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문
지금이 중요합니다.
*** 지금이 중요합니다. / 에스겔 33:10-16, 히브리서 3:13-14
에스겔 33:10-16, “10 그런즉 인자야, 너는 이스라엘 족속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말하여 이르되 ‘우리의 허물과 죄가 이미 우리에게 있어 우리로 그 가운데에서 쇠퇴하게 하니 어찌 능히 살리요.’ 하거니와 11 너는 그들에게 말하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니 나는 악인의 죽는 것을 기뻐하지 아니하고, 악인이 그의 길에서 돌이켜 떠나 사는 것을 기뻐하노라. 이스라엘 족속아, 돌이키고 돌이키라. 너희 악한 길에서 떠나라. 어찌 죽고자 하느냐?’ 하셨다 하라. 12 인자야, 너는 네 민족에게 이르기를 ‘의인이 범죄하는 날에는 그 공의가 구원하지 못할 것이요. 악인이 돌이켜 그 악에서 떠나는 날에는 그 악이 그를 엎드러뜨리지 못할 것인즉, 의인이 범죄하는 날에는 그 의로 말미암아 살지 못하리라. 13 가령 내가 의인에게 말하기를 너는 살리라 하였다 하자, 그가 그 공의를 스스로 믿고 죄악을 행하면, 그 모든 의로운 행위가 하나도 기억되지 아니하리니, 그가 그 지은 죄악으로 말미암아 곧 그 안에서 죽으리라. 14 가령 내가 악인에게 말하기를 너는 죽으리라 하였다 하자, 그가 돌이켜 자기의 죄에서 떠나서 정의와 공의로 행하여, 15 저당물을 도로 주며 강탈한 물건을 돌려보내고, 생명의 율례를 지켜 행하여 죄악을 범하지 아니하면, 그가 반드시 살고 죽지 아니할지라. 16 그가 본래 범한 모든 죄가 기억되지 아니하리니, 그가 반드시 살리라. 이는 정의와 공의를 행하였음이니라.’ 하라.”
히브리서 3:13-14, “13 오직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매일 피차 권면하여,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의 유혹으로 완고하게 되지 않도록 하라. 14 우리가 시작할 때에 확신한 것을 끝까지 견고히 잡고 있으면, 그리스도와 함께 참여한 자가 되리라.”
** 들어가는 말
가수 민혜경이 부른 ‘내 인생은 나의 것’이라는 노래가 있습니다. ‘내 인생은 나의 것 그냥 나에게 맡겨주세요. 내 인생은 나의 것, 나는 모든 것 책임질 수 있어요 …’ 요즘은 유치원 꼬마도 ‘자기 권리를 주장한다.’라고 합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자기의 자유의지로 삶을 택할 수 있습니다. 죄의 길도 자신이 선택하고 의의 길도 자신이 선택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잊고 있는 것이, 자유에는 책임과 판결이 따른다는 사실입니다. 세상에서도 자기가 행한 일에 책임을 판결이 따르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우리 인생의 전부를 판결받게 됩니다. 본문 아래의 20절에,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나는 너희가 각기 행한 대로 심판하리라.”라고 하십니다. 성경의 마지막 책인 요한계시록 마지막 장인 22:12절에서 하나님 판결의 종지부를 찍습니다.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가 행한 대로 갚아주리라.” 그러므로 우리는 자신이 택하고 행한 일에 대하여 스스로 책임져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삶에는 지금 어떻게 사는지가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내일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저녁 묵상 시간이면, 종종 이런 생각에 빠질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왜 나를 지금, 여기에 살게 하셨을까?” “하나님께서 나를 세상에 보내신 목적대로 잘살고 있는 것일까?” 이렇게 내가 살아온 길을 돌아보곤 합니다. 아마 하나님의 사람 모세도 그랬던가 봅니다. 시편 90:12절에서 “우리에게 우리 날 계수함을 가르치사 지혜로운 마음을 얻게 하소서.”라고 기도했습니다. 이는 자기 삶의 길을 깨닫는 지혜를 구하는 것입니다.
※ 본문 말씀의 배경과 의미를 봅시다.
에스겔 본문은 구원의 현재성에 대한 하나님의 선언이십니다. 즉 ‘비록 악한 자일지라도 회개하면 멸망하지 않고, 의인일지라도 범죄하면 멸망한다.’라는 것입니다. 본문 12절에서 “의인이 범죄하는 날에는 그 공의가 구원하지 못할 것이요. 악인이 돌이켜 그 악에서 떠나는 날에는 그 악이 그를 엎드러뜨리지 못할 것인즉, 의인이 범죄하는 날에는 그 의로 말미암아 살지 못하리라.”라고 하십니다. 이는 하나님의 공평성의 원칙이며, 현재적인 삶이 심판과 구원의 원인이 됨을 말씀하십니다. 지금 우리의 신앙이 바로 여기에 근거를 두고 있습니다. ‘내가 어떤 사람이든지, 어떤 과거를 가지고 있든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회개하고, 회개에 합당한 의로운 삶과 십자가를 따르는 삶을 살면, 죄를 용서받고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의 핵심입니다.
히브리서 말씀은 ‘그리스도인이 끝까지 견고하게 붙잡아야 하는 현재적(現在的) 믿음’에 대한 말씀입니다. “오직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라는 말씀과 “우리가 시작할 때에 확신한 것을 끝까지 견고히 잡고 있으면…”이라는 말씀에서 ‘현재적(現在的)인 신앙’을 말씀하십니다.
※ 오늘이라는 지금의 시간이 왜 중요합니까?
답변은 아주 단순합니다. 지금이라는 시간만이 내가 사용할 확실한 기회이기 때문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중요하게 여기시는 시점이 ‘오늘’이라고 선언하십니다. 하나님의 선언은 이러합니다. ‘평소에 의를 행하던 사람이 그 의를 믿고 죄악을 행하면, 그 모든 의로운 행위가 하나도 기억되지 않고 그 죄악 중에서 죽을 것이며, 아무리 흉악한 악인이라도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지금 의를 행한다면, 죽지 않고 살 것’이라는 판결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선언에 대하여 사람들이 반발하고 나섰습니다. “하나님의 조치가 불공평하다.”라는 것입니다. 즉 ‘지금까지 잘해 왔는데, 지금 잠시 잘못한 것으로 악인 취급하고, 지금까지 악을 행하다가 이제 선을 행한다고 의인 취급한다는 것이 불공평하다.’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는 과거도 아니고 미래도 아닌, 영원한 오늘만 있습니다. 그래서 히브리서를 통하여 “오직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매일 피차 권면하여,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의 유혹으로 완고하게 되지 않도록 하라.”라고 하십니다.
성공회대학교 교수로 재직했었던 신영복 교수가 쓴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신 교수는 육군사관학교 경제학과 교관으로 있던 중, 1968년 통일혁명당 사건으로 구속되어 무기 징역형을 선고받고 20년간 복역했습니다. 1988년 8월 15일, 특별가석방 되어 그해 이 책을 내놓았습니다. 이 책은 그가 수감생활을 하면서 가족들에게 보낸 작은 편지들을 모은 것입니다. 신 교수는 이 책에서 진실한 사랑에 대하여 이렇게 말합니다. “차가운 빗속을 거닐 때, 남은 우산을 하나 빌려주는 것보다, 그와 함께 그 비를 맞으며 함께 걸어가는 것이 참다운 사랑이다.” 그리고 또 이렇게 말합니다. “관찰보다는 애정이, 애정보다는 실천적 연대가, 실천적 연대보다는 입장의 동일함이 더욱 중요합니다. 입장의 동일함, 그것은 관계의 최고 형태입니다.”
신 교수는 사상가이자 성공회대학교 교수였지만, 신을 인정하지 않는 무종교였습니다. 이런 철저히 유물적이고 세상 적인 사람도 참다운 사랑을 ‘함께 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예수께서는 아예 참된 사랑을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요 15:5)이라고 하십니다. 이것이 진정으로 함께 하는 것입니다. 함께 한다는 것은 과거도 미래도 아닌, 현재형입니다. 지금 함께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입장의 동일함을 몸소 실천하신 분은 우리 주님이십니다. 예수께서 우리 사람을 사랑하심을 이렇게 표현하십니다. 히브리서 4:15절(현대어성경)입니다. “우리의 대제사장은 우리가 당하는 이 시련을 몸소 겪으신 분이기 때문에, 우리의 연약함을 잘 알고 계십니다. 그러면서도 그분은 단 한 번도 유혹에 빠져 죄를 범하신 일이 없습니다.” 이 말씀이 ‘동병상련(同病相憐)’ 즉 ‘입장의 동일함’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시면서 우리 인생처럼 육신을 가지셨고, 가난과 삶의 고통과 십자가에 달리시는 수모와 처절한 아픔과 낮아짐을 친히 경험하신 분이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이시면서 우리 사람과 동일하게 되신 것이며, 우리 육신의 모든 사정을 너무나도 잘 아십니다. 세상의 어느 종교나 교주도 이런 사람과 동일함을 취한 적이 없습니다.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뿐만 아니라, 신앙의 모든 것이 지금 나와 함께 하시고, 지금 나에게 주어지는 현재적(現在的)인 은혜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야고보를 통하여 불확실한 미래에 소망을 두는 인간의 허탄함에 관하여 비유적으로 말씀하십니다. 야고보서 4:13-17절입니다. “13 들으라. 너희 중에 말하기를 ‘오늘이나 내일이나 우리가 아무 도시에 가서 거기서 일 년을 머물며 장사하여 이익을 보리라.’ 하는 자들아, 14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냐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 15 너희가 도리어 말하기를 ‘주의 뜻이면 우리가 살기도 하고 이것이나 저것을 하리라.’ 할 것이거늘, 16 이제도 너희가 허탄한 자랑을 자랑하니, 그러한 자랑은 다 악한 것이라. 17 그러므로 사람이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하지 아니하면 죄니라.” 그러므로 주님께서 명하시는 일은 불확실한 내일로 미루어서는 안 됩니다. 지금 순종하고, 지금 행동해야 합니다.
※ 그렇다면, 지금 해야 할 일이 무엇입니까?
에스겔 본문 13-16절을 봅시다. “가령 내가 의인에게 말하기를 너는 살리라 하였다 하자, 그가 그 공의를 스스로 믿고 죄악을 행하면, 그 모든 의로운 행위가 하나도 기억되지 아니하리니, 그가 그 지은 죄악으로 말미암아 곧 그 안에서 죽으리라. 14 가령 내가 악인에게 말하기를 너는 죽으리라 하였다 하자, 그가 돌이켜 자기의 죄에서 떠나서 정의와 공의로 행하여, 15 저당물을 도로 주며 강탈한 물건을 돌려보내고, 생명의 율례를 지켜 행하여 죄악을 범하지 아니하면, 그가 반드시 살고 죽지 아니할지라. 16 그가 본래 범한 모든 죄가 기억되지 아니하리니, 그가 반드시 살리라. 이는 정의와 공의를 행하였음이니라.’ 하라.” 히브리서 본문 13절도 봅시다. “오직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매일 피차 권면하여,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의 유혹으로 완고하게 되지 않도록 하라.” 이 두 내용의 핵심이 무엇입니까? 바로 ‘오늘(지금, 현재)’이라는 의미입니다. 성도들의 삶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지나간 어제도, 아직 오지 않은 내일도 아니고 오늘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는 언제나 오늘이 있을 뿐이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서 13:8절에서는 이렇게 표현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 성도가 과거에는 경건하고 의로운 신앙생활을 했지만, 지금은 형식적인 믿음만 가지고 있다면, 하나님 앞에 아무런 인정을 받을 수 없습니다. 반면에 과거에는 허랑방탕하고 하나님을 떠나 있었으나, 지금의 삶이 하나님을 의지하는 의로운 삶이라면, 하나님께서 인정해 주십니다. 많은 사람이 ‘나중에 여유가 있을 때’라고 신앙의 때를 늦추는 것을 봅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 자신의 종말이 언제인지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내게 주어진 가장 확실한 시간이자 기회인 지금 해야 할 일은, 하나님께서 가장 큰 관심을 가지고 계신 것, 즉 하나님께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시는 것입니다. 에스겔 본문 11절을 봅시다.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니 나는 악인의 죽는 것을 기뻐하지 아니하고, 악인이 그의 길에서 돌이켜 떠나 사는 것을 기뻐하노라. 이스라엘 족속아, 돌이키고 돌이키라. 너희 악한 길에서 떠나라. 어찌 죽고자 하느냐?” 이 말씀의 핵심인 ‘생명’입니다. 마태복음 16:26절입니다.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과 바꾸겠느냐?” 그리고 요한복음 10:10절에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시고 관심을 가지시는 것은 ‘생명을 얻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사랑이신 하나님은 사람이 죄로 인하여 영원히 멸망하는 것을 원하지 않으시며, 그들이 죄를 떠나 회개하여, 잃어버린 생명을 회복하기 원하십니다.
이러한 사실은 예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가장 먼저 선포하신 말씀 속에도 나타납니다. 마태복음 4:17절입니다. “이때부터 예수께서 비로소 전파하여 이르시되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하시더라.” 예수님보다 6개월 앞서 와서 예수님의 길을 예비하던 세례 요한의 첫 선포도 그러합니다. 마태복음 3:1-2절입니다. “그때에 세례 요한이 이르러 유대 광야에서 전파하여 말하되,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하였으니” 이 말씀들에서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라는 선포는 ‘천국이 가까이 왔으므로 회개하여, 죄 사함을 받고 생명을 얻어라.’라는 말씀입니다. 바로 에스겔 본문의 “이스라엘 족속아 돌이키고 돌이키라. 너희 악한 길에서 떠나라”라는 말씀과 그 의미하는 바가 같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향하신 가장 깊은 관심은 사람이 생명을 얻는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관심에 대하여, 그의 백성 된 우리는 어떠해야 하겠습니까? 우리도 역시 나 자신의 생명과 다른 사람들이 생명을 얻는 일에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이 관심의 범위에 관하여는 예수께서 하나님 나라로 올라가시기 직전에 하신 말씀에 나타납니다. 사도행전 1:8절입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예수께서는 ‘생명에 관한 관심을 가장 가까운 곳에서부터 하라.’라고 하십니다. 디모데전서 5:8절입니다. “누구든지 자기 친족 특히 자기 가족을 돌보지 아니하면 믿음을 배반한 자요, 불신자보다 더 악한 자니라.” 물론 이 말씀의 전후 과정을 보면, ‘돌본다.’라는 말의 의미는 ‘가족, 특히 과부나 노년의 부모 형편을 보살피는 것’을 말합니다. 하지만, 이 말에는 가장 중요한 영의 생명을 살펴야 하는 의미가 들어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지금 우리가 해야 하는 일 중에 가장 중요한 일은 영의 생명을 살리는 일입니다. 이 일은 가장 가까운 가족, 일가친척, 혈육들, 친구들, 이웃들, 민족, 세계 열방에 이르는 관심으로 시작됩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영의 생명을 살리는 일은 하나님 사랑의 결실이라는 것입니다. 요한일서 4:9절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 11절입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우리가 해야 하는 이 사랑은 생명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사랑을 우리에게 부탁하셨습니다. 고린도후서 5:18-19절입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서 났으며, 그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주셨으니, 곧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그들의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는 일은 영의 생명을 살리는 일이며, 이 일이 하나님께서 가장 큰 영광으로 갚아주시는 일입니다. 다니엘 12:3절입니다. “지혜 있는 자는 궁창의 빛과 같이 빛날 것이요, 많은 사람을 옳은 대로 돌아오게 한 자는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빛나리라.”라고 하십니다. 이렇게 주님이 기뻐하시는 생명 살리는 가장 큰 사랑의 일에 관심을 가지고 지금 실천하면, 하나님께서도 우리의 삶에 깊은 관심과 복을 내리십니다. 이와 같은 은혜를 누리시는 삶이 이루시기를 축복합니다.
마라나-타(μαράνα-θ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