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직 예수 그리스도로 사는 사람들
작성자 배의신 댓글
/ 조회: 8,051회
작성일
2002-11-30 17:41
♡♥♡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 사는 사람들 / 롬8:31-39
*** 들어가는 말
성경말씀은 모두가 사람의 생명을 위한 말씀입니다. 그 중에서도 그리스도인에게 용기를 주는 말씀들이 많이 있습니다. 담대함과 용기를 주는 말씀 중에서 본문 말씀은 절대적인 확신을 주시는 탁월한 말씀입니다. 특히 본문에서는 하나님의 사랑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강력한 근거로 제시하면서 삶의 승리를 확신케 하고 있습니다.
‘헬렌 켈러’ 여사는 볼 수 없고, 들을 수 없고, 말할 수 없는 삼중 장애를 딛고 일어선 세계적으로 유명한 저술가입니다. 헬렌 켈러 여사는 평생 두고 잊을 수 없는 은사인 ‘앤 설리반’선생님에 대하여,
“내가 만일 눈을 뜬다면 제일 먼저 설리반 선생님을 보고 싶다.”고 하면서 다음과 같이 회고했습니다.
“그 분은 나를 한 인간으로 세우셨습니다. 그것은 과학의 힘도, 철학의 힘도 아닙니다. 신념을 위해 자기 생명을 맡긴 사랑이 기적을 만든 것입니다. 맡긴다는 것은 사랑입니다.”
사랑의 탁월성에 대하여는 세상의 어느 누구도 반론을 제시하지 않을 만큼 알려져 있습니다. 사랑의 힘은 동물이든 식물이든 가리지 않고 작용합니다. 그래서 요즘은 식물을 키우는 곳에도 음악을 틀어주고 사랑을 쏟는다고 합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치료하는 ‘묘약’임에 틀림없습니다.
‘버클리’대학 연구팀이 우리를 따로 한 세 그룹의 흰쥐에게 먹이로 실험을 했습니다. 첫 번째 그룹은 우리에 한 마리만 넣었고, 홀로 먹이를 먹게 했습니다. 두 번째 그룹은 우리에 다섯 마리가 어울려 먹이를 먹게 했습니다. 세 번째 그룹은 우리에 한 마리만 넣었지만 먹이를 줄 때마다 사람이 애정을 쏟으며 직접 먹이를 주었습니다.
그 결과 첫 번째 그룹의 홀로 살던 쥐는 세포활동이 둔화된 작은 뇌를 지닌 채 6백일을 살았습니다. 두 번째 그룹은 약간 무거운 뇌로 7백일 살았으며, 세 번째 그룹은 활발한 세포활동을 보이는 무거운 뇌를 지니고 9백50일을 살았습니다.
이처럼 ‘사랑’은 어떤 무기보다 강하고, 어떤 약보다도 치료효과가 뛰어납니다. 서론으로 사랑을 예찬하는 것은 본문에서 뿐만 아니라, 지금 우리에게도 가장 강력한 힘이 되고 있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신 하나님의 사랑이며, 동시에 자신의 생명을 주신 예수님의 희생적인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1. 본문의 배경을 봅시다.
로마에 그리스도인 공동체가 생겨난 것은 아마도 오순절 날 복음을 접한 ‘로마에서 온 사람들’에 의한 것이리라 추측합니다. 사도행전 2장에는 오순절에 있었던 성령강림 사건과 성령강림으로 인한 15개 국어로‘방언’의 표적이 나타난 사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당시에 오순절을 지키려고 각 지에 흩어져 있던 유대인들이 모여들었는데, 그들이 이 방언의 표적으로 말미암아 자기들의 말로 복음을 듣게 되는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 중에는 ‘로마에서 온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사도행전2:10절에서, “…로마로부터 온 나그네 곧 유대인과 유대교에 들어온 사람들”이라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이들이 복음을 듣고 돌아가서 그리스도인 공동체가 생겨났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복음이 막 시작된 로마에는 신앙을 가르치고 지도할 사람이 없었습니다. 더욱이 기독교의 초기였으며, 이방 세력이 강력한 도시였기 때문에 기독교 신앙에 대하여 기초부터 튼튼하게 세울 필요가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유대교에서 개종한 사람들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에 율법과 복음의 차이에 대한 이해도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로마서에는 율법과 복음에 대한 설명이 많으며, 이방인에게 복음이 전해지게 된 과정까지도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하나를 더 한다면, 곧 다가오게 될 혹독한 박해와 핍박을 견딜 수 있도록 믿음의 담력과 용기를 심어야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모든 상황을 감안하셔서 본문의 말씀처럼 확신의 차원을 지나서 너무나도 강력한 믿음의 담력을 불어넣고 계십니다. 왜 이렇게 강력한 믿음의 담력과 확신에 찬 용기가 필요하겠습니까?
2.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살게 하기 위함입니다.
본문35절 전반절에서,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라고 하시며, 39절에서는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고 하십니다. 이는 세상의 어떤 힘과 세력과 환경도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성도를 떼어낼 수 없음을 말씀합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 안에 머무는 것이 중요하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면 왜 예수 그리스도 안에 머무는 것이 이처럼 중요하다고 강조하겠습니까?
첫째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자유가 있기 때문입니다.
본문 앞쪽의 8:1-2절을 봅시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고 하십니다.
우리는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과거 아브라함 때부터 하나님의 언약을 받은 유대인들이 애굽에서 종노릇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때가 되어 ‘모세’를 보내어 언약의 후손들을 광야로 불러 내셨습니다. 그리고 광야 시내 산에서 하나님께서는 유대인들과 율법으로 계약을 맺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레위기26:12절에서, “나는 너희 중에 행하여 너희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나의 백성이 될 것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이들은 하나님이 통치자가 되시는 이스라엘 나라를 이루었고, 약속의 땅으로 향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지금 우리가 사는 신약 시대의 예표가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율법이 정하는 짐승 대신에,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사람의 죄를 씻기 위한 속죄 제물로 택하셨습니다. 이는 영원한 속죄를 이루어 일평생 죄에 매여 종노릇하는 인생을 풀어서 자유롭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갈라디아서5:1절에서는,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고 하셨고, 5:13절에서는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다.”고 하셨습니다.
만일 예수 그리스도를 벗어나게 되면, 마치 물고기가 물을 벗어나는 것과 같아서 그 결과가 너무나 분명합니다. 죄의 종이 되어 물질과 쾌락과 세상의 것에 끌려 다니다가 결국은 세상과 함께 멸망하는 비참함 뿐입니다.
두 번째는 성령의 법의 지배를 받게 하기 위함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는 ‘성령의 법’이 작용을 합니다. ‘성령의 법’은 곧 ‘생명’입니다. 앞서 읽은 8:2절에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성령께서는 하나님의 뜻을 꿰뚫고 계셔서, 우리 그리스도인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뜻대로 살도록 인도하십니다. 결국 성령께서는 성도가 하나님의 뜻 안에서 마음껏 자유를 누리도록 하십니다.
그렇다면 성령의 지배를 받는 그리스도인은 무슨 일이든 해도 된다는 말입니까? 물론 해도 됩니다. 그러나 반드시 욕망을 따르는 육신의 일과 성령을 따르는 영의 일을 분별해야 합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은 하나님의 뜻에 굴복하도록 요청하게 됩니다. 그러나 육신의 일은 세상의 환경과 자신의 욕망을 따르도록 요구합니다. 이것이 영적인 싸움이며, 이 싸움에서 육신의 욕망에 지게 되면 그 결과는 죽음임을 잊지 않아야 합니다. 로마서8:12,13절을 봅시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빚진 자로되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살 것이 아니니라.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성령께서는 하나님의 사람들의 마음에 하나님의 법을 깨우쳐 주시며 인도하셔서 하나님의 사랑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하십니다. 본문37절에서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고 하셨고, 성령께서 우리를 도우시는 방법 또한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8:26-27절을 같이 읽어봅시다.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마음을 감찰하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이렇게 성령의 법의 지배를 받으며, 그리스도 예수 안에 머물게 될 때, 성도의 삶은 기쁨과 즐거움과 감사와 감격이 있는 행복한 삶을 누리게 됩니다. 뿐만 아니라 이러한 삶이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로 연결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직 그리스도로 사는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행복입니다.
3. 그러므로 담대하고 용기 있게 삽시다.
저나 여러분에게 이렇게 큰 행복이 주어져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좋은 것이 있어도 사용할 줄 모르고 누릴 줄을 모르면 아무 쓸모가 없습니다. 주변의 환경이나 삶의 상황에 매여서 마음껏 누리도록 주신 이 큰 행복을 그냥 쌓아두고만 있다면 얼마나 불행한 일입니까? 혹시 용기가 없고 자신이 없습니까? 환경과 상황을 다스리시고 섭리하시는 분은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두려워하지 말고, 염려하지 말고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행복을 누리며 전합시다.
‘토니 캄폴로’(Tony Compolo)목사의 신앙 간증록에 있는 이야기입니다. 캄폴로 목사님이 젊은 시절에 학생들의 ‘캠프 카운슬러’(신앙상담자)로 사역했다고 합니다. 한 번은 중학생들의 신앙캠프에서 뜨거운 신앙부흥의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던 일이 있었습니다.
일의 발단은 ‘빌리’라고 하는 뇌성마비 학생이었습니다. 많은 학생들이 ‘빌리’를 노리개로 삼았습니다. 온몸을 비틀면서 더듬더듬 천천히 말하는 빌리의 흉내를 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이 ‘빌리’를 저녁 기도회 인도자로 세우면서 일이 일어났습니다.
이 기도회는 매일 저녁 각 숙소에서 열리며 아이들이 인도하는데, 그 날은 아이들이 ‘빌리’를 인도자로 내세운 것입니다. ‘빌리’의 더듬는 모습을 보려고 재미로 내세운 것입니다. 기도회 시간이 되어서 빌리가 입을 열었습니다.
“예…수…님…이 나를…사랑해요… 나도…예…수…님을…사랑…해요.”
이 짧은 말을 하는 데 2-3분의 시간이 걸렸습니다. 그러나 웃는 아이는 한 명도 없었습니다. ‘빌리’의 말이 끝난 뒤에도 오랫동안 조용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날 그곳에 모인 학생들이 모두 각자가 예수를 따라 살기로 결심하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학생들의 신앙부흥을 위하여 이 캠프에서 많은 예산을 들여 유명한 운동선수와 슈퍼스타들을 초청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 슈퍼스타들이 못한 일을 신앙의 확신과 용기를 가진 뇌성마비 소년이 이룬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자유와 행복을 누리도록 하시려고 세상에 오셨습니다. 이제 이 일을 기억하고 감사하며 다시 마음을 새롭게 가다듬는 ‘대강절’을 맞이했습니다. 우리를 결코 세상의 환경과 권력과 힘에 무너지도록 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넉넉하게 이기게 하시는 주님의 사랑에 감사합시다. 그리고 우리도 그 사랑을 나눕시다.
갈라디아서5:13절에서,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 하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대로 우리의 용기 있는 사랑의 행동을 실행해 봅시다. 전도이든, 구제이든, 봉사이든, 섬김이든 어떤 형태로도 이웃에 대하여 사랑을 표현할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이번 성탄절에는 우리의 아름다운 삶을 성탄 선물로 내어놓을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 들어가는 말
성경말씀은 모두가 사람의 생명을 위한 말씀입니다. 그 중에서도 그리스도인에게 용기를 주는 말씀들이 많이 있습니다. 담대함과 용기를 주는 말씀 중에서 본문 말씀은 절대적인 확신을 주시는 탁월한 말씀입니다. 특히 본문에서는 하나님의 사랑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강력한 근거로 제시하면서 삶의 승리를 확신케 하고 있습니다.
‘헬렌 켈러’ 여사는 볼 수 없고, 들을 수 없고, 말할 수 없는 삼중 장애를 딛고 일어선 세계적으로 유명한 저술가입니다. 헬렌 켈러 여사는 평생 두고 잊을 수 없는 은사인 ‘앤 설리반’선생님에 대하여,
“내가 만일 눈을 뜬다면 제일 먼저 설리반 선생님을 보고 싶다.”고 하면서 다음과 같이 회고했습니다.
“그 분은 나를 한 인간으로 세우셨습니다. 그것은 과학의 힘도, 철학의 힘도 아닙니다. 신념을 위해 자기 생명을 맡긴 사랑이 기적을 만든 것입니다. 맡긴다는 것은 사랑입니다.”
사랑의 탁월성에 대하여는 세상의 어느 누구도 반론을 제시하지 않을 만큼 알려져 있습니다. 사랑의 힘은 동물이든 식물이든 가리지 않고 작용합니다. 그래서 요즘은 식물을 키우는 곳에도 음악을 틀어주고 사랑을 쏟는다고 합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치료하는 ‘묘약’임에 틀림없습니다.
‘버클리’대학 연구팀이 우리를 따로 한 세 그룹의 흰쥐에게 먹이로 실험을 했습니다. 첫 번째 그룹은 우리에 한 마리만 넣었고, 홀로 먹이를 먹게 했습니다. 두 번째 그룹은 우리에 다섯 마리가 어울려 먹이를 먹게 했습니다. 세 번째 그룹은 우리에 한 마리만 넣었지만 먹이를 줄 때마다 사람이 애정을 쏟으며 직접 먹이를 주었습니다.
그 결과 첫 번째 그룹의 홀로 살던 쥐는 세포활동이 둔화된 작은 뇌를 지닌 채 6백일을 살았습니다. 두 번째 그룹은 약간 무거운 뇌로 7백일 살았으며, 세 번째 그룹은 활발한 세포활동을 보이는 무거운 뇌를 지니고 9백50일을 살았습니다.
이처럼 ‘사랑’은 어떤 무기보다 강하고, 어떤 약보다도 치료효과가 뛰어납니다. 서론으로 사랑을 예찬하는 것은 본문에서 뿐만 아니라, 지금 우리에게도 가장 강력한 힘이 되고 있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신 하나님의 사랑이며, 동시에 자신의 생명을 주신 예수님의 희생적인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1. 본문의 배경을 봅시다.
로마에 그리스도인 공동체가 생겨난 것은 아마도 오순절 날 복음을 접한 ‘로마에서 온 사람들’에 의한 것이리라 추측합니다. 사도행전 2장에는 오순절에 있었던 성령강림 사건과 성령강림으로 인한 15개 국어로‘방언’의 표적이 나타난 사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당시에 오순절을 지키려고 각 지에 흩어져 있던 유대인들이 모여들었는데, 그들이 이 방언의 표적으로 말미암아 자기들의 말로 복음을 듣게 되는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 중에는 ‘로마에서 온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사도행전2:10절에서, “…로마로부터 온 나그네 곧 유대인과 유대교에 들어온 사람들”이라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이들이 복음을 듣고 돌아가서 그리스도인 공동체가 생겨났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복음이 막 시작된 로마에는 신앙을 가르치고 지도할 사람이 없었습니다. 더욱이 기독교의 초기였으며, 이방 세력이 강력한 도시였기 때문에 기독교 신앙에 대하여 기초부터 튼튼하게 세울 필요가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유대교에서 개종한 사람들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에 율법과 복음의 차이에 대한 이해도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로마서에는 율법과 복음에 대한 설명이 많으며, 이방인에게 복음이 전해지게 된 과정까지도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하나를 더 한다면, 곧 다가오게 될 혹독한 박해와 핍박을 견딜 수 있도록 믿음의 담력과 용기를 심어야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모든 상황을 감안하셔서 본문의 말씀처럼 확신의 차원을 지나서 너무나도 강력한 믿음의 담력을 불어넣고 계십니다. 왜 이렇게 강력한 믿음의 담력과 확신에 찬 용기가 필요하겠습니까?
2.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살게 하기 위함입니다.
본문35절 전반절에서,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라고 하시며, 39절에서는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고 하십니다. 이는 세상의 어떤 힘과 세력과 환경도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성도를 떼어낼 수 없음을 말씀합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 안에 머무는 것이 중요하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면 왜 예수 그리스도 안에 머무는 것이 이처럼 중요하다고 강조하겠습니까?
첫째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자유가 있기 때문입니다.
본문 앞쪽의 8:1-2절을 봅시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고 하십니다.
우리는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과거 아브라함 때부터 하나님의 언약을 받은 유대인들이 애굽에서 종노릇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때가 되어 ‘모세’를 보내어 언약의 후손들을 광야로 불러 내셨습니다. 그리고 광야 시내 산에서 하나님께서는 유대인들과 율법으로 계약을 맺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레위기26:12절에서, “나는 너희 중에 행하여 너희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나의 백성이 될 것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이들은 하나님이 통치자가 되시는 이스라엘 나라를 이루었고, 약속의 땅으로 향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지금 우리가 사는 신약 시대의 예표가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율법이 정하는 짐승 대신에,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사람의 죄를 씻기 위한 속죄 제물로 택하셨습니다. 이는 영원한 속죄를 이루어 일평생 죄에 매여 종노릇하는 인생을 풀어서 자유롭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갈라디아서5:1절에서는,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고 하셨고, 5:13절에서는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다.”고 하셨습니다.
만일 예수 그리스도를 벗어나게 되면, 마치 물고기가 물을 벗어나는 것과 같아서 그 결과가 너무나 분명합니다. 죄의 종이 되어 물질과 쾌락과 세상의 것에 끌려 다니다가 결국은 세상과 함께 멸망하는 비참함 뿐입니다.
두 번째는 성령의 법의 지배를 받게 하기 위함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는 ‘성령의 법’이 작용을 합니다. ‘성령의 법’은 곧 ‘생명’입니다. 앞서 읽은 8:2절에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성령께서는 하나님의 뜻을 꿰뚫고 계셔서, 우리 그리스도인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뜻대로 살도록 인도하십니다. 결국 성령께서는 성도가 하나님의 뜻 안에서 마음껏 자유를 누리도록 하십니다.
그렇다면 성령의 지배를 받는 그리스도인은 무슨 일이든 해도 된다는 말입니까? 물론 해도 됩니다. 그러나 반드시 욕망을 따르는 육신의 일과 성령을 따르는 영의 일을 분별해야 합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은 하나님의 뜻에 굴복하도록 요청하게 됩니다. 그러나 육신의 일은 세상의 환경과 자신의 욕망을 따르도록 요구합니다. 이것이 영적인 싸움이며, 이 싸움에서 육신의 욕망에 지게 되면 그 결과는 죽음임을 잊지 않아야 합니다. 로마서8:12,13절을 봅시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빚진 자로되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살 것이 아니니라.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성령께서는 하나님의 사람들의 마음에 하나님의 법을 깨우쳐 주시며 인도하셔서 하나님의 사랑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하십니다. 본문37절에서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고 하셨고, 성령께서 우리를 도우시는 방법 또한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8:26-27절을 같이 읽어봅시다.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마음을 감찰하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이렇게 성령의 법의 지배를 받으며, 그리스도 예수 안에 머물게 될 때, 성도의 삶은 기쁨과 즐거움과 감사와 감격이 있는 행복한 삶을 누리게 됩니다. 뿐만 아니라 이러한 삶이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로 연결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직 그리스도로 사는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행복입니다.
3. 그러므로 담대하고 용기 있게 삽시다.
저나 여러분에게 이렇게 큰 행복이 주어져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좋은 것이 있어도 사용할 줄 모르고 누릴 줄을 모르면 아무 쓸모가 없습니다. 주변의 환경이나 삶의 상황에 매여서 마음껏 누리도록 주신 이 큰 행복을 그냥 쌓아두고만 있다면 얼마나 불행한 일입니까? 혹시 용기가 없고 자신이 없습니까? 환경과 상황을 다스리시고 섭리하시는 분은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두려워하지 말고, 염려하지 말고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행복을 누리며 전합시다.
‘토니 캄폴로’(Tony Compolo)목사의 신앙 간증록에 있는 이야기입니다. 캄폴로 목사님이 젊은 시절에 학생들의 ‘캠프 카운슬러’(신앙상담자)로 사역했다고 합니다. 한 번은 중학생들의 신앙캠프에서 뜨거운 신앙부흥의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던 일이 있었습니다.
일의 발단은 ‘빌리’라고 하는 뇌성마비 학생이었습니다. 많은 학생들이 ‘빌리’를 노리개로 삼았습니다. 온몸을 비틀면서 더듬더듬 천천히 말하는 빌리의 흉내를 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이 ‘빌리’를 저녁 기도회 인도자로 세우면서 일이 일어났습니다.
이 기도회는 매일 저녁 각 숙소에서 열리며 아이들이 인도하는데, 그 날은 아이들이 ‘빌리’를 인도자로 내세운 것입니다. ‘빌리’의 더듬는 모습을 보려고 재미로 내세운 것입니다. 기도회 시간이 되어서 빌리가 입을 열었습니다.
“예…수…님…이 나를…사랑해요… 나도…예…수…님을…사랑…해요.”
이 짧은 말을 하는 데 2-3분의 시간이 걸렸습니다. 그러나 웃는 아이는 한 명도 없었습니다. ‘빌리’의 말이 끝난 뒤에도 오랫동안 조용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날 그곳에 모인 학생들이 모두 각자가 예수를 따라 살기로 결심하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학생들의 신앙부흥을 위하여 이 캠프에서 많은 예산을 들여 유명한 운동선수와 슈퍼스타들을 초청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 슈퍼스타들이 못한 일을 신앙의 확신과 용기를 가진 뇌성마비 소년이 이룬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자유와 행복을 누리도록 하시려고 세상에 오셨습니다. 이제 이 일을 기억하고 감사하며 다시 마음을 새롭게 가다듬는 ‘대강절’을 맞이했습니다. 우리를 결코 세상의 환경과 권력과 힘에 무너지도록 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넉넉하게 이기게 하시는 주님의 사랑에 감사합시다. 그리고 우리도 그 사랑을 나눕시다.
갈라디아서5:13절에서,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 하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대로 우리의 용기 있는 사랑의 행동을 실행해 봅시다. 전도이든, 구제이든, 봉사이든, 섬김이든 어떤 형태로도 이웃에 대하여 사랑을 표현할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이번 성탄절에는 우리의 아름다운 삶을 성탄 선물로 내어놓을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