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문
육신이 원하는 것과 성령의 인도하심
*** 육신이 원하는 것과 성령의 인도하심 / 갈라디아서 5:16-26
갈라디아서 5:16-26, “16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17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르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18 너희가 만일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가 되면 율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리라. 19 육체의 일은 분명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20 우상숭배와 주술과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열함과 이단과 21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 22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23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24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25 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행할지니 26 헛된 영광을 구하여 서로 노엽게 하거나 서로 투기하지 말지니라.”
** 들어가는 말
여러분이 세상에 살면서 생활 현실과 신앙의 요구가 다를 경우가 많지요? 이렇게 다른 것 중에 가장 고민되고 힘들게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조금 쉽게 표현하면, ‘세상에서 내가 원하는 게 있는데, 신앙 양심으로는 가책이 되는 것’을 말합니다. 예를 들면, 경제 (풍족한 물질생활), 신체(건강과 장수), 오락(여가 선용), 사교(아름답고 원만한), 사랑(변함없는 이성 간의 사랑), 국가와 인류를 위한 봉사, 지적인 것(높고 깊은 학식), 품성(높고 원만한 인격), 명성(이름이 알려지는 것), 많은 권력(확고한 지위), 종교(사랑과 기쁨의 신앙생활), 영적인 확신, 결혼(행복한 삶), 가문의 번영, 가정(화목한 가정생활), 훌륭한 죽음, 등등. 세상에서 하고 싶고 원하는 것이 많을 것입니다. 그런데 내가 원하는 걸 하자니 영의 생명이 걱정되고, 신앙을 따르자니 장래가 염려스럽기도 하고 재밋거리를 놓기가 힘듭니다. 그래서 머리 아프게 하는 걸 생각하지 않고, 적당하게 타협하며 무신경하게 살게 됩니다. 아니며, 이렇게 살면 안 된다는 것도 알지만, 조금만 더 하면서 차일피일(此日彼日) 신앙의 결단을 미루게 됩니다. 하지만, 다른 건 몰라도 신앙의 결단은 미룰수록 마음은 힘들어지고 주님과의 관계가 멀어지게 됩니다. 신앙의 결단은 빠를수록 좋습니다. 선지자 엘리야는 하나님과 우상 사이에서 머뭇거리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너희가 어느 때까지 둘 사이에서 머뭇머뭇하려느냐? 여호와가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따르고, 바알이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따를지니라.”(왕상 18:21)라고 했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기도문이 있습니다.
현대신학의 거장인 미국 신학자 ‘라인홀드 니이버’의 기도문입니다. “하나님이여! 나에게, 내가 변화시킬 수 없는 일에 대해서는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평정을 주시고, 내 힘으로 고칠 수 있는 일에 대하여는 그것을 고칠 수 있는 용기를 주시며, 그리고 이 두 가지 차이를 깨달아 알 수 있는 지혜를 허락해 주옵소서.” 영국의 ‘조지 5세’는 “하나님이여, 나에게 달의 세계나 엎질러진 우유에 대해 울지 않도록 가르쳐 주옵소서.”라는 좌우명을 벽에 걸어놓고 지표로 삼았다고 합니다. 이는 자기의 한계를 알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순복해야 함을 말합니다. 이러한 환경에 대한 인정은 용기와 결단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조차 환경이나 상황을 탓하며 포기하고 체념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니이버는 “내 힘으로 고칠 수 있는 일에 대해서는 그것을 고칠 수 있는 용기를 주옵소서.”라고 기도합니다. 즉 자신에게 어렵고 힘겨운 상황이라 할지라도 자신이 고칠 수 있는 일이고, 고쳐야 하는 일이라면 담대하게 행할 수 있기를 소망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마태복음 24장에서 제자들에게 종말에 관하여 말씀하시면서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어느 날에 너희 주가 임할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니라.”라는 내용을 거듭 강조하십니다. 이는 깨달은 바를 결단하고 실천하라는 촉구입니다.
※ 육신이 원하는 것과 성령의 인도하심을 어떻게 구별합니까?
신앙생활 중에 가장 힘든 것은, ‘내가 하는 일에서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과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깨닫는 것’입니다. 설교에서나, 신앙 간증할 때, 혹은 다른 성도들이 가끔 이런 말을 합니다. ‘이번 일은 하나님이 인도해주셔서’라거나,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해 주셔서’라는 말입니다. 그런 말을 들으면, ‘나는 전혀 그런 걸 느낄 수가 없으니 내 신앙이 잘못된 것인가?!’라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요. 하지만, 내 신앙이 잘못된 건 아닙니다. 목회자나 간증자, 성도들이 이렇게 표현하는 것은, 자기 신앙의 표현입니다. 즉, 하나님 말씀을 생활에서 실천하면서 경험한 것을 그렇게 표현한 것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르면, 성령께서 내 영을 통하여 깊이 깨닫게 하시며, 내 생활을 통하여 나타나게 됩니다. 예수께서 이러한 현상을 마태복음 7:16-20절에서 말씀하십니다.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 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느니라. 이러므로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 이 말씀을 다르게 표현하면, ‘그 사람에게서 나타나는 삶의 모습을 보면,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를 안다.’라는 것입니다. 즉 육신이 원하는 것과 성령의 인도하심을 나타내는 것은 자신의 생활입니다. 제가 잘 사용하는 시대적 예화가 있습니다.
루이스(C. S. Lewis)가 쓴 ‘엄청난 이혼’(The Great Divorce)이라는 제목의 우화적인 작품이 있습니다.
내용은 이렇습니다. 엄청나게 뜨겁고, 날마다 비가 오고, 언제나 어두운 거리입니다. 하루도 거기에 살고 싶지 않은 환경입니다. 그러나 빛나는 천국으로 옮겨가는 방법을 하나님이 마련하셨습니다. 천국행 정기 버스(Shuttle Bus)를 보내신 것입니다. 매시간 떠나기 때문에 기회는 자주 있습니다. 그러나 놀라운 것은 천국행 버스를 타는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대부분 사람이 버스 정거장에 시간 맞추어 나옵니다. 그러나 버스에 올라타지를 않습니다. 요금은 무료이기 때문에 누구나 탈 수 있습니다. 그들은 정거장에 나와 버스를 바라보며 생각합니다.
“저쪽으로 가면 못할 일이 많아진다. 남의 흉을 보던 즐거움도 없어지고, 약간의 재주로 어리석은 인간들의 박수를 받고 보스 노릇 할 만족도 없어진다. 지위 노름(status game)이 거기서는 안된다. 자랑할 수도 으쓱댈 수도 없는 세상에 무엇 때문에 가는가?…”
그래서 그들은 일주일에 한 번쯤 정거장에만 나왔다가 버스는 타지 않는 일을 오래 계속하고 있습니다. 이들에게 한 가지 예고되지 않은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이 정기 버스가 운행 중지되는 날이 며칠 남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루이스 교수의 이 우화는 ‘성령의 인도하심에 대한 육신을 따르는 성도의 삶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표현한 것입니다. 많은 성도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인도하시는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르고자 하는 마음은 있지만, 생활 현실에 매여 실천을 미루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이러한 현실적인 갈등이 일어나는 이유를 본문 17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르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즉 성령께서 성도가 육체가 원하는 것을 따르지 못하도록 갈등을 일으키시는 것입니다. 영적인 갈등은 영의 생명에 관심을 가질 때 일어납니다. 만일, 영의 생명에 관하여 관심이 없고, 육신을 따라 사는 일에 가책이 없다면, 당연히 이런 갈등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영적인 갈등은 성령께서 하나님의 사람들이 하나님을 떠나 살지 못하도록 하는 안전장치입니다. 예를 들어, 사도 바울에게는 육신을 힘들게 하는 고질병이 있었습니다. 고린도후서 12:7절입니다.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탄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 이 고질병을 안질 혹은 간질이라고 추측하는데, 너무나 고통스러워서 하나님께 고쳐달라고 세 번 기도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답변이 이러합니다.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 짐이라.”(고후 12:9). 지금 그대로가 더욱 큰 은혜라는 뜻입니다. 이처럼, 그리스도인에게는 성령께서 우리 마음대로 살지 못하도록 제어하십니다. 이러한 갈등이 내 마음을 어렵게 한다면, 육신이 원하는 것과 성령의 인도하심이 무엇인가를 내 마음으로는 알고 있다는 표현입니다. 만일 성령의 인도하심이 무엇인지를 전혀 알지 못하거나, 내가 원하는 것이 육신적인 것임을 모른다면, 내 마음이 고민하거나 갈등할 이유가 없습니다.
※ 육신이 원하는 것은 무엇이며, 성령의 인도하심은 무엇입니까?
본문 19-23절을 같이 읽어봅시다. “육체의 일은 분명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20 우상숭배와 주술과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열함과 이단과 21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 22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23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이 말씀에서, 육신의 일과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나타나는 삶의 모습을 세밀하게 표현했습니다. 육신의 일로 표현된 현상들은 따로 설명할 필요 없이 알 수 있는 내용입니다. 분별하기 어려운 건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나타나는 삶의 현상입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른다는 건 내가 성령 안에 있고, 성령께서 내 안에 거하시는 것으로 알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성령께서 내 안에 거하시면, 육체의 일을 하지 못하도록 갈등하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만일 주님이 내 안에, 내가 주님 안에 있지 않으면, 결단코 주님의 뜻을 따를 수 없습니다. 요한복음 15:5절에서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 그러면, 성령께서 여러분 안에 거하시고, 여러분은 성령 안에 있습니까? 성령께서 내 안에 계심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고린도전서 12:3절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리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아니하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여러분이 예수 그리스도가 ‘나의 주인’임을 확실하게 믿고 인정한다면 성령께서 여러분 안에 거하십니다. 성령께서 내 안에 계시면, 내가 생활하는 모든 과정을 성령께서 인도하십니다. 성령께서 인도하심은 내 마음의 깨달음과 감동으로 나타납니다.
성령의 감동이 우리 생활에 어떻게 나타나는지를 말씀을 통하여 봅시다. 누가복음 2:27절입니다. “성령의 감동으로 성전에 들어가매, 마침 부모가 율법의 관례대로 행하고자 하여 그 아기 예수를 데리고 오는지라.” 이 말씀은 예수님의 부모가 율법이 정한 정결 예식을 위하여 아기 예수를 안고 성전에 왔을 때, 성령께서 신실한 하나님의 사람인 시므온에게 성전으로 가도록 감동하신 내용입니다. 사도행전 21:4절에는 사도 바울에 관한 말씀이 있습니다. “제자들을 찾아 거기서 이레를 머물더니, 그 제자들이 성령의 감동으로 바울더러 ‘예루살렘에 들어가지 말라.’ 하더라.” 이 내용은 바울의 말년에 예루살렘으로 갈 때였습니다. 성령께서 바울의 제자들에게 감동하셔서 ‘예루살렘에 가면 고난을 당할 것이므로 가지 말라.’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처럼, 성령께서는 성도들의 마음을 감동하게 하셔서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하시고 인도하십니다. 그런데, 우리가 성령의 감동을 무시하고 자기 생각이나 계획대로 행동하면, 우리 마음이 갈등하게 하십니다. 만일, 성령의 인도하심을 계속 무시하면 더 깊은 갈등과 어려움이 따르게 됩니다.
사도행전 5:1-4절을 봅시다. “아나니아라 하는 사람이 그의 아내 삽비라와 더불어 소유를 팔아, 그 값에서 얼마를 감추매 그 아내도 알더라. 얼마만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두니, 베드로가 이르되 아나니아야, 어찌하여 사탄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네가 성령을 속이고 땅 값 얼마를 감추었느냐? 땅이 그대로 있을 때에는 네 땅이 아니며, 판 후에도 네 마음대로 할 수가 없더냐? 어찌하여 이 일을 네 마음에 두었느냐? 사람에게 거짓말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로다.” 이어서 7-9절입니다. “세 시간쯤 지나 그의 아내가 그 일어난 일을 알지 못하고 들어오니, 베드로가 이르되 ‘그 땅 판 값이 이것뿐이냐? 내게 말하라.’ 하니 이르되 ‘예, 이것뿐이라.’ 하더라. 베드로가 이르되 ‘너희가 어찌 함께 꾀하여 주의 영을 시험하려 하느냐? 보라. 네 남편을 장사하고 오는 사람들의 발이 문 앞에 이르렀으니 또 너를 메어 내가리라.’ 하니” 초대교회 당시, 성령의 능력으로 폭발적인 부흥이 일어나서 성도들이 자기 재산을 팔아 모두를 위하여 하나님께 바쳤습니다. 그중에는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도 있었습니다. 이들은 성령의 감동하심으로 재산을 팔아서 바쳤지만, 일부를 숨기고 전부라고 거짓말을 했습니다. 솔직하게 일부를 자신들이 사용하고 일부를 가져왔다고 했더라면 아무 문제도 없었을 텐데, 성령의 인도하심을 정직하게 순종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지금도 성령께서는 성도들 마음의 감동을 통하여 인도하십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주님께서 믿음으로 구하면 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내가 원한다고 다 주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아무리 원하고 애써도 가질 수 없는 것들이 더 많습니다. 그렇다면, 주님께서 우리를 속이신 것입니까? 로마서 8:26-27절입니다.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느니라. 마음을 살피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우리가 성령 안에서 기도해야 하는 이유가 이것입니다. 성령께서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을 아십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감동하심을 따라 기도하면, 내 뜻을 구하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구하게 됩니다. 그래서 성령께서는 성도가 육신이 원하는 것을 하지 않고,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르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기도할 때, 항상 먼저 성령의 도우심을 구하십시오. 이렇게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르셔서 필요를 채우시는 하나님의 은혜로 충만하시기를 축복합니다.
마라나-타(μαράνα-θ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