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세대에 주는 표적(눅11:29-36)
작성자 배의신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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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01-05-08 21:56
* 들어가는 말
1827년 스콧트랜드의 항구에서 배에 올라탄 노인 목사가 있었습니다. 성 안드레 교회에서 50년간 사역한 ‘라이트’(Henry rancis Lyte)목사였습니다. 건강을 위하여 따뜻한 곳에 살아야 하겠다는 의사의 지시를 따라 ‘프렌치 리비에라’로 떠나는 길이었습니다. 첫 번 기항지인 프랑스의 북부 항구에서 하룻밤을 자는데, 아침 출항 시간에도 라이트목사가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선원이 여관방을 찾아갔더니 노인 목사는 방바닥에 쓰러져 있었으며, 책상에는 밤사이에 쓴 시 한 편이 놓여있었습니다. 그것은 오늘날 전 세계가 애송하는 찬송인 “때 저물어 날 이미어두니” (Abide with me, 531장)입니다.
원문을 직역하면 이런 내용입니다. “날은 빨리 저물고 어둠이 짙어 가는데, 주님, 내 속에 거하소서. 아무도 나를 위로해 줄 수 없을 때, 오직 나를 도와주실 수 있는 주여, 나와 함께 거하소서. 작은 인생은 썰물처럼 멀어가고, 땅의 기쁨과 영광은 점점 희미해집니다. 변하지 않는 주님, 내 속에 거하소서. 주님의 축복이 내 곁에 있으면 병도 힘을 못 쓰며, 눈물도 쓰지 않습니다. 주님이 나와 함께 계시면 죽음도 무덤도 승리의 개가가 되리이다. 내 눈을 감기 전에 십자가를 보게 하소서. 하늘의 새벽이 밝아올 때, 허망한 땅의 그늘은 사라질 것이오니, 사나 죽으나 주님 내 속에 거하소서.”
너무나 평안하고 신뢰로 가득 찬 시입니다.
주님의 부활을 생각하는 부활절 아침에, 성도에게 주어진 진정한 소망이 무엇인지를 느끼게 하는 감동적인 시입니다. 오늘은 주님의 부활을 기념하고 동시에 오늘 우리의 부활 신앙을 되새겨 보며, 감사하고 서로를 축하하고 축복하는 날입니다.
성경에는 부활의 소망과 영광에 대한 많은 말씀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 시간에는 주님께서 이 세대를 향하여 말씀하신 하나의 표적을 통하여 부활의 참의미를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오늘날 교회의 신앙은 다분히 현실주의적입니다. 즉 부활의 영원한 영광을 바라보는 신앙이 아니라, 현실의 생활에 의하여 신앙이 좌우된다는 말입니다. 평안할 때는 누구의 믿음이 진실한지를 알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나 막상 시험과 고난의 일들이 닥치면 믿음의 빛은 구별됩니다. 현실주의적인 믿음을 소유한 성도는 작은 시험에도 흔들리며, 또한 육신적인 감각으로 느끼지 못하면 잘 믿으려 하지 않습니다. ‘도마’처럼 자신들의 믿음을 위하여 어떤 표적을 구한다는 말입니다.
- ꁾ본문29절, 요20:25, “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이르되, ‘우리가 주를 보았노라.’ 하니 도마가 가로되, ‘내가 그 손의 못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 하니라.”
그러면, 표적을 구하는 오늘의 신앙을 봅시다.
본문29-32절을 봅시다.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은 유일하신 하나님을 알고 있고, 자신들은 선택된 백성이라고 자랑했습니다. 그 중에서도 바리새인들이나 사두개인, 율법사, 서기관들, 제사장 그룹들의 자랑은 대단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향한 믿음은 자신들을 따라올 자가 없다고 큰소리 쳤습니다. 모든 행위나 신앙의 일은 항상 자신들이 옳았고, 자신들만이 진리였습니다. 자신들을 따르지 않는 자를 정죄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은 진리이신 예수님마저도 자신들의 뜻에 어긋남으로 정죄했습니다.
- ꁾ요7:46-49, “하속들이 대답하되, ‘그 사람의 말하는 것처럼 말한 사람은 이때까지 없었나이다.’ 하니 바리새인들이 대답하되, 너희도 미혹되었느냐? 당국자들이나 바리새인 중에 그를 믿는 이가 있느냐? 율법을 알지 못하는 이 무리는 저주를 받은 자로다.”
예수님께서는 이들의 신앙을 속과 겉이 다른 외식적인 신앙이라고 책망했습니다. 진리는 결코 자신을 주장하지 않습니다. 진리는 있는 그대로가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태양은 스스로가 ‘나는 태양이다.’라고 외치지 않아도 모든 사람이 태양인 줄 압니다. 주님은 당신 자신을 주장하지 않으셨습니다. 심지어는 재판 석에서까지 자기를 위하여 변호조차 하지 않으셨습니다. 사도 베드로를 통하여 말씀하셨습니다.
- ꁾ벧전5:2-3, “너희 중에 있는 하나님의 양 무리를 치되 부득이함으로 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뜻을 좇아 자원함으로 하며, 더러운 이를 위하여 하지 말고 오직 즐거운 뜻으로 하며, 맡기운 자들에게 주장하는 자세를 하지 말고 오직 양 무리의 본이 되라.”
예수님은 이와 같은 믿음을 가진 자들의 심각성을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표적을 구하는 사람들에게 표적을 보여주시지 않으시고, 요나의 표적밖에 보일 것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이유는 그들에게 다른 표적을 보여주어도 믿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표적을 구한 이유는 믿기 위해서가 아니라 예수님을 책잡기 위해서였습니다.
진정한 믿음을 소유한 성도는 표적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과 영광을 구하게 됩니다.
그러면 요나의 표적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는 요나 선지자에게 죄악의 도성인 ‘니느웨’에 가서, 죄악이 가득 찼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심판을 행하실 것이라고 전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요나는 이스라엘의 적국인 니느웨가 망하기를 바랐기 때문에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하고 ‘다시스’로 도망을 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명령을 거역하고 도망하는 요나가 탄 배를 위기 속에 몰아넣으셨습니다. 결국 요나는 바다에 던져졌고,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물고기 뱃속에서 사흘 낮, 사흘 밤을 지내며 회개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요나는 사흘 후에 물고기 뱃속에서 다시 육지로 나오게 되고, 죄악의 도성 <니느웨>에서 하나님의 심판을 외쳤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불순종하던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서 사흘을 지내고, 다시 땅으로 나와서는 니느웨에 살아계신 하나님의 표적이 되게 하셨습니다. 니느웨 사람들은 요나의 일들을 들었을 것이고 하나님의 경고에 즉시 순종해서 왕으로 더불어 온 백성이 회개했던 것입니다. 물고기 뱃속에서의 삼일은 요나에게 있어서 불순종의 대가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사흘 동안 무덤에 계신 것은 인류가 저지른 불순종과 죄악의 대가였습니다. 그리고 다시 살아나신 예수님은 죄악 된 이 세대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예고하는 표적이 되셨습니다. 물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는 예수님의 부활이 영생과 썩어지지 않는 영광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믿음의 표적은 병든 자가 낫는 것도 아니며, 죽었던 자가 살아나는 것도 아니며, 일이 잘 되는 것도, 부자가 되는 것도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의 믿음의 표적은 오직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뿐입니다.
이 세대 사람을 정죄할 스바의 여왕과 니느웨 사람들은 무엇입니까?
예수님은 표적을 구하면서 믿지 아니하는 사람들을 비유해서 ‘스바 여왕’과 ‘니느웨의 사람들’을 예로 들었습니다. 여기서 믿지 않는다는 말은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고, 자신의 신앙을 고집 하는 것을 말합니다.
1) 스바 여왕은 솔로몬의 지혜를 듣기 위하여 먼 길을 일부러 달려와서 솔로몬의 말을 들었습니다.(스바는 현재의 에티오피아를 말한다.) 이는 진리를 향한 열정을 높이 평가한 것입니다.
2) 니느웨는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만큼 죄악으로 가득한 도시였습니다. 그러나 <요나> 선지자가 선포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즉시 회개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세상 끝날, 즉 심판의 날에 ‘스바 여왕’과 ‘니느웨 사람들’이 이 세대의 사람들을 정죄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즉, 재판 석에서 검사가 된다는 말입니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스바여왕’은 솔로몬의 지혜를 들으려고 와서, 솔로몬에게 지혜를 주신 하나님을 높였습니다(대하9:8,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를 송축할지로다. 하나님이 당신을 기뻐하시고 그 위에 올리사,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왕이 되게 하셨도다. 당신의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사랑하사 영원히 견고하게 하시려고, 당신을 세워 저희 왕을 삼아 공과 의를 행하게 하셨도다. 하고”). ‘니느웨 사람들’은 선지자인 요나의 설교를 듣고 회개했습니다. 그러나 이 세대의 사람들은 솔로몬과도, 요나와도 비교할 수 없이 크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적을 행하시고, 진리를 증거 하심에도 불구하고 믿지 않았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지금까지 행하신 이적들과 진리의 말씀을 보고 듣고서도 믿지 못하면, 아무리 큰 표적을 행하여도 이들이 믿지 않을 것을 아셨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들으면서 확실히 믿습니까? 혹시 믿음을 위하여 어떤 표적을 원하지 않습니까?
예수님은 저들의 어두운 눈을 염려하셨습니다. 그래서 눈과 등불과 빛에 대한 비유를 하셨습니다.
눈과 등불과 빛의 비유는 무엇을 말합니까?
본문33-36을 보십시오.
이 말씀에는 세 가지 등불에 대하여 기록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방안의 어두움을 밝히는 등불이요(33). 둘째는 세상을 밝히 보는 육신의 등불인 눈이요(34). 셋째는 영혼을 밝히는 내면의 빛인 신앙의 등불입니다(35).
1) 방안의 등불(33)
우리는 전깃불을 방의 구석이나, 마루 밑에 설치하지는 않습니다. 그 이유를 묻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불을 밝히는 용도를 모르는 사람이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등불의 의무는 방안을 밝히는 것이요, 등불의 위치는 모든 것을 밝힐 수 있는 높은 곳입니다.
진리의 말씀이시며, 부활하신 예수님이 곧 빛이십니다. 요1:9에서,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취는 빛이 있었나니”라고 그리스도를 표현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빛이 아닙니다. 빛을 담고 있는 그릇일 뿐입니다(고후4:6, “어두운 데서 빛이 비취리라 하시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취셨느니라.”).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이 해야 할 일은 이 빛이 잘 비취도록 자리를 정하는 것입니다.
전도, 즉 복음을 전하는 일은 곧 빛을 전하는 것입니다. 빛을 전하는 일은 빛을 받아 반사하는 역할입니다. 이로 보아 전도는 성도의 삶을 통하여 반사되는 것임이 분명합니다. 뒤에 나오는 35-36절의 말씀을 보아 더욱 확실합니다.
2) 육신의 등불인 눈(34)
인간 세상을 밝히 볼 수 있는 것은 육신의 눈입니다. 눈이 어두우면 모든 물체가 흐릿하게 보일 것입니다. 이는 생명의 빛을 담고, 이를 반사하려면 성도들이 먼저 밝아져 있어야 함을 깨닫게 하는 말씀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똑똑하게 바라보지 못하면서 다른 사람에게 밝은 빛을 반사할 수가 없다는 뜻입니다(36절).
3) 내면의 빛인 신앙의 등불(35)
이 빛은 우리 영혼 속에 들어와서 우리의 영혼을 밝히고, 이 빛을 다른 사람에게 반사하게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런데 본문의 말씀은 우리 속에 있는 빛이 어둡지 않은가 보라고 하셨습니다. 어떻게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어두울 수가 있습니까? 이 말씀은 빛을 담고 있는 우리의 영혼이 세상의 것으로 혼탁해 있지 않은지를 살펴보라고 하신 것입니다(눅21:34, 36). 방안을 밝히는 전등이 오래되면 낡고, 때가 끼어서 어두워집니다. 빛 자체가 어두워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방안을 항상 밝게 유지하려면 정기적으로 전등을 손질하고 닦아주어야 합니다.
우리의 신앙도 매일 점검해야 합니다. 내면의 빛, 영혼의 등불을 항상 밝게 유지하려면, 성령 충만을 유지해야 합니다(행4:31, 7:55, 엡5:15-21). 성령께서 우리 마음에 충만하게 역사 하실 때, 그리스도의 빛을 온전하게 반사할 수가 있습니다. 성령은 하나님의 뜻을 완전하게 아시는 반사경이시기 때문입니다(고전2:10).
여러분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확실히 믿습니까? 그리고 예수님의 부활이 곧 나의 부활임도 믿습니까? 이제부터는 자신을 주장하지 아니하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푯대로 삼아 생명의 빛을 비춥시다. 이러한 진실한 부활의 믿음이 주님이 오시는 날까지 지켜지고 증거 되어 영원한 행복의 삶을 준비하시기를 축원합니다.
1827년 스콧트랜드의 항구에서 배에 올라탄 노인 목사가 있었습니다. 성 안드레 교회에서 50년간 사역한 ‘라이트’(Henry rancis Lyte)목사였습니다. 건강을 위하여 따뜻한 곳에 살아야 하겠다는 의사의 지시를 따라 ‘프렌치 리비에라’로 떠나는 길이었습니다. 첫 번 기항지인 프랑스의 북부 항구에서 하룻밤을 자는데, 아침 출항 시간에도 라이트목사가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선원이 여관방을 찾아갔더니 노인 목사는 방바닥에 쓰러져 있었으며, 책상에는 밤사이에 쓴 시 한 편이 놓여있었습니다. 그것은 오늘날 전 세계가 애송하는 찬송인 “때 저물어 날 이미어두니” (Abide with me, 531장)입니다.
원문을 직역하면 이런 내용입니다. “날은 빨리 저물고 어둠이 짙어 가는데, 주님, 내 속에 거하소서. 아무도 나를 위로해 줄 수 없을 때, 오직 나를 도와주실 수 있는 주여, 나와 함께 거하소서. 작은 인생은 썰물처럼 멀어가고, 땅의 기쁨과 영광은 점점 희미해집니다. 변하지 않는 주님, 내 속에 거하소서. 주님의 축복이 내 곁에 있으면 병도 힘을 못 쓰며, 눈물도 쓰지 않습니다. 주님이 나와 함께 계시면 죽음도 무덤도 승리의 개가가 되리이다. 내 눈을 감기 전에 십자가를 보게 하소서. 하늘의 새벽이 밝아올 때, 허망한 땅의 그늘은 사라질 것이오니, 사나 죽으나 주님 내 속에 거하소서.”
너무나 평안하고 신뢰로 가득 찬 시입니다.
주님의 부활을 생각하는 부활절 아침에, 성도에게 주어진 진정한 소망이 무엇인지를 느끼게 하는 감동적인 시입니다. 오늘은 주님의 부활을 기념하고 동시에 오늘 우리의 부활 신앙을 되새겨 보며, 감사하고 서로를 축하하고 축복하는 날입니다.
성경에는 부활의 소망과 영광에 대한 많은 말씀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 시간에는 주님께서 이 세대를 향하여 말씀하신 하나의 표적을 통하여 부활의 참의미를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오늘날 교회의 신앙은 다분히 현실주의적입니다. 즉 부활의 영원한 영광을 바라보는 신앙이 아니라, 현실의 생활에 의하여 신앙이 좌우된다는 말입니다. 평안할 때는 누구의 믿음이 진실한지를 알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나 막상 시험과 고난의 일들이 닥치면 믿음의 빛은 구별됩니다. 현실주의적인 믿음을 소유한 성도는 작은 시험에도 흔들리며, 또한 육신적인 감각으로 느끼지 못하면 잘 믿으려 하지 않습니다. ‘도마’처럼 자신들의 믿음을 위하여 어떤 표적을 구한다는 말입니다.
- ꁾ본문29절, 요20:25, “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이르되, ‘우리가 주를 보았노라.’ 하니 도마가 가로되, ‘내가 그 손의 못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 하니라.”
그러면, 표적을 구하는 오늘의 신앙을 봅시다.
본문29-32절을 봅시다.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은 유일하신 하나님을 알고 있고, 자신들은 선택된 백성이라고 자랑했습니다. 그 중에서도 바리새인들이나 사두개인, 율법사, 서기관들, 제사장 그룹들의 자랑은 대단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향한 믿음은 자신들을 따라올 자가 없다고 큰소리 쳤습니다. 모든 행위나 신앙의 일은 항상 자신들이 옳았고, 자신들만이 진리였습니다. 자신들을 따르지 않는 자를 정죄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은 진리이신 예수님마저도 자신들의 뜻에 어긋남으로 정죄했습니다.
- ꁾ요7:46-49, “하속들이 대답하되, ‘그 사람의 말하는 것처럼 말한 사람은 이때까지 없었나이다.’ 하니 바리새인들이 대답하되, 너희도 미혹되었느냐? 당국자들이나 바리새인 중에 그를 믿는 이가 있느냐? 율법을 알지 못하는 이 무리는 저주를 받은 자로다.”
예수님께서는 이들의 신앙을 속과 겉이 다른 외식적인 신앙이라고 책망했습니다. 진리는 결코 자신을 주장하지 않습니다. 진리는 있는 그대로가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태양은 스스로가 ‘나는 태양이다.’라고 외치지 않아도 모든 사람이 태양인 줄 압니다. 주님은 당신 자신을 주장하지 않으셨습니다. 심지어는 재판 석에서까지 자기를 위하여 변호조차 하지 않으셨습니다. 사도 베드로를 통하여 말씀하셨습니다.
- ꁾ벧전5:2-3, “너희 중에 있는 하나님의 양 무리를 치되 부득이함으로 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뜻을 좇아 자원함으로 하며, 더러운 이를 위하여 하지 말고 오직 즐거운 뜻으로 하며, 맡기운 자들에게 주장하는 자세를 하지 말고 오직 양 무리의 본이 되라.”
예수님은 이와 같은 믿음을 가진 자들의 심각성을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표적을 구하는 사람들에게 표적을 보여주시지 않으시고, 요나의 표적밖에 보일 것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이유는 그들에게 다른 표적을 보여주어도 믿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표적을 구한 이유는 믿기 위해서가 아니라 예수님을 책잡기 위해서였습니다.
진정한 믿음을 소유한 성도는 표적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과 영광을 구하게 됩니다.
그러면 요나의 표적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는 요나 선지자에게 죄악의 도성인 ‘니느웨’에 가서, 죄악이 가득 찼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심판을 행하실 것이라고 전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요나는 이스라엘의 적국인 니느웨가 망하기를 바랐기 때문에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하고 ‘다시스’로 도망을 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명령을 거역하고 도망하는 요나가 탄 배를 위기 속에 몰아넣으셨습니다. 결국 요나는 바다에 던져졌고,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물고기 뱃속에서 사흘 낮, 사흘 밤을 지내며 회개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요나는 사흘 후에 물고기 뱃속에서 다시 육지로 나오게 되고, 죄악의 도성 <니느웨>에서 하나님의 심판을 외쳤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불순종하던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서 사흘을 지내고, 다시 땅으로 나와서는 니느웨에 살아계신 하나님의 표적이 되게 하셨습니다. 니느웨 사람들은 요나의 일들을 들었을 것이고 하나님의 경고에 즉시 순종해서 왕으로 더불어 온 백성이 회개했던 것입니다. 물고기 뱃속에서의 삼일은 요나에게 있어서 불순종의 대가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사흘 동안 무덤에 계신 것은 인류가 저지른 불순종과 죄악의 대가였습니다. 그리고 다시 살아나신 예수님은 죄악 된 이 세대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예고하는 표적이 되셨습니다. 물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는 예수님의 부활이 영생과 썩어지지 않는 영광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믿음의 표적은 병든 자가 낫는 것도 아니며, 죽었던 자가 살아나는 것도 아니며, 일이 잘 되는 것도, 부자가 되는 것도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의 믿음의 표적은 오직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뿐입니다.
이 세대 사람을 정죄할 스바의 여왕과 니느웨 사람들은 무엇입니까?
예수님은 표적을 구하면서 믿지 아니하는 사람들을 비유해서 ‘스바 여왕’과 ‘니느웨의 사람들’을 예로 들었습니다. 여기서 믿지 않는다는 말은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고, 자신의 신앙을 고집 하는 것을 말합니다.
1) 스바 여왕은 솔로몬의 지혜를 듣기 위하여 먼 길을 일부러 달려와서 솔로몬의 말을 들었습니다.(스바는 현재의 에티오피아를 말한다.) 이는 진리를 향한 열정을 높이 평가한 것입니다.
2) 니느웨는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만큼 죄악으로 가득한 도시였습니다. 그러나 <요나> 선지자가 선포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즉시 회개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세상 끝날, 즉 심판의 날에 ‘스바 여왕’과 ‘니느웨 사람들’이 이 세대의 사람들을 정죄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즉, 재판 석에서 검사가 된다는 말입니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스바여왕’은 솔로몬의 지혜를 들으려고 와서, 솔로몬에게 지혜를 주신 하나님을 높였습니다(대하9:8,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를 송축할지로다. 하나님이 당신을 기뻐하시고 그 위에 올리사,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왕이 되게 하셨도다. 당신의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사랑하사 영원히 견고하게 하시려고, 당신을 세워 저희 왕을 삼아 공과 의를 행하게 하셨도다. 하고”). ‘니느웨 사람들’은 선지자인 요나의 설교를 듣고 회개했습니다. 그러나 이 세대의 사람들은 솔로몬과도, 요나와도 비교할 수 없이 크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적을 행하시고, 진리를 증거 하심에도 불구하고 믿지 않았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지금까지 행하신 이적들과 진리의 말씀을 보고 듣고서도 믿지 못하면, 아무리 큰 표적을 행하여도 이들이 믿지 않을 것을 아셨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들으면서 확실히 믿습니까? 혹시 믿음을 위하여 어떤 표적을 원하지 않습니까?
예수님은 저들의 어두운 눈을 염려하셨습니다. 그래서 눈과 등불과 빛에 대한 비유를 하셨습니다.
눈과 등불과 빛의 비유는 무엇을 말합니까?
본문33-36을 보십시오.
이 말씀에는 세 가지 등불에 대하여 기록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방안의 어두움을 밝히는 등불이요(33). 둘째는 세상을 밝히 보는 육신의 등불인 눈이요(34). 셋째는 영혼을 밝히는 내면의 빛인 신앙의 등불입니다(35).
1) 방안의 등불(33)
우리는 전깃불을 방의 구석이나, 마루 밑에 설치하지는 않습니다. 그 이유를 묻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불을 밝히는 용도를 모르는 사람이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등불의 의무는 방안을 밝히는 것이요, 등불의 위치는 모든 것을 밝힐 수 있는 높은 곳입니다.
진리의 말씀이시며, 부활하신 예수님이 곧 빛이십니다. 요1:9에서,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취는 빛이 있었나니”라고 그리스도를 표현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빛이 아닙니다. 빛을 담고 있는 그릇일 뿐입니다(고후4:6, “어두운 데서 빛이 비취리라 하시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취셨느니라.”).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이 해야 할 일은 이 빛이 잘 비취도록 자리를 정하는 것입니다.
전도, 즉 복음을 전하는 일은 곧 빛을 전하는 것입니다. 빛을 전하는 일은 빛을 받아 반사하는 역할입니다. 이로 보아 전도는 성도의 삶을 통하여 반사되는 것임이 분명합니다. 뒤에 나오는 35-36절의 말씀을 보아 더욱 확실합니다.
2) 육신의 등불인 눈(34)
인간 세상을 밝히 볼 수 있는 것은 육신의 눈입니다. 눈이 어두우면 모든 물체가 흐릿하게 보일 것입니다. 이는 생명의 빛을 담고, 이를 반사하려면 성도들이 먼저 밝아져 있어야 함을 깨닫게 하는 말씀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똑똑하게 바라보지 못하면서 다른 사람에게 밝은 빛을 반사할 수가 없다는 뜻입니다(36절).
3) 내면의 빛인 신앙의 등불(35)
이 빛은 우리 영혼 속에 들어와서 우리의 영혼을 밝히고, 이 빛을 다른 사람에게 반사하게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런데 본문의 말씀은 우리 속에 있는 빛이 어둡지 않은가 보라고 하셨습니다. 어떻게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어두울 수가 있습니까? 이 말씀은 빛을 담고 있는 우리의 영혼이 세상의 것으로 혼탁해 있지 않은지를 살펴보라고 하신 것입니다(눅21:34, 36). 방안을 밝히는 전등이 오래되면 낡고, 때가 끼어서 어두워집니다. 빛 자체가 어두워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방안을 항상 밝게 유지하려면 정기적으로 전등을 손질하고 닦아주어야 합니다.
우리의 신앙도 매일 점검해야 합니다. 내면의 빛, 영혼의 등불을 항상 밝게 유지하려면, 성령 충만을 유지해야 합니다(행4:31, 7:55, 엡5:15-21). 성령께서 우리 마음에 충만하게 역사 하실 때, 그리스도의 빛을 온전하게 반사할 수가 있습니다. 성령은 하나님의 뜻을 완전하게 아시는 반사경이시기 때문입니다(고전2:10).
여러분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확실히 믿습니까? 그리고 예수님의 부활이 곧 나의 부활임도 믿습니까? 이제부터는 자신을 주장하지 아니하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푯대로 삼아 생명의 빛을 비춥시다. 이러한 진실한 부활의 믿음이 주님이 오시는 날까지 지켜지고 증거 되어 영원한 행복의 삶을 준비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