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문
우리가 지켜야 할 새 계명
*** 우리가 지켜야 할 새 계명 / 요한복음 13:31-35
요한복음 13:31-35, “31 그가 나간 후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지금 인자가 영광을 받았고 하나님도 인자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셨도다. 32 만일 하나님이 그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셨으면 하나님도 자기로 말미암아 그에게 영광을 주시리니 곧 주시리라. 33 작은 자들아, 내가 아직 잠시 너희와 함께 있겠노라. 너희가 나를 찾을 것이나 일찍이 내가 유대인들에게 너희는 내가 가는 곳에 올 수 없다고 말한 것과 같이 지금 너희에게도 이르노라. 34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35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 들어가는 말
성경은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맺은 계약을 기록한 책입니다. 그래서 구약(舊約, old testament), 신약(新約, new testament)이라고 부릅니다. 옛 약속인 구약은 예수께서 세상에 오시기 이전에 하나님께서 죄로 단절된 사람들에게 회복의 기회로 율법을 주셨다는 사실을 기록했습니다. 새 약속인 신약은 옛 약속을 지키지 못하는 인생들을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대속(代贖)의 제물로 삼으시고, 생명을 약속하신 새 계명을 기록했습니다. 바로 지금, 우리 그리스도인이 지켜야 할 계명은 예수께서 우리에게 명하신 새 계명입니다. 새 계명은 본문 34절에서 말씀하신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계명이라고 표현하신 이유는 반드시 지켜야만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예수께서 십자가를 통한 대속(代贖)을 위하여 예루살렘으로 들어오심을 기억하는 ‘종려 주일’로 지킵니다. 종려 주일에 이 말씀을 생각하는 것은, 예수님의 고난과 십자가 죽으심을 가장 값지게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명하신 계명을 지키는 것이야말로 예수님을 가장 높이며 값지게 기억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요한복음 15:10절에서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라고 하십니다.
※ 본문의 내용과 의미를 봅시다.
본문 말씀은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직전, 제자들과의 마지막 유월절을 앞두고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시면서 섬김의 본을 보이셨으며, 제자들에게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요 13:15)라고 하셨습니다. 본을 보였다고 함은 우리에게 ‘너희도 그렇게 하라.’라는 뜻입니다. 그러면서 제자들에게 ‘너희는 영적으로 깨끗하다,’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다는 아니라, 한 사람이 자신을 팔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자신의 마음을 들킨 가룟 유다는 분한 마음을 품고 예수님을 유대인에게 넘기기 위하여 나가버렸습니다. 유다가 나간 후에 예수께서는 남은 열 한 제자들에게 새 계명을 주셨습니다. 왜 유다가 나간 후에 새 계명을 주셨겠습니까? 이는 진리의 말씀을 들을 복 된 사람이 따로 있음을 나타냅니다. 예수께서는 많은 진리를 비유로 가르치셨는데, 그 이유는 ‘천국의 비밀을 알도록 허락된 사람만 깨닫게 하기 위함’입니다. 마태복음 13:11절에서,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그들에게는 아니 되었나니”라고 하시며, 16절에서 “그러나 너희 눈은 봄으로, 너희 귀는 들음으로 복이 있도다.”라고 하십니다. 지금 주님 말씀을 들으며 깨닫는 우리는 진정으로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새 계명은 실천함으로써 영원한 행복에 이를 수 있음을 분명하게 가르치십니다. 본문 33절입니다. “작은 자들아, 내가 아직 잠시 너희와 함께 있겠노라. 너희가 나를 찾을 것이나 일찍이 내가 유대인들에게 너희는 내가 가는 곳에 올 수 없다고 말한 것과 같이 지금 너희에게도 이르노라.”라고 하십니다. 예수께서는 외식하며 예수님을 믿지 않는 유대인들에게 “내가 가리니 너희가 나를 찾다가 너희 죄 가운데서 죽겠고 내가 가는 곳에는 너희가 오지 못하리라.”(요 8:21)라고 하셨습니다. 왜 유대인들이 예수님이 가시는 곳,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하겠습니까? 그 이유는 예수님을 믿지 않았고, 말씀을 순종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새 계명을 주시면서 ‘새 계명을 믿고 실천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지금 우리가 지켜야 할 새 계명은 어떤 것입니까?
※ 새 계명은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본문 34-35절입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35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우리 말에 ‘손뼉은 마주쳐야 소리가 난다.’라고 했습니다. 이는 사랑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서로 사랑”이란, 사랑을 서로 나누는 것을 의미합니다. 혼자서만 하는 사랑은 참된 사랑의 의미가 없습니다. 사랑은 서로가 표현해야 하고, 행동으로 실천해야 합니다. 잠언 27:5절에서 “면책은 숨은 사랑보다 나으니라.(공동번역/‘속으로 사랑하는 것보다 터놓고 꾸짖는 것이 낫다.’)”라고 했습니다. 많은 사람이 친하고 가까운 사람들에게 사랑을 표현하거나 실천하는 것을 민망스러워합니다. 그래서 예로부터 우리 선조들은 ‘가슴에 품은 사랑’을 미덕으로 여겼습니다. 가슴에 품은 사랑은 서로가 알 수 없고, 행복으로 이어질 수도 없습니다. 차라리 드러내놓고 나무라는 것이 그 사람의 마음을 알 수 있어서 더 좋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을 행복하게 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사랑은 서로 나누고 실천하는 것입니다. 다만,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서로 사랑은 그리스도인 안에서의 일이라는 것입니다. 세상을 향하여는 우리가 하는 일방적인 사랑이더라도 해야 합니다. 예수께서 누가복음 10:30-37절에서 ‘선한 이웃’에 관해 비유하시면서, 강도 만난 자에게 행한 일방적 사랑을 보여주셨습니다. 이렇게 따뜻한 위로와 격려로, 살뜰한 배려, 친절, 힘겹고 어려울 때는 손을 잡아주고, 토닥여주는 것처럼, 작은 사랑이라도 실천해야 합니다.
그런데, 사랑은 가장 가까운 사람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부부, 가족, 일가친척, 친구, 이웃 등. 동심원적으로 퍼져가야 합니다. 갈라디아서 6:10절에서 “그러므로 우리는 기회 있는 대로 모든 이에게 착한 일을 하되 더욱 믿음의 가정들에게 할지니라.”라고 하십니다. 우리 옛말에 ‘안에서 새는 바가지 밖에서도 샌다.’라고 했습니다. 가까운 사람을 사랑하지 못하면서 다른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은, 진정한 사랑이 아닙니다. 내가 하나님께 인정받고, 하나님의 은혜를 받으려면, 진정으로 사랑해야 합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신 것처럼, 서로를 높여주고, 섬겨주는 것이 행복해지는 하나님 자녀로서의 사랑입니다. 경상도 사람들 참 무뚝뚝합니다. 남자나 여자나 표현할 줄 모르고 사랑하는 방법을 잘 모릅니다. 돈이 많다고 행복하고, 부족한 것 없이 산다고 행복한 것은 아닙니다. 더욱이 저절로 사랑이 되는 것도 아닙니다. 사랑을 나누는 데는 희생이 따르고, 섬김과 봉사가 따릅니다. 하나님께서는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으로 사랑을 표현하셨습니다. 요한일서 4:10절에서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라고 하십니다. 자기 자존심 다 세우고, 자기 이익 챙기면서는 사랑할 수도 없고 행복해질 수는 더욱 없습니다.
오래전에 ‘We are the World’라는 노래가 유행했던 때가 기억나시지요? 이 노래가 생겨난 동기입니다.
10년 이상 가뭄이 계속된 아프리카에는 수천만 명이 죽어 갔으며, 내전으로 인한 수십만 명의 난민들이 있었습니다. 그 난민들을 돌보려고 호주의 한 의사가 자원봉사자로 나섰습니다. 끝없이 늘어선 환자들을 돌보고 있는 그 의사에게 어떤 기자가 물었습니다. “당신은 아무리 돌보아도 표시조차 없는 이 일을 어떻게 혼자서 하시렵니까?” 그러자 의사는 이렇게 말합니다. “한 사람씩 한 사람씩 돌보고 있을 뿐입니다.”
바로 이 인터뷰 장면이 TV를 통하여 방영되었고, 당시의 유명한 자메이카계 미국 가수였던 ‘해리 벨라폰테(Harry belaFonte, 1927- ) ’가 그 장면에 감동하였습니다. 그것이 동기가 되어 시작된 운동이 세계의 슈퍼스타들이 아프리카를 돕자고 벌인 구호운동이었고, 그들의 노래가 바로 ‘We are the World’였습니다. 세계가 함께 했던 사랑의 하모니였습니다.
사랑하려면, 내가 먼저 마음을 열고 이해하고 배려하고 다가가야 합니다. ‘자폐증’을 알고 계시지요? 이 병은 ‘작은 변화에도 견디지 못하고 고통을 받으며, 어떤 대상에만 집착하려는 경향이 있는 정서 발달 장애’를 말합니다. 즉 ‘스스로 갇혀 사는 마음 폐쇄증상’입니다. 쉽게 말해서 마음 문을 꽁꽁 닫아버린 상태입니다. 스스로 마음을 닫으면 세상은 온통 어둡고 불행과 고통으로 다가옵니다. 똑같은 벽돌이라도, 그것으로 담을 쌓으면 다른 사람과 소통이 끊어지게 되고, 다리를 만들면 끊어진 관계도 이어지고 회복됩니다. 어떻게 보면, 지금 시대가 화려해 보이지만 실상은 마음들이 닫혀 가는 그런 시대가 아닌가 합니다. 지금은 일인 가구가 늘어가면서, 사람들은 스스로 마음의 담을 쌓고 혼자 외로워하고 고통스러워합니다. 이 시대를 깨울 수 있는 것은 ‘사랑’뿐입니다. 사랑은 다른 사람을 향한 관심이며, 마음의 문을 여는 것입니다. 상대방이 내 마음에 들지 않기 때문에 마음을 닫아버린다는 것은 스스로 불행을 부르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죄로 말미암아 원수가 된 사람들을 향하여 먼저 화해의 손을 내미셨으며 마음을 여셨습니다. 로마서 5:8절입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라고 하십니다. 이제, 진실한 사랑을 고민하시고 작은 사랑이라도 실천합시다.
※ 왜 하필이면 사랑입니까?
우리가 지켜야 할 새 계명이 많고 많은 덕목을 두고 하필이면 사랑입니까? 이유는 간단합니다. 하나님께서 사랑 그 자체이시며, 하나님의 능력이 사랑 안에서 역사하기 때문입니다. 요한일서 4:16절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의 안에 거하시느니라.” 올해 첫 주일 설교를 기억하십니까? 요한계시록 2:1-7절의 말씀으로 ‘지켜야 할 신앙노선’이라는 제목으로 전했습니다. 이 말씀에서 요점은 ‘그리스도인으로서 더는 물러설 수 없는 최후까지 지켜야 할 신앙 덕목이 사랑이라.’라는 것입니다. 전쟁에서 영토를 지키고 생명을 지킬 수 있는 마지막 마지노선이 있듯이, 그리스도인의 신앙에는 사랑이 마지노선입니다. 이 말씀을 거듭 강조하는 이유가 에베소 교회에 경고하신 예수님의 말씀에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2:4-5절입니다.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가서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 촛대는 교회를 의미하는데(계 1:20), “촛대를 옮긴다.”라고 함은 ‘교회를 버리겠다.’라는 뜻입니다. 즉 처음 사랑이 떨어진 것을 회개하여 회복하지 않으면, 택하심을 옮겨버리겠다는 무서운 경고입니다.
우리가 잘 알지만, 다시 확인합시다. 고린도전서 13:1-3절입니다.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것도 아니요.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이 말씀을 잊지 마십시오. 주님께 집중하려 할 때, 끊임없이 강권하시는 말씀입니다. 목사인 저도 가슴앓이를 하며, 정말 힘들게 고민 많이 했으며, 지금도 끊임없이 노력하고 있습니다. 왜 이렇게까지 해야 합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를 살리시려고 아무런 조건 없이 독생자를 내주셨기 때문입니다. 또한, 독생자이신 예수께서는 아무런 조건 없이, 내가 받아야 할 수모와 죄의 무거운 짐을 지시고 십자가에서 제물이 되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사랑에 조건을 붙입니다. ‘~ 때문에 사랑할 수 없고’ ‘~ 때문에 밉고, 싫고’ ‘~ 때문에 용서할 수 없다.’라고 합니다. 내가 용서하지 않고, 내가 사랑하지 않으면, 주님께서도 나를 용서하지 않으시고 사랑하지 않으십니다. 그 이야기가 바로 마태복음 18:21-35절에서 말씀하시는 ‘용서할 줄 모르는 종의 비유’입니다. 35절입니다. “너희가 각각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
말씀을 맺습니다.
마음이 닫힌 관계는 서로를 불행하게 합니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으로서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려면 자신의 마음부터 열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사랑으로 나에게 먼저 다가오셨음을 잊지 마십시오. 예수님의 십자가는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징표입니다. 이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 사순절 새벽기도 하고, 금식하고, 십자가를 생각하면서 슬퍼하는 것보다 귀합니다. 진정한 사랑 없이는 주님이 계신 곳에 갈 수가 없습니다. 이제,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기억하면서 마음을 열고 서로를 받아들이고, 작은 사랑의 실천이라도 시작합시다. 우리 모두의 앞날에 하나님께로 말미암는 이런 아름답고 따뜻한 사랑으로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삶을 누리시기를 축복합니다.
마라나-타(μαράνα-θ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