말씀에 비추어보십시오. 다윗의 실패 원인이 ①영적인 아무런 준비도 하지 않았고, ②하나님의 뜻에 대하여 무지했고, ③하나님의 법을 무시한 사람의 방법대로 했다는 것임을 기억하십시오. 사람과 의논하거나, 사람의 뜻을 물으려고 동분서주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 일으키시는 마음의 소원이 있을 때, 먼저 하나님께 방법과 길을 물으십시오. 그리고 주어지는 기회를 따라 성실하게 순종하십시오. 때늦은 순종은 더 깊은 고난을 부릅니다. 이 길을 먼저 순종하시면서 자녀들에게 가르치십시오. 오늘 말씀을 통하여 우리에게 향하신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충만하게 부어지시기를 축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영광을 위하여 특정한 민족을 선택하여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으셨습니다. 이 택함 받은 민족을 ‘선민’이라고 부릅니다. 이 선민의 시작이 누구로부터 시작되었는지 기억하십니까? ‘믿음의 조상’이라고 불리는 ‘아브라함’입니다. 아브라함은 ‘믿음’과 ‘순종’의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선민으로서의 출발을 믿음과 순종의 사람으로 시작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택하시고 선민으로서의 출발을 알리셨지만, 웬일인지 오랜 세월동안 이곳저곳으로 인도하시면서 정작 대를 이을 자손을 주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다가 아브라함과 사라 부부가 다 늙어 더 이상 자식을 낳을 수 없는 시점에서야 하나님께서 일을 시작하셨습니다. 이는 그들의 믿음을 보고자 하셨으며, 오직 하나님을 의지하고 순종하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100세에 낳은 아들 ‘이삭’, 아마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소중한 자손이었습니다. 그런데 아이가 자라서 부모를 알 때쯤, 하나님께서는 그 아이를 제물로 삼아 번제를 드리라고 하셨습니다. 성경에 표현은 되어 있지는 않지만 얼마나 고민되고 쓰라린 마음이었겠습니까? 그러나 아브라함은 지체하지 않았고 삼일 길을 걸어서 ‘모리아 산’에 올랐습니다. 돌단을 쌓고 아들을 제물로 드리기 위하여 결박하여 막 죽이려는 찰나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급하게 부르셨습니다. 이삭은 죽음의 찰나에서 생명을 건졌습니다. 아마도 이 때만큼은 하나님께서도 다급한 순간이었습니다.
무엇이 하나님으로 하여금 다급하게 했습니까?
하나님께 대한 절대적인 믿음과 신속한 순종이었습니다. 이처럼 철저한 믿음과 신속한 순종은 하나님의 다급한 응답을 받아냅니다. 반면에 지체된 순종은 불순종과도 같습니다. 민수기 14장에 보면, 12정탐꾼의 보고를 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낙담하여 하나님과 모세를 원망하면서 애굽으로 돌아가고자 했습니다. 그 때에 하나님께서 진노하셨고, 하나님을 믿지 않고 원망한 사람들을 40년 동안 광야에서 방황하며 모두 죽게 하겠다고 선언하셨습니다. 그 때야 비로소 사람들은 자신들의 어리석음을 한탄하며 백성들 스스로 대열을 정비하고 싸우러 나갔습니다. 그러나 이미 하나님의 결정은 내려졌고, 때늦게 싸우고자 하는 것은 오히려 불순종만 더하는 것이 되었습니다. 물론 때늦은 순종으로 전쟁에 나선 사람들은 패망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크신 은혜를 입어 애굽에서 벗어나 자유를 얻었고, 하나님의 선민이 되는 영광까지도 얻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을 제대로 알지 못했고, 하나님을 알지 못함으로 인하여 믿음도 없었으며 순종하지도 못했습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 대한 불신을 낳았으며, 불신은 불순종을 낳았습니다. 불순종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은혜의 길을 막아버렸습니다.
그렇다면, 오늘의 우리는 어떻게 해야 계속해서 하나님의 은혜를 입을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이미 애굽, 즉 죄의 세상으로부터 구원하시고 자유를 주신 하나님의 크신 은혜를 입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는 이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우리를 더 풍성하게 하시고, 우리를 위하여 예비하신 하나님의 나라에 이르기까지 은혜 베푸시는 것을 계속하십니다. 내 삶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계속 얻을 수 있는 길은 무엇입니까?
물론 하나님께 대한 철저한 믿음과 신속한 순종입니다. 이제 본문을 중심으로 하여 철저한 믿음과 신속한 순종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구체적으로 살펴봅시다.
본문의 내용은 다윗이 왕이 된 후, 하나님의 법궤를 예루살렘으로 모셔오는 광경입니다. 그런데 그 모습이 대단히 신중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뜻을 제대로 알지 못해서 이미 한 번 실패한 후였기 때문입니다.
1. 실패할 수밖에 없었던 상황을 봅시다.
13장의 내용이 하나님의 법궤를 옮기던 첫 번째 시도였습니다. 다윗이 왕위에 올랐을 때에는 하나님의 법궤가 <기럇여아림>에 있었습니다. 이미 100년 전, <엘리> 제사장 시절에 블레셋과의 전쟁에 가지고 나갔다가 빼앗긴 후, 지금까지 <기럇여아림>에 머물고 있었습니다. 다윗이 왕으로 등극한 후, 이스라엘의 수도를 예루살렘으로 확정했습니다. 그리고는 하나님의 율법의 중심이자 온 이스라엘의 사상과 정신의 집약이 될 하나님의 법궤를 예루살렘으로 모셔 오기로 생각했습니다.
여기에서 빌2:13절 말씀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어떤 일을 이루시려고 하실 때, 그 사람으로 하여금 그 일에 대하여 간절한 소원이 생기게 하신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성도는 기도로 깨어 있어야 하며, 자신에게 나타나는 소원을 경솔하게 대하여서는 안 됩니다.
다윗은 모든 일을 하나님께 묻고 의지하기 위하여 <기럇여아림>에 있는 <하나님이 법궤>를 모셔 올 것을 제안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는 하나님의 법궤를 모셔오는 일에 대하여 천부장과 백부장, 그리고 이스라엘의 모든 회중에게 그 뜻을 물어서 의견을 모았습니다. 즉, 다윗은 혼자 단독으로 처리하지 않고, 군부와 민중의 여론을 합한 민주적인 방법으로 일을 처리했습니다. 이에 뭇 백성이 이일을 선히 여기므로 온 회중이 그대로 행하겠다고 응답했습니다.
여기서 잠시 멈추어 서서, 다윗의 계획을 재정리해 봅시다.
질문1 ꁾ 다윗이 하나님의 법궤를 모셔 오는 일을 위해서 하나님께 무엇을 물었습니까? / 아무것도 물은 것이 없습니다. “여호와께로 말미암았으면…” 이라는 가정법만 썼을 뿐입니다.
질문2 ꁾ 다윗이 법궤를 모셔 오기 위해서 신앙적으로 준비한 것이 무엇입니까? / 역시 아무것도 없습니다. 기도를 하지도 않았고, 선지자를 부르지도 않았고, 제사를 드리지도 않았습니다. 다만, 군부와 백성의 뜻을 물었을 뿐입니다.
많은 신학자들이나 목회자들이 다윗이 여론을 수렴한 것을 민주주의적인 정치 형태라고 찬사를 보냅니다. 하지만 다윗의 처세가 세상적인 정치 형태에 있어서는 바람직한 민주주의적인 방법인지는 몰라도, 하나님 앞에서는 옳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것이 현대인들이 오해하기 쉬운 함정입니다.
성도나 사람들의 다수가 옳다고 여긴다고 해서 바른 길은 아닙니다. 적어도 신앙의 일에 있어서는 말입니다. 다윗은 당연히 하나님께 물었어야 했습니다. 그리고 선지자를 불러서 이 일에 대한 하나님의 뜻과 법을 알아보았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용의주도한 다윗도 한 순간에 인간적인 실수를 범했습니다. 뜻이 좋다고 해서 어떻게 진행하든지 좋은 것은 결코 아닙니다.
다윗은 새 수레를 만들어 언약궤를 싣고, <유다 자손> 아비나답의 손자인 <웃사>와 <아히오>가 수레를 몰고, 법궤가 20년 동안 머물렀던 기럇여아림에서 출발했습니다. 하나님의 언약궤를 모시는 다윗과 백성들의 모습은 너무나 진지하고, 기쁨이 넘쳤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일 자체를 거부하셨습니다. 왜냐하면, 다윗이 하나님의 법대로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법에 대하여 무지했습니다.
언약궤는 사람이 메도록 하셨습니다. 그런데, 수레에 실었습니다. 그것이 새 수레라고 해서 달라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리고 레위인 중에서도 고핫 자손이 메도록 했는데, 수레를 몰았던 사람은 둘 다 유다 자손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궤는 어떤 경우에도 만지지 못하도록 하셨습니다. 그런데, 소가 날뛰므로 언약궤가 넘어지려고 하자 <웃사>가 붙잡았습니다. 이는, 충분히 정상이 참작될 만도 한 일이지만 역시 하나님의 뜻이 우선입니다.
2. 그렇다면, 하나님의 은혜를 입는 길은 무엇입니까?
본문 말씀은 한 번의 실패를 경험한 다윗이 하나님의 뜻을 묻고 그 뜻대로 다시 시작하는 모습입니다. 이 본문의 광경에서 다윗은 하나님이 세우신 법도와 하나님의 뜻대로 일을 처리하고 있음을 봅니다.
ꁾ 본문 2, 11-13절
하나님의 법궤는 사람의 어깨에 메고 섬기도록 하셨습니다. 즉 하나님의 말씀은 보기 좋고, 편리한 방법으로 따르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다른 사람도 아닌 자신의 어깨에 메고 따라야 합니다.
우리는 흔히 말씀을 들으면서 ‘이 말씀은 누구누구에게 딱 맞는 말씀이야!’, 혹은 ‘우리가 꼭 그렇게 살아야 할 필요가 있을까?’라고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이러한 생각이 수레를 만드는 것입니다. 잊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은 내게 주시는 것이며, 내가 따르고 지키고 순종해야 하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편하게 수레에 싣고 가는 것이 아니라, 어깨에 메고 가는 것입니다.
말씀을 정리해 봅시다.
하나님의 은혜를 계속적으로 입을 수 있는 길은 하나님께 대한 철저한 믿음과 신속하게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믿음과 순종은 철저하게 하나님의 뜻에 근거해야 합니다. 이렇게 하려면 하나님의 뜻을 잘 알아야 하며, 항상 깨어있어야 합니다.
옛 말에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고 했는데, 하나님의 나라에는 결코 그렇게 갈 수 없으며, 하나님의 은혜를 입지도 못합니다. 진정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나,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는 삶에 있어서는, 사람의 기발한 아이디어나 요령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 철저하게 하나님의 방법대로 해야만 합니다.
여러분이 지금 소망하는 것이나, 기도로 준비하고 있는 것이 있습니까? 있다면 그것을 오늘의 말씀에 비추어보십시오. 다윗의 실패 원인이 ①영적인 아무런 준비도 하지 않았고, ②하나님의 뜻에 대하여 무지했고, ③하나님의 법을 무시한 사람의 방법대로 했다는 것임을 기억하십시오. 사람과 의논하거나, 사람의 뜻을 물으려고 동분서주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 일으키시는 마음의 소원이 있을 때, 먼저 하나님께 방법과 길을 물으십시오. 그리고 주어지는 기회를 따라 성실하게 순종하십시오. 때늦은 순종은 더 깊은 고난을 부릅니다. 이 길을 먼저 순종하시면서 자녀들에게 가르치십시오. 오늘 말씀을 통하여 우리에게 향하신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충만하게 부어지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