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문
나를 부르신 주님의 은혜
*** 나를 부르신 주님의 은혜 / 마태복음 20:1-16
마태복음 20:1-16, “1 천국은 마치 품꾼을 얻어 포도원에 들여보내려고 이른 아침에 나간 집주인과 같으니 2 그가 하루 한 데나리온씩 품꾼들과 약속하여 포도원에 들여보내고 3 또 제삼시에 나가 보니 장터에 놀고 서 있는 사람들이 또 있는지라. 4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도 포도원에 들어가라. 내가 너희에게 상당하게 주리라.’ 하니 그들이 가고 5 제육시와 제구시에 또 나가 그와 같이 하고 6 제십일시에도 나가 보니 서 있는 사람들이 또 있는지라. 7 이르되 ‘너희는 어찌하여 종일토록 놀고 여기 서 있느냐?’ 이르되 ‘우리를 품꾼으로 쓰는 이가 없음이니이다.’ 이르되 ‘너희도 포도원에 들어가라.’ 하니라. 8 저물매 포도원 주인이 청지기에게 이르되 품꾼들을 불러 나중 온 자로부터 시작하여 먼저 온 자까지 삯을 주라 하니 9 제십일시에 온 자들이 와서 한 데나리온씩을 받거늘 10 먼저 온 자들이 와서 더 받을 줄 알았더니 그들도 한 데나리온씩 받은지라. 11 받은 후 집주인을 원망하여 이르되 12 ‘나중 온 이 사람들은 한 시간밖에 일하지 아니하였거늘 그들을 종일 수고하며 더위를 견딘 우리와 같게 하였나이다.’ 13 주인이 그 중의 한 사람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친구여 내가 네게 잘못한 것이 없노라. 네가 나와 한 데나리온의 약속을 하지 아니하였느냐? 14 네 것이나 가지고 가라. 나중 온 이 사람에게 너와 같이 주는 것이 내 뜻이니라. 15 내 것을 가지고 내 뜻대로 할 것이 아니냐? 내가 선하므로 네가 악하게 보느냐?’ 16 이와 같이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되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리라.”
** 들어가는 말
여러분은 혹시 이런 생각 해보신 적이 있으신지요?
‘하나님께서 왜 나를 세상에 보내셨을까?’ 이런 생각 말입니다. 우리는 왜 세상에 보내졌고, 무엇을 위해 살고 있겠습니까? 사람들의 이러한 생각이 곧 ‘철학’이라는 학문으로 정립되었고, 철학의 주제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유명한 고대 그리스 철학자 소크라테스는 “너 자신을 알라.”라고 했으며, 철학자들은 “사람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으로 시작합니다. 소크라테스의 명언 중 하나를 더 보면, “진리를 사랑하고 구하는 것이야말로 인간이 행복하게 사는 큰 열쇠다.”라고 했습니다. 이처럼 사람은 자신의 근본에 관하여 알고자 하는 욕망이 있습니다. 이것은 창조주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찾게 하는 열쇠와도 같습니다. 로마서 1:19-20절입니다. “이는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그들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그들에게 보이셨느니라.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 그러므로 핑계하지 못할지니라.” 우리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께서 주신 본능적인 심성을 따라 은혜를 입어 하나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하나님을 알게 된 우리는, ‘왜 하나님께서 나를 부르셨고,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라는 영적인 깊은 생각을 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생각이 우리의 삶을 하나님께로 향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알도록 구체적인 비유로 주신 말씀이 본문 말씀입니다.
※ 본문 말씀의 배경과 의미를 봅시다.
본문 말씀은 ‘포도원 품꾼 비유’라고 불리는 예수께서 하신 비유입니다. 포도원 주인이 포도원에 품꾼을 들여보내는 과정과 그들에게 품값을 지급하는 과정을 통하여 하나님 나라의 법칙을 가르치십니다. 이 비유를 하신 의도는 이렇습니다.
첫째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부르심의 이유와 목적을 나타내십니다. 본문 1절을 시작하면서 “천국은 마치 …”라고 하십니다. 주님께서는 이 비유를 통하여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께서 나를 어떻게 부르셨고,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알도록 하십니다. 두 번째는 하나님의 주권과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의 자세에 관하여 나타내십니다. 곧 하나님의 나라는 ‘먼저 된 자가 나중 되고 나중 된 자가 먼저 될 수 있음’을 통하여 부름받은 사람의 일하는 자세와 이들에 관한 하나님의 주권을 보이십니다. 그래서 부르심을 받은 이들이 끝까지 자신의 열정이 떨어지지 않도록 주의를 환기하십니다. 세 번째는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일한 모든 사람에게 반드시 보상하신다는 것입니다. 오랜 시간을 일했든지 짧은 시간을 일했든지, 냉수 한 잔을 대접한 상을 잊지 않으시는 하나님께서 반드시 상급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하여 ‘나를 부르신 주님께서, 왜 나를 부르셨는지, 내가 무엇을 해야 할지’를 돌아보아야 합니다.
※ 주님께서 왜 나를 부르셨겠습니까?
본 비유의 전개 과정인 포도원 주인이 품꾼들을 부르는 과정이 있습니다. 하루의 일과가 시작되는 오전 여섯 시를 시작으로 아홉 시와 열두 시 그리고 오후 세 시, 마지막으로 일과가 끝나기 한 시간 전인 오후 다섯 시까지 품꾼들을 농장으로 들여보냅니다. 이처럼 품꾼을 부르시는 농장 주인은 하나님이시며, 품꾼은 저와 여러분인 그리스도인들입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부르심을 받은 품꾼들입니다. 달란트 비유나 므나 비유에서 부르심의 목적을 잘 보여주십니다. 마태복음 25:14-15절입니다. “또 어떤 사람이 타국으로 갈 때 그 종들을 불러 자기 소유를 맡김과 같으니, 각각 그 재능대로 한 사람에게는 금 다섯 달란트를, 한 사람에게는 두 달란트를, 한 사람에게는 한 달란트를 주고 떠났더니” 이렇게 각 사람을 불러 각자의 재능대로 달란트를 맡긴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품꾼들을 농장으로 들여보낼 때의 장면을 자세히 보십시오. 품꾼들의 힘이나 노력이 전혀 들어있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농장 주인이 사람들이 모여 있는 장터로 찾아가서 사람들을 모아서 포도원으로 들여보냈습니다. 주인이 품꾼들을 모을 때, “장터에 놀고 있는 사람들이 또 있는지라.”라고 표현했습니다. 마지막 오후 다섯 시에는 아직도 빈둥거리고 있는 사람들을 발견하고 “너희는 어찌하여 종일토록 놀고 여기 서 있느냐?”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우리를 품꾼으로 쓰는 이가 없음이니이다.”라고 대답합니다. 이처럼 생명으로의 부르심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요한복음 15:16절에서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라고 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택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택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왜 나를 부르셨겠습니까?
먼저, 우리는 사람을 부르시는 주체를 분명하게 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능력이나 재능이나 소유나 학식 등을 평가하여 부르지 않으십니다. 부르심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에 달려있습니다. 그러므로 부르심을 받은 사람은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고린도전서 1:26-29절입니다.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로운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그러므로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로 부르심을 받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아무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오히려 나를 부르신 그 부르심의 뜻을 찾아 행하기를 힘써야 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 3:14절에서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라고 고백합니다. 우리도 주님께서 부르신 부름을 상을 위하여 나아가려면, 나를 부르신 주님의 뜻을 알아야 합니다.
요한계시록 2:24-26절을 봅시다. “두아디라에 남아 있어 이 교훈을 받지 아니하고, 소위 사탄의 깊은 것을 알지 못하는 너희에게 말하노니, 다른 짐으로 너희에게 지울 것이 없노라. 다만 너희에게 있는 것을 내가 올 때까지 굳게 잡으라. 이기는 자와 끝까지 내 일을 지키는 그에게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리니” 주님께서는 ‘두아디아 교회 성도들이 가지고 있는 것을 굳게 잡으라.’라고 하십니다. 두아디라 성도들에게 있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앞쪽의 19절을 봅시다. “내가 네 사업과 사랑과 믿음과 섬김과 인내를 아노니, 네 나중 행위가 처음 것보다 많도다.” 두아디아 교회 성도는 세상에서의 일과 신앙의 삶에서 주님께 인정받았으며, 날마다 성장하고 있었습니다. 주님께서는 ‘지금 그대로 계속 유지하면 된다.’라고 하십니다. 즉 두아디라 교회의 성도들은 주님의 뜻을 잘 따르는 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요한계시록의 일곱 교회를 보면,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다름을 봅니다. 이는 교회가 있는 사회의 환경과 당면한 상황에 따라서 주님께서 주신 일이 다름을 의미합니다. 빌라델비아 교회의 경우에는 박해가 극심한 환경에서 믿음을 지키는 것이 주님의 뜻임을 알게 합니다. 계시록 3:8절입니다. “볼지어다. 내가 네 앞에 열린 문을 두었으되 능히 닫을 사람이 없으리라.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작은 능력을 가지고서도 내 말을 지키며 내 이름을 배반하지 아니하였도다.”라고 하십니다. 이처럼, 나를 부르신 하나님의 뜻을 알려면, 내가 살고 일하는 자리와 환경을 잘 살펴야 합니다. 고린도전서 7:20절입니다. “각 사람은 부르심을 받은 그 부르심 그대로 지내라.” 그리고 24절입니다. “형제들아, 너희는 각각 부르심을 받은 그대로 하나님과 함께 거하라.”라고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부르신 부르심의 자리는 지금 내가 살고 활동하는 환경과 상황입니다.
‘쿼바디스(Quo Vadis)’라는 영화가 있었습니다. 폴란드의 노벨문학상 수상작인 ‘헨리크 시엔키에비치’의 작품입니다. 로마 황제 네로의 시대에 로마에서 벌어진 기독교 박해를 중심으로 미군 장교와 기독교인 여자와의 사랑을 다룬 내용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께 믿음으로 순종하고 담대하게 순교하는 기독 영화입니다. 마지막 장면이 사도 베드로가 로마 성도들의 권고로, 네로의 박해를 피하여 로마를 빠져나가는 장면입니다. 숲길을 따라 도망하는 베드로 앞에 예수께서 나타나셨는데, 베드로와는 반대로 로마로 향하여 가고 계셨습니다. 그때 베드로가 주님께 “쿼바디스 도미네(Quo Vadis, Domine)”라고 묻습니다. “쿼바디스”는 ‘어디로 가십니까?’라는 뜻이며, “도미네”는 ‘주님’이라는 뜻입니다. 즉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라고 물은 것입니다. 그때 예수께서 “네가 버리고 온 로마로 내가 죽으러 간다.”라고 하십니다. 그 말을 들은 베드로는 그 자리에서 엎드려 “제가 가겠습니다.”라며, 로마를 향하여 발걸음을 돌립니다. 결국, 베드로는 로마에서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순교했습니다.
베드로는 로마 성도들이 자신을 아껴서 해 주었던 말, ‘박해를 피하여 이곳을 떠나십시오. 다른 곳에서도 말씀을 전해야 하지 않겠습니까?’라는 말이 그럴듯하게 들립니다. 그러나, 어떤 일로도 하나님께서 주신 일, 살게 하신 삶의 자리를 떠나서는 안 됩니다.
열왕기상 13장에는 북이스라엘의 분열 후 첫 번째 왕이 된 여로보암 때 일어난 하나님의 징벌 예고편이 나옵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로보암의 우상 숭배를 경고하시며, 300년 후에 일어날 일에 관하여, 남 유다의 어느 선지자를 북이스라엘로 보내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선지자에게 ‘북이스라엘로 가서 여로보암에게 경고하고, 남 유다로 돌아갈 때는 왔던 길로 가지 말고, 북이스라엘 지역에서는 물이나 음식을 먹지 말라.’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런데 북 이스라엘의 벧엘에 거주하던 한 늙은 선지자가 그 사실을 알고는 자신의 미래를 위하여, 남 유다의 선지자를 불러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다.’라고 거짓말로 음식과 물을 먹도록 했습니다. 늙은 선지자의 유혹으로 하나님의 명령을 어긴 남 유다의 선지자는 사자에게 죽임을 당했습니다. 늙은 선지자는 죽은 선지자를 장사 지내주고, 자식들에게 자신이 죽으면 그 선지자의 무덤에 함께 넣어달라고 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일과 삶의 자리는 벗어나면 안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지금 내게 주신 그 삶의 자리에서 내가 해야 할 일을 찾아야 합니다. 도무지 하나님의 뜻을 찾지 못하겠다면, 하나님께 깨닫는 마음을 구하십시오. 야고보서 1:5절에서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라고 약속하십니다.
그러면, 왜 이렇게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부르심의 뜻을 굳이 찾아야 합니까?
마태복음 25:24-30절을 봅시다. “한 달란트 받았던 자는 와서 이르되 ‘주인이여, 당신은 굳은 사람이라.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을 내가 알았으므로, 두려워하여 나가서 당신의 달란트를 땅에 감추어 두었었나이다. 보소서. 당신의 것을 가지셨나이다.’ 그 주인이 대답하여 이르되 ‘악하고 게으른 종아, 나는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로 네가 알았느냐? 그러면 네가 마땅히 내 돈을 취리하는 자들에게나 맡겼다가 내가 돌아와서 내 원금과 이자를 받게 하였을 것이니라.’ 하고, 그에게서 그 한 달란트를 빼앗아 열 달란트 가진 자에게 주라. 무릇 있는 자는 받아 풍족하게 되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 이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 데로 내쫓으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리라 하니라.” 누가복음 19장에서는 ‘므나 비유’로 말씀하셨는데, 거의 같은 의미의 말씀이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부르심의 뜻을 깨닫지 못했거나, 알면서도 게을러서 또는 세상의 삶에 빠져 살다가 주어진 일을 하지 못한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판결입니다. 주님께서 나를 부르셔서 주신 생명과 재능을 주님의 뜻대로 행하지 못하여 열매가 없으면, ‘바깥 어두운 곳’으로 쫓겨납니다. ‘바깥 어두운 곳’이란, 두 번째 죽음을 의미하는 ‘불 못’을 뜻합니다. 요한계시록 20:14-15절을 봅시다. “사망과 음부도 불 못에 던져지니, 이것은 둘째 사망 곧 불 못이라.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 못에 던져지더라.” 21:8절도 봅시다. “그러나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음행하는 자들과 점술가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거짓말하는 모든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던져지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 그래서 나를 부르신 주님의 뜻을 찾아야 하고, 그 뜻을 잘 수행하여 좋은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한 가지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이렇게 주님께서 나를 부르심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라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이 비유에서 일한 시간에 관계없이 모두에게 한 달란트를 주었다는 것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하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구원의 상급임을 보여줍니다. 에베소서 2:8-9절입니다. “너희가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 우리가 감사함과 기쁨으로 주님을 섬기고 따라야 할 이유가 이것입니다. 그러므로 내게 주어진 삶의 자리, 모든 상황과 환경에 감사하며, 매일의 삶에서 하나님의 이 은혜를 잊지 않고 주님과 동행하여 하나님의 능력과 은총 가득한 삶을 이루시기를 축복합니다.
마라나-타(μαράνα-θ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