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문
기다림과 인내로 얻는 열매 2
*** 기다림과 인내로 얻는 열매 2 / 야고보서 5:7-11
야고보서 5:7-11, “7 그러므로 형제들아, 주께서 강림하시기까지 길이 참으라. 보라. 농부가 땅에서 나는 귀한 열매를 바라고 길이 참아 이른 비와 늦은 비를 기다리나니 8 너희도 길이 참고 마음을 굳건하게 하라. 주의 강림이 가까우니라. 9 형제들아, 서로 원망하지 말라. 그리하여야 심판을 면하리라. 보라. 심판 주가 문밖에 서 계시느라. 10 형제들아, 주의 이름으로 말한 선지자들을 고난과 오래 참음의 본으로 삼으라. 11 보라. 인내하는 자를 우리가 복되다 하나니 너희가 욥의 인내를 들었고, 주께서 주신 결말을 보았거니와 주는 가장 자비하시고 긍휼히 여기시는 이시니라.”
※ 들어가는 말
이 본문으로 지금까지 말씀을 전한 것이 4-5편이 됩니다. 지난 2011년에 전했던 말씀에는 ‘기다림과 인내로 얻는 열매’라는 제목이 있습니다. 이 말씀을 자주 거론하는 이유는 지금 우리가 사는 시대는 반드시 기다림과 인내가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제목을 ‘기다림과 인내로 얻는 열매 2’라고 2탄으로 표했습니다. 기다림과 인내는 성공적인 인생을 위해서도 있어야 하지만, 우리 그리스도인에게는 너무도 중요한 마음 경영입니다. 왜냐하면, 기다리지 못해 낭패를 겪는 사람이 많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도 종말의 징조에 관하여 말씀하시면서 “너희의 인내로 너희 영혼을 얻으리라.”라고 하셨습니다. 앞으로 다가올 환난의 때에는 기다림과 인내를 시험하는 일들이 많이 일어날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직은 시간이 있을 때 나 자신을 연단하여, 주님이 다시 오실 때까지 견딜 기다림과 인내를 연습해야 합니다.
※ 본문 말씀의 내용과 의미를 봅시다.
본문 앞쪽 1-6절에는 의인을 핍박하는 사악한 부자들에 대하여 신랄한 경고로 말씀하십니다. 이어지는 본문 말씀에서는 고난받는 하나님의 백성을 위한 위로의 말씀이 들어 있습니다. 말씀의 내용은 ‘예수님의 임박한 재림을 기다리며, 모든 생활과 환경에서 끈기 있게 참아야 한다.’라는 것입니다. 인내해야 하는 사람의 실례로서, 땅에서 나는 귀한 열매를 바라는 농부의 경우를 예로 듭니다. 팔레스타인에서는 이른 비가 농작물을 심은 다음인 10월~11월에 오고, 늦은 비는 그것이 무르익을 때인 4월~5월에 옵니다. 이처럼 이른 비와 늦은 비는 농작물이 잘되기 위해 꼭 필요했습니다. 그러나 사람이 어려움을 만나면 긴장하게 되고, 감정이 민감하게 되어 서로 불평하고 원망하기 쉽습니다. 그래서 이어지는 경고로 “서로 원망하지 말라.”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이런 원망은 세상의 주인이신 하나님께 대한 것이며, 생명이 달린 심각한 죄에 빠지게 하기 때문입니다. 사도들이 처음 복음을 전하며, 임박한 그리스도의 재림을 선포했을 때, 초대교회 성도들은 큰 소망을 안고 신앙에 열중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재림이 계속 지연되자 성도들의 신앙이 시들해지기 시작했고, 개중에는 형제를 원망하는 자들도 생겨났습니다. 그래서 야고보 사도는 성도들의 조급함을 꾸짖으며 ‘주의 재림을 기다리는 자들은 인내함으로 기다려야 한다.’라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그 인내의 본으로서 농부와 구약의 선지자들과 의인 욥을 소개합니다. 예수께서 세상에 오셨을 때가 종말의 시작이었는데, 지금은 종말의 마지막 부분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므로 지금 우리에게는 그 어느 때보다 준비된 기다림과 인내가 필요합니다.
※ 기다림과 인내가 왜 필요합니까?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기다림과 인내가 필요한 이유를 가장 잘 나타낸 말씀이 히브리서 10:36-39절입니다. “너희에게 인내가 필요함은 너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약속하신 것을 받기 위함이라. ‘잠시 잠깐 후면 오실 이가 오시리니 지체하지 아니하시리라.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또한,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우리는 뒤로 물러가 멸망할 자가 아니요 오직 영혼을 구원함에 이르는 믿음을 가진 자니라.” 인내가 필요한 이유를 ‘하나님의 약속을 받기 위함이라.’라고 하십니다. 예컨대, 우리가 직장에서 힘들고 어려움을 견디면서 일하는 이유가 보상을 기대하는 것과도 같습니다. 우리가 영혼의 구원을 위하여 믿음으로 살며, 수고롭게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여 행하는 것은, 영원한 생명의 약속을 받기 위함입니다. 만일 이러한 보상이나 약속이 없다면 우리가 주님의 뜻을 따라갈 이유가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요한복음 14:1-3절에서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라고 하십니다. 우리가 기다리는 것이, 바로 이 약속입니다.
그런데 기다림과 인내가 의미하는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그것은 ‘준비’입니다. 기다림과 인내는 마음으로 생각하는 것이나, 아무런 준비 없이 무작정 기다린다면 낭패를 피할 수가 없습니다. 노아는 하나님께서 세상의 죄를 홍수로 심판하겠다는 말씀을 믿고, 산 중턱에서 100년 동안 배를 만들었습니다. 그 백 년 동안 사람들로부터 얼마나 많은 조롱과 비웃음을 당했겠습니까! 그리고 본문에서 말씀하는 욥은 사탄이 시기하여 하나님께 참소하는 바람에 모든 재산과 자녀들, 그리고 자기 건강까지 모두 잃어버렸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자기 도움을 받던 사람들까지도 욥을 비웃으며 조롱하고 놀렸습니다. 욥기 30:9-10절입니다. “이제는 그들이 나를 노래로 조롱하며 내가 그들의 놀림거리가 되었으며, 그들이 나를 미워하여 멀리하고 서슴지 않고 내 얼굴에 침을 밷는도다.” 그리고 아브라함도 요셉도 있습니다. 하지만, 노아나 욥, 아브라함, 요셉 등. 이들은 하나님을 신뢰하며, 자기 삶의 자리에서 인내하며 믿음을 실천하는 준비된 기다림이었습니다. 왜 이렇게 준비가 필요합니까? 그 이유는 준비가 되어 있을 때, 두려움이 없고 담대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가장 두려움을 느낄 때가 언제인 것 같습니까? 그것은 고통이나 불행이 예고 없이 다가올 때일 것입니다. 사람들은 같은 고난이라도 그 고난이 올 것을 예측할 수 있으면, 아픔을 덜 느끼게 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고난이 오는 상황을 변화시키지는 못한다고 할지라도, 언제 그 고난이 오는지를 알려고 애를 쓰는 것입니다.
이러한 현상이 과연 사실인지를 알기 위해서 의학계의 ‘베디아’와 ‘쿨버트’라는 두 박사가 쥐를 대상으로 실험을 했습니다. 그들은 쥐에게 전기충격을 가했습니다. 불이 켜져 있을 때는 경고음을 들려주지 않고 전기충격을 가했고, 불이 꺼졌을 때는 경고음을 들려준 후 전기충격을 가했습니다. 쥐들은 불이 꺼져 있을 때는 경고음을 들을 수 있으므로 전기충격이 곧 온다는 것을 예측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쥐들이 불을 끌 수 있도록 훈련 시켰습니다. 경고음이 있을 때나 없을 때의 전기충격 횟수나 강도는 같았습니다. 실험 결과 쥐들의 반응은 독특했습니다. 불이 켜져 있을 때, 쥐들은 경고음을 들을 수 있도록 계속해서 불을 끄려 했습니다.
경고음이 들린다는 것이 쥐에게 어떤 의미였겠습니까? 경고음을 듣는다고 쥐에게 주어지는 전기충격이 없어지는 것도 아니며, 그러한 고통을 막을 수 있는 것도 아닌데도 쥐들은 불을 끄려고 했습니다. 경고음은 단지 ‘이제 곧 전기충격이 온다.’라는 예고일 뿐입니다. 그런데도 쥐들은 예고가 있는 어둠 쪽을 선택했습니다. 인간에 있어서도 예측 불가의 상황은 불안을 줍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어리석게도 용하다는 점쟁이를 찾아다니고, 무당을 찾기도 합니다. 교회 안에도 자신의 앞일을 알고 싶어서, 예언의 은사가 있다는 사람들을 찾아다니면서 예언 기도를 받으러 다니는 사람이 많습니다. 누가복음 21:34절입니다.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그렇지 않으면 방탕함과 술 취함과 생활의 염려로 마음이 둔하여지고, 뜻밖에 그날이 덫과 같이 너희에게 임하리라.” 마음이 둔해지는 것은 ‘마음에 굳은살이 박여서 감각이 둔한 것’을 말합니다. 아무리 소리쳐도 감각이 없고, 아무리 양심을 찔러도 좀처럼 가책을 받지 않습니다. 이것은 마지막 세대의 특징이라고 마태복음 11:16-17절에서 예수께서 말씀하십니다. “이 세대를 무엇으로 비유할까, 비유하건대 아이들이 장터에 앉아 제 동무를 불러 이르되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리가 슬피 울어도 너희가 가슴을 치지 아니하였다.’ 함과 같도다.” 이처럼 마음을 둔하게 만드는 요인은 ‘방탕함’ ‘술 취함’ ‘생활의 염려’라고 했습니다. 이러한 삶의 방황이나 염려는 하나님의 말씀이 뿌리내리지 못하게 하는 원인이 됩니다. 마가복음 4:18-19절입니다. “또 어떤 이는 가시떨기에 뿌려진 자니, 이들은 말씀을 듣기는 하되,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과 기타 욕심이 들어와 말씀을 막아 결실하지 못하게 되는 자요.”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실천하는 준비된 삶이 없다면, 기다림과 인내는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오히려 멸망을 기다리는 것과 같습니다.
※ 기다림과 인내로 무엇을 얻을 수 있습니까?
인도 선교사로 사역했던 ‘스탠리 존스’ 선교사의 일화입니다. 젊은 나이에 인도에서 열심히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러나 인도 사람들은 회개하지도 않고 복음을 받아들이지도 않았습니다. 성과 없는 일에 너무나 지친 존스 선교사는 사과나무 밑에 쓰러져 누웠습니다. 그때 나무 사이에서 하나님의 음성이 들렸습니다. “스탠리 존스, 피곤하지? 지쳤지?” “예, 하나님, 지쳤습니다.” “왜 지쳤느냐?” “제가 아무리 복음을 전해도 저들이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습니다. 아무런 열매가 없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조용히 말씀하셨습니다. “이 사과나무를 보아라. 곧 아름다운 열매가 맺힐 것이다.”
잠시 닥치는 어려움과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세상에 빠지게 되면, 영원한 고통과 괴로움을 당하게 됩니다. 세상에서의 삶은 기껏 100여 년입니다. 이렇게 백 년을 위해 영원한 행복을 포기할 수는 없습니다. 이처럼, 우리가 기다림과 인내를 배워야 하는 이유는 삶의 열매를 맺기 위함이며, 하나님의 약속을 받기 위함입니다. 쉽게 말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약속하신 구원과 영생의 복을 받기 위함입니다. 앞서 보았던 히브리서 10:36절에서 “너희에게 인내가 필요함은 너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약속하신 것을 받기 위함이라.”라고 하셨고, 로마서 8:24-25절에서는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라고 하십니다. 이는 우리가 기다리고 인내해야 하는 이유를 분명하게 알려주십니다. 우리가 기다리는 것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서의 삶입니다. 이뿐만 아니라. 이 땅에서 육신의 삶에도 약속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따랐사온대, 그런즉 우리가 무엇을 얻으리이까?”라고 예수께 물었습니다. 예수께서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상이 새롭게 되어 인자가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을 때에 나를 따르는 너희도 열두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심판하리라. 또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마다 여러 배를 받고 또 영생을 상속하리라.”(마 19:28-29)라고 하셨습니다. 마가복음 10:30절에서는 “현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식과 전토를 백 배나 받되 박해를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라고 하십니다. 이처럼 인내하고 기다리며 주님을 신실하게 따르는 사람은, 지금 사는 세상에서도 복을 받고, 영생을 상속하게 된다고 하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기다리고 인내하며 주님을 따른 사람에게 주시는 열매입니다.
농부는 씨를 뿌려놓고 이른 비를 기다립니다. 팔레스타인의 농부들은 풍성한 열매를 거두기 위해 이른 비와 늦은 비를 기다립니다. 이른 비는 10월 하순에서 11월 상순 사이에, 늦은 비는 4월과 5월 사이에 내립니다. 농부들은 비를 기다리는 데 절대로 조급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때가 되면 비가 온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여유 있게 비를 기다렸습니다. 그리고 비가 오기 전에 해두어야 할 일에 전념했습니다. 성도들이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자세가 이러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반드시 약속하신 대로 다시 오십니다. 때와 기한은 이미 정해졌지만, 우리가 알 수 없을 뿐입니다. 우리가 조급한 마음으로 기다린다고 해서 앞당겨지거나, 게으르고 나태하다고 늦춰지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 된 우리는 주님을 기다리되 부끄러움 없이 맞이할 준비를 하면서 인내해야 합니다. 우리의 믿음의 선조들인 선지자들이나, 모진 고난을 이겨낸 욥의 인내의 결말이 이를 증명합니다. 본문 11절에서 “보라 인내하는 자를 우리가 복되다 하나니, 너희가 욥의 인내를 들었고 주께서 주신 결말을 보았거니와, 주는 가장 자비하시고 긍휼히 여기시는 이시니라.”라는 말씀을 기억합시다. 그러므로 더 나은 행복을 위하여 덜 중요한 것을 버리는 결단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하여 욥에게 베푸셨던 하나님의 복을 우리도 받아 누리는 인내의 믿음을 이루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마라나-타(μαράνα-θ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