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큰 섬김(마6:1-4)
작성자 배의신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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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01-09-07 22:52
Title 가장 큰 섬김 / Scripture 마6:1-4 / Space 대복교회
*** 들어가는 말
하나님의 백성인 그리스도인들은 말 그대로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기 때문에 생활의 모든 원리는 당연히 천국 적이어야 합니다. 성도의 행동원리는 말씀을 속에 들어있습니다. 사도 바울을 통하여 주신 에베소서1:1-3절 말씀을 봅시다. “그러므로 주 안에서 갇힌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부르심을 입은 부름에 합당하게 행하여,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에 합당한 행동의 원리, 즉 그리스도인의 행동원리는 겸손과 온유이며, 사랑 안에서 오래 참음으로 서로 용납하는 것입니다. 그 외에도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하나님 앞에서 효과가 있도록 하는 행동의 원리가 있습니다. 마치 자신의 몸을 불사르게 내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니듯이, 이것이 없으면 그리스도인으로서의 모든 행동이 효과를 발휘하지 못하게 됩니다. 이 시간에는 이처럼 중요한 그리스도인의 행동원리를 증거 하고자 합니다.
옛 말에, ‘호사유피 인사유명’(虎死留皮 人死留名)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는 말입니다. 사람에게 있어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명예라는 뜻입니다. 특히 정보 시대라고 하는 오늘에는 남에게 자신을 나타내고 표현하는 것이 무척이나 중요하게 인식되고 있습니다. 이처럼 할 수만 있다면 자신을 드러내고자 하는 명예심은 믿지 않는 세계뿐만 아니라, 믿음의 세계에서도 일반적인 사람의 욕망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그리스도인의 행동원리는 이러한 세상의 현상과는 거리가 멉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인의 모든 행동은 은밀하게 이루어져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즉 그리스도인은 하나님 앞에서 사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세상 사람에게 인정받으려 하지 않아야 함을 말합니다. 특히 남을 돕는 일이나, 자신의 신앙에 관한 의에 대하여는 엄격하게 적용하도록 하셨습니다. 대표적으로 본문을 포함하는 마태복음6:1-18절을 들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이 말씀을 잘 알고 있지만 실천하기가 그리 쉽던가요?
자신의 재물과 시간과 노력과 힘과 재능을 투자하는 일이 아무에게도 인정받지 못한다면 섭섭하지 않겠습니까? 아니, 아무에게 알려지기를 기대하지 말고 그렇게 투자하라면 과연 몇 사람이나 그렇게 하려고 하겠습니까?
사람들은 자신의 이력이 화려하다는 것을 과시하려고 명함에 온갖 명칭을 다 갖다 붙입니다. 어느 예비군 교육 강사의 명함에는 ‘새마을 부녀회 고문’, ‘모 동창회 회장역임’이라는 이력도 있고, 어느 교역자의 이력에는 ‘모영어학원 강사역임’이라는 명칭도 있었습니다.
얼마나 자신을 자랑하고 알리고 싶었으면 그렇겠습니까!
어떤 젊은 변호사가 개업을 했습니다. 한 사람이 그 사무실을 방문했습니다. 마침 변호사가 전화 통화를 하고 있어서 기다렸습니다. 변호사는 연신 예, 예 하면서 전화를 하고 있습니다. “예, 회장님 그런 문제는 저에게 맡겨 주십시오. 예. 요즘 좀 바쁩니다. 방문도 많고 손님들이 많아서ꀞ” 하고 한 바탕 떠들고 난 후에, 들어온 분에게 정중하게 “무슨 사건으로 오셨습니까?”라고 묻는 것입니다. 그 때 그 방문자는, “예. 전화국에서 온 기삽니다. 전화선 작업이 끝나서 전화선을 이어주려고 왔는데, 전화선이 없어도 통화가 잘 되는 것 같군요.” 라면서 전화선 단자 쪽으로 갔습니다.
사람들의 자기 과시와 자랑의 욕망은 끝이 없습니다.
남들에게 있는 것이 자기에게 없으면, 있는 척이라도 해야 직성이 풀립니다. 유명 회사 제품을 사용한다고 사람이 달라지는 것은 아닐 텐데도 마치 자신이 유명 회사의 제품만큼이나 유명해진 것처럼 여깁니다. 사람들의 이런 심리가 연예인들의 옷이나 액세서리, 말투나 태도까지 흉내를 내는 연예인 신드롬에다가, 이제는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만화나 영화 속의 인물까지 흉내를 내고 있습니다. 하지만 나타나지고 알려진다고 해서 모두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다만 주님께서 경고하시는 것은 의도적인 나타냄입니다. 이 길은 분명히 그리스도인이 가야 할 길은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의 길은 은밀한 충성의 길입니다.
성경에는 선한 일을 하고도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예컨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타셨던 나귀를 마련한 사람은 누구였을까요? 최후의 만찬을 위하여 다락방을 제공한 사람은 또 누구였을까요? 아기 예수님께 경배하기 위하여 먼 길을 찾아 온 동방 박사들의 이름은 무엇이며, 어디서 왔을까요? 5천명을 먹이기 위해서 자신의 도시락을 바친 아이는 또 누구였을까요?
그 뿐만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열 두 제자들 중에서도 거의 태반은 행적을 알 수가 없습니다. ‘다대오’로도 알려진 ‘유다’와 작은 ‘야고보’도 잘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에 ‘알려지지 않은 사도’라고 불렸습니다. 이들은 자신의 일에 충실했지만, 성경 어디에도 그들의 행적은 없습니다. 이들뿐 아니라 비교적 잘 알려져 있다고 하는 제자들에 대해서도 사실은 별로 기록 된 것이 없습니다.
이와 같이 교회의 역사도 초대교회 이래로 지금까지, 숱한 어려움 속에서도 알려지지 않은 은밀한 충성 자들에 의하여 존속해 왔습니다. 적어도 하나님 앞에서는 작은 일과 눈에 띄지 않는 은밀한 일이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의 행위에 대하여 선악 간에 심판하시고 보응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며, 또한 하나님께서는 은밀한 중에 감찰하시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마태복음16:27절에서, “인자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그 천사들과 함께 오리니 그 때에 각 사람의 행한 대로 갚으리라.”고 하셨으며, 로마서2:6-8절에서는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시되, 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에게는 영생으로 하시고, 오직 당을 지어 진리를 좇지 아니하고 불의를 좇는 자에게는 노와 분으로 하시리라.”라고 하셨습니다.
영국 런던의 워커 미술관에는 ‘콘트러’라는 화가가 그린 유명한 그림이 하나 있습니다. 그 그림은 ‘폼페이’라는 도시가 ‘베스비우스’ 화산의 폭발로 인해 그 화산재에 묻혀 전멸당하는 비참한 모습을 그린 것이었습니다. 화산재와 용암이 비와 눈처럼 폼페이 성에 내렸습니다. 사람들은 화산재와 불을 피해 성 밖으로 몰려 나갔습니다. 이들로 인해 대 환란이 야기되었습니다.
그 혼란 속에서도 성문 곁에서 묵묵히 서 있는 사람이 하나 있습니다. 그는 그 성의 문지기였습니다. 뜨거운 화산재와 불이 우박처럼 쏟아지는 그 혼란 속에서도 자신의 맡은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고 묵묵히 죽음을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 그림의 제목은 바로 '충성'이었습니다.
충성은 죽음 앞에서도 자신의 책임을 저버리지 않는, 다시 말해서 죽음을 이기는 사명감입니다. 하나님께서 정해주신 자신의 삶의 자리에서 오직 하나님을 향하여 생명을 다하는 충성스러움이 하나님의 기뻐하심을 입습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길입니다. 뿐만 아니라 은밀한 충성에는 또 다른 의미가 있습니다.
은밀한 충성의 길은 하나님 앞에서 가장 큰 섬김입니다.
어느 날, 제자들이 가버나움으로 가는 길에서 서로 다툼이 일어났습니다. 가버나움에 이른 후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물었습니다. “너희가 길에서 서로 토론한 것이 무엇이냐?”제자들은 대답하지를 못했습니다. 서로 자신이 크다고 싸웠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질서를 가르치셨습니다(막9:35). “아무든지 첫째가 되고자 하면 뭇사람의 끝이 되며, 뭇사람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다음 장에서 좀 더 자세하게 말씀하십니다. 마가복음10:43-44절을 봅시다.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아니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하나님 나라의 질서이자 그리스도인의 삶의 자세는 ‘섬김’임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하신 말씀은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입니다.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 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이 자신을 대속의 제물로 드려 죄인 된 사람을 섬기는 것이었습니다. 주님께서는 당신께서 이루셔야 할 사명의 길을 말없이 묵묵히 걸어가셨습니다. 이것이 은밀한 충성입니다. 은밀한 충성이란, 자신이 감당해야 할 사명이기 때문에 너무도 당연한 마음으로 행하는 것입니다. 그 사실을 주님은 누가복음17:7-10절에서 ‘종의 자세’로 가르치셨습니다. 10절이 결론인데 한 번 봅시다.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 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의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 할지니라.” 자신이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하면서 자랑하거나 나타내거나 할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이렇게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묵묵하고 충성스럽게 감당할 때, 하나님 앞에서 가장 아름다운 모습이며 가장 큰 섬김입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의 상급이 예비 되어 있습니다. 본문 말씀에서도 주님은 은밀한 충성에 대한 상급이 있음을 말씀하십니다.
여러분도 자랑하고 싶은 마음이나, 자신의 일을 나타내고자 하는 마음이 들 때가 있을 것입니다. 그럴 때면 지금의 내 삶이 내 것이 아니라 주님의 것이며, 종으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하는 것이라고 생각합시다. 그러면 평안하고 기쁜 마음으로 자신의 일에 충실할 수 있을 것입니다.
어느 자동차 경주 선수는 경기가 가까워지면 신경이 극도로 날카로워진다고 합니다. 그래서 경기가 있는 날이면 말을 붙일 엄두조차 낼 수 없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가 어느 시골을 방문했을 때, 늙수그레한 농부로부터 큰 깨달음을 얻었다고 합니다. 그는 자신이 그동안 너무나 어리석게 스스로를 부려먹었음을 깨달았습니다. 그의 말을 들어봅시다.
'예전에 나는 자동차 경주할 때 눈을 목표 지점에만 두고 달렸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태도를 바꾸었습니다. 나는 경주에 이기려고 경주하지 않습니다. 나는 목표 선에 눈을 두지 않고 먼저 경기에 대비해서 자동차의 기계를 점검하여 최고의 속력을 낼 수 있도록 준비를 합니다. 그리고 내가 하는 일은 자동차의 최대 속도와 최대 마력을 내게 하는 것이지요. 그런 다음 브레이크와 크러치를 잡고 내가 가진 기술을 다해서 운전하는 것입니다. 내가 이렇게 할 때 나의 기술이 다른 경주자의 기술보다 좋고 내 자동차 속력이 다른 경주자의 자동차 속력보다 더 빨리 목표 지점에 도달한다는 것을 그 농부가 가르쳐주었습니다. 나는 긴장할 필요도 없고 단지 가능한 침착하게 내 일에만 정신을 집중하면 된다는 것을 농부는 확신시켜주었습니다. 승리에 대해서 집착을 하고 염려하고 과민반응을 한다고 하여 속력을 낼 수는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주님께서 가장 기뻐하시고, 하나님 앞에서 가장 큰 섬김은 많은 일, 큰 일, 위대한 것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묵묵하고 은밀하게 충성을 다하는 것입니다.
우리, 이제 오직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하루하루 주어지는 일들에 최선을 다합시다. 그리하면 언젠가 주님 앞에 설 때에 기쁨으로 주님을 뵈올 수 있을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성경한 구절을 인용하고 마치겠습니다.
갈라디아서6:4-5절입니다. “각각 자기의 일을 살피라. 그리하면 자랑할 것이 자기에게만 있고 남에게는 있지 아니하리니, 각각 자기의 짐을 질 것임이니라.”
*** 들어가는 말
하나님의 백성인 그리스도인들은 말 그대로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기 때문에 생활의 모든 원리는 당연히 천국 적이어야 합니다. 성도의 행동원리는 말씀을 속에 들어있습니다. 사도 바울을 통하여 주신 에베소서1:1-3절 말씀을 봅시다. “그러므로 주 안에서 갇힌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부르심을 입은 부름에 합당하게 행하여,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에 합당한 행동의 원리, 즉 그리스도인의 행동원리는 겸손과 온유이며, 사랑 안에서 오래 참음으로 서로 용납하는 것입니다. 그 외에도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하나님 앞에서 효과가 있도록 하는 행동의 원리가 있습니다. 마치 자신의 몸을 불사르게 내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니듯이, 이것이 없으면 그리스도인으로서의 모든 행동이 효과를 발휘하지 못하게 됩니다. 이 시간에는 이처럼 중요한 그리스도인의 행동원리를 증거 하고자 합니다.
옛 말에, ‘호사유피 인사유명’(虎死留皮 人死留名)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는 말입니다. 사람에게 있어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명예라는 뜻입니다. 특히 정보 시대라고 하는 오늘에는 남에게 자신을 나타내고 표현하는 것이 무척이나 중요하게 인식되고 있습니다. 이처럼 할 수만 있다면 자신을 드러내고자 하는 명예심은 믿지 않는 세계뿐만 아니라, 믿음의 세계에서도 일반적인 사람의 욕망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그리스도인의 행동원리는 이러한 세상의 현상과는 거리가 멉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인의 모든 행동은 은밀하게 이루어져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즉 그리스도인은 하나님 앞에서 사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세상 사람에게 인정받으려 하지 않아야 함을 말합니다. 특히 남을 돕는 일이나, 자신의 신앙에 관한 의에 대하여는 엄격하게 적용하도록 하셨습니다. 대표적으로 본문을 포함하는 마태복음6:1-18절을 들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이 말씀을 잘 알고 있지만 실천하기가 그리 쉽던가요?
자신의 재물과 시간과 노력과 힘과 재능을 투자하는 일이 아무에게도 인정받지 못한다면 섭섭하지 않겠습니까? 아니, 아무에게 알려지기를 기대하지 말고 그렇게 투자하라면 과연 몇 사람이나 그렇게 하려고 하겠습니까?
사람들은 자신의 이력이 화려하다는 것을 과시하려고 명함에 온갖 명칭을 다 갖다 붙입니다. 어느 예비군 교육 강사의 명함에는 ‘새마을 부녀회 고문’, ‘모 동창회 회장역임’이라는 이력도 있고, 어느 교역자의 이력에는 ‘모영어학원 강사역임’이라는 명칭도 있었습니다.
얼마나 자신을 자랑하고 알리고 싶었으면 그렇겠습니까!
어떤 젊은 변호사가 개업을 했습니다. 한 사람이 그 사무실을 방문했습니다. 마침 변호사가 전화 통화를 하고 있어서 기다렸습니다. 변호사는 연신 예, 예 하면서 전화를 하고 있습니다. “예, 회장님 그런 문제는 저에게 맡겨 주십시오. 예. 요즘 좀 바쁩니다. 방문도 많고 손님들이 많아서ꀞ” 하고 한 바탕 떠들고 난 후에, 들어온 분에게 정중하게 “무슨 사건으로 오셨습니까?”라고 묻는 것입니다. 그 때 그 방문자는, “예. 전화국에서 온 기삽니다. 전화선 작업이 끝나서 전화선을 이어주려고 왔는데, 전화선이 없어도 통화가 잘 되는 것 같군요.” 라면서 전화선 단자 쪽으로 갔습니다.
사람들의 자기 과시와 자랑의 욕망은 끝이 없습니다.
남들에게 있는 것이 자기에게 없으면, 있는 척이라도 해야 직성이 풀립니다. 유명 회사 제품을 사용한다고 사람이 달라지는 것은 아닐 텐데도 마치 자신이 유명 회사의 제품만큼이나 유명해진 것처럼 여깁니다. 사람들의 이런 심리가 연예인들의 옷이나 액세서리, 말투나 태도까지 흉내를 내는 연예인 신드롬에다가, 이제는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만화나 영화 속의 인물까지 흉내를 내고 있습니다. 하지만 나타나지고 알려진다고 해서 모두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다만 주님께서 경고하시는 것은 의도적인 나타냄입니다. 이 길은 분명히 그리스도인이 가야 할 길은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의 길은 은밀한 충성의 길입니다.
성경에는 선한 일을 하고도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예컨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타셨던 나귀를 마련한 사람은 누구였을까요? 최후의 만찬을 위하여 다락방을 제공한 사람은 또 누구였을까요? 아기 예수님께 경배하기 위하여 먼 길을 찾아 온 동방 박사들의 이름은 무엇이며, 어디서 왔을까요? 5천명을 먹이기 위해서 자신의 도시락을 바친 아이는 또 누구였을까요?
그 뿐만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열 두 제자들 중에서도 거의 태반은 행적을 알 수가 없습니다. ‘다대오’로도 알려진 ‘유다’와 작은 ‘야고보’도 잘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에 ‘알려지지 않은 사도’라고 불렸습니다. 이들은 자신의 일에 충실했지만, 성경 어디에도 그들의 행적은 없습니다. 이들뿐 아니라 비교적 잘 알려져 있다고 하는 제자들에 대해서도 사실은 별로 기록 된 것이 없습니다.
이와 같이 교회의 역사도 초대교회 이래로 지금까지, 숱한 어려움 속에서도 알려지지 않은 은밀한 충성 자들에 의하여 존속해 왔습니다. 적어도 하나님 앞에서는 작은 일과 눈에 띄지 않는 은밀한 일이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의 행위에 대하여 선악 간에 심판하시고 보응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며, 또한 하나님께서는 은밀한 중에 감찰하시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마태복음16:27절에서, “인자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그 천사들과 함께 오리니 그 때에 각 사람의 행한 대로 갚으리라.”고 하셨으며, 로마서2:6-8절에서는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시되, 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에게는 영생으로 하시고, 오직 당을 지어 진리를 좇지 아니하고 불의를 좇는 자에게는 노와 분으로 하시리라.”라고 하셨습니다.
영국 런던의 워커 미술관에는 ‘콘트러’라는 화가가 그린 유명한 그림이 하나 있습니다. 그 그림은 ‘폼페이’라는 도시가 ‘베스비우스’ 화산의 폭발로 인해 그 화산재에 묻혀 전멸당하는 비참한 모습을 그린 것이었습니다. 화산재와 용암이 비와 눈처럼 폼페이 성에 내렸습니다. 사람들은 화산재와 불을 피해 성 밖으로 몰려 나갔습니다. 이들로 인해 대 환란이 야기되었습니다.
그 혼란 속에서도 성문 곁에서 묵묵히 서 있는 사람이 하나 있습니다. 그는 그 성의 문지기였습니다. 뜨거운 화산재와 불이 우박처럼 쏟아지는 그 혼란 속에서도 자신의 맡은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고 묵묵히 죽음을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 그림의 제목은 바로 '충성'이었습니다.
충성은 죽음 앞에서도 자신의 책임을 저버리지 않는, 다시 말해서 죽음을 이기는 사명감입니다. 하나님께서 정해주신 자신의 삶의 자리에서 오직 하나님을 향하여 생명을 다하는 충성스러움이 하나님의 기뻐하심을 입습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길입니다. 뿐만 아니라 은밀한 충성에는 또 다른 의미가 있습니다.
은밀한 충성의 길은 하나님 앞에서 가장 큰 섬김입니다.
어느 날, 제자들이 가버나움으로 가는 길에서 서로 다툼이 일어났습니다. 가버나움에 이른 후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물었습니다. “너희가 길에서 서로 토론한 것이 무엇이냐?”제자들은 대답하지를 못했습니다. 서로 자신이 크다고 싸웠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질서를 가르치셨습니다(막9:35). “아무든지 첫째가 되고자 하면 뭇사람의 끝이 되며, 뭇사람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다음 장에서 좀 더 자세하게 말씀하십니다. 마가복음10:43-44절을 봅시다.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아니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하나님 나라의 질서이자 그리스도인의 삶의 자세는 ‘섬김’임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하신 말씀은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입니다.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 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이 자신을 대속의 제물로 드려 죄인 된 사람을 섬기는 것이었습니다. 주님께서는 당신께서 이루셔야 할 사명의 길을 말없이 묵묵히 걸어가셨습니다. 이것이 은밀한 충성입니다. 은밀한 충성이란, 자신이 감당해야 할 사명이기 때문에 너무도 당연한 마음으로 행하는 것입니다. 그 사실을 주님은 누가복음17:7-10절에서 ‘종의 자세’로 가르치셨습니다. 10절이 결론인데 한 번 봅시다.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 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의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 할지니라.” 자신이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하면서 자랑하거나 나타내거나 할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이렇게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묵묵하고 충성스럽게 감당할 때, 하나님 앞에서 가장 아름다운 모습이며 가장 큰 섬김입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의 상급이 예비 되어 있습니다. 본문 말씀에서도 주님은 은밀한 충성에 대한 상급이 있음을 말씀하십니다.
여러분도 자랑하고 싶은 마음이나, 자신의 일을 나타내고자 하는 마음이 들 때가 있을 것입니다. 그럴 때면 지금의 내 삶이 내 것이 아니라 주님의 것이며, 종으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하는 것이라고 생각합시다. 그러면 평안하고 기쁜 마음으로 자신의 일에 충실할 수 있을 것입니다.
어느 자동차 경주 선수는 경기가 가까워지면 신경이 극도로 날카로워진다고 합니다. 그래서 경기가 있는 날이면 말을 붙일 엄두조차 낼 수 없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가 어느 시골을 방문했을 때, 늙수그레한 농부로부터 큰 깨달음을 얻었다고 합니다. 그는 자신이 그동안 너무나 어리석게 스스로를 부려먹었음을 깨달았습니다. 그의 말을 들어봅시다.
'예전에 나는 자동차 경주할 때 눈을 목표 지점에만 두고 달렸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태도를 바꾸었습니다. 나는 경주에 이기려고 경주하지 않습니다. 나는 목표 선에 눈을 두지 않고 먼저 경기에 대비해서 자동차의 기계를 점검하여 최고의 속력을 낼 수 있도록 준비를 합니다. 그리고 내가 하는 일은 자동차의 최대 속도와 최대 마력을 내게 하는 것이지요. 그런 다음 브레이크와 크러치를 잡고 내가 가진 기술을 다해서 운전하는 것입니다. 내가 이렇게 할 때 나의 기술이 다른 경주자의 기술보다 좋고 내 자동차 속력이 다른 경주자의 자동차 속력보다 더 빨리 목표 지점에 도달한다는 것을 그 농부가 가르쳐주었습니다. 나는 긴장할 필요도 없고 단지 가능한 침착하게 내 일에만 정신을 집중하면 된다는 것을 농부는 확신시켜주었습니다. 승리에 대해서 집착을 하고 염려하고 과민반응을 한다고 하여 속력을 낼 수는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주님께서 가장 기뻐하시고, 하나님 앞에서 가장 큰 섬김은 많은 일, 큰 일, 위대한 것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묵묵하고 은밀하게 충성을 다하는 것입니다.
우리, 이제 오직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하루하루 주어지는 일들에 최선을 다합시다. 그리하면 언젠가 주님 앞에 설 때에 기쁨으로 주님을 뵈올 수 있을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성경한 구절을 인용하고 마치겠습니다.
갈라디아서6:4-5절입니다. “각각 자기의 일을 살피라. 그리하면 자랑할 것이 자기에게만 있고 남에게는 있지 아니하리니, 각각 자기의 짐을 질 것임이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