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와 절제(고전10:23-33)
작성자 배의신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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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01-05-08 22:06
* 들어가는 말
어느 부흥사의 이야기를 옮겨봅니다. 강사 안내를 하던 집사님이 차를 운전하면서 작은 마을을 지날 때였습니다. “목사님, 바로 저 집 대문 있잖아요. 언제가 한밤중에 실수로 대문을 받아서 부서졌는데 아무도 보지 않았기에 천만 다행이었지요. 운전이 서툴렀던 때인데ꀞ” 라며 말꼬리를 흐립니다. 마을길을 보니 꼬불꼬불하여 운전하는 사람에게는 힘든 길이라고 생각되었습니다. 그런데 집사님이 말을 이었습니다. “그 대문만 보면 늘 생각이 나지요. 주인이 어딜 갔는지 인적도 없고 해서 무사했지요. 참으로 ‘할렐루야’지요”
목사님은 그 이야기를 듣고는 깜짝 놀라서 ‘집사님! 안 들킨 게 어째서 할렐루야 입니까?’라고 가르쳐 주고 싶은 생각이 앞섰지만, 처음 만난 분이고 또 기분 나빠 할까봐 입을 다물고 말았다고 합니다. 꼭 지적해 줄 것을 안 해서 그랬는지 지금도 가끔 그 집사님이 생각난다고 말을 덧붙였습니다.
여러분, 남의 집 대문을 부수어놓고 들키지 않은 것이 ‘할렐루야!’라니!!! 그것은 신앙 양심이 잘못되어도 한참 잘못된 것입니다. 오늘날 수많은 교인들이 생활 속에서 실수나 잘못을 하고서도 윤리적 가책을 느끼지 못하고, 도리어 입버릇처럼 ‘할렐루야’를 외치거나 ‘하나님의 은혜’를 들먹거리고 있습니다. 어떤 청년이 간증을 하면서, 찬송가를 부르면서 가짜 꿀을 만드는 부모 때문에 교회를 멀리했었다고 했습니다.
이 시간의 本文은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이 아니요,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덕을 세우는 것이 아니니, 누구든지 자기의 유익을 구치 말고 남의 유익을 구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로 구원받은 성도는 믿음 안에서 자유를 누리는 자유인임에 틀림없습니다. 이 시간에는 성도가 누리는 자유와 자유를 스스로 조절하는 절제를 통하여 그리스도인의 진정한 자유에 대하여 살펴보고자 합니다.
성도는 믿음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자유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 자유는 자신만을 위하여 마음껏 누리도록 되어 있지는 않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성도 상호간의 관계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이어야 합니다.
1.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믿음 안에서 가능합니다.
그리스도인이 자유하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서 가능합니다. 사람은 본래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자유하게 지음 받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과의 약속을 어김으로서 죄를 범하게 되었고, 죄의 종으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왜냐하면, 죄를 짓는 사람마다 죄의 종이 되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8:34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죄의 종이 되어 본향인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오지 못하는 인생을 불쌍히 여기셔서 대속의 제물로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생명으로 사람들의 죄를 대신하게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십자가는 죄에 팔려 죄의 종이 되어 있는 인생을 자유하게 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 ꁾ롬8:1-2,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롬6:17-18,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너희가 본래 죄의 종이더니 너희에게 전하여 준바 교훈의 본을 마음으로 순종하여, 죄에게서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되었느니라.”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죄로부터 해방되어 자유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죄에 대하여 자유하다 함은 의에 종이 되었음을 의미합니다. 의의 종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셨던 그 때의 모습처럼 오직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만 살도록 되어 있는 사람임을 말합니다.
2.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절제될 때에 아름답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말씀으로 당신의 백성들을 다스리시며, 성도의 자유는 하나님의 말씀에 입각한 신앙 양심에 의하여 지배를 받습니다. ‘양심주의’라는 말은 라틴어로 ‘아디아포라’(Adiaphora)라고 하는데, 이 말의 의미는 ‘자기 자신의 양심에는 괜찮은 것으로 생각되는 일이라 할지라도, 그 일을 거부해야 하는 경우가 있음’을 뜻합니다. 즉, 나는 양심에 거리낌이 없지만, 남의 양심에 손해를 끼칠까 염려하여, 할 수 있는 일도 참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이런 경우는 남의 양심 때문에 내 자신의 자유를 절제하고 억제해야 하는 것인데, 이것을 가리켜 본문에서는 양심의 자유를 위함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남의 양심이나 대중의 여론, 사상에 무조건 맹목적으로 따르라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자신의 신앙적 양심에 있어서 어떤 행동이 죄가 되지 않는 한, 다른 사람과 조화하라는 말입니다. 이는 사람을 기쁘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 영광이 되게 하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갈1:10에서, “내가 지금까지 사람의 기쁨을 구하는 것이었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라.”고 고백했습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자유입니다.
본문 말씀에는 우상의 제물에 대하여 예를 들었습니다. 우상에게 드려졌던 제물이라 할지라도 그것은 음식이기 때문에 정결한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모든 음식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므로 먹을 수 있습니다(27절). 그러나 누군가가 그 음식이 제물이라고 말하면 알려준 사람과 거리낌이 되는 자신의 양심을 위하여 먹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우상의 제물이라고 알려준 사람은 이 음식이 그리스도인에게 거리낌이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성도들에게는 분명히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자유가 보장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자유에는 책임이 따른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성도가 참된 자유를 누릴 때는 아름다운 삶의 열매가 맺히게 마련입니다. 이 열매가 바로 갈5:22-23절에서 말씀하는 아홉 가지의 성령의 열매이며, 에베소서5:9(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의 빛의 열매입니다.
3.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분명한 목적이 있습니다.
본문31절을 보십시오.
그리스도인의 자유의 목적은 분명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을 기쁘게 하는 일이나, 많은 사람의 유익을 위하는 행위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이 됩니다. 마태복음5:16절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한 성도의 생활 목표는 오직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먹는 것, 마시는 것, 입는 것, 배우고 익히는 모든 것, 세상의 富貴榮華도, 사는 것도, 죽는 것도 모두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할 때 의미가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 사실을 로마서14:7-8절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라.”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자유로 자신의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사용합시다. 이러한 삶의 대가는 주님께서 영과 육신의 풍성한 삶으로 갚아주실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진정한 자유인의 삶으로 하나님께는 영광이요 우리 삶에는 주님이 이루시는 만족과 평안으로 충만하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어느 부흥사의 이야기를 옮겨봅니다. 강사 안내를 하던 집사님이 차를 운전하면서 작은 마을을 지날 때였습니다. “목사님, 바로 저 집 대문 있잖아요. 언제가 한밤중에 실수로 대문을 받아서 부서졌는데 아무도 보지 않았기에 천만 다행이었지요. 운전이 서툴렀던 때인데ꀞ” 라며 말꼬리를 흐립니다. 마을길을 보니 꼬불꼬불하여 운전하는 사람에게는 힘든 길이라고 생각되었습니다. 그런데 집사님이 말을 이었습니다. “그 대문만 보면 늘 생각이 나지요. 주인이 어딜 갔는지 인적도 없고 해서 무사했지요. 참으로 ‘할렐루야’지요”
목사님은 그 이야기를 듣고는 깜짝 놀라서 ‘집사님! 안 들킨 게 어째서 할렐루야 입니까?’라고 가르쳐 주고 싶은 생각이 앞섰지만, 처음 만난 분이고 또 기분 나빠 할까봐 입을 다물고 말았다고 합니다. 꼭 지적해 줄 것을 안 해서 그랬는지 지금도 가끔 그 집사님이 생각난다고 말을 덧붙였습니다.
여러분, 남의 집 대문을 부수어놓고 들키지 않은 것이 ‘할렐루야!’라니!!! 그것은 신앙 양심이 잘못되어도 한참 잘못된 것입니다. 오늘날 수많은 교인들이 생활 속에서 실수나 잘못을 하고서도 윤리적 가책을 느끼지 못하고, 도리어 입버릇처럼 ‘할렐루야’를 외치거나 ‘하나님의 은혜’를 들먹거리고 있습니다. 어떤 청년이 간증을 하면서, 찬송가를 부르면서 가짜 꿀을 만드는 부모 때문에 교회를 멀리했었다고 했습니다.
이 시간의 本文은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이 아니요,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덕을 세우는 것이 아니니, 누구든지 자기의 유익을 구치 말고 남의 유익을 구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로 구원받은 성도는 믿음 안에서 자유를 누리는 자유인임에 틀림없습니다. 이 시간에는 성도가 누리는 자유와 자유를 스스로 조절하는 절제를 통하여 그리스도인의 진정한 자유에 대하여 살펴보고자 합니다.
성도는 믿음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자유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 자유는 자신만을 위하여 마음껏 누리도록 되어 있지는 않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성도 상호간의 관계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이어야 합니다.
1.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믿음 안에서 가능합니다.
그리스도인이 자유하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서 가능합니다. 사람은 본래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자유하게 지음 받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과의 약속을 어김으로서 죄를 범하게 되었고, 죄의 종으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왜냐하면, 죄를 짓는 사람마다 죄의 종이 되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8:34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죄의 종이 되어 본향인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오지 못하는 인생을 불쌍히 여기셔서 대속의 제물로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생명으로 사람들의 죄를 대신하게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십자가는 죄에 팔려 죄의 종이 되어 있는 인생을 자유하게 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 ꁾ롬8:1-2,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롬6:17-18,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너희가 본래 죄의 종이더니 너희에게 전하여 준바 교훈의 본을 마음으로 순종하여, 죄에게서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되었느니라.”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죄로부터 해방되어 자유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죄에 대하여 자유하다 함은 의에 종이 되었음을 의미합니다. 의의 종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셨던 그 때의 모습처럼 오직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만 살도록 되어 있는 사람임을 말합니다.
2.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절제될 때에 아름답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말씀으로 당신의 백성들을 다스리시며, 성도의 자유는 하나님의 말씀에 입각한 신앙 양심에 의하여 지배를 받습니다. ‘양심주의’라는 말은 라틴어로 ‘아디아포라’(Adiaphora)라고 하는데, 이 말의 의미는 ‘자기 자신의 양심에는 괜찮은 것으로 생각되는 일이라 할지라도, 그 일을 거부해야 하는 경우가 있음’을 뜻합니다. 즉, 나는 양심에 거리낌이 없지만, 남의 양심에 손해를 끼칠까 염려하여, 할 수 있는 일도 참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이런 경우는 남의 양심 때문에 내 자신의 자유를 절제하고 억제해야 하는 것인데, 이것을 가리켜 본문에서는 양심의 자유를 위함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남의 양심이나 대중의 여론, 사상에 무조건 맹목적으로 따르라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자신의 신앙적 양심에 있어서 어떤 행동이 죄가 되지 않는 한, 다른 사람과 조화하라는 말입니다. 이는 사람을 기쁘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 영광이 되게 하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갈1:10에서, “내가 지금까지 사람의 기쁨을 구하는 것이었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라.”고 고백했습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자유입니다.
본문 말씀에는 우상의 제물에 대하여 예를 들었습니다. 우상에게 드려졌던 제물이라 할지라도 그것은 음식이기 때문에 정결한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모든 음식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므로 먹을 수 있습니다(27절). 그러나 누군가가 그 음식이 제물이라고 말하면 알려준 사람과 거리낌이 되는 자신의 양심을 위하여 먹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우상의 제물이라고 알려준 사람은 이 음식이 그리스도인에게 거리낌이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성도들에게는 분명히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자유가 보장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자유에는 책임이 따른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성도가 참된 자유를 누릴 때는 아름다운 삶의 열매가 맺히게 마련입니다. 이 열매가 바로 갈5:22-23절에서 말씀하는 아홉 가지의 성령의 열매이며, 에베소서5:9(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의 빛의 열매입니다.
3.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분명한 목적이 있습니다.
본문31절을 보십시오.
그리스도인의 자유의 목적은 분명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을 기쁘게 하는 일이나, 많은 사람의 유익을 위하는 행위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이 됩니다. 마태복음5:16절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한 성도의 생활 목표는 오직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먹는 것, 마시는 것, 입는 것, 배우고 익히는 모든 것, 세상의 富貴榮華도, 사는 것도, 죽는 것도 모두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할 때 의미가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 사실을 로마서14:7-8절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라.”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자유로 자신의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사용합시다. 이러한 삶의 대가는 주님께서 영과 육신의 풍성한 삶으로 갚아주실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진정한 자유인의 삶으로 하나님께는 영광이요 우리 삶에는 주님이 이루시는 만족과 평안으로 충만하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