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문
하나님께 집중합시다.
*** 하나님께 집중합시다. / 베드로전서 1:13-23
베드로전서 1:13-23, “13 그러므로 너희 마음의 허리를 동이고 근신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너희에게 가져다 주실 은혜를 온전히 바랄지어다. 14 너희가 순종하는 자식처럼 전에 알지 못할 때에 따르던 너희 사욕을 본받지 말고 15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이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 16 기록되었으되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하셨느니라. 17 외모로 보시지 않고 각 사람의 행위대로 심판하시는 이를 너희가 아버지라 부른즉 너희가 나그네로 있을 때를 두려움으로 지내라. 18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이 물려 준 헛된 행실에서 대속함을 받은 것은 은이나 금같이 없어질 것으로 된 것이 아니요 19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된 것이니라. 20 그는 창세 전부터 미리 알린 바 되신 이나 이 말세에 너희를 위하여 나타내신 바 되었으니 21 너희는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시고 영광을 주신 하나님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믿는 자니 너희 믿음과 소망이 하나님께 있게 하셨느니라. 22 너희가 진리를 순종함으로 너희 영혼을 깨끗하게 하여 거짓이 없이 형제를 사랑하기에 이르렀으니 마음으로 뜨겁게 서로 사랑하라. 23 너희가 거듭난 것은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살아 있고 항상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되었느니라.”
** 들어가는 말
여러분은 2023년을 시작하는 시점에 어떤 계획이나 생각들이 있습니까? 사람들은 새해가 되면 ‘무엇인가 잘 될 것 같은 혹은 잘 되었으면 하는 막연한 기대감’을 가지게 됩니다. 그래서 해돋이를 보면서 소원도 빌어보고, 비록 작심삼일(作心三日)이 될지언정 새로운 계획과 결심도 해 봅니다. 이러한 잘 되었으면 하는 마음은 우리 그리스도인이라고 예외가 되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세상 사람들은 모를 터이지만, 그리스도인들은 알고 있지만 별로 생각하지 않는 것이 있습니다. 잠언 16:1입니다. “마음의 경영은 사람에게 있어도 말의 응답은 여호와께로부터 나오느니라.” 그리고 9절에서는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의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여호와시니라.”라고 하십니다. 예레미야 10:23입니다. “여호와여 내가 알거니와 사람의 길이 자신에게 있지 아니하니, 걸음을 지도함이 걷는 자에게 있지 아니하니이다.(표준새번역, 주님, 사람이 자기 운명의 주인이 아니라는 것을, 제가 이제 깨달았습니다. 아무도 자기 생명을 조종하지 못한다는 것도, 제가 이제 알았습니다)” 즉, 사람의 모든 삶이 하나님께 달려있다는 것입니다.
러시아의 소설가이자 사상가였던 ‘톨스토이’의 작품 중에 ‘바보 이반’이라는 단편 소설이 있습니다. 그 내용은 이렇습니다.
'이반'이라는 농부는 평생토록 주인집 머슴살이를 했습니다. 어느 날, 주인은 이반을 독립시켜 주려고 불렸습니다. “내일 아침부터 내 소유의 땅에서 네가 밟고 돌아오는 땅은 모두 네게 주겠다.”라고 했습니다. 평생을 머슴살이로 늙은 그는, 다음날 새벽을 기다리느라고 한잠도 못 잤습니다. 이반은 새벽부터 달리기 시작하여 쉬는 시간도 없이 뛰고 또 뛰었습니다. 한 평의 땅이라도 더 차지하기 위해 먹는 것도 잊어버리고 뛰었습니다. 평생의 한을 풀기 위하여 밤이 늦도록 뛰어 주인집 대문에 들어서는 순간 쓰러져 죽어버렸습니다. 그가 평생토록 머슴살이하고, 뛰고 또 뛰어서 마지막에 얻은 땅은, 자기 무덤으로 사용한 '3평' 뿐이었습니다.
톨스토이는 세상 사람들의 욕망을 이렇게 바보 이반에 비유하여 표현한 것입니다. 지금 세상에도 바보 이반 같은 사람들이 넘쳐납니다. 자신의 삶에 대하여 한 치 앞도 알지 못하면서 엄청난 계획들을 세우고, 쌓고 또 쌓습니다. 마치 예수께서 누가복음 12장에서 ‘어리석은 부자 비유’로 말씀하신 것처럼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준비한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 답을 주님께서 요한복음 15:5에서 말씀하십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 그래서 2023년을 시작하는 이즈음에 본문 말씀을 중심으로 우리의 한 해가 잘 되기 위한 길을 살펴봅시다.
※본문 말씀의 배경과 의미를 봅시다.
베드로전서는 본도와 갈라디아와 갑바도기아와 아시아와 비두니아에 흩어져 사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보낸 사도 베드로의 편지입니다. 아마도 이들 지방에 있는 교회에 보내졌을 것입니다. 이 지방에 대하여 역사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비두니아의 총독이었던 플리니우스(Plinius, 로마의 정치가)가 로마 황제 트라야누스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 지방의 그리스도인들이 박해받는 상황을 전하고 있습니다. 1:1절에서 언급하는 “흩어진 나그네”라는 표현은, 본래는 유대 본국을 떠나, 다른 나라에 흩어져 사는 사람, 즉 디아스포라(Diaspora)를 뜻합니다. 그런데 이 편지에서는 하나님 나라를 본국으로 나타내며, 이 세상 나라를 그리스도인이 흩어져 사는 다른 나라로 표현합니다. 즉 앞서 말한 지방에 거주하는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 나라를 향하는 흩어진 나그네라는 표현입니다. 그래서 사도 베드로는 이들 흩어진 나그네들이 당하는 시련과 환난을 잘 견디고,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여, 시련을 극복하도록 용기를 주고 있습니다. 특히 본문의 주제가 되는 구절은 21절입니다. “너희는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시고 영광을 주신 하나님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믿는 자니, 너희 믿음과 소망이 하나님께 있게 하셨느니라.” 즉 세상의 시련과 환난에 마음을 두지 말고, 오직 우리를 살리신 하나님께 집중하라고 하십니다. 이 하나님께 우리의 생명과 모든 소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집중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정신일도하사불성(精神一到何事不成)”이라는 말을 아시지요? 이 말은, 마치 낙숫물이 오랜 세월 한곳에 집중해서 떨어지면, 바위에도 구멍이 뚫어지는 것과 같은 의미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에게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 마음을 두는 것을 의미하지요. 본문 13-15을 봅시다. “그러므로 너희 마음의 허리를 동이고 근신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너희에게 가져다 주실 은혜를 온전히 바랄지어다. 14 너희가 순종하는 자식처럼 전에 알지 못할 때에 따르던 너희 사욕을 본받지 말고 15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이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 특히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너희에게 가져다 주실 은혜를 온전히 바랄지어다.”라고 하셨습니다. 즉 ‘우리 인생의 마지막을 생각하라.’라는 말씀입니다. 이 세상에서 사는 짧은 인생에 마음 두지 말고, 우리 주님을 만나는 날 내가 영원을 누릴 은혜를 마음에 두라는 것입니다. 왜 예수 그리스도께 마음을 두어야 합니까? 본문 17-19절을 봅시다. “외모로 보시지 않고 각 사람의 행위대로 심판하시는 이를 너희가 아버지라 부른즉 너희가 나그네로 있을 때를 두려움으로 지내라. 18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이 물려 준 헛된 행실에서 대속함을 받은 것은 은이나 금같이 없어질 것으로 된 것이 아니요 19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된 것이니라.”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께 마음을 두어야 할 두 가지 이유를 말씀합니다. 첫째는 우리가 행한 대로 심판하시기 때문이며, 둘째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살리심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님의 소유된 사람들이기 때문에 모든 상황에서 예수 그리스도께 마음을 두어야 하고, 이것이 하나님께 집중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조금 더 깊이 생각해 봅시다.
지금 내가 예수께 마음을 두고 있는지, 아닌지를 어떻게 알겠습니까? 그것은 아주 단순합니다. 지금 나의 삶이 하나님을 구하는 것이라면, 내 마음도, 내 모든 계획도 예수께 두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께서 요한복음 15:5에서 말씀하신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라는 의미입니다. 즉 가지가 본 줄기를 떠나서는 존재할 수 없는 것처럼, 모든 삶이 주님과 연결된 것입니다. 이처럼 지금 내가 하나님께 집중하여, 하나님을 구하는 삶이라면, 하나님께서 내게 주시는 것이 있습니다. 빌립보서 2:12-14을 봅시다.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이 말씀에서 “소원을 두고”라는 말은, 헬라어로 thelo라는 단어를 사용했는데, ‘선택하다’ ‘결정하다’라는 뜻입니다. 영어로 번역할 때에는 'to will' 'to determine'이라고 했는데, ‘결심시키다’ ‘결정하다’ 등의 뜻입니다. 즉 ‘내가 주님 안에서 살고 하나님을 구하면, 하나님께서 나를 통하여 이루시고자 하시는 뜻을 행하도록 결심하게 하신다.’라는 것입니다. 즉 내가 하나님께 집중하여, 하나님을 구하면 하나님께서 내게 이루어주시고자 하시는 것을 비전으로 주십니다. 그러므로 내가 주님께 마음을 두고 살아간다면, 내 마음에 어떤 비전과 소원이 일어나는 것은 주님께서 주시는 은혜입니다. 이러한 소망이나 비전이 내 마음에서 일어난다면 감사함으로 순종하십시오. 하나님께서 그 걸음을 인도하십니다.
※어떻게 하나님께 집중할 수 있습니까?
예레미야 35장에는 레갑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2절에서 예레미야 선지자에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레갑 사람들의 집에 가서 그들에게 말하고 그들을 여호와의 집 한 방으로 데려다가 포도주를 마시게 하라.”라고 하십니다. 예레미야는 순종하여 그들을 모아서 포도주가 가득한 종지와 술잔을 놓고 ‘마시라.’라고 했습니다. 그때, 레갑 사람들이 이렇게 대답합니다. “우리는 포도주를 마시지 않겠노라. 레갑의 아들 우리 선조 요나답이 우리에게 명령하여 이르기를 ‘너희와 너희 자손은 영원히 포도주를 마시지 말며, 너희가 집도 짓지 말고, 너희는 평생 동안 장막에 살아라. 그리하면 너희가 머물러 사는 땅에서 너희 생명이 길리라.’하였으므로, 우리 선조 요나답이 우리에게 명령한 대로 다 지켜 행하노라.”(렘 35:6-11) 이때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레갑의 아들 요나답이 그의 자손에게 ‘포도주를 마시지 말라.’ 한 그 명령은 실행되도다. 그들은 그 선조의 명령을 순종하여 오늘까지 마시지 아니하거늘, 내가 너희에게 말하고 끊임없이 말하여도 너희는 내게 순종하지 아니하도다.” 하나님께서는 레갑 자손들이 선조의 명령을 철저하게 지키는 것을 높이 평가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신실한 레갑 자손에게 복을 약속하십니다. “레갑의 아들 요나답에게서 내 앞에 설 사람이 영원히 끊어지지 아니하리라.”(19절). 사람에게 신실한 사람은 하나님께도 신실할 수가 있습니다. 이렇게 마음이 흔들리지 않고 신실함이 하나님께 집중하는 것입니다. 이사야 26:3입니다. “주께서 심지가 견고한 자를 평강하고 평강하도록 지키시리니, 이는 그가 주를 신뢰함이니이다.” 이처럼, 우리가 하나님께 집중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전적으로 신뢰하고 순종하는 것입니다.
태국과 등을 맞대고 있는 라오스의 ‘시폼 마을’은 인상적인 염전지대라고 전해집니다. 그러나 더욱 인상적인 것은 열대의 수목을 배경으로 펼쳐져 있는 끝없는 염전 풍경이 아니라, 그 염전을 연인 삼아 살아가는 ‘시폼 마을 염전 지기들의 삶’입니다. 인류학자들의 보고문서에 의하면, 시폼 염전의 염전 지기들에겐 평생 지켜 내려오는 두 가지 금기, 즉 두 가지 맹세가 있습니다. 하나는 ‘자신이 염전지기로 살아가는 한 결단코 작열하는 태양의 직사광선을 피하려고, 모자나 수건 따위로 머리를 가려서는 안 된다.’라는 것이고, 두 번째는 ‘따가운 태양열로부터 피하려고 차양의 그늘이나 양산의 그늘로 발을 들여놓아서는 안 된다.’라는 것입니다
라오스의 태양은 전 국토를 밀림으로 뒤덮이게 할 만큼 혹독하고 살인적인 열대의 태양이라고 합니다. 이 태양 아래서 오직 자신이 염전지기라는 이유만으로 평생 머리에 모자를 쓰지 않고, 양산이나 차양의 그늘로 머리를 숨기지 않으며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은, 신념의 차원을 넘어서 차라리 신앙과 같은 것입니다. 일 년 내내 수고해봐야 몇 가마니의 천연소금을 얻는 것이 전부인 염전지기가, 자신들에게 소망이 되는 소금을 만들 수 있게 하는 태양을 위한 정성도 그쯤이면 정말 신앙입니다.
그런데 요즈음의 그리스도인들은 라오스 시폼 마을의 염전 지기들만도 못할 경우가 허다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소망은 이 세상과는 감히 비교도 할 수 없는 영원한 낙원인 하나님의 나라를 얻고자 하는 것이 가장 큰 소망이 아니겠습니까?! 단지 몇 가마니의 소금을 얻기 위하여 그렇게 단호한 신념을 소유한 염전 지기들인데, 영원을 소망하는 우리는 전적으로 하나님을 신뢰하고 순종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것이 하나님께 집중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집중해야 할 소망을 본문 21절에서 “너희는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시고 영광을 주신 하나님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믿는 자니, 너희 믿음과 소망이 하나님께 있게 하셨느니라.”라고 하십니다. 함석헌 선생은 “꿈이 없는 민족은 망한다.”라고 한 것처럼, 사람에게는 비전, 즉 소망이 오늘을 사는 원동력이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인에게는 하나님을 갈망하는 마음이 하나님께 집중하게 하며, 하나님의 은혜를 이루는 복의 통로가 됩니다. 요한복음 21장에서 예수께서 잡히셨을 때, 모른다고 세 번씩이나 부인했던 베드로에게, 부활하신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이렇게 세 번을 물으셨습니다. 이 물음을 조금 바꾸어보면, ‘시몬아, 이제 나에게 좀 더 집중할 수는 없느냐?’라는 것입니다. 이때 민망한 베드로가 예수님 곁에 있던 요한을 가리키며, “주님,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사옵나이까?”라고 물었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은 베드로에게 ‘주변 환경에 마음 쓰지 말고, 오직 나만 바라보라.’라고 하신 것입니다.
인터넷에 어느 어머니의 말씀을 아들이 옮긴 글이 있었습니다.
“세수 남 보라고 씻는다디? 머리 감으면 모자는 털어서 쓰고 싶고, 목욕하면 헌 옷 입기 싫은 기 사람 마음이다. 그기 얼마나 가겠노마는 날마다 새날로 살라꼬 아침마다 낯도 씻고 그런거 아이가. 안 그러면 내 눈에는 보이지도 않는 낯을 왜 만날 씻겠노?”
나이 많으신 어머니가 아들에게 ‘다른 사람 마음 쓰지 말고 날마다 너 마음이나 새롭게 해서 살아라.’라는 연륜이 묻어나는 충고입니다. 우리도 흔들리는 세상에 마음 두지 말고, 변함없으신 하나님의 은혜를 신뢰하면서 신실하게 주님을 따라갑시다. 이렇게 살아야 할 이유를 본문 17절에서 “외모로 보시지 않고 각 사람의 행위대로 심판하시는 이를 너희가 아버지라 부른즉 너희가 나그네로 있을 때를 두려움으로 지내라.”라고 하십니다. 이 하나님을 깊이 생각하며, 올해는 하나님의 깊으신 은혜를 누릴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마라나-타(μαράνα-θ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