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문
하나님의 뜻과 내 생각이 다를 때
*** 하나님의 뜻과 내 생각이 다를 때 / 열왕기하 5:8-14
열왕기하 5:1-14(8-14), “8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가 이스라엘 왕이 자기 옷을 찢었다 함을 듣고 왕에게 보내어 이르되 ‘왕이 어찌하여 옷을 찢었나이까? 그 사람을 내게로 오게 하소서. 그가 이스라엘 중에 선지자가 있는 줄을 알리이다.’ 하니라. 9 나아만이 이에 말들과 병거들을 거느리고 이르러 엘리사의 집 문에 서니 10 엘리사가 사자를 그에게 보내어 이르되 ‘너는 가서 요단강에 몸을 일곱 번 씻으라. 네 살이 회복되어 깨끗하리라.’ 하는지라. 11 나아만이 노하여 물러가며 이르되 ‘내 생각에는 그가 내게로 나와 서서 그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고 그의 손을 그 부위 위에 흔들어 나병을 고칠까 하였도다. 12 다메섹 강 아바나와 바르발은 이스라엘 모든 강물보다 낫지 아니하냐? 내가 거기서 몸을 씻으면 깨끗하게 되지 아니하랴!’ 하고 몸을 돌려 분노하며 떠나니 13 그의 종들이 나아와서 말하여 이르되 ‘내 아버지여, 선지자가 당신에게 큰 일을 행하라 말하였더면 행하지 아니하였으리이까! 하물며 당신에게 이르기를 씻어 깨끗하게 하라 함이리이까!’하니 14 나아만이 이에 내려가서 하나님의 사람의 말대로 요단강에 일곱 번 몸을 잠그니 그의 살이 어린아이의 살 같이 회복되어 깨끗하게 되었더라.”
** 들어가는 말
주님을 진실하게 따르는 신앙의 길에는 의외로 갈등을 일으키는 복병(伏兵)들이 많습니다. 주로 신앙과 세상의 환경이 달라서 일어나는 일들입니다. 예전에 청년들을 상담할 때를 보면, 대부분이 직장에서 회식이나 모임이나 부당한 일을 지시받았을 때처럼, 신앙과 부딪치는 상황들이었습니다. 예전에 어느 장로님이 간증하면서, 자신은 재정담당 이사였는데 회장이 회사에 큰 고사를 지낼 때, 회장과 함께 절해야 하는 문제로 사표를 낸 적이 있다고 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사람들이 세상에서 믿음을 지키려면 당면하는 불이익뿐만 아니라, 영적인 갈등이 많이 일어납니다. 이러한 갈등을 믿음의 사람인 사도 바울은 로마서 7:18-25절에서 이렇게 표현합니다.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 바 악을 행하는도다.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인이 영의 일과 세상의 일 사이에서 고민하고 갈등하게 됨을 보여줍니다. 이러할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 본문 말씀의 배경과 내용을 살펴봅시다.
본문 말씀은 아람 나라의 장군이었던 ‘나아만’에 대한 내용입니다. 나아만은 아람을 패망의 위기에서 건진 용맹한 장군이었으며 영웅이었습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나병 환자였습니다. 마침, 얼마 전에 포로로 잡혀 와서 장군의 집 식모살이를 하는 유대인 소녀가 엘리사 선지자 이야기를 전했습니다. 소녀는 ‘자신의 나라에 엘리사 선지자가 계시는데, 그분이 나아만 장군의 병을 고칠 수 있다.’라고 했습니다. 귀가 번쩍 뜨인 나아만은 왕에게 그 이야기를 했고, 왕은 즉시 이스라엘 왕에게 보내는 편지와 함께 예물을 주면서 이스라엘로 보냈습니다. 하지만, 아람 왕의 편지를 받은 이스라엘 왕은 옷을 찢으며, 아람 왕이 전쟁을 일으키려는 핑계를 만들려고 이런 편지를 보냈다고 기막혀했습니다. 편지 내용은 이렇습니다. “내가 내 신하 나아만을 당신에게 보내오니, 이 글이 당신에게 이르거든, 당신은 그의 나병을 고쳐 주소서.” 그도 그럴 것이 왕이 무슨 수로 당시의 불치병인 나병을 고치겠습니까?! 그런데 이 소식을 들은 엘리사 선지자가 나아만을 자기에게 보내라고 왕에게 전했습니다.
나아만은 수행원을 거느리고 엘리사의 집에 이르렀습니다. 그런데 엘리사는 문밖으로 나오지도 않고는 사환을 통해 “너는 가서 요단강에 몸을 일곱 번 씻으라. 네 살이 회복되어 깨끗하리라.”라고 했습니다. 나아만은 화가 머리끝까지 올랐습니다. 자신을 무시하는 엘리사가 너무나 괘씸했고, 볼 것도 없는 요단강에서 목욕하라는 말이 자신의 모욕으로 여겨졌습니다. 그러면서 자기 생각을 이렇게 말합니다. “내 생각에는 그가 내게로 나와 서서 그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고 그의 손을 그 부위 위에 흔들어 나병을 고칠까 하였도다. 다메섹 강 아바나와 바르발은 이스라엘 모든 강물보다 낫지 아니하냐? 내가 거기서 몸을 씻으면 깨끗하게 되지 아니하랴!” 그리고는 돌아섰습니다. 그때 나아만의 종들이 나아만을 붙잡고 ‘어려운 일을 시키는 것도 아닌데, 한 번 더 생각해 보십시오.’라고 간청했습니다. 나아만은 종들의 말을 듣고 생각을 바꾸어 요단강으로 향했고, 자신의 나병이 순식간에 사라지고 깨끗하게 회복되었습니다. 이 이야기는 우리에게 시사(示唆)한 바가 많지만, 그중에서 나아만의 행동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과 자기 생각이 다를 때 어떻게 해야 할지를 살펴보겠습니다.
※ 하나님의 뜻과 내 생각이 다를 때는 주변을 살펴야 합니다.
위험에 빠진 사람에게 가장 위험한 현상이 있는데, 아시겠습니까? 몸과 마음이 긴장하면서 몸은 생존을 위한 위기 대처 시스템으로 바뀌게 됩니다. 그 현상은 오로지 생존을 위하여 시각도 좁아지고, 생각도 좁아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히려 그것이 더 큰 위기가 되기도 합니다. 소련의 독재자 스탈린은 1953년 3월 1일 공산당정치국원 4명과 만찬을 하던 도중에 쓰러졌습니다. 스탈린은 자신을 암살한 거라 염려하여 자신의 비밀별장에 데려다 달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 선택이 자기 죽음을 부를 것임을 미처 깨닫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그곳의 위치는 자신을 암살할 것을 우려하여 깊숙하고 복잡하여 찾기 힘들었으며, 암살방지를 위해 미로처럼 복잡한 형태로 되어 경비원들조차 스탈린의 위치를 전혀 몰랐기 때문입니다. 결국, 병원에 옮길 수 있는 시간이 없었으며, 사망 후 3일이 지나서야 식사담당 파출부에 의해 발견되었습니다. 살려고 선택한 것이 오히려 죽음에 이르게 했습니다. 이처럼 인생이 힘들어지고 위기가 닥치면 모든 생각이 좁아지게 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도 역시 세상의 생활에 위기가 닥치고 힘들어지면, 신앙과 충돌이 일어나 마음이 좁아지게 됩니다. 고린도 시에 복음을 전하던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회가 말씀을 잘 받아들이지를 못함을 보고 이렇게 말합니다. 고린도후서 6:12-13절입니다. “너희가 우리 안에서 좁아진 것이 아니라, 너희 심정에서 좁아진 것이니라. 내가 자녀에게 말하듯 하노니, 보답하는 것으로 너희도 마음을 넓히라.” 즉 말씀을 수용할 수 있도록 관대한 마음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나아만이 한껏 희망을 품고 선지자 엘리사에게 이르렀습니다. 그런데 엘리사 선지자는 얼굴조차 내밀지 않고 사환을 시켜 말만 전했습니다. 그 치료법이라는 것이 “너는 가서 요단강에 몸을 일곱 번 씻으라. 네 살이 회복되어 깨끗하리라.”라는 것입니다. 정말 강이라고 부르기도 민망한 작은 시냇물 같은 요단강에서 몸을 씻으라는 것은, 모독으로 여겨졌습니다. 하지만, 엘리사를 통하여 전한 이 말씀은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그러나 나아만에게는 도무지 이해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건방진 도발로 여겨졌습니다. 그래서 자기 생각을 말합니다. “내 생각에는 그가 내게로 나와 서서 그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고 그의 손을 그 부위 위에 흔들어 나병을 고칠까 하였도다. 12 다메섹 강 아바나와 바르발은 이스라엘 모든 강물보다 낫지 아니하냐? 내가 거기서 몸을 씻으면 깨끗하게 되지 아니하랴!”라고 하며, 분노하여 떠났다고 했습니다. 이 일은 나아만에게 있어서는 건강을 회복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잃을 수 있는 절대적인 위기였습니다. 바로 그 위기의 때, 나아만의 종들이 나섰습니다. “내 아버지여, 선지자가 당신에게 큰 일을 행하라 말하였더면 행하지 아니하였으리이까! 하물며 당신에게 이르기를 씻어 깨끗하게 하라 함이리이까!” 종들의 마음에는 ‘이보다 더 쉽고 좋은 기회가 다시 올까!’라는 희망이 보였습니다. 요즘 말로 하면, ‘밑져봐야 본전인데 할 만하지 않느냐?’라는 것이지요. 그래서 위험을 무릅쓰고 분노한 주인에게 청을 올렸습니다. 바로 이 시점. 여기가 우리가 생각해야 할 중요한 지점입니다. 나아만은 교만하지 않았습니다. 비록 자신의 편협한 생각으로 기회를 놓칠 위기에 빠졌지만, 주변을 돌아보는 열린 귀가 있었습니다. 비천한 종들의 말이었지만, 그 말에 수긍했습니다. 그리고는 바로 요단강으로 향했습니다. 바로 이 시점입니다. 환경이 내 생각과는 전혀 다르게 주어질 때, 하나님의 손길에 집중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럴 때를 위한 하나님의 약속이 있기 때문입니다. 고린도전서 10:13절입니다.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하나님께서 자녀들의 걸음을 인도하시려고 우리 시대에는 성령님을 보혜사로 보내주셨습니다. 사도행전 16:9-10절을 봅시다. “밤에 환상이 바울에게 보이니, 마게도냐 사람 하나가 서서 그에게 청하여 이르되 ‘마게도냐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 하거늘, 바울이 그 환상을 보았을 때 우리가 곧 마게도냐로 떠나기를 힘쓰니, 이는 하나님이 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우리를 부르신 줄로 인정함이러라.” 사도 바울은 생각하고 계획했던 길이 계속 막히자, 억지로 길을 만들려고 하지 않고, 기도하며 환경을 돌아보았습니다. 그때 성령께서 환상을 통하여 바울의 길을 인도하셨습니다. 이사야 30:20-21절도 봅시다. “주께서 너희에게 환난의 떡과 고생의 물을 주시나, 네 스승은 다시 숨기지 아니하시리니, 네 눈이 네 스승을 볼 것이며, 너희가 오른쪽으로 치우치든지, 왼쪽으로 치우치든지, 네 뒤에서 말소리가 네 귀에 들려 이르기를 ‘이것이 바른길이니 너희는 이리로 가라.’ 할 것이며” 이는 성도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이러한 성령께서 인도하시는 길은 사도 바울이나 나아만처럼, 기도하며 주변을 돌아보는 겸손함이 있어야 깨닫게 됩니다.
※ 하나님의 뜻과 내 생각이 다를 때, 하나님께 순종해야 합니다.
종교개혁가이자 개혁주의 신학자인 ‘존 칼빈’은, 27세 때 ‘기독교 강요’를 저술했는데, 이로 인하여 온 유럽에까지 유명하게 되었습니다. 어느 날, 이탈리아에 잠깐 들렸던 적이 있었습니다. 잠깐 들렀었는데 그만 전쟁이 일어나 부득이 지금의 스위스 지방으로 돌아서 오려고 제네바에 들러 하루를 자게 되었습니다. 그 당시, 제네바에서 종교개혁을 추진하던 ‘기욤 파렐(Guillaume Farel)’이 칼빈이 왔음을 알고, 그에게 찾아와 제네바 종교개혁을 도와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칼빈은 이미 다른 계획된 일이 있었기 때문에 허락할 수가 없었습니다. 계속되는 거절에 기욤 파렐은 “내가 보기에는 당신이 여기에 잠깐 들린 것이 하나님의 뜻이요, 장차 이것은 당신이 여기서 일하라고 하는 것이 분명한데, 만일 당신이 그냥 간다면 하나님께서 당신을 저주할 것입니다.”라고 했습니다. 이 일로 결국, 칼빈은 제네바의 종교개혁을 도와서 많은 열매를 맺게 되었습니다.
어떤 때에는 하나님께서 내 생각에 맞지 않는 방향으로 우리를 인도할 때가 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뜻과 내 생각이 충돌하여 갈등이 일어날 때가 우리의 생애를 가르는 분수령(分水嶺)이 될 수 있습니다. 나아만이 엘리사 선지자를 만났던 때가 나아만에게 있어서는 생애를 가르는 분수령이었습니다. 나병 환자로 사는 길과 건강한 몸으로 살 수 있는 분수령입니다. 나아만 장군이 자신의 집 종들의 충고에 귀를 기울였다는 사실이 신기하지 않습니까? 바꾸어 생각하면, 나아만 장군은 평소에도 신분 여하를 막론하고 옳은 말은 받아들일 줄 아는 겸손한 사람이었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포로로 잡혀 온 어린 계집종의 말도 믿었으며, 종들이 자신에게 충고하는 말도 들었던 것입니다. 성경에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많은 복이 있는데, 그중에서도 정말 많은 하나님의 복이 약속된 것이 있습니다. 많은 말씀 중에 두 곳을 보겠습니다. 이사야 57:15절입니다. “지극히 존귀하며 영원히 거하시며 거룩하다 이름하는 이가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내가 높고 거룩한 곳에 있으며 또한 통회하고 마음이 겸손한 자와 함께 있나니, 이는 겸손한 자의 영을 소생시키며 통회하는 자의 마음을 소생시키려 함이라.” 그리고 야고보서 4:6절입니다. “그러나 더욱 큰 은혜를 주시나니 그러므로 일렀으되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하였느니라.” 하나님의 많은 복이 약속 된 것은 ‘겸손’입니다. 사로잡혀 온 여자아이의 말을 들은 것이나 종들의 충고를 들은 것이나 모두 나아만의 겸손한 성품을 보여줍니다. 이렇게 겸손한 사람에게 하나님께서는 순종의 열매를 얻는 기회를 주셨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자신을 낮추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할 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이 생명의 길이며, 복의 길입니다.
청개구리 이야기를 잘 아시기요? 청개구리는 어머니 살아생전 너무나도 속을 썩였습니다. 동으로 가라 하면 서로 가고, 서로 가라 하면 동으로 갔습니다. 냇가로 가라 하면 산으로 가고, 산으로 가라 하면 냇가로 갔습니다. 어머니가 시키는 것은 무조건 반대로만 했습니다. 근심 속에 살던 어머니 청개구리는 유언을 남기며 죽었는데 ‘자신을 냇가 묻어달라.’라고 했습니다. 실은 산에 묻히고 싶어서 반대로 말했던 것입니다. 어머니가 죽고 나자 아들 청개구리는 정신을 차렸습니다. 어머니 유언만큼은 꼭 지켜야겠다면서 어머니를 냇가에 묻었습니다. 결국, 그것마저 어머니 본뜻과는 달리 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청개구리는 비만 오면 어머니 무덤이 떠내려갈까 봐 걱정되어 운다고 합니다. “개골, 개골, 울 엄마, 울 엄마, 나 때문에 속만 썩은 울 엄마!” 청개구리는 오늘도 울고 있습니다.
오늘에는 영적인 청개구리들이 많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많이도 읽고 듣지만, 순종하기를 어려워합니다. 겨우 순종하는 것마저 하나님의 뜻에 맞추는 것이 아니라, 자기 생각에 맞추어 순종할 때가 많습니다. 이런 삶으로는 평생을 가도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하지 못합니다. 순종이 없이는 어떤 기도도 응답하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라는 말씀은 ‘하나님께 드리는 어떤 헌물이나 예배보다 하나님 뜻에 순종하는 것이 우선이라.’라는 뜻입니다. 순종은 하나님의 능력의 통로입니다. 때때로 환경이 내 생각과는 전혀 다를 때는 하나님께서 지시하시는 방향을 살피십시오. 그리고 순종하기가 어려운 마라의 쓴물과 같은 고통이 있을 때는 하나님께 부르짖으십시오. 그리하면 피할 길을 예비하시고 감당할 믿음을 주시는 하나님께서 쓴 물까지도 달게 하십니다. 즉 순종의 능력은 우리의 모든 삶을 회복하시고 치료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능력이 우리 모두의 삶에 충만하시기를 축복합니다.
마라나-타(μαράνα-θ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