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을 지키십시오(약1:26-27)
작성자 배의신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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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01-09-28 21:40
Title 자신을 지키십시오. / Scripture 약1:26-27 / Space 대복교회
*** 들어가는 말
본문 / (26) 누구든지 스스로 경건하다 생각하며 자기 혀를 재갈 먹이지 아니하고 자기 마음을 속이면 이 사람의 경건은 헛것이라. (27)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아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이것이니라.
세상이 온통 뒤숭숭합니다. 세계 뉴스의 초점은 미국의 대 테러전쟁 시나리오에 모아지고, 세계 각국은 미국에 동조하거나 아니면 항전을 선언하는 양분 현상이 두드러지고 있습니다. 그런 중에도 혹시 미국에 동조했다가 테러 대상국이 되지나 않을까 전전긍긍하고 있습니다. 어느 나라든지 자국의 이익을 지키고 싶은 것입니다.
이런 와중에 국내 뉴스는 연일 정부와 사회의 비리가 불거져 나오고, 각 정당은 자신들의 권력의 자리를 지키려고 핏대를 올립니다. 심지어 법을 집행하는 사법기관마저 극도의 오염증상을 보이고 있습니다. 항상 그래왔지만 어떤 불미스러운 일이 불거지면 저마다 자신은 모르는 일이고, 시켜서 했고, 깨끗하다고 변명하고 있습니다. 무슨 수를 쓰더라도 구차하게 자신을 지키려고 애쓰고 있습니다.
이러한 세대의 암울한 현상을 보노라니 비인부전(非人不傳) 이라는 말이 언뜻 떠오릅니다. 이 말은 서예의 달인이라 부르는 ꡔ왕희지ꡕ가 제자들에게 했던 말입니다. 그 뜻은 ‘스승의 안목으로 보아 합당한 인물이 아니면 함부로 도를 전해 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즉, 아무리 의술이나 도를 터득하고 싶고, 전수 받고 싶다고 해도 적임자가 아니면 허락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 세대는 마치 ‘힘 있는 자가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식으로 흘러가고 있습니다.
이러한 권력과 힘의 세계뿐만 아니라 우리는 각종 질병과 온갖 사고들과 위험스러운 사상들, 사람들의 탐욕, 폭력의 위험에 노출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신앙인에게 있어서 무엇보다도 위험한 것은 세상적인 미혹과 영적인 침체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것들로부터 자신을 지켜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말세를 사는 성도의 참된 경건은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않는 것’이라고 주의를 환기시키십니다. 또한 디모데후서3:1-5절에서는 말세에 나타날 온갖 죄악을 말씀하시면서,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자니 이 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고 하십니다.
하지만 우리는 세상에서 살고, 살다보면 어느새 세상에 깊숙이 들어와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말세의 위험도 알고 신앙을 지켜야 하는 것도 알지만 실제로 그렇게 잘 되지 않음을 날마다 경험합니다. 하나님의 경고는 준엄하며 천국과 지옥을 아는 우리는 선택의 역지가 없음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세상과 영적인 대적들로부터 우리의 믿음을 지켜야 하는 것은 분명한데, 여러분은 어떻게 하겠습니까?
무엇보다도 먼저 자신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개성 있게 창조하셨습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에게는 자신만이 가지는 저마다의 독특함이 있습니다. 지식의 종류와 정도, 경험의 축적, 재능, 지혜로움, 대응력, 가치관 등. 모두가 각자의 분량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는 각자의 쓰임새가 다름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자신이 머물러야 할 자리와 그렇지 않은 자리를 분별하여 자신을 지킬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잠언3:1절에서, “천하에 모든 일이 기한이 있고, 모든 목적이 이룰 때가 있다.”고 하셨으며, 잠언16:4절에서는, “여호와께서 온갖 것을 그 씌움에 적당하게 지으셨으며, 악인도 악한 날에 적당하게 하셨다.”고 하셨습니다. 이 어지러운 세대에 우리가 얻어야 할 지혜가 여기에 있습니다.
여러분은 “자신이 누구이며 신분은 무엇인지, 또는 이 땅에서 살아가는 목적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리고 자신이 영적으로 어떤 상태인지 아십니까?” 꼭 무슨 철학적인 질문 같지만, 철학이 별스러운 것입니까? 사람이 살아가는 것이 철학 아니겠습니까? 어떻든 자신을 지킨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각자에게 주신 자신만의 삶의 자리를 지키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신을 분명히 알아야 하겠지요.
자신을 알면 다음으로 무엇을 지켜야 할지를 찾아야 합니다.
본문 말씀에서 두 가지를 말씀하십니다. 하나는 어려움에 처한 고아와 과부를 돌아보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않는 것입니다.
1) 사람에 대한 사랑을 지켜가는 것입니다.
구약에서부터 고아와 과부는 약하고 소외된 자들을 대표하는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즉 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사랑으로 어려움에 처한 가난하고 약하고 소외된 자들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주신 두 가지의 새 계명 중에서 두 번째 것입니다.
왜 사람에 대한 사랑의 실천이 먼저 강조했을까요? 요한일서4:20절을 봅시다.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가 보지 못하는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고 하셨습니다. 더불어 사는 사람을 사랑하지 못하면서 육신의 감각으로 느낄 수 없는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거짓말이기 때문입니다. 요한일서3:17절에서, “누가 이 세상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줄 마음을 막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할까보냐”라고 사랑의 실체가 어떠함을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에 대한 사랑의 실천으로 가장 잘 표현되는 것은 소외되고 약하고 가난한 사람을 돕는 것입니다. 이들은 갚을 능력이 없기 때문에 순수한 마음으로 도울 수 있는 것입니다.
2) 하나님께 대한 사랑을 지켜가는 것입니다.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않는 것”은 영적인 순결을 지켜가는 것입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주신 두 가지 계명 중에서 첫 번째 것이며, 하나님께 대한 정결한 사랑입니다. “세속에 물들지 않는다.”는 것은 세상의 것으로 마음을 채우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요한일서2:15절에서,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세상의 어떤 것에도 하나님보다 더 깊은 관심을 쏟을 수 없습니다.
‘어떻게 이렇게 살아갈 수 있느냐?’고 의문스럽습니까? 너무 힘들겠습니까? 하지만 영원한 생명이 누리는 영원한 행복을 얻는 길이 그리 쉽지는 않습니다. 이 세상의 것도 다 누리고 영원한 행복도 차지할 수 있는 길은 없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길을 하나님께 맡기고 갈 수 있도록 도움을 부탁하십시오. 충분히 갈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길이 이 세상에서의 삶도 행복하게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입니다.
주님께서 약속하셨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동안 항상 함께 하시겠다고 말입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지켜야 할 자리를 지킬 때,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더하여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여러분 자신이 머물고 있는 삶의 자리에서 이 두 가지를 어떻게 지켜갈 수 있을지를 생각해 보십시오. 그리고 하나님께 그 길을 알게 해 주시며, 또한 지킬 수 있게 해 달라고 부탁하십시오. 여러분이 기쁜 마음으로 이 길을 간다면, 각종 질병과 온갖 사고들과 위험스러운 사상들, 사람들의 탐욕, 폭력의 위험으로부터 보호하시며, 세상에서의 모든 필요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채우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행복에 대하여 깊은 관심을 가지고 계십니다. 우리는 이 하나님께서 주신 길을 성실하게 행함으로서 이생과 내생 모두에서 행복한 삶을 이룰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 들어가는 말
본문 / (26) 누구든지 스스로 경건하다 생각하며 자기 혀를 재갈 먹이지 아니하고 자기 마음을 속이면 이 사람의 경건은 헛것이라. (27)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아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이것이니라.
세상이 온통 뒤숭숭합니다. 세계 뉴스의 초점은 미국의 대 테러전쟁 시나리오에 모아지고, 세계 각국은 미국에 동조하거나 아니면 항전을 선언하는 양분 현상이 두드러지고 있습니다. 그런 중에도 혹시 미국에 동조했다가 테러 대상국이 되지나 않을까 전전긍긍하고 있습니다. 어느 나라든지 자국의 이익을 지키고 싶은 것입니다.
이런 와중에 국내 뉴스는 연일 정부와 사회의 비리가 불거져 나오고, 각 정당은 자신들의 권력의 자리를 지키려고 핏대를 올립니다. 심지어 법을 집행하는 사법기관마저 극도의 오염증상을 보이고 있습니다. 항상 그래왔지만 어떤 불미스러운 일이 불거지면 저마다 자신은 모르는 일이고, 시켜서 했고, 깨끗하다고 변명하고 있습니다. 무슨 수를 쓰더라도 구차하게 자신을 지키려고 애쓰고 있습니다.
이러한 세대의 암울한 현상을 보노라니 비인부전(非人不傳) 이라는 말이 언뜻 떠오릅니다. 이 말은 서예의 달인이라 부르는 ꡔ왕희지ꡕ가 제자들에게 했던 말입니다. 그 뜻은 ‘스승의 안목으로 보아 합당한 인물이 아니면 함부로 도를 전해 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즉, 아무리 의술이나 도를 터득하고 싶고, 전수 받고 싶다고 해도 적임자가 아니면 허락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 세대는 마치 ‘힘 있는 자가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식으로 흘러가고 있습니다.
이러한 권력과 힘의 세계뿐만 아니라 우리는 각종 질병과 온갖 사고들과 위험스러운 사상들, 사람들의 탐욕, 폭력의 위험에 노출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신앙인에게 있어서 무엇보다도 위험한 것은 세상적인 미혹과 영적인 침체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것들로부터 자신을 지켜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말세를 사는 성도의 참된 경건은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않는 것’이라고 주의를 환기시키십니다. 또한 디모데후서3:1-5절에서는 말세에 나타날 온갖 죄악을 말씀하시면서,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자니 이 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고 하십니다.
하지만 우리는 세상에서 살고, 살다보면 어느새 세상에 깊숙이 들어와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말세의 위험도 알고 신앙을 지켜야 하는 것도 알지만 실제로 그렇게 잘 되지 않음을 날마다 경험합니다. 하나님의 경고는 준엄하며 천국과 지옥을 아는 우리는 선택의 역지가 없음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세상과 영적인 대적들로부터 우리의 믿음을 지켜야 하는 것은 분명한데, 여러분은 어떻게 하겠습니까?
무엇보다도 먼저 자신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개성 있게 창조하셨습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에게는 자신만이 가지는 저마다의 독특함이 있습니다. 지식의 종류와 정도, 경험의 축적, 재능, 지혜로움, 대응력, 가치관 등. 모두가 각자의 분량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는 각자의 쓰임새가 다름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자신이 머물러야 할 자리와 그렇지 않은 자리를 분별하여 자신을 지킬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잠언3:1절에서, “천하에 모든 일이 기한이 있고, 모든 목적이 이룰 때가 있다.”고 하셨으며, 잠언16:4절에서는, “여호와께서 온갖 것을 그 씌움에 적당하게 지으셨으며, 악인도 악한 날에 적당하게 하셨다.”고 하셨습니다. 이 어지러운 세대에 우리가 얻어야 할 지혜가 여기에 있습니다.
여러분은 “자신이 누구이며 신분은 무엇인지, 또는 이 땅에서 살아가는 목적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리고 자신이 영적으로 어떤 상태인지 아십니까?” 꼭 무슨 철학적인 질문 같지만, 철학이 별스러운 것입니까? 사람이 살아가는 것이 철학 아니겠습니까? 어떻든 자신을 지킨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각자에게 주신 자신만의 삶의 자리를 지키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신을 분명히 알아야 하겠지요.
자신을 알면 다음으로 무엇을 지켜야 할지를 찾아야 합니다.
본문 말씀에서 두 가지를 말씀하십니다. 하나는 어려움에 처한 고아와 과부를 돌아보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않는 것입니다.
1) 사람에 대한 사랑을 지켜가는 것입니다.
구약에서부터 고아와 과부는 약하고 소외된 자들을 대표하는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즉 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사랑으로 어려움에 처한 가난하고 약하고 소외된 자들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주신 두 가지의 새 계명 중에서 두 번째 것입니다.
왜 사람에 대한 사랑의 실천이 먼저 강조했을까요? 요한일서4:20절을 봅시다.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가 보지 못하는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고 하셨습니다. 더불어 사는 사람을 사랑하지 못하면서 육신의 감각으로 느낄 수 없는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거짓말이기 때문입니다. 요한일서3:17절에서, “누가 이 세상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줄 마음을 막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할까보냐”라고 사랑의 실체가 어떠함을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에 대한 사랑의 실천으로 가장 잘 표현되는 것은 소외되고 약하고 가난한 사람을 돕는 것입니다. 이들은 갚을 능력이 없기 때문에 순수한 마음으로 도울 수 있는 것입니다.
2) 하나님께 대한 사랑을 지켜가는 것입니다.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않는 것”은 영적인 순결을 지켜가는 것입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주신 두 가지 계명 중에서 첫 번째 것이며, 하나님께 대한 정결한 사랑입니다. “세속에 물들지 않는다.”는 것은 세상의 것으로 마음을 채우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요한일서2:15절에서,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세상의 어떤 것에도 하나님보다 더 깊은 관심을 쏟을 수 없습니다.
‘어떻게 이렇게 살아갈 수 있느냐?’고 의문스럽습니까? 너무 힘들겠습니까? 하지만 영원한 생명이 누리는 영원한 행복을 얻는 길이 그리 쉽지는 않습니다. 이 세상의 것도 다 누리고 영원한 행복도 차지할 수 있는 길은 없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길을 하나님께 맡기고 갈 수 있도록 도움을 부탁하십시오. 충분히 갈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길이 이 세상에서의 삶도 행복하게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입니다.
주님께서 약속하셨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동안 항상 함께 하시겠다고 말입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지켜야 할 자리를 지킬 때,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더하여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여러분 자신이 머물고 있는 삶의 자리에서 이 두 가지를 어떻게 지켜갈 수 있을지를 생각해 보십시오. 그리고 하나님께 그 길을 알게 해 주시며, 또한 지킬 수 있게 해 달라고 부탁하십시오. 여러분이 기쁜 마음으로 이 길을 간다면, 각종 질병과 온갖 사고들과 위험스러운 사상들, 사람들의 탐욕, 폭력의 위험으로부터 보호하시며, 세상에서의 모든 필요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채우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행복에 대하여 깊은 관심을 가지고 계십니다. 우리는 이 하나님께서 주신 길을 성실하게 행함으로서 이생과 내생 모두에서 행복한 삶을 이룰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