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문
열정으로 이루는 능력의 삶
*** 열정으로 이루는 능력의 삶 / 고린도후서 5:11-19
고린도후서 5:11-19, “11 우리는 주의 두려우심을 알므로 사람들을 권면하거니와 우리가 하나님 앞에 알리어졌으니 또 너희의 양심에도 알리어지기를 바라노라. 12 우리가 다시 너희에게 자천하는 것이 아니요, 오직 우리로 말미암아 자랑할 기회를 너희에게 주어 마음으로 하지 않고 외모로 자랑하는 자들에게 대답하게 하려 하는 것이라. 13 우리가 만일 미쳤어도 하나님을 위한 것이요 정신이 온전하여도 너희를 위한 것이니 14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우리가 생각하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15 그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살아 있는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그들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그들을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이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라. 16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어떤 사람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신을 따라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그같이 알지 아니하노라. 17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18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서 났으며 그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책을 주셨으니 19 곧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그들의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
** 들어가는 말
아직은 날씨가 시원하지만, 따뜻한 것이 그리워지는 계절이 돌아왔습니다. 그리스도인은 냉혈한이 아니라 가슴으로부터 뜨거운 피가 흐르는 사람들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열정을 닮은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몇 년 전에 KBS1 TV에서 방영한 ‘글로벌 성공시대’라는 프로그램이 있었습니다. 24회 방송이었는데 ‘타조 왕이 된 펀드매니저, 배효섭’이라는 제목으로 방영되었습니다. 배효섭 씨는 13년 전에 잘나가던 증권회사 펀드메니저의 길을 접고, 뉴질랜드로 이민을 떠났습니다. 세계적인 목축업의 나라인 뉴질랜드에서 아무도 도전하지 않은 ‘타조 농장’에 도전했습니다. 타조 고기가 생산성, 안전성, 맛과 영양, 다이어트 등의 모든 조건을 갖춘 미래의 육류라는 것을 파악하고 도전했습니다. 10여 년의 고된 도전과 노력 끝에 지금은 뉴질랜드 최고의 타조 농장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그는 뉴질랜드뿐만 아니라 전 세계에 타조를 뜻하는 Ostrich 대신에 ‘타조(Tajo)’라는 브랜드로 수출을 합니다. 현재 내수시장을 빼고도 주문이 들어오는 수출물량만도 자신의 최대 공급량보다 16배나 많다고 했습니다.
세계적 수준의 목축업 기술을 가진 뉴질랜드에서조차 인정받은 배효섭 씨가 성공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는 남들이 가지 않는 길과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도전적인 열정이 있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돌다리도 두들겨 보고 건넌다고 하는데, 내 신조는 그런 다리는 건너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새로운 것에 도전해야 미래가 있습니다.”
이처럼 새로운 삶을 향한 도전과 열정은 성경에 수없이 기록되어 있는 그리스도인의 삶의 모습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께서 주신 가나안 땅을 점령하던 때, 요셉의 후손인 에브라임 지파 자손들이 여호수아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여호와께서 지금까지 내게 복을 주시므로 내가 큰 민족이 되었거늘, 당신이 나의 기업을 위하여 한 제비, 한 분깃으로만 주심은 어찌함이니이까?” 그때 여호수아는 “네가 큰 민족이 되므로 에브라임 산지가 네게 너무 좁을진대 브리스 족속과 르바임 족속의 땅 삼림에 올라가서 스스로 개척하라.”라고 하면서 “너는 큰 민족이요 큰 권능이 있은즉 한 분깃만 가질 것이 아니라. 그 산지도 네 것이 되리니 비록 삼림이라도 네가 개척하라. 그 끝까지 네 것이 되리라. 가나안 사람이 비록 철병거를 가졌고 강할지라도 네가 능히 그를 쫓아내리라.”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믿고 의뢰하는 사람은 가만히 서서 기다리는 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나와서 홍해에 이르렀을 때, 그들은 부르짖으며 두려워하여 우왕좌왕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너는 어찌하여 내게 부르짖느냐?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령하여 앞으로 나아가게 하고 지팡이를 들고 손을 바다 위로 내밀어 그것이 갈라지게 하라. 이스라엘 자손이 바다 가운데서 마른 땅으로 행하리라.”(출 14:15-16)라고 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이 주신 기회를 사용하여 열정으로 도전해서 쟁취해야 합니다. 마태복음 11:12에서 “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은 지금 우리에게도 약속되어 있습니다. 세상이 영적으로 혼란스럽고, 예수께서 말씀하신 종말의 징조가 보인다고 할지라도, 더욱 새로운 삶을 향하여 도전하며 열정을 품고 나아가야 합니다.
※ 본문 말씀의 내용과 의미를 살펴봅시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서 세우신 이방인들을 위한 사도였습니다. 즉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이방인들에게 하나님의 뜻을 전하고 가르치며, 그들을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는 일을 맡기신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의 편지에는 각 지역의 실정에 맞는 복음을 강론하면서 세속의 삶에서 벗어나서 새로운 삶으로 나아가라고 강력하게 권면합니다. 특히, 고린도교회가 있는 고린도 시는 잡다한 인종과 민족인 모여 사는 코스모폴리탄(cos·mo·pol·i·tan )적 도시였습니다. 약 20만 명의 자유민이 있었고, 40만 명이 넘는 노예들이 있었습니다. 그런가 하면 상업 도시였기 때문에,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는 극단적인 이기주의와 향락이 극에 달했습니다. 예를 들면, 희랍에서는 최초로 로마의 검투사 경기를 수입했고, 아프로디테 신전에는 수천 명의 매춘부가 있어서 음란의 도시였습니다. 이런 고린도 시를 사도 바울은 제2차 전도여행 때 방문하여 1년 6개월을 체류하면서 미쳤다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열정으로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세웠습니다. 이러한 환경에 있는 고린도 교회는 당연히 신앙을 지킨다는 것이 무척 어려웠습니다. 너무도 강력한 향락과 부를 추구하는 환경을 벗어나기가 힘들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를 책망하기도 하며, 위로도 하고, 하나님 나라에 금과 은과 보석으로 집을 지어야 한다는 상급을 가르쳤습니다. 그리고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라는 말씀과 같이, 예수님을 따르는 새로운 삶에 도전하는 열정을 가지라고 가르칩니다.
사도 바울의 시대가 이러했다면 지금 우리의 시대는 더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본문 말씀처럼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예수께서 이루신 구원의 은총을 알고, 그 안에서 살도록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자신만 새로운 삶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 아직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을 하나님과 화목하도록 인도하는 ‘화목의 직분’에 힘써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그들의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라고 하십니다.
※ 그리스도인의 열정이란 어떤 것입니까?
어떤 성도가 목사님께 물었습니다. “어떻게 믿어야 잘 믿을 수 있습니까?” 그러자 그 목사님은 “물에 빠지듯 풍덩 빠져 믿으시오. 거지 오쟁이 짊어지듯 믿으시오.”라고 했습니다(참고, ‘오쟁이’는 ‘짚으로 엮어 만든 작은 가방 같은 자루’를 말함). 즉 ‘아주 목숨 걸고 오직 예수께 푹 빠져라.’라는 표현입니다. 이용도 목사님의 표어는 “미치자. 크게 미치자. 예수를 위해 미치는 것만이 우리의 목적이다.”라고 했습니다. 코카콜라의 사장은 ‘내 혈관에 흐르고 있는 것은 피가 아니고 코카콜라이다.’라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을 위해 미쳤다.’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신앙의 열정이 있었습니다. 바울이 베스도 총독 앞에서 복음을 전할 때, 총독은 “바울아 네가 미쳤도다. 네 많은 학문이 너를 미치게 한다.”(행 26:24)라고 했으며, 본문 13절에서도 “우리가 만일 미쳤어도 하나님을 위한 것이요.”라고 했습니다. 세상의 삶이든지 신앙의 삶이든지 열광적이 아니고는 위대한 일이 일어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오늘의 그리스도인들에게서 이런 열정을 찾기가 어렵습니다. 설령 열정이 있다고 해도 자기를 위한 것이거나, 아니면 남의 것 구경하듯 마음만 설레다가 마는 그런 신앙이 대부분입니다. 우리가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얻기를 원한다면, 하나님 안에 푹 빠져야만 합니다. 야고보서 4:2하-3을 봅시다.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하기 때문이요,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하기 때문이라.” 즉, ‘주님께 푹 빠져 있지 못하기 때문에 얻지 못한다.’라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유대교에서 기독교로 개종한 직후부터 3년 동안을 광야에서 지냈습니다. 이 기간은 하나님께서 바울을 연단하시고 훈련시키시는 시간이었습니다. 특히, 광야에서의 생활은 세상의 어떤 것도 의지하지 못하도록 하며, 온전히 하나님만 의지하도록 하는 훈련이었습니다. 모세가 40년 동안 광야에서 장인 이드로의 양을 치며 훈련받은 것도 그러하며, 이스라엘 백성들의 광야 40년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이 세상의 환경이나 돈이나 권력을 의지하는 것을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이사야 2:22에서는 “너희는 인생을 의지하지 말라. 그의 호흡은 코에 있나니 셈할 가치가 어디 있느냐?”라고 하시며, 시편 62:10절에서는 “포악을 의지하지 말며, 탈취한 것으로 허망하여지지 말며, 재물이 늘어도 거기 마음을 두지 말지어다.”라고 하십니다. 바울이 지금까지 자신의 능력과 의를 의지하며 살아왔던 그 과거의 잔재를 씻어내고, 대신 하나님만 바라보게 하는 훈련의 자리가 광야였습니다.
오늘도 다르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힘들고, 어렵고, 고통스럽고, 삭막한 바람이 이는 광야와 같은 삶을 통하여 성도가 세상을 의지하는 잔재를 씻어내십니다. 이런 인생의 광야는 하나님을 생각하고 하나님만 의지하라고 우리에게 보이시는 하나님의 뜻입니다. 베드로전서 4:1-2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이미 육체의 고난을 받으셨으니 너희도 같은 마음으로 갑옷을 삼으라. 이는 육체의 고난을 받은 자는 죄를 그쳤음이니, 그 후로는 다시 사람의 정욕을 따르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육체의 남은 때를 살게 하려 함이라.”라고 하십니다. 광야에서는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살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이 메마르고 건조한 광야 같은 삶은 광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 가나안을 향하는 길입니다. 약속의 땅 가나안은 새로운 삶의 자리이며, 도전과 열정으로 얻을 수 있는 자리입니다. 이 새로운 행복의 삶을 위하여 예수께서 세상에 오셨고, 십자가에서 재물로 자신의 생명을 주셨고,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셨습니다. 본문 14-15을 봅시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우리가 생각하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그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살아 있는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그들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그들을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이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라.” 이처럼, 하나님께 나의 온전한 마음을 드리며 순종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열정입니다.
※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열정을 이룰 수 있습니까?
갈라디아서 1:11-12을 봅시다.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내가 전한 복음은 사람의 뜻을 따라 된 것이 아니니라. 이는 내가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요, 배운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라.” 바울은 자신이 받은 복음이 사람에게서 난 것이 아니며, 그렇다고 배우거나 익혀서 된 것도 아니라고 고백합니다. 그래서 자신이 해야 할 일과 나아갈 길에 대하여 사람과 의논하지 않고 유명한 사람들을 찾아가지도 않았습니다. 오직 자신을 부르신 하나님만을 의지한 것입니다. 변화의 주도자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십니다. 본문 17절을 다시 봅시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했습니다. 이는 자신이 변화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새롭게 창조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5:10에서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라고 고백합니다.
그렇다면, 열정을 이루기 위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너무도 명확합니다. 갈라디아서 1:10을 봅시다.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들의 기쁨을 구하였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 바로 이 말씀이 갈라디아서의 주제이며, 오늘 우리들에게 주시는 핵심 된 말씀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좋게 하는 것, 하나님의 기쁨을 구하는 것에 적극적으로 도전하는 것입니다. 이 일에 열정을 가져보십시오. 우리가 하나님의 기쁨을 구하는 일에 열정을 다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기뻐하는 일을 이루어주십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가 열정으로 해야 할 일 중의 하나를 ‘화목하게 하는 직분’이라고 했습니다. 나만 새로운 생명을 누리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도 이 새로운 생명의 길로 이끄는 것이 우리가 해야 할 일입니다.
어느 어머니가 어린 딸과 함께 장 보러 갔습니다. 필요한 식료품을 다 산 후에 딸에게 과자를 사 먹으라고 돈을 얼마 주었습니다. 소녀는 가게의 진열대 앞에 서서 마음에 드는 것을 찾느라 이것저것 열심히 눈으로 뒤졌습니다. 그러다 어느 상자 속에 있는 것을 가리키면서 "저것 주세요!"라고 했습니다. 점원이 그것을 꺼내려는 순간 소녀는 얼른 다른 것을 가리키며 "그것 말고 이것으로 주세요!"라고 했습니다. 그러고도 번복하기를 몇 번이나 하고서도 결정을 짓지 못하자, 지켜보던 어머니가 민망하고 안쓰러워서 “얘야, 어서 살 것을 정하려무나.”라고 딸을 다그쳤습니다. 그때, 어린 딸은 “그렇지만 엄마, 돈이 하나 밖에 없지 않아요!”라고 단순하지만, 여운을 남기는 대답을 했습니다.
“돈이 하나 밖에!” 소녀는 하나밖에 없는 돈을 단 한 번의 기회로 여겼던 것입니다. 그러니 후회하지 않도록 가장 맛있는 과자를 골라야 했던 것이지요. 오늘 저와 여러분에게는 ‘단 한 번의 생애!’가 주어져 있습니다. 잘 못 살았다고 물건을 사듯이 무르고 다시 시작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후회를 남기지 않도록 머뭇거리지 말고 주어진 삶을 열정으로 살아야 합니다. 우리의 열정이 하나님께 인정받게 되면, 하나님의 능력의 손길이 함께 하십니다. 그러므로 내게 주어진 생명의 기회에 나의 온전한 마음을 하나님께 드리며 순종하고, 다른 사람을 생명의 길로 인도하는 열정의 삶으로 하나님께서 공급하시는 은혜와 능력의 삶을 이루시기를 축복합니다.
마라나-타(μαράνα-θ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