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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담대한 믿음이 필요합니다.

작성자 늘푸른 댓글 / 조회: 1,349회 작성일 2023-05-30 20:09

*** 지금은 담대한 믿음이 필요합니다. / 마가복음 9:14-24

 

마가복음 9:14-24, “14 이에 그들이 제자들에게 와서 보니 큰 무리가 그들을 둘러싸고 서기관들이 그들과 더불어 변론하고 있더라. 15 온 무리가 곧 예수를 보고 매우 놀라며 달려와 문안하거늘 16 예수께서 물으시되 너희가 무엇을 그들과 변론하느냐? 17 무리 중의 하나가 대답하되 선생님, 말 못 하게 귀신들린 내 아들을 선생님께 데려왔나이다. 18 귀신이 어디서든지 그를 잡으면 거꾸러져 거품을 흘리며 이를 갈며 그리고 파리해지는지라. 내가 선생의 제자들에게 내쫓아 달라 하였으나 그들이 능히 하지 못하더이다.’ 19 대답하여 이르시되 믿음이 없는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얼마나 너희에게 참으리요. 그를 내게로 데려오라.’ 하시매 20 이에 데리고 오니 귀신이 예수를 보고 곧 그 아이로 심히 경련을 일으키게 하는지라. 그가 땅에 엎드러져 구르며 거품을 흘리더라. 21 예수께서 그 아버지에게 물으시되 언제부터 이렇게 되었느냐?하시니 이르되 어릴 때부터니이다. 22 귀신이 그를 죽이려고 불과 물에 자주 던졌나이다. 그러나 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도와주옵소서.’ 23 예수께서 이르시되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 하시니 24 곧 그 아이의 아버지가 소리를 질러 이르되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주소서.’ 하더라.

 

** 들어가는 말

 

이 본문 말씀은 자주 거론하는 말씀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시대 사람들의 믿음을 보는 것 같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 여러 주제로 말씀을 드렸었는데, 이 시간에는 ‘담대한 믿음’ 즉 ‘믿음의 자신감’을 중심으로 살펴보겠습니다. 지금의 많은 그리스도인이 예수 그리스도를 구원 주(主)로 믿고, 그 능력도 믿지만, 자기 삶에서는 영적인 능력을 이루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그 이유를 히브리서 4:2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들과 같이 우리도 복음 전함을 받은 자이나, 그 들은바 그 말씀이 그들에게 유익하지 못한 것은, 듣는 자가 믿음과 결부시키지 아니함이라.” 즉 말씀을 들었지만, 생활에서 믿음으로 순종하지 않았기 때문에 능력이 나타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영적인 능력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생활에서 실천하는 것, 즉 순종할 때 나타납니다.

 

폐결핵의 악화로 시한부 인생을 선고받은 젊은이가 있었습니다. 20대 초반의 이 젊은이는 극도의 절망감에 몸부림치며 기도했습니다. 그러다가, “그래, 죽는 시간을 기다리는 것보다 남은 시간을 하나님께 바치자.”라고 생각을 바꾸었습니다. 그는 즉시 빈민굴에 들어가서 가난한 사람들과 소외된 사람들을 위해 헌신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 청년은 그 후로 50여 년을 더 살았습니다. 바로 ‘사선을 넘어서’라는 글을 써서 수많은 사람에게 삶의 고귀함과 희망을 깨우쳐 준 일본의 성자라고 불리는 ‘가가와 도요히코’의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본문에 등장하는 귀신 들린 아이 아버지처럼, 우리 주변의 환경이나 상황으로 인하여 하나님을 의심하는 불신의 죄를 범하게 됩니다. 하지만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은, 하나님을 향한 신앙은 전적으로 주관적이라는 것입니다. 즉 다른 사람이나 환경, 상황에 의하여 흔들려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주시는 확신을 따라서 믿음으로 순종하는 것이 생명의 길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지금 내가 담대한 믿음으로 나아가려면 무엇이 필요하겠습니까?

 

※ 본문 말씀의 배경과 의미를 봅시다.

 

예수께서 떡 일곱으로 사천 명을 먹이신 큰 이적을 행하시고, 십자가에서의 죽음과 부활, 제자의 길을 가르치셨습니다. 그 후, 우리가 ‘변화산 사건’이라고 부르는 주님의 영광스러운 모습을 세 명의 제자들에게 보이셨습니다. 이 시간의 이야기는 바로 변화산 사건과 연관된 이적의 이야기입니다. 예수께서 아홉 명의 제자들을 산 아래에 남겨두시고,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시고 산에 오르셨습니다. 그곳에서 예수님은 모세와 엘리야를 만나셨고, 예수님의 죽음에 관하여 대화(눅 9:31)하셨습니다. 세 명의 제자들은 그 광경이 어찌나 황홀했던지 정신이 혼미했습니다. 베드로는 그 혼미한 중에 ‘여기에 초막 셋을 지어 살았으면 좋겠다.’라고 까지 말했습니다. 이렇게 산 위에서는 주님의 영광스러움이 드러나는 동안 산 아래에서는 곤혹스러운 장면이 펼쳐지고 있었습니다.

 

어떤 귀신들린 아이를 데리고 온 사람이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귀신을 쫓아내 달라.’라고 요청했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아무 능력도 행할 수가 없었습니다. 모여든 수많은 사람이 웅성거리며 무능한 제자들과 논쟁을 하고 있었습니다. 예수께서 산에서 내려오셔서 제자들에게 왔을 때, 무리가 예수께로 몰려들었습니다. 예수께서는 “너희가 무엇을 그들과 변론하느냐?”라고 물으셨습니다. 그때 귀신들린 아들을 데려온 사람이 자초지종을 설명했습니다. 예수께서는 아이의 상황을 물으셨습니다. 아이의 아버지는 아이 병의 심각성을 설명하고는 예수께 ‘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도와주옵소서.’라고 반신반의로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예수께서는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라고 아이 아버지의 믿음 없음을 나무라셨습니다. 그러자 아이 아버지는 즉시 다급하게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주소서.”라고 소리 질렀습니다. 예수께서는 아이를 고쳐 주셨습니다.

 

장면이 바뀌어, 예수께서 제자들과 집에 왔습니다. 제자들은 예수께 “우리는 어찌하여 능히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였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예수께서는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종류가 나갈 수 없느니라.”라고 제자들의 무능력 원인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이러한 모습은 지금 우리 세대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을 믿는다고는 하지만 주님이 이루시는 능력을 체험하지도 못하고, 나 자신이 능력 있는 주님의 일군도 되지 못한 경우가 너무나 많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넘쳐나는데 성도들은 능력이 없습니다. 상황이 이러하니 악한 영의 세력들이 교회를 위협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 세대를 이기고, 악한 영의 세력을 무너뜨리는 길은 하나님의 능력을 입는 길뿐입니다. 이 시간에는 이 길을 찾아봅시다.

 

※ 담대한 믿음의 길은 하나님을 알고 순종하는 것입니다.

 

오늘의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의 삶에 대한 용기와 담대함, 즉 영적인 자신감을 잃고 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능력의 원천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모시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삶의 능력에 대하여는 세상의 어떤 것도 따를 수가 없습니다. 이 사실을 우리에게 깨우치시려고 예수께서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라고 하시면서, 성도들 역시 이미 세상을 이겼음을 선언하셨습니다. 그래서 히브리서에서는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무장한 사람을 가리켜,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의 제자들이나, 지금의 성도들이 무능하다 못해, 세상을 두려워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두려움이라는 것은, 무의식적인 불신의 표현입니다. 요한일서 4:18절에서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라고 하시며, 요한계시록 21:8절에서는 “그러나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음행하는 자들과 점술가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거짓말하는 모든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던져지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라고 하십니다. 두 구절 모두 ‘두려움’에 관하여 심각하게 경고하십니다.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으며’ ‘두려워하는 자는 둘째 사망에 이르는 첫 번째 원인’이라고 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경외하며 진정으로 사랑해야 합니다. 혹시, 여러분은 하나님께 경외와 사랑을 어떻게 표현합니까? ‘내 마음 아시죠?’ 이렇게 하지는 않습니까?

 

왜 이렇게 사랑 표현을 해야 하겠습니까?

이런 사랑의 표현을 통하여 하나님을 더욱 가까이하게 되고, 하나님을 더 깊이 알게 되기 때문입니다. 부부나, 부모 자녀 사이나, 형제 사이에도 사랑의 마음이 많아질수록, 관심도 많아지고 더 깊이 알게 됩니다. 그래서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쫓는다.”라고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을 더욱 깊이 알아 갈수록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한없으신 사랑을 알게 됩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되면, 하나님이 두려운 분이 아니라, 그 사랑에 감격하며 기대고 싶어집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제자들은 늘 주님과 함께했지만, 주님을 잘 알지 못했습니다. 예수께서 갈릴리 호수를 항해하실 때, 바람과 물결을 잔잔하게 하시자 제자들이 이렇게 반응했습니다. 마가복음 4:41절입니다. “그들이 심히 두려워하여 서로 말하되 그가 누구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가?하였더라.” 본문의 제자들도 마찬가지로 예수님을 알지 못했기에 무능했습니다. 또 한 사람, 귀신들린 아이의 아버지도 예수님을 알지 못하여 “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도와주옵소서.”라고 했던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을 알지 못하고, 하나님 아버지를 알지 못하면 우리는 세상에서 담대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게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이미 제자들에게 더러운 귀신을 제어할 수 있는 능력을 주셨고, 제자들은 그 능력을 체험했다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0:1절(막 6:7)에서, “예수께서 그의 열두 제자를 부르사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는 권능을 주시니라.”라고 하셨고, 누가복음 10:17절에서는 “칠십 인이 기뻐 돌아와 이르되, 주여, 주의 이름이면 귀신들도 우리에게 항복하더이다.”라고 경험을 고백했습니다. 그때 예수께서 19절에서 “내가 너희에게 뱀과 전갈을 밟으며, 원수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 권능을 주었으니 너희를 해칠 자가 결코 없으리라.”라고 하셨습니다. 이처럼, 제자들은 능력을 부여받았고, 또 능력을 경험하기도 했는데도 왜 귀신을 제어하지 못했겠습니까? 그 원인을 본문과 병행구절인 마태복음에서는 17:20절에서, “너희의 믿음이 작은 까닭이니라.”라고, 작은 믿음을 원인으로 지적하셨고, 본문에서는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종류가 나갈 수 없느니라.”라고, 제자들의 기도 부재가 원인임을 지적하셨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아이의 아버지에게는,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라고 하심으로써, 역시 의심과 믿음의 부재를 원인으로 꼽으셨습니다. 그러면, 지금의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에게도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주셨던 능력을 보장하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도 별수 없이 예수님의 제자들처럼 무능할 때가 더 많습니다. 원인이 무엇입니까?

 

아마존 밀림에서는 나무를 벌목하면 강물에 띄워서 하류로 보냅니다. 하류에서는 떠내려오는 원목을 공장으로 이동하고 가공하여 상품을 만듭니다. 그런데 떠내려가던 원목들이 종종 얽히곤 합니다. 물을 따라 떠내려가다가 진로에 굴곡이 생기면 긴 나무들이 엉켜서 멈춰버립니다. 하지만 벌목공들은 전혀 걱정하지 않습니다. 뒤엉켜 있는 나무 중에서 중요한 위치를 막고 있는 나무 하나만 건드려 주면 다시 순조롭게 흘러가기 때문입니다. 뒤엉킨 수많은 나무를 움직이게 하는 단 하나의 나무, 이것을 ‘킹 핀(King pin)’이라고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에도 킹 핀(King Pin)이 있습니다. 순종입니다. 믿음도 좋고, 예배와 섬김과 봉사 무엇 하나 나무랄 것 없는 신앙의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순종이 없으면 엉켜버린 나뭇더미와 같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불순종은 곧 불신앙(不信仰)이며, 파멸의 지름길입니다. 사무엘상 15:22절에서 “사무엘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의 목소리를 청종하는 것을 좋아하심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예수께서 마태복음 7:21절에서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라고 하십니다. 아무리 작은 능력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께 순종할 때, 우리는 담대하게 되며, 하나님의 능력을 이루는 통로가 됩니다.

 

그리고 또 하나, ‘기도’가 필요합니다.

‘기도’는 ‘주님과의 온라인(on line/연결된 상태)상태’입니다. 즉 주님과의 교제 중임을 나타내는 표시입니다. 그래서 기도는 여러 형태를 가지게 됩니다. 때로는 잔잔하게, 때로는 격렬하게, 묵상으로 또는 부르짖음으로 하며, 시간과 장소에 구애됨도 없고, 일할 때나 길을 갈 때나 어떤 때를 막론하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함으로 하나님을 더 깊이 알게 되고, 하나님을 알므로 하나님께 순종하게 됩니다. 그리고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께 사랑을 고백할 수 있고, 하나님의 사랑을 확인하게 됩니다. 지금의 우리 현실은 이러한 담대한 믿음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주님 앞에 두려움 없이 서도록 사랑으로 순종하며, 기도로 교통하여 하나님의 사랑과 능력 안에서 살아가시기를 축복합니다.

 

마라나-타(μαράνα-θ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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