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무엇을 하리이까?(눅3:7-14)
작성자 배의신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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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01-10-05 18:38
Title 우리가 무엇을 하리이까? / Scripture 눅3:7-14 / Space 대복교회
***들어가는 말
중국의 사상가 장자(莊子)가 어느 날 활을 메고 사냥을 나갔습니다. 갑자기 이상하게 생긴 까치 한 마리가 머리 위를 날아서 멀리 있는 나뭇가지 위에 앉았습니다. 그 모양이 하도 이상해서 그 까치를 사냥하려고 조심스럽게 다가갔습니다. 활을 쏠 수 있는 곳까지 와서 활을 당기려고 보니, 까치가 무엇을 뚫어져라 노려보고 있었습니다. 까치가 노리는 쪽을 보니 풀숲 사이에 사마귀가 한 마리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사마귀는 또 나무 그늘에서 울고 있는 매미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습니다.
사마귀도 까치도 눈앞의 먹이에 정신이 팔려 자기가 죽게 되었다는 것은 전혀 생각지도 않고 있었습니다. 그 모습을 본 장자는 한심한 그 미물들이 측은하다는 생각이 들어 그만 활을 거두고 돌아섰습니다.
그리고는 깜짝 놀랐습니다. 한 사나이가 몽둥이로 자기를 내리치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사정을 알고 본즉, 까치를 따라가느라 정신없었던 장자가 남의 밭으로 들어가 채소를 망가뜨려 놓았던 탓이었습니다. 결국 사마귀나 까치나 장자 모두 똑같은 존재들이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제각기 무엇인가를 목적으로 삼고 열심히 살아갑니다. 아마 사람들에게 ‘자신이 추구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느냐?’고 묻는다면, 거의 모두가 ‘그렇다.’고 대답할 것입니다.
하지만 오늘 바쁘게 살아가는 우리는 중요한 것을 빠뜨리고 있습니다. 그것은 앞의 예화처럼 자신에게 다가오는 죽음의 그림자를 잊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뒤에 따라오는 죽음은 잊은 채 육신을 위한 세상적인 삶에 매달려 흐느적거리고 있습니다. 죽음은 모든 사람에게 예고되어 있는 공개된 진리입니다. 히브리서9:27절의 말씀처럼,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한 것이며, 그 이후에는 심판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내 앞에 있는 목적만 향할 것이 아니라, 뒤따라오는 죽음과 심판을 위하여 준비하는 것이 후회를 남기지 않는 영적인 삶입니다. 항상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에게는 어떤 환경과 여건이 주어져도 기쁨과 평안을 유지할 수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요? 이 물음은 하나님 앞에서 사는 인생이 하나님께 맡겨야 할 당연한 의뢰입니다. 우리의 이 질문과 답변이 본문 말씀에서 주어지고 있습니다. 진지한 마음으로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에 귀를 기울여 봅시다.
먼저, 본문 말씀의 배경을 보면서 말씀의 의도를 찾아봅시다.
“우리가 무엇을 하리이까?” 이 질문은 유대인들이 회개의 세례를 전파하는 ‘세례요한’에게 묻는 것입니다.
‘요한’이 회개를 촉구하면서 세례를 베풀던 시기는 400여년이라는 종교적인 암흑기가 계속되고 있던 때였습니다. 당시의 사회는 그야말로 모든 것이 뒤죽박죽이었습니다. 올바른 삶의 길을 제시하는 선지자도 없고, 하나님께서도 침묵하시던 시대였습니다. 사람들은 자기 마음대로 살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하여 이 시대를 미리 말씀하셨습니다. 예레미야8:5-7절입니다. “이 예루살렘 백성이 항상 나를 떠나 물러감은 어찜이뇨? 그들이 거짓을 고집하고 돌아오기를 거절하도다. 내가 귀를 기울여 들은즉 그들이 정직을 말하지 아니하며, 그 악을 뉘우쳐서 ‘나의 행한 것이 무엇인고!’ 말하는 자가 없고, 전장을 향하여 달리는 말같이 각각 그 길로 행하도다. 공중의 학은 그 정한 시기를 알고, 반구와 제비와 두루미는 그 올 때를 지키거늘, 내 백성은 여호와의 규례를 알지 못하도다 하셨다 하라.”사람들의 삶에 대한 하나님의 깊은 탄식이 아닙니까?
이 현상을 사도 바울은 시편을 인용하여 로마서3:10-12절에서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기록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한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주님께서 오실 그 때가 그러했다면 오늘의 우리는 어떠하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세대에 예수 그리스도를 구원자로 보내주시려고 작정하시고, 먼저 그 길을 예비할 요한을 보내셨습니다. 요한의 임무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할 수 있도록 마음을 준비시키는 것이었습니다. 요한은 외쳤습니다. “지금까지 살아온 헛된 삶의 길을 정리하라.”고 말입니다. 그 때, 모여든 사람들이 물었습니다. “우리가 무엇을 하리이까?” 이 외침과 질문은 지금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청하시는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요청은 본문7-9절에 나타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세례요한을 통하여 당신의 뜻을 전하셨습니다. 본문에서의 하나님의 뜻은 두 가지로 요약되는데 이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조건입니다.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러 나아온 무리들은 그나마 신앙에 대하여 관심이 있었던 사람들입니다. 그런 그들을 향하여 ‘독사의 자식들’이라는 폭언을 퍼부었습니다. 이는 그들의 삶의 모습이 전혀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형식적으로 하나님을 섬기며, 돈을 위하여 하나님을 이용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자신들이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것을 내세웠습니다. 아브라함의 자손이란,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이라는 의미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명목상으로는 하나님의 선민이지만 그들의 생활은 전혀 그렇지 못했습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하고 자신들의 생각으로 섬기고 있었던 것입니다.
세례 요한은 사람을 향하신 하나님의 뜻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생각하고 있는 것처럼 ‘한 번 선민은 영원한 선민’이 아님을 분명히 증거하십니다. 하나님의 뜻은 단호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비록 선민이라 할지라도 선민으로서의 행함이 없으면 찍어버리시고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겠다.”고 하셨습니다.
1)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첫 번째 조건은 ‘회개’입니다.
우리가 아는 대로, 하나님은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속죄 제물로 주시기까지 사람을 사랑하시지만 한편으로는 나 하나에 연연해하지 않으십니다. 즉 내가 하나님의 일을 하지 않아도 하나님 나라는 변함없이 이루어져 갑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느 누구를 통하여서도 그 뜻을 이루십니다. 왜냐하면 내가 하나님을 택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나를 택하셨기 때문입니다(요15:16,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ꀞ). 그러므로 내가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지 않다면 다른 사람을 택하실 수 있으십니다(렘18:1-6의 토기장이 비유 참조, 롬9:21참조).
내가 하나님의 자녀의 신분을 유지하려면 세례요한의 외침처럼 ‘자신을 정비하고 하나님께로 마음을 돌려야’ 합니다. 이것을 ‘회개’라고 합니다. 눈물을 흘리며 “잘못 했습니다”를 연발하는 것이 진정한 회개가 아닙니다. 진정한 회개는 지금까지의 잘못된 삶을 청산하고 새 길로 들어서는 것을 말합니다. 만일 눈물을 흘리면서 잘못했다고 회개하고서도 지금까지의 삶으로 다시 돌아간다면, 아무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이러한 경우를 베드로후서2:22절에서는, “개가 그 토하였던 것에 돌아가고, 돼지가 씻었다가 더러운 구덩이에 도로 누웠다.”고 표현했습니다.
2)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두 번째 조건은 ‘열매’입니다.
진정한 회개는 열매를 동반합니다. 그래서 본문8절에서는 “회개의 합당한 열매”를 강조합니다. 그리고 9절에서 “열매가 없는 나무는 찍어 불에 던져 넣는다.”고 하셨습니다. 나의 생활에서 실제로 나타나는 행동을 열매라고 말합니다. 이 열매의 구체적인 내용인 다음 구절에 병행되고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맺어야 할 열매는 무엇입니까?
본문10-14절에서 각자의 삶의 자리에서 맺어야 할 열매가 무엇임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는 당시 사회의 삶의 환경에서 아주 구체적인 것이었습니다. 무리들에게는 “옷 두벌이 있는 사람은 옷 없는 사람에게 한 벌을 나누어 주고, 먹을 것이 있는 사람은 없어 굶주리는 사람에게 나누어주라.”고 했습니다. 세리들에게는, “정한 세 외에는 더 받지 말라.”고 했습니다. 군병들에게는, “사람에게 포악한 짓을 삼가하고, 권력의 힘이 있다고 약한 사람을 억누르려고 생각지 말고, 받는 월급으로 족한 줄로 알라.”고 했습니다. 너무나 당연한 말입니다. 이 내용을 종합하면 지금 현재 자신에게 주어진 생활의 자리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며, 자신의 직분에서 정의롭고 정당한 행위를 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 당연한 것을 하지 못함으로서 가정과 교회와 사회와 나라가 총체적으로 부실하며 불신풍조가 만연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때에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우리가 행해야 할 이러한 일들은 특별한 계획이나 능력을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환경을 이해하고 자신의 재능과 직분을 안다면 그것을 성실하게 행함으로서 충분한 것입니다. 즉 신뢰받을 수 있는 생활로 이웃에게 믿음을 심어가고, 따뜻한 마음을 퍼뜨려갈 차 한 잔의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 이러한 생활 속에 복음을 실천하고 전하는 것을 잊지 않는 것입니다.
이러한 합당한 생활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기쁨과 만족과 평안을 누리게 합니다. 비록 우리의 시대가 어수선하지만 우리가 해야 할 일을 행함으로서 우리 자신들은 기쁨과 평안과 만족을 누리며, 주변을 밝게 만들어가는 복된 성도의 삶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들어가는 말
중국의 사상가 장자(莊子)가 어느 날 활을 메고 사냥을 나갔습니다. 갑자기 이상하게 생긴 까치 한 마리가 머리 위를 날아서 멀리 있는 나뭇가지 위에 앉았습니다. 그 모양이 하도 이상해서 그 까치를 사냥하려고 조심스럽게 다가갔습니다. 활을 쏠 수 있는 곳까지 와서 활을 당기려고 보니, 까치가 무엇을 뚫어져라 노려보고 있었습니다. 까치가 노리는 쪽을 보니 풀숲 사이에 사마귀가 한 마리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사마귀는 또 나무 그늘에서 울고 있는 매미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습니다.
사마귀도 까치도 눈앞의 먹이에 정신이 팔려 자기가 죽게 되었다는 것은 전혀 생각지도 않고 있었습니다. 그 모습을 본 장자는 한심한 그 미물들이 측은하다는 생각이 들어 그만 활을 거두고 돌아섰습니다.
그리고는 깜짝 놀랐습니다. 한 사나이가 몽둥이로 자기를 내리치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사정을 알고 본즉, 까치를 따라가느라 정신없었던 장자가 남의 밭으로 들어가 채소를 망가뜨려 놓았던 탓이었습니다. 결국 사마귀나 까치나 장자 모두 똑같은 존재들이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제각기 무엇인가를 목적으로 삼고 열심히 살아갑니다. 아마 사람들에게 ‘자신이 추구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느냐?’고 묻는다면, 거의 모두가 ‘그렇다.’고 대답할 것입니다.
하지만 오늘 바쁘게 살아가는 우리는 중요한 것을 빠뜨리고 있습니다. 그것은 앞의 예화처럼 자신에게 다가오는 죽음의 그림자를 잊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뒤에 따라오는 죽음은 잊은 채 육신을 위한 세상적인 삶에 매달려 흐느적거리고 있습니다. 죽음은 모든 사람에게 예고되어 있는 공개된 진리입니다. 히브리서9:27절의 말씀처럼,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한 것이며, 그 이후에는 심판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내 앞에 있는 목적만 향할 것이 아니라, 뒤따라오는 죽음과 심판을 위하여 준비하는 것이 후회를 남기지 않는 영적인 삶입니다. 항상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에게는 어떤 환경과 여건이 주어져도 기쁨과 평안을 유지할 수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요? 이 물음은 하나님 앞에서 사는 인생이 하나님께 맡겨야 할 당연한 의뢰입니다. 우리의 이 질문과 답변이 본문 말씀에서 주어지고 있습니다. 진지한 마음으로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에 귀를 기울여 봅시다.
먼저, 본문 말씀의 배경을 보면서 말씀의 의도를 찾아봅시다.
“우리가 무엇을 하리이까?” 이 질문은 유대인들이 회개의 세례를 전파하는 ‘세례요한’에게 묻는 것입니다.
‘요한’이 회개를 촉구하면서 세례를 베풀던 시기는 400여년이라는 종교적인 암흑기가 계속되고 있던 때였습니다. 당시의 사회는 그야말로 모든 것이 뒤죽박죽이었습니다. 올바른 삶의 길을 제시하는 선지자도 없고, 하나님께서도 침묵하시던 시대였습니다. 사람들은 자기 마음대로 살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하여 이 시대를 미리 말씀하셨습니다. 예레미야8:5-7절입니다. “이 예루살렘 백성이 항상 나를 떠나 물러감은 어찜이뇨? 그들이 거짓을 고집하고 돌아오기를 거절하도다. 내가 귀를 기울여 들은즉 그들이 정직을 말하지 아니하며, 그 악을 뉘우쳐서 ‘나의 행한 것이 무엇인고!’ 말하는 자가 없고, 전장을 향하여 달리는 말같이 각각 그 길로 행하도다. 공중의 학은 그 정한 시기를 알고, 반구와 제비와 두루미는 그 올 때를 지키거늘, 내 백성은 여호와의 규례를 알지 못하도다 하셨다 하라.”사람들의 삶에 대한 하나님의 깊은 탄식이 아닙니까?
이 현상을 사도 바울은 시편을 인용하여 로마서3:10-12절에서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기록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한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주님께서 오실 그 때가 그러했다면 오늘의 우리는 어떠하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세대에 예수 그리스도를 구원자로 보내주시려고 작정하시고, 먼저 그 길을 예비할 요한을 보내셨습니다. 요한의 임무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할 수 있도록 마음을 준비시키는 것이었습니다. 요한은 외쳤습니다. “지금까지 살아온 헛된 삶의 길을 정리하라.”고 말입니다. 그 때, 모여든 사람들이 물었습니다. “우리가 무엇을 하리이까?” 이 외침과 질문은 지금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청하시는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요청은 본문7-9절에 나타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세례요한을 통하여 당신의 뜻을 전하셨습니다. 본문에서의 하나님의 뜻은 두 가지로 요약되는데 이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조건입니다.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러 나아온 무리들은 그나마 신앙에 대하여 관심이 있었던 사람들입니다. 그런 그들을 향하여 ‘독사의 자식들’이라는 폭언을 퍼부었습니다. 이는 그들의 삶의 모습이 전혀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형식적으로 하나님을 섬기며, 돈을 위하여 하나님을 이용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자신들이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것을 내세웠습니다. 아브라함의 자손이란,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이라는 의미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명목상으로는 하나님의 선민이지만 그들의 생활은 전혀 그렇지 못했습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하고 자신들의 생각으로 섬기고 있었던 것입니다.
세례 요한은 사람을 향하신 하나님의 뜻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생각하고 있는 것처럼 ‘한 번 선민은 영원한 선민’이 아님을 분명히 증거하십니다. 하나님의 뜻은 단호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비록 선민이라 할지라도 선민으로서의 행함이 없으면 찍어버리시고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겠다.”고 하셨습니다.
1)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첫 번째 조건은 ‘회개’입니다.
우리가 아는 대로, 하나님은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속죄 제물로 주시기까지 사람을 사랑하시지만 한편으로는 나 하나에 연연해하지 않으십니다. 즉 내가 하나님의 일을 하지 않아도 하나님 나라는 변함없이 이루어져 갑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느 누구를 통하여서도 그 뜻을 이루십니다. 왜냐하면 내가 하나님을 택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나를 택하셨기 때문입니다(요15:16,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ꀞ). 그러므로 내가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지 않다면 다른 사람을 택하실 수 있으십니다(렘18:1-6의 토기장이 비유 참조, 롬9:21참조).
내가 하나님의 자녀의 신분을 유지하려면 세례요한의 외침처럼 ‘자신을 정비하고 하나님께로 마음을 돌려야’ 합니다. 이것을 ‘회개’라고 합니다. 눈물을 흘리며 “잘못 했습니다”를 연발하는 것이 진정한 회개가 아닙니다. 진정한 회개는 지금까지의 잘못된 삶을 청산하고 새 길로 들어서는 것을 말합니다. 만일 눈물을 흘리면서 잘못했다고 회개하고서도 지금까지의 삶으로 다시 돌아간다면, 아무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이러한 경우를 베드로후서2:22절에서는, “개가 그 토하였던 것에 돌아가고, 돼지가 씻었다가 더러운 구덩이에 도로 누웠다.”고 표현했습니다.
2)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두 번째 조건은 ‘열매’입니다.
진정한 회개는 열매를 동반합니다. 그래서 본문8절에서는 “회개의 합당한 열매”를 강조합니다. 그리고 9절에서 “열매가 없는 나무는 찍어 불에 던져 넣는다.”고 하셨습니다. 나의 생활에서 실제로 나타나는 행동을 열매라고 말합니다. 이 열매의 구체적인 내용인 다음 구절에 병행되고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맺어야 할 열매는 무엇입니까?
본문10-14절에서 각자의 삶의 자리에서 맺어야 할 열매가 무엇임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는 당시 사회의 삶의 환경에서 아주 구체적인 것이었습니다. 무리들에게는 “옷 두벌이 있는 사람은 옷 없는 사람에게 한 벌을 나누어 주고, 먹을 것이 있는 사람은 없어 굶주리는 사람에게 나누어주라.”고 했습니다. 세리들에게는, “정한 세 외에는 더 받지 말라.”고 했습니다. 군병들에게는, “사람에게 포악한 짓을 삼가하고, 권력의 힘이 있다고 약한 사람을 억누르려고 생각지 말고, 받는 월급으로 족한 줄로 알라.”고 했습니다. 너무나 당연한 말입니다. 이 내용을 종합하면 지금 현재 자신에게 주어진 생활의 자리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며, 자신의 직분에서 정의롭고 정당한 행위를 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 당연한 것을 하지 못함으로서 가정과 교회와 사회와 나라가 총체적으로 부실하며 불신풍조가 만연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때에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우리가 행해야 할 이러한 일들은 특별한 계획이나 능력을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환경을 이해하고 자신의 재능과 직분을 안다면 그것을 성실하게 행함으로서 충분한 것입니다. 즉 신뢰받을 수 있는 생활로 이웃에게 믿음을 심어가고, 따뜻한 마음을 퍼뜨려갈 차 한 잔의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 이러한 생활 속에 복음을 실천하고 전하는 것을 잊지 않는 것입니다.
이러한 합당한 생활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기쁨과 만족과 평안을 누리게 합니다. 비록 우리의 시대가 어수선하지만 우리가 해야 할 일을 행함으로서 우리 자신들은 기쁨과 평안과 만족을 누리며, 주변을 밝게 만들어가는 복된 성도의 삶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