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의 도망자(몬1:8:18)
작성자 배의신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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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01-10-05 18:34
Title 인생의 도망자 / Scripture 몬1:8-18 / Space 대복교회
***들어가는 말
결혼한 지 오래도록 아이가 없는 어떤 가정에서 “만약 아이를 허락하시면 아이를 하나님께 드리겠나이다.”라고 하나님께 서원기도를 했습니다. 얼마 후 아이를 갖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낳고 보니 아들이었습니다. 이 아이가 자라면서 천재의 징후를 보였습니다. 학교에서 전체 수석에다가 운동도 못하는 것이 없고 동료를 리드하는 리더십까지 갖추었습니다.
아이가 성장할수록 부모는 다른 생각을 가지기 시작했습니다. ‘아들이 의대를 지망해서 의사가 되는 것이 하나님께 더 좋은 것이 아닐까!’ 라고 생각하고는 아들을 의대에 보냈고 모든 것이 순조로웠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아들이 하루아침에 정신이상이 되었습니다. 미쳐도 보통 미친것이 아니어서 대낮에도 옷을 벗고 알몸으로 바깥으로 무작정 뛰어나가는 것이었습니다. 하루는 그 날도 다 큰 아들이 알몸으로 뛰쳐나가는 것을 본 어머니가 “하나님, 하나님, 저기 주의 종이 뛰어가나이다! 주의 종을 붙들어주소서!”라고 소리 지르며 따라갑니다.
자신들의 욕망 때문에 하나님께 서원한 것도 저버리고 의대에 보낼 때는 언제이고, 다급할 때는 ‘주의 종’이라고 부르는 심사는 또 무엇이란 말입니까?! 확실히 사람은 믿을 것이 못됩니다. 급할 때는 ‘하나님’을 찾다가 형편이 나아지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자기욕심’을 따르는 것이 인간이 아닙니까! 이것이 영적인 도망자입니다.
성경에는 도망자에 대한 이야기가 심심찮게 등장합니다. 아마 최초의 사람인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도 도망친 선례를 남겨서 그렇지 않을까 싶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과의 약속을 어긴 후 두려워서 하나님의 낯을 피해 도망쳐서 풀숲에 숨어버렸던 것입니다.
아버지와 쌍둥이 형인 에서를 속이고 축복을 가로채서는 멀리 도망쳤던 ‘야곱’, 바로왕의 보복을 피해서 광야로 도망친 ‘모세’, 백성들의 적개심과 하나님의 징벌을 전해야 하는 무거운 짐으로부터 도망친 ‘예레미야’, 사울 왕의 적개심으로 죽음의 위기에 몰려 도망친 ‘다윗’, 이세벨 왕후의 칼날을 피해 그릿 시냇가로 도망친 선지자 ‘엘리야’, 유대인들의 핍박과 죽음의 위기를 피해 갈릴리로 도망친 ‘예수님의 제자들’ 등.
이들 도망자들에게 나타나는 공통점은 모두 그런 위기 속에서 하나님을 만났고, 소명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도망자에게 특별한 관심을 가지고 계신 것이 분명합니다. 왜냐하면, 사람과 환경을 피해 도망치는 자들은 피난처와 새로운 의지할 것을 간절히 찾기 마련이기 때문입니다.
이들 도망자 중에는 본문의 주인공인 ‘오네시모’가 있습니다. 오네시모는 ‘빌레몬’의 노예였습니다. 오네시모가 빌레몬의 집에서 왜 도망갔는지는 몰라도, 그는 도망친 후 로마에서 생활했습니다. 그러다가 어떤 연유에서인지 로마의 감옥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그 곳에서 오네시모는 복음을 전하다가 갇힌 ‘사도 바울’을 만나게 됩니다. 바울과의 만남을 통하여 오네시모 역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게 됩니다. 바울은 골로새서4:9절에서, 오네시모를 “신실하고 사랑받는 형제”로 부릅니다.
바울은 도망자 오네시모를 이제는 그 주인으로부터 인정받는 자유인으로 만들어야 할 때가 되었다고 생각했습니다. 오네시모의 주인인 ‘빌레몬’도 역시 바울에 의하여 복음을 받게 되었고 이제는 친구가 되어 있었습니다(17절). 바울은 오네시모의 근황과 함께 그를 보증하는 편지를 써서 보냈습니다. 그 편지가 이 빌레몬서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쿼바디스’라는 영화에서, 핍박이 극심한 로마에서 도망치는 ‘베드로’를 예수님께서 만나시고 그를 다시 로마로 보내시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무엇인가에서 도피한 사람을 변화 시키셔서, 새로운 소명자로 도망쳤던 곳으로 되돌려 보내시곤 하십니다.
인생의 도망자는 어디에서도 평안을 얻지 못합니다.
오네시모는 빌레몬 집의 노예였습니다. 빌레몬은 골로새에 사는 부자였습니다. 그는 사도 바울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되었고, 온 가족이 독실한 신자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집은 교회로 사용되었고 바울의 전도 후원자가 되었습니다(몬1-2절).
당시의 팔레스틴과 온 유럽이 노예 제도를 인정하고 있었습니다. 그 때는 기독교인들도 노예를 소유하고 있었으나, 일반인들과는 달리 노예에 대한 대우가 달랐습니다. 일반적으로 노예는 주인의 소유물이었고, 노예를 사고팔거나 죽일 수 있는 권한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무슨 이유에서인지 빌리몬의 노예인 오네시모가 도망을 쳤습니다. 그것도 도망을 치면서 주인의 돈이나 재산을 훔쳐갔습니다.
오네시모의 도망은 자신으로부터의 도망이었습니다. 그가 빌레몬의 집에 있는 동안에는 노예의 신분을 벗어날 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자신을 알고 있는 모든 것으로부터 도망을 쳤습니다. 자유와 편안한 삶을 향하여 말입니다. 그러나 오네시모는 결국 다시 잡히는 신세가 되었고, 이전보다 더 악화된 환경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 잡힌바 된 사람은 도망칠 곳이 없습니다. 시편139:7-11절을 보십시오. “내가 주의 신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내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시며, 음부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니이다. 내가 새벽 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가서 거할지라도 곧 거기서도 주의 손이 나를 인도하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리이다. 내가 혹시 말하기를 흑암이 정녕 나를 덮고 나를 두른 빛은 밤이 되리라 할지라도 주에게서는 흑암이 숨기지 못하며, 밤이 낮과 같이 비취나니 주에게는 흑암과 빛이 일반이니이다.” 라고 고백합니다.
모세도 요나 선지자도 예레미야 선지자도 하나님의 명령이 부담스럽고 싫어서 하나님으로부터 도망쳐보려 했지만 결코 벗어날 수가 없었습니다. 예레미야의 고백을 들어보십시오. 예레미야20:9절입니다. “내가 다시는 여호와를 선포하지 아니하며 그 이름으로 말하지 아니하리라 하면, 나의 중심이 불붙는 것 같아서 골수에 사무치니 답답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떠나 있는 사람은 육신적으로나 영적으로나 결코 평안이 없습니다. 평안은 오직 하나님 안에서만 가능합니다. 주님께서 요한복음14:27절에서 말씀하십니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여러분은 혹시 하나님의 명령으로부터 도망치고 있는 도망자가 아닙니까? 만일 그러하다면 다음의 말씀을 마음 깊이 들으십시오.
하나님은 결코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인생을 향하신 하나님의 뜻은 분명합니다. 민수기23:19절에서는, “하나님은 인생이 아니시니 식언치 않으시고, 인자가 아니시니 후회가 없으시도다. 어찌 그 말씀하신 바를 행치 않으시며 하신 말씀을 실행치 않으시랴.”라고 하셨으며, 이사야55:11절에서는, “내 입에서 나가는 말도 헛되이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고 나의 뜻을 이루며, 나의 명하여 보낸 일에 형통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인생의 도망자 오네시모가 로마에서조차 범죄 하여 갇힌 신세가 되어, 죽을지도 모르는 그야말로 절망의 순간에 서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기회를 주셨습니다. 사도 바울을 만나게 하신 것입니다. 바울은 3차전도 여행 후에 로마로 압송되었습니다. 그의 생애에 있어서 마지막 길인 로마행을 4차전도 여행이라고 합니다. 바울은 순교하기 직전인 로마 감옥에서 오네시모에게 복음을 전했고 오네시모가 복음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결코 포기하지 않으시며 인생의 절망의 순간에 까지도 기회를 주십니다. 인간으로서 더 이상 할 수 없을 때, 하나님께서 개입하시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간사함 때문입니다. 인간은 조금만 틈이 있으면 자신을 나타내는 교만한 존재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스스로 무너져 내리도록 기다리시는 것입니다.
오네시모는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는 순간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습니다. 그토록 자신의 신분에서 벗어나고자 했던 그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를 얻은 것입니다. 바로 고린도전서15:22절의 말씀 그대로입니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고 하셨으며, 고후5:17절에서는,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고 하셨고, 요한복음8:36절에서는,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케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쓸모없는 인생을 가치 있는 인생으로 만드시며 무익한 인생을 유익하게 만드십니다. 여러분의 생애가 빛나고 가치 있기를 원하십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십시오. 그리고 그분께 모든 생애를 맡기십시오. 그리하면 인생이 새롭게 여겨지고 자신이 얼마나 가치 있는 존재인가를 알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대신 죽으시고 생명을 얻은 보배입니다. 고린도후서4:6-7절에서 우리는 보배로우신 하나님의 영광의 빛을 담은 소중한 존재임을 말씀하십니다.
만일 하나님의 끊임없는 부르심에도 불구하고 거듭 거부한다면 인생을 비참하게 하는 징계가 계속될 것입니다. 왜냐고요? 하나님은 결코 포기하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나를 부르셨다고 생각되시거든 얼른 자신의 고집을 포기하십시오. 그것이 덜 맞고 더 많은 행복을 누릴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네시모의 생명과 자유와 행복을 위하여 걸음을 인도하셨습니다. 오네시모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했습니다. 그 결과 자신이 바라던 자유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일군으로서 행복까지도 덤으로 얻었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과 요청은 말씀을 통하여 그리고 우리 마음을 통하여 전달됩니다. 여러분의 마음에 “무엇을 해야 한다.”는 생각이 계속 주어지고, 그 생각이 말씀에 의한 것이라면 그것은 하나님의 부르심이며 요청입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계속 외면하면 그 생각은 희미해지겠지만, 그 대신 여러분의 삶을 통한 징계가 더욱 커질 것입니다.
우리는 오네시모처럼 순종으로 행복을 누릴 수도 있지만, 요나 선지자나 가룟 유다처럼 고통과 파멸에까지 이를 수 있음을 잊지 않아야 합니다. 현명하신 여러분은 순종하심으로 주님 안에서 행복을 마음껏 누릴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들어가는 말
결혼한 지 오래도록 아이가 없는 어떤 가정에서 “만약 아이를 허락하시면 아이를 하나님께 드리겠나이다.”라고 하나님께 서원기도를 했습니다. 얼마 후 아이를 갖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낳고 보니 아들이었습니다. 이 아이가 자라면서 천재의 징후를 보였습니다. 학교에서 전체 수석에다가 운동도 못하는 것이 없고 동료를 리드하는 리더십까지 갖추었습니다.
아이가 성장할수록 부모는 다른 생각을 가지기 시작했습니다. ‘아들이 의대를 지망해서 의사가 되는 것이 하나님께 더 좋은 것이 아닐까!’ 라고 생각하고는 아들을 의대에 보냈고 모든 것이 순조로웠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아들이 하루아침에 정신이상이 되었습니다. 미쳐도 보통 미친것이 아니어서 대낮에도 옷을 벗고 알몸으로 바깥으로 무작정 뛰어나가는 것이었습니다. 하루는 그 날도 다 큰 아들이 알몸으로 뛰쳐나가는 것을 본 어머니가 “하나님, 하나님, 저기 주의 종이 뛰어가나이다! 주의 종을 붙들어주소서!”라고 소리 지르며 따라갑니다.
자신들의 욕망 때문에 하나님께 서원한 것도 저버리고 의대에 보낼 때는 언제이고, 다급할 때는 ‘주의 종’이라고 부르는 심사는 또 무엇이란 말입니까?! 확실히 사람은 믿을 것이 못됩니다. 급할 때는 ‘하나님’을 찾다가 형편이 나아지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자기욕심’을 따르는 것이 인간이 아닙니까! 이것이 영적인 도망자입니다.
성경에는 도망자에 대한 이야기가 심심찮게 등장합니다. 아마 최초의 사람인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도 도망친 선례를 남겨서 그렇지 않을까 싶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과의 약속을 어긴 후 두려워서 하나님의 낯을 피해 도망쳐서 풀숲에 숨어버렸던 것입니다.
아버지와 쌍둥이 형인 에서를 속이고 축복을 가로채서는 멀리 도망쳤던 ‘야곱’, 바로왕의 보복을 피해서 광야로 도망친 ‘모세’, 백성들의 적개심과 하나님의 징벌을 전해야 하는 무거운 짐으로부터 도망친 ‘예레미야’, 사울 왕의 적개심으로 죽음의 위기에 몰려 도망친 ‘다윗’, 이세벨 왕후의 칼날을 피해 그릿 시냇가로 도망친 선지자 ‘엘리야’, 유대인들의 핍박과 죽음의 위기를 피해 갈릴리로 도망친 ‘예수님의 제자들’ 등.
이들 도망자들에게 나타나는 공통점은 모두 그런 위기 속에서 하나님을 만났고, 소명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도망자에게 특별한 관심을 가지고 계신 것이 분명합니다. 왜냐하면, 사람과 환경을 피해 도망치는 자들은 피난처와 새로운 의지할 것을 간절히 찾기 마련이기 때문입니다.
이들 도망자 중에는 본문의 주인공인 ‘오네시모’가 있습니다. 오네시모는 ‘빌레몬’의 노예였습니다. 오네시모가 빌레몬의 집에서 왜 도망갔는지는 몰라도, 그는 도망친 후 로마에서 생활했습니다. 그러다가 어떤 연유에서인지 로마의 감옥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그 곳에서 오네시모는 복음을 전하다가 갇힌 ‘사도 바울’을 만나게 됩니다. 바울과의 만남을 통하여 오네시모 역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게 됩니다. 바울은 골로새서4:9절에서, 오네시모를 “신실하고 사랑받는 형제”로 부릅니다.
바울은 도망자 오네시모를 이제는 그 주인으로부터 인정받는 자유인으로 만들어야 할 때가 되었다고 생각했습니다. 오네시모의 주인인 ‘빌레몬’도 역시 바울에 의하여 복음을 받게 되었고 이제는 친구가 되어 있었습니다(17절). 바울은 오네시모의 근황과 함께 그를 보증하는 편지를 써서 보냈습니다. 그 편지가 이 빌레몬서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쿼바디스’라는 영화에서, 핍박이 극심한 로마에서 도망치는 ‘베드로’를 예수님께서 만나시고 그를 다시 로마로 보내시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무엇인가에서 도피한 사람을 변화 시키셔서, 새로운 소명자로 도망쳤던 곳으로 되돌려 보내시곤 하십니다.
인생의 도망자는 어디에서도 평안을 얻지 못합니다.
오네시모는 빌레몬 집의 노예였습니다. 빌레몬은 골로새에 사는 부자였습니다. 그는 사도 바울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되었고, 온 가족이 독실한 신자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집은 교회로 사용되었고 바울의 전도 후원자가 되었습니다(몬1-2절).
당시의 팔레스틴과 온 유럽이 노예 제도를 인정하고 있었습니다. 그 때는 기독교인들도 노예를 소유하고 있었으나, 일반인들과는 달리 노예에 대한 대우가 달랐습니다. 일반적으로 노예는 주인의 소유물이었고, 노예를 사고팔거나 죽일 수 있는 권한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무슨 이유에서인지 빌리몬의 노예인 오네시모가 도망을 쳤습니다. 그것도 도망을 치면서 주인의 돈이나 재산을 훔쳐갔습니다.
오네시모의 도망은 자신으로부터의 도망이었습니다. 그가 빌레몬의 집에 있는 동안에는 노예의 신분을 벗어날 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자신을 알고 있는 모든 것으로부터 도망을 쳤습니다. 자유와 편안한 삶을 향하여 말입니다. 그러나 오네시모는 결국 다시 잡히는 신세가 되었고, 이전보다 더 악화된 환경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 잡힌바 된 사람은 도망칠 곳이 없습니다. 시편139:7-11절을 보십시오. “내가 주의 신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내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시며, 음부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니이다. 내가 새벽 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가서 거할지라도 곧 거기서도 주의 손이 나를 인도하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리이다. 내가 혹시 말하기를 흑암이 정녕 나를 덮고 나를 두른 빛은 밤이 되리라 할지라도 주에게서는 흑암이 숨기지 못하며, 밤이 낮과 같이 비취나니 주에게는 흑암과 빛이 일반이니이다.” 라고 고백합니다.
모세도 요나 선지자도 예레미야 선지자도 하나님의 명령이 부담스럽고 싫어서 하나님으로부터 도망쳐보려 했지만 결코 벗어날 수가 없었습니다. 예레미야의 고백을 들어보십시오. 예레미야20:9절입니다. “내가 다시는 여호와를 선포하지 아니하며 그 이름으로 말하지 아니하리라 하면, 나의 중심이 불붙는 것 같아서 골수에 사무치니 답답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떠나 있는 사람은 육신적으로나 영적으로나 결코 평안이 없습니다. 평안은 오직 하나님 안에서만 가능합니다. 주님께서 요한복음14:27절에서 말씀하십니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여러분은 혹시 하나님의 명령으로부터 도망치고 있는 도망자가 아닙니까? 만일 그러하다면 다음의 말씀을 마음 깊이 들으십시오.
하나님은 결코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인생을 향하신 하나님의 뜻은 분명합니다. 민수기23:19절에서는, “하나님은 인생이 아니시니 식언치 않으시고, 인자가 아니시니 후회가 없으시도다. 어찌 그 말씀하신 바를 행치 않으시며 하신 말씀을 실행치 않으시랴.”라고 하셨으며, 이사야55:11절에서는, “내 입에서 나가는 말도 헛되이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고 나의 뜻을 이루며, 나의 명하여 보낸 일에 형통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인생의 도망자 오네시모가 로마에서조차 범죄 하여 갇힌 신세가 되어, 죽을지도 모르는 그야말로 절망의 순간에 서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기회를 주셨습니다. 사도 바울을 만나게 하신 것입니다. 바울은 3차전도 여행 후에 로마로 압송되었습니다. 그의 생애에 있어서 마지막 길인 로마행을 4차전도 여행이라고 합니다. 바울은 순교하기 직전인 로마 감옥에서 오네시모에게 복음을 전했고 오네시모가 복음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결코 포기하지 않으시며 인생의 절망의 순간에 까지도 기회를 주십니다. 인간으로서 더 이상 할 수 없을 때, 하나님께서 개입하시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간사함 때문입니다. 인간은 조금만 틈이 있으면 자신을 나타내는 교만한 존재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스스로 무너져 내리도록 기다리시는 것입니다.
오네시모는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는 순간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습니다. 그토록 자신의 신분에서 벗어나고자 했던 그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를 얻은 것입니다. 바로 고린도전서15:22절의 말씀 그대로입니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고 하셨으며, 고후5:17절에서는,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고 하셨고, 요한복음8:36절에서는,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케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쓸모없는 인생을 가치 있는 인생으로 만드시며 무익한 인생을 유익하게 만드십니다. 여러분의 생애가 빛나고 가치 있기를 원하십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십시오. 그리고 그분께 모든 생애를 맡기십시오. 그리하면 인생이 새롭게 여겨지고 자신이 얼마나 가치 있는 존재인가를 알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대신 죽으시고 생명을 얻은 보배입니다. 고린도후서4:6-7절에서 우리는 보배로우신 하나님의 영광의 빛을 담은 소중한 존재임을 말씀하십니다.
만일 하나님의 끊임없는 부르심에도 불구하고 거듭 거부한다면 인생을 비참하게 하는 징계가 계속될 것입니다. 왜냐고요? 하나님은 결코 포기하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나를 부르셨다고 생각되시거든 얼른 자신의 고집을 포기하십시오. 그것이 덜 맞고 더 많은 행복을 누릴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네시모의 생명과 자유와 행복을 위하여 걸음을 인도하셨습니다. 오네시모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했습니다. 그 결과 자신이 바라던 자유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일군으로서 행복까지도 덤으로 얻었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과 요청은 말씀을 통하여 그리고 우리 마음을 통하여 전달됩니다. 여러분의 마음에 “무엇을 해야 한다.”는 생각이 계속 주어지고, 그 생각이 말씀에 의한 것이라면 그것은 하나님의 부르심이며 요청입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계속 외면하면 그 생각은 희미해지겠지만, 그 대신 여러분의 삶을 통한 징계가 더욱 커질 것입니다.
우리는 오네시모처럼 순종으로 행복을 누릴 수도 있지만, 요나 선지자나 가룟 유다처럼 고통과 파멸에까지 이를 수 있음을 잊지 않아야 합니다. 현명하신 여러분은 순종하심으로 주님 안에서 행복을 마음껏 누릴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