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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있어야 할 자리

작성자 늘푸른 댓글 / 조회: 1,704회 작성일 2023-06-18 21:52

*** 내가 있어야 할 자리 / 시편 1:1-6

 

시편 1:1-6, “1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2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3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리로다. 4 악인들은 그렇지 아니함이여! 오직 바람에 나는 겨와 같도다. 5 그러므로 악인들은 심판을 견디지 못하며, 죄인들이 의인들의 모임에 들지 못하리로다. 6 무릇 의인들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나, 악인들의 길은 망하리로다.

 

** 들어가는 말

 

세상의 모든 만물은 하나님께서 만드셨고, 모든 것에는 의미가 부여되어 있습니다. 즉 뜻 없이 우연히 만들어진 것은 없습니다. 이사야 48:12-13절에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야곱아, 내가 부른 이스라엘아, 내게 들으라. 나는 그니, 나는 처음이요 또 나는 마지막이라. 과연 내 손이 땅의 기초를 정하였고, 내 오른손이 하늘에 폈나니, 내가 그들을 부르면 그것들이 일제히 서느니라” 이것이 온 우주를 만드시고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절대주권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만드신 모든 생물과 사물, 모든 현상까지 각자 차지하는 자리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욥에게 말씀하시면서 “바다가 그 모태에서 터져나올 때에 문으로 그것을 가둔 자가 누구냐? 한계를 정하여 문빗장을 지르고, 이르기를 네가 여기까지 오고 더 넘어가지 못하리니 네 높은 파도가 여기서 그칠지니라.’ 하였노라. 네가 너의 날에 아침에게 명령하였느냐? 새벽에게 그 자리를 일러 주었느냐?”(욥 38:8-12)라고 하십니다. 하물며,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만물의 영장으로 만드신 사람에게 자리를 명령하지 않으셨겠습니까? 그러면, 내가 있어야 할 자리는 어디입니까? 그리고 지금 나는 내가 있어야 할 자리에 있습니까? 자리는 하나님의 사람인 우리에게는 정말 중요합니다.

 

고려 말기, 조선왕조가 태동하기 전, 이성계의 세력이 날로 커갈 때, 포은 정몽주는 쓰러져가는 고려의 운명을 다시 회복시키려고 애썼습니다. 한편 이성계는 정몽주를 회유하려고 온갖 방법을 다 썼습니다. 이성계는 ‘하여가’(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만수산 더렁이 얽어진들 어떠하리. 우리도 이같이 얽어져 백년까지 누리리라.)로 정몽주를 회유하려 했으며, 그에 대한 답으로 정몽주는 ‘단심가’(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 번 고쳐죽어 백골이 진토 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임 향한 일편단심 가실 줄이 있으랴.)로 답변했습니다. 어느 날, 이성계가 사냥하다가 낙마하여 병이 들었다는 소식을 들은 정몽주가 문병을 가기 위하여 집을 나섰습니다. 그때 팔순 가까운 정몽주의 노모가 ‘간밤의 꿈이 흉하니 가지 말라.’라며 문밖까지 따라 나와 만류한 글이 ‘경계가’라는 시조로 남아 있습니다. 그 시조를 풀이하면 이렇습니다. “까마귀들이 싸우는 골짜기에 백로야 가지 말아라. 성낸 까마귀들이 너의 새하얀 빛을 시샘할까 두렵구나. 맑은 물에 깨끗이 씻은 몸이 더러워질까 걱정되는구나.” 그런데도 길을 나선 정몽주는 돌아오는 길에 선죽교에서 이방원이 보낸 자객 조영규에게 피살되고 말았습니다.

 

우리 옛말에 “누울 자리를 봐가면서 발을 뻗어라.”라고 했습니다. 이는 사람이 자신의 머물 자리가 어디인지 잘 살펴야 한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오늘 우리는 매일 매 순간이 선택의 연속이며, 자신의 선택에 의하여 그 자리에 머물게 됩니다. 특히 우리 그리스도인은 자신이 머무는 자리가 중요합니다. 그런데 그 머무는 삶의 자리가 자신의 생명을 좌우할 수 있는 중요한 선택 요소입니다.

 

※ 내가 있어야 할 자리란 무엇을 의미합니까?

 

오늘 본문인 시편 첫 편은 복 있는 사람이 있어야 할 자리를 보여줍니다. 이러한 사람이 머무는 자리는 자신의 삶을 경영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환경입니다. 삶의 경영이란 자신에게 주어진 생명, 시간, 건강, 재능, 물질 등을 사용하는 행위를 말합니다. 사람이 격에 맞지 않는 일을 할 때면 흔히 “이름값 좀 해라.”, “덩치값 좀 해라.”, “수준 맞게 놀아라.” 등으로 핀잔을 줍니다. 이는 ‘자신의 신분이나 이름이나 능력에 걸맞은 일을 하라.’라는 충고입니다. 잠언 25:11절에서는 “경우에 합당한 말은 아로새긴 은쟁반에 금사과니라.”라고 했습니다. 즉 ‘그 자리에 알맞은 말, 신분이나 이름에 합당한 행동은 최고의 아름다움이 된다.’라는 의미입니다. 이처럼, 자신이 있어야 할 자리란, ‘자기 신분이나 이름에 합당한 생활’이라고 보아도 무방합니다. 그래서 본문 1절에서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라고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 만물이 각자 있어야 할 자리에 머물도록 명령하셨습니다. 이것을 전도서 3:11절에서 이렇게 표현합니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들에게는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의 하시는 일의 시종을 사람으로 측량할 수 없게 하셨도다.” 즉 하나님께서는 모든 피조물이 조화롭도록 때와 자리를 배정하셨습니다. 특히, 사람이 있어야 할 자리는 “영원을 사모하는 자리”라고 하십니다. 영원을 사모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아는 것이며, 하나님을 섬기고 따르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7:3절에서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라고 하십니다. 본문 2절에서는,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라고 하시며, 복 있는 사람의 자리가 하나님의 말씀 대로 사는 삶이라고 하십니다. 로마서 2:6-8절을 봅시다.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시되, 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에게는 영생으로 하시고, 오직 당을 지어 진리를 따르지 아니하고 불의를 따르는 자에게는 진노와 분노로 하시리라.” 우리는 악인들의 자리에 함께 할 수도 있고, 의인들의 자리에 함께 할 수도 있으며, 영생의 상급을 받는 자리에 있을 수도 있고, 진노와 분노를 받는 자리에 있을 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내가 머무는 자리란, 내가 생활하고, 활동하는 생활의 현장입니다.

 

내가 머무는 자리가 중요한 이유는 우리의 행동과 행위를 하나님께서 살피시기 때문입니다. ‘나는 아무 짓도 하지 않고, 그냥 함께 있을 뿐인데’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6:14-16상반절입니다.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함께 메지 말라.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하며, 빛과 어둠이 어찌 사귀며,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어찌 조화되며,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어찌 상관하며,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찌 일치가 되리요. 우리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성전이라.” 그러면, 그리스도인은 믿지 않는 세상 사람과는 상대도 하지 말라는 말입니까? 아닙니다. 고린도전서 5:10절을 봅시다. “이 말은 이 세상의 음행하는 자들이나 탐하는 자들이나 속여 빼앗는 자들이나 우상숭배 하는 자들을 도무지 사귀지 말라 하는 것이 아니니, 만일 그리하려면 너희가 세상 밖으로 나가야 할 것이라.” 이 말씀에서 ‘멍에를 함께 멘다.’ ‘함께 한다.’ ‘사귄다.’ ‘상관한다.’ ‘일치된다.’라는 말들은 ‘뜻을 같이한다.’라는 의미입니다. 즉, 세상 사람들과 차를 마시고, 음식을 먹고, 친구가 되는 것은 아무 흠이 없습니다. 다만, 그들과 영의 생명을 손상되게 하는 뜻을 같이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역대하 19:2절입니다. “하나니의 아들 선견자 예후가 나가서 여호사밧 왕을 맞아 이르되, 왕이 악한 자를 돕고 여호와를 미워하는 자들을 사랑하는 것이 옳으니이까? 그러므로 여호와께로부터 진노하심이 왕에게 임하리이다.” 하나님을 경외했던 남 유다의 여호사밧 왕이, 우상 숭배자인 북이스라엘의 아합 왕과 연합하여 아람 나라와 전쟁하고 돌아오는 길이었습니다. 이처럼, 우리 그리스도인이 동맹을 맺든지, 동업하든지, 결혼하든지, 사업을 하든지, 뜻을 같이하는 자리가 내가 머무는 자리입니다. 그렇다면, 내가 있어야 할 자리는 어디입니까?

 

※ 내가 있어야 할 자리는 어디입니까?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탄이 활동하는 무대입니다. 사탄이 세상의 주인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마지막 때까지 활동하도록 허용하신 것입니다. 악한 영들이 활동하지만, 여전히 세상의 주인은 하나님이십니다. 다만, 악한 영들이 자신에게 허용된 권세를 사용하여, 할 수만 있으면 하나님의 자녀들까지라도 유혹하려고 합니다. 마가복음 13:22절에서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서 이적과 기사를 행하여,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을 미혹하려 하리라.” 예수께서 사탄에게 받으셨던 세 가지 시험을 기억해 보십시오. 사탄은 예수님까지도 유혹했습니다. 이처럼 사탄은 세상의 부귀영화를 보여주면서, 그것으로 사람들의 온 마음과 관심을 빼앗습니다. 이 사실을 에베소서 2:2절에서 이렇게 표현합니다. “그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마치 나방이 불로 뛰어들 듯이 사람들은 이 달콤한 유혹을 뿌리치지 못하고 세상의 부귀영화에 빠져듭니다. 사실 이 세상의 즐거움과 부귀영화와 권세는 뿌리치기 힘든 유혹입니다. 이 유혹이란 것은 ‘하나님이 주신 자신의 자리를 벗어나도록 하는 것’입니다. 악한 영들도 하나님께서 정하신 자리를 떠나서 하나님을 배반한 천사이기 때문입니다. 유다서 1:6절입니다. “또 자기 지위를 지키지 아니하고 자기 처소를 떠난 천사들을 큰 날의 심판까지 영원한 결박으로 흑암에 가두셨으며” 이들은 자신이 의의 일군인 것처럼 가장하고 사람에게 접근합니다. 고린도후서 11:13-15절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거짓 사도요 속이는 일꾼이니, 자기를 그리스도의 사도로 가장하는 자들이니라. 이것이 이상한 일이 아니니라. 사탄도 자기를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나니, 그러므로 사탄의 일꾼들도 자기를 의의 일꾼으로 가장하는 것이, 또한 대단한 일이 아니니라.” 이처럼, 마지막 때가 가까울수록 악한 영들의 미혹과 훼방이 극심하여 그리스도인들이 자기 자리를 찾고 지키는 일이 어려워집니다. 그래서 사업 파트너를 잘 못 만나서 파산하는 경우도 허다합니다.

 

노아는 100년 동안 산에서 방주를 만들면서 하나님의 심판을 경고했지만, 사람들은 무시했습니다. 그리고 소돔과 고모라가 멸망 당하던 바로 그 순간까지 사람들은 먹고 마시고 즐기면서, 롯의 경고를 농담으로 여겼습니다. 이제 다가올 마지막 때에도 다르지 않습니다. 요한계시록 22:10-12절입니다. “또 내게 말하되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을 인봉하지 말라. 때가 가까우니라. 불의를 행하는 자는 그대로 불의를 행하고, 더러운 자는 그대로 더럽고, 의로운 자는 그대로 의를 행하고, 거룩한 자는 그대로 거룩하게 하라.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가 행한 대로 갚아 주리라.” 지금 우리 시대에도 그러하지만 앞으로 주님의 재림이 가까울수록 이러한 현상은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날 것입니다. 이러할 때, 내가 있어야 할 자리는 어디입니까?

 

이탈리아의 성악가인 ‘루치아노 파바로티(Luciano Pavarotti, 1935-2007)’는 플라시도 도밍고, 호세 카레라스와 함께 The three tenors(테너 삼인방)라 불렸습니다. 어린 시절의 그의 가족은 가난했습니다. 아버지 페르난도는 빵을 굽는 사람이었고, 어머니 아델레 벤투리 파바로티는 시가(Cigar) 공장에서 일했습니다. 자상하셨던 아버지가 아들에게 음악의 아름다운 세상을 가르쳐 주었고, 목소리를 개발하도록 권유했습니다. “루치아노야. 열심히 공부해야 한다. 더욱 열심히 연습하면 그때는 혹시…” 루치아노는 사범대학에 입학했고, 졸업하자 진로에 대하여 고민이 되어 아버지께 ‘선생이 되어야 할지! 음악가가 되어야 할지!’ 조언을 구했습니다. 그때 아버지는 “루치아노야, 두 의자에 앉으려고 하면, 그 사이로 떨어지고 말 것이다. 너는 한 의자를 선택해야 한다.” 루치아노는 음악을 선택했고, 처음으로 무대에 등장하기까지 7년 동안의 노력과 좌절이 있었습니다. 그 후 메트로폴리탄 오페라에 도달하기까지는 또 7년이 걸렸습니다. 그는 이렇게 회고했습니다.

“나에게는 하나님께서 좋은 목소리의 복을 주셨습니다. 나 자신은 이 좋은 목소리로 헌신하겠다고 결심함으로써 하나님을 기쁘게 하였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생각해 보니 벽돌을 쌓는 일이나, 못을 똑바로 박는 일이나, 책을 쓰는 일이나 무슨 일이든지 우리가 하려고 선택했으면, 그에 대해서 우리 자신을 바치는 것, 그것이 열쇠입니다. 한 의자를 선택하십시오.”

 

줏대가 없는 사람들을 위한 주제가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나훈아가 부른 ‘이정표 없는 거리’라는 노래입니다. “이리 가면 고향이요. 저리 가면 타향인데, 이정표 없는 거리 헤매 도는 삼거리, 이리 갈까 저리 갈까 차라리 돌아갈까 / 바로 가면 경상도길 돌아가면 전라도길, 이정표 없는 거리, 저리 가면 충청도길, 와도 그만 가도 그만 반겨줄 사람 없고” 하나님의 사람들이 세상을 따라가면 이렇게 줏대 없는 사람이 됩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이 있어야 할 자리는 하나님이 부르신 부르심의 자리입니다. 고린도전서 7:17절입니다. “오직 주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 주신 대로, 하나님이 각 사람을 부르신 그대로 행하라. 내가 모든 교회에서 이와 같이 명하노라. 23-24, 너희는 값으로 사신 것이니, 사람들의 종이 되지 말라. 형제들아, 너희는 각각 부르심을 받은 그대로 하나님과 함께 거하라.” 내가 있어야 할 자리는 ‘하나님께서 나를 부르신 자리’입니다. 그 자리가 어디입니까? 이 자리는 각자 자신이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찾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인도하시는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이 자리를 알기 위하여 매일 매 순간 기도와 말씀으로 주님과 함께해야 합니다. 내가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생활이면, 해야 할 일과 만나야 할 사람, 머물러야 할 자리를 성령께서 인도하십니다. 이것을 위하여 매일 아침 모든 일을 시작하기 전에 주인이신 하나님께 기도로 묻고 아뢰어야 합니다. 내가 주님 안에 있으면, 주께서 마땅히 행할 길로 인도하십니다.

 

우리의 현명한 선택을 위하여 본문 3-6절에서 말씀하십니다.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리로다. 4 악인들은 그렇지 아니함이여! 오직 바람에 나는 겨와 같도다. 5 그러므로 악인들은 심판을 견디지 못하며, 죄인들이 의인들의 모임에 들지 못하리로다. 6 무릇 의인들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나, 악인들의 길은 망하리로다.” 이 말씀에서 하나님을 섬기고 따르는 자리에 대한 아름다운 약속을 보여주십니다. 특히 “시냇가에 심은 나무”라는 표현은 ‘세상의 힘들고 고달픈 환경 속에서의 풍성함’을 의미합니다. 이 자리가 복 있는 사람의 자리입니다. 이 삶의 자리는 때로는 좁고, 험하고, 힘이 들기도 하지만,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형통함이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로마서 2:6-7절에서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시되, 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에게는 영생으로 하시고”라고 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은 사람이 있어야 할 자리는 ‘하나님을 즐거워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면서 순종하는 자리’입니다. 상황과 환경을 따라 변하는 마음이 아니라, 하나님을 바라보는 올곧은 마음으로 약속을 자리를 지키시기를 축복합니다.

 

마라나-타(μαράνα-θ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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