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문
하나님께 속한 사람의 표징
*** 하나님께 속한 사람의 표징 / 요한복음 8:31-47
요한복음 8:31-36, 42-47, “31 그러므로 예수께서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으로 내 제자가 되고 32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33 그들이 대답하되 ‘우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남의 종이 된 적이 없거늘 어찌하여 우리가 자유롭게 되리라 하느냐?’ 34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 35 종은 영원히 집에 거하지 못하되 아들은 영원히 거하나니 36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로우리라. / 42 예수께서 이르시되 하나님이 너희 아버지였으면 너희가 나를 사랑하였으리니, 이는 내가 하나님께로부터 나와서 왔음이라. 나는 스스로 온 것이 아니요,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이니라. 43 어찌하여 내 말을 깨닫지 못하느냐? 이는 내 말을 들을 줄 알지 못함이로다. 44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대로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그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그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라. 45 내가 진리를 말하므로 너희가 나를 믿지 아니하는도다. 46 너희 중에 누가 나를 죄로 책잡겠느냐? 내가 진리를 말하는데도 어찌하여 나를 믿지 아니하느냐? 47 하나님께 속한 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나니 너희가 듣지 아니함은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였음이로다.”
** 들어가는 말
세상 만물에는 모두 이름이 있습니다. 심지어 태풍이나 자연 현상에까지 이름이 있습니다. 이름이 있다는 것은 ‘무엇엔가 소속되어 있음’을 나타냅니다. 누군가가 그것에 이름을 붙였기 때문입니다. 유일하게 이름이 없는 한 분이 계십니다.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스스로 존재하시므로 이름이 없습니다. 다만, 사람들이 부를 수 있도록 기념 칭호를 주셨는데, ‘야훼’, ‘여호와’입니다. 출애굽기 3:15에서 “하나님이 또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너희 조상의 하나님 여호와 곧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께서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 이는 나의 영원한 이름이요 대대로 기억할 나의 칭호니라.” 그리고 호세아 12:5에서는 “여호와는 만군의 하나님이시라. 여호와는 그를 기억하게 하는 이름이니라.”라고 하십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사람이 부를 수 있도록 스스로 이름을 주셨으며, 하나님께 속한 사람들을 하나하나 부르셨습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부르셔서 자녀로 삼으신 사람에게는 특별한 표징이 있습니다. 이 말씀 속에서 나에게는 이러한 표징이 있는지를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 본문 말씀의 배경과 의미를 봅시다.
본문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께로 말미암는 진정한 자유에 대한 선언입니다. 아브라함의 자손, 즉 선택받은 자손이라고 자부하면서도 율법에 얽매여 죄의 종이 되어 있는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메시아로 말미암는 영적인 자유를 선언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자신들은 종이 된 적이 없고, 지금도 충분히 자유를 누리고 있는데 무슨 소리냐?’고 반문합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아브라함의 자손들이라고 해서 모두가 자유롭고 저절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다.’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의 약속에 동참할 수 있는 진정한 아브라함의 자손은 육신의 혈통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사람 즉 하나님과 소통하는 사람들이라고 하십니다. 본문 47절입니다. “하나님께 속한 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나니 너희가 듣지 아니함은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였음이로다.” 즉 ‘아브라함에게서 난 혈통의 자손들이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 영적인 아브라함의 자손들인 믿음으로 하나님과 소통하는 사람들이 구원을 받게 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과 유대인들의 대화 내용을 보면, 무엇인가 답답함을 느낍니다. 마치 동문서답(東問西答)이라는 느낌도 들고, 전혀 소통되지 않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43절에서 “어찌하여 내 말을 깨닫지 못하느냐? 이는 내 말을 들을 줄 알지 못함이로다.”라고 하십니다. 이러한 현상은 긴 시간이 지난 지금도 여전합니다. 많은 그리스도인이 하나님 말씀을 듣지만 깨닫지 못하여, 말씀과는 전혀 다르게 살고 있습니다.
※ 하나님께 속했다는 것은 어떤 의미입니까?
우리가 무엇에 소속이 되었다는 것은 그 무리의 일원이 되는 것입니다. 그 무리의 일원이 되는 것에는 조건이 따릅니다. 예를 들어, 내가 어떤 회사의 사원이 되려면, 먼저 그 회사가 제시하는 조건에 합당한 자격을 갖추어야 하는 것과 같습니다. 하지만 그저 자격만 갖추었다고 당장 사원이 되지는 않습니다. 그 회사와의 소통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래서 사원을 모집할 때면, 통상적으로 면접이라는 것을 하게 됩니다. 면접은 소통의 가능성을 시험해 보는 것입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우리가 하나님께 속했다는 것도 분명한 자격이 있어야 하며, 소통도 이루어져야 합니다. 예를 들어 봅시다. 집을 새롭게 건축할 때, 전기 배선도 하고, 상수도와 하수도의 배관도 하게 됩니다. 이렇게 집을 잘 지었다고 해서 바로 불이 켜지고, 인터넷이 연결되고, 물이 나오는 것은 아닙니다. 전원을 공급하는 본선과 연결이 되어야 하고, 외부 상수도관과 연결이 되어야 합니다. 이렇게 연결되는 것이, 소속이 되는 것이며, 소통되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하나님께 속했다는 것을 가장 잘 나타내는 말씀이 있습니다. 요한복음 15:5절입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 포도나무와 가지는 따로 떨어진 존재가 아니라, 하나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 속했다는 것은 곧 하나님 안에 있다는 뜻입니다. 포도나무 가지가 생존하려면, 줄기에 연결되어 있어서 뿌리로부터 수분과 영양분을 공급받는 것입니다.
조금 더 깊이 생각해 봅시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라는 말씀에서, 하나님과의 소통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깨닫게 합니다. 소통(疏通)이란 나무뿌리에서 가지로 흐르듯이 ‘막힘없이 통한다.’라는 뜻입니다. 여러분도 생활 속에서 가끔 느끼실 ‘이심전심(以心傳心)’이라는 것 아시지요? 서로 약속한 것도 아닌데 마음이 통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는 텔레파시(telepathy)라고도 하는 정신적인 소통입니다. 신앙이란, 하나님과 마음이 통하는 영적인 소통입니다. 이 영적인 소통을 주님께서는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이라고 표현하셨는데, 구체적으로 요한복음 15:9-10절을 봅시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 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 주님께서 우리가 주님과 소통하는 길이, 주님의 말씀을 지켜 행하는 것임을 구체적으로 말씀하십니다. 즉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행하는 소통이 없으면, 형식적인 신앙의 흉내를 내는 것일 뿐입니다. 지금 이 시대의 교회가 이렇게 세속화되는 것은 하나님과의 소통이 없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의 뜻과는 상관없이 사업을 경영하듯이, 자기 생각과 자기 뜻으로 교회를 경영하고, 자기중심적인 신앙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이는 신앙생활이 아니라 자기만족을 위한 종교 생활에 불과합니다. 종교 생활은 하나님과는 아무런 상관없이 자기만족을 위한 행위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금하신 불법을 용인하며, 다른 종교를 인정하고 서로 교류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깁니다. 오히려 하나님뿐이라고 하는 사람들을 독선이라고 하면서 이상하게 여깁니다. 며칠 전 프란치스코 교황은 ‘동성애는 범죄가 아니며, 오히려 동성애를 처벌하는 것은 부당하다’라고 했습니다. 이런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0:20-21절입니다. “무릇 이방인이 제사하는 것은 귀신에게 하는 것이요 하나님께 제사하는 것이 아니니, 나는 너희가 귀신과 교제하는 자가 되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너희가 주의 잔과 귀신의 잔을 겸하여 마시지 못하고 주의 식탁과 귀신의 식탁에 겸하여 참여하지 못하리라.” 이 말씀은 하나님을 거부하는 불법이나, 이방 종교와의 교류를 금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오해하지 않아야 할 것은, 개인적으로 이방인과 교류하지 말라는 말이 아니라, 이방 종교와 교류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요즘, 어느 기독교연합회장이 불교 기념일에 절에서 합장하고 축하하기도 하며, 반대로 기독교 기념일에 불교 관계자가 기독교 행사에서 기념사를 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이러한 종교 혼합주의는 교회를 세속화시키고 영의 죽음과 파멸로 이어집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말씀을 듣고 있는 유대인들에게 ‘하나님과 단절되어 있다.’라고 책망하셨습니다. 본문 34-35절을 봅시다. “어찌하여 내 말을 깨닫지 못하느냐? 이는 내 말을 들을 줄 알지 못함이로다.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대로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그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그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라. 내가 진리를 말하므로 너희가 나를 믿지 아니하는도다.” 이 말씀에 하나님과 유대인들 사이가 단절되었다는 것과 단절된 원인이 들어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이해하지 못하니 믿을 수도 없었습니다. 이렇게 유대인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는 이유는 하나님과 단절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만일 유대인들이 하나님과 소통하고 있었다면 당연히 예수님을 알았을 것이며, 그 말씀도 받아들였을 것입니다. 본문 47절에서 “하나님께 속한 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나니, 너희가 듣지 아니함은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였음이로다.”라고 하십니다. 유대인들이 하나님과 단절된 원인은 ‘자신들의 욕망’입니다. 마귀가 자신의 욕망으로 인하여 하나님을 배반하고 쫓겨난 것처럼, 사람들도 하나님의 말씀을 버리고 자신의 욕망을 따랐기 때문에 단절된 것입니다. 야고보서 4:4절입니다. “간음한 여인들아, 세상과 벗 된 것이 하나님과 원수 됨을 알지 못하느냐? 그런즉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 되는 것이니라.”라고 하십니다. “간음한 여인들”이란 ‘하나님을 멀리하고 세상을 사랑하는 사람’을 뜻합니다. 그리고 요한일서 2:15절에서도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있지 아니하니”라고 하십니다. 그러므로 육신의 욕망을 따라가면 하나님과의 소통이 끊어집니다(롬 8:13,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 어떻게 하나님과의 소통을 계속할 수 있습니까?
에스겔 9:3-6절을 봅시다. “그룹에 머물러 있던 이스라엘 하나님의 영광이 올라 성전 문지방에 이르더니 여호와께서 그 가는 베옷을 입고 서기관의 먹 그릇을 찬 사람을 불러 4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너는 예루살렘 성읍 중에 순행하여 그 가운데서 행하는 모든 가증한 일로 말미암아 탄식하며 우는 자의 이마에 표를 그리라.’ 하시고 5 그들에 대하여 내 귀에 이르시되 ‘너희는 그를 따라 성읍 중에 다니며 불쌍히 여기지 말며 긍휼을 베풀지 말고 쳐서 6 늙은 자와 젊은 자와 처녀와 어린이와 여자를 다 죽이되 이마에 표 있는 자에게는 가까이하지 말라. 내 성소에서 시작할지니라.’ 하시매 그들이 성전 앞에 있는 늙은 자들로부터 시작하더라.”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자손들이 하나님과 소통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징벌하시는 모습을 보여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심판을 시행하는 천사에게 ‘세상의 가증한 일 때문에 탄식하며 우는 사람의 이마에 표하라.’라고 하십니다. 세상의 가증한 일 때문에 탄식하며 운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 즉 하나님의 뜻을 알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본문 47절에서도 “하나님께 속한 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나니 너희가 듣지 아니함은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였음이로다.”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을 바꾸어보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실천하는 사람이 하나님께 속한 사람이며 소통하는 사람이다.’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과 소통을 계속할 수 있는 길은, 하나님의 뜻을 알고 믿음으로 순종하고 실천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소통을 너무 어렵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과 뜻을 깨달아 아는 대로 하나씩 순종하고 실천하기를 힘쓰면 됩니다. 넘어지고 실패하면 다시 일어나서 다시 시작하면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고 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우리 마음을 바로 알아주십니다. 재미있는 일화가 있습니다.
시골 할아버지가 서울 강남에 있는 ‘메리어트 호텔’에 갈 일이 생겼습니다. 그런데 ‘메리어트’라는 말을 기억하기가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나름대로 머리를 써서 자신이 아는 단어인 ‘메리야쓰’라고 기억하기로 했습니다. 서울에 도착해서 택시를 타고 목적지를 말하려 했는데 기억이 나지를 않았습니다. 기사가 묻습니다. “어디 가세요?” “그~ 뭐더라? 호텔 이름이? 속에 입은 것이랑 비슷했는데” 할아버지는 결국 운전 기사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호텔 이름이… 난닝구 같은 건데…” 할아버지의 말을 들은 기사는 알겠다고 하고는 차를 몰았습니다. 노심초사(勞心焦思)하며 마음을 졸이는 할아버지에게 기사가 말했습니다. “할아버지, 다 왔어요!”다 왔다는 말을 듣고 할아버지가 밖을 보니 ‘메리어트 호텔’이라고 쓰여 있었습니다. 그제야 호텔 이름이 생각 난 할아버지가 기사에게 물었습니다. “거, 기사 양반 참 용하우. ‘난닝구’라고 했는데, 어떻게 여기인 줄 알고 찾아 왔소?” 그러자 기사가 대답했습니다. “난닝구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어제는 ‘전설의 고향’도 다녀왔어요!” “전설의 고향? 거긴 어디요?” “예술의 전당 아세요? 노인들은 그걸 전설의 고향이라고 하세요!”
이처럼,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잘 알지 못해도, 하나님의 뜻을 따라가려고 진실하게 노력한다는 것을, 하나님께서 아십니다. 우리는 개떡같이 말해도 하나님께서는 찰떡같이 알아들으십니다. 다만, 하나님과의 소통이 없이는 치료도 회복도 없고 구원도 없습니다. 예수님의 재림의 때가 다가올수록 하나님과 사람들 사이에는 소통이 막히게 된다고 사도 바울을 통하여 디모데후서에서 경고하셨습니다.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견의 능력은 부인하고,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따를 스승을 많이 두고 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따른다.’라고 하셨습니다. 올해는 하나님께 집중하여, 말씀과 기도로 하나님의 뜻을 깨닫기를 힘쓰고, 깨달은 말씀은 순종하겠다는 결심으로 삽시다. 그리하여 후회 없이 주님의 인정 받고 복을 누리는 삶을 이루시기를 축복합니다.
마라나-타(μαράνα-θ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