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문
재림의 기쁜 소식을 위하여
*** 재림의 기쁜 소식을 위하여 / 눅 2:8-14, 마 25:1-6
누가복음 2:8-14, “8 그 지역에 목자들이 밤에 밖에서 자기 양 떼를 지키더니 9 주의 사자가 곁에 서고 주의 영광이 그들을 두루 비추매 크게 무서워하는지라. 10 천사가 이르되 ‘무서워하지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11 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12 너희가 가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뉘어 있는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니라.’ 하더니 13 홀연히 수많은 천군이 그 천사들과 함께 하나님을 찬송하여 이르되 14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하니라.”
마태복음 25:1-6, “1 그 때에 천국은 마치 등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와 같다 하리니 2 그 중의 다섯은 미련하고 다섯은 슬기 있는 자라. 3 미련한 자들은 등을 가지되 기름을 가지지 아니하고 4 슬기 있는 자들은 그릇에 기름을 담아 등과 함께 가져갔더니 5 신랑이 더디 오므로 다 졸며 잘새 6 밤중에 소리가 나되 ‘보라, 신랑이로다. 맞으러 나오라.’ 하매”
** 들어가는 말
오늘은 2022년 마지막 주일이자, 성탄절입니다. 이 뜻깊은 날에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가장 뜨거운 이슈(hot issue)에 관하여 생각해보려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hot issue가 무엇이겠습니까? 다름 아닌, 예수님의 재림입니다. 예수님의 재림(再臨)은 인류 구원을 위해 오셨던 초림(初臨)과는 전혀 다르게, 징벌과 심판의 날입니다. 그런데 이런 두려운 날을 우리는 왜 기다리겠습니까? 이는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두려움의 날이지만, 믿음의 사람들에게는 영광과 영원한 행복이 시작되는 날이기 때문입니다. 즉, 예수님 맞이할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에게는 기쁜 소식이 되겠지만, 준비가 안 된 사람에게는 가장 두려운 소식이 됩니다. 본문 10절에서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라고 하셨는데, 초림의 기쁜 소식이 재림의 기쁜 소식도 되려면, 주님 맞이할 준비를 잘 해두어야 합니다.
해마다 성탄절을 맞이하지만, 해마다 예수님은 머무실 곳이 없습니다. 첫 번 성탄절의 모습을 누가복음 2:7절에서 “첫아들을 낳아 강보로 싸서 구유에 뉘었으니, 이는 여관에 있을 곳이 없음이러라.”라고 하셨으며, 예수님의 공생애(共生涯) 중에도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도다.”(눅 9:58)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신 첫날부터 오늘에 이르도록 머무실 곳이 없으십니다. 사람들이 마음의 자리를 비워드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예수께서는 마음을 비우고 영접하는 자들에게 기꺼이 들어가셨고 함께 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12에서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라고 하셨고, 요한계시록 3:20에서는 “볼지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라고 하십니다. 나는 주님께서 내 마음의 자리에 머무시도록 자리를 내어 드립니까?
※ 본문 말씀의 배경과 의미를 봅시다.
누가복음 본문은 천사들이 메시아 탄생을 세상에 알리는 Good News입니다. 여기에서 주목할 내용은 12절 내용인 “너희가 가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뉘어 있는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니라.”라는 말씀입니다. 메시아 된 표적으로 주신 증거가 “구유에 누인 아기”입니다. 왜 이것이 표적이 됩니까? 이 표적은 요한복음 6장의 내용과 연결됩니다. 51절입니다.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내가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니라.”라고 하시며, 54절에서는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라고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언약을 어기고 죄를 범한 인간을 ‘짐승’이라고 하셨습니다. 창세기 6:3절입니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나의 영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신이 됨이라.” 이 “육신”이라는 단어는 ‘영이 없고 몸만 있는 동물’을 의미합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짐승들을 위하여 세상에 오신 것입니까? 그렇습니다. 짐승들을 위해서 오셨습니다. 소나 말이나 돼지 등의 짐승이 아니라, 짐승처럼 된 인간을 위해서 오신 것입니다. 죄를 범하여 하나님을 떠난 인생은 영이 없는 ‘짐승’과 똑같은 존재입니다. 하나님과 연결된 영의 생명이 끊어졌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짐승처럼 된 인간을 회복시켜 주시려고 마구간, 그리고 구유에 그 몸을 누이셨습니다. 짐승의 먹이통에 누우신 예수님께서,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라고 하십니다. 예수께서는 짐승이 된 인생을 다시 살려서 하나님의 자녀로 회복시키시려고 세상에 사람으로 오신 것입니다. 그날이 성탄절입니다. 이것이 세상에 가장 기쁜 소식입니다.
마태복음 본문을 포함하는 25장에는 종말과 예수님의 재림에 관한 세 가지 비유가 나란히 등장합니다. 열 처녀 비유, 달란트 비유, 양과 염소 비유, 이 세 가지는 모두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사람들의 올바른 신앙과 삶의 자세를 가르치는 비유입니다. 첫 번째 비유에 해당하는 본문 말씀은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그리스도인들을 ‘신랑을 기다리는 처녀들’에 비유합니다. 이 비유는 실제의 생활이 느껴지는 사실적인 구성으로,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사람이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구체적으로 가르칩니다. 특히 본문 5절의 “신랑이 더디 오므로 다 졸며 잘새”라는 말씀으로 말세의 영적인 상황을 잘 보여주십니다. 이러한 시대적인 상황에도 불구하고 재림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갖추어야 할 중요한 것이 ‘기름을 준비하는 것’임을 명백하게 보여주십니다. 예수님의 재림을 믿고 기다린다고 할지라도 이처럼 기름이 준비되지 않으면 천국의 혼인 잔치에 참여할 수가 없습니다. 이런 황당하고 낭패스러움을 당하지 않으려면 깨어 있으라고 하십니다. 즉 ‘예수님의 재림을 믿고 기다리는 사람은 철저하게 준비하고 깨어 있어야 한다.’라고 말씀하십니다.
※ 두 가지의 기쁜 소식이 있습니다.
두 본문에는 모두 기쁜 소식이 있습니다. 하나는 이미 2000여 년 전에 이루어진 천지가 진동할 인류 구원의 기쁜 소식입니다. 다른 하나는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앞으로 이루어질 천지가 개벽하는 천국의 혼인 잔치의 기쁜 소식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독생자 예수님을 인간을 구원할 속죄 제물로 세상에 보내신 성육신의 사건은 다시는 일어나지 않을 세기적인 사건입니다. 세상에는 신(神)이라고 불리는 수많은 것이 있지만, 그 어떤 신(神)도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 자신을 버렸다는 이야기는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사람의 몸을 입고 세상에 오신 성육신의 사건은 세상에서 전무후무(前無後無)한 둘도 없는 기쁨의 좋은 소식입니다. 요한복음 3:16에서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라고, 인간을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내셨습니다. 요한일서 4:10에서는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라고 증언합니다. 지금 우리는 하나님의 이 사랑을 입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해마다 주님의 오심을 기념하며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 사랑은 우리 그리스도인이 결단코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과 이 기쁜 소식을 할 수 있다면 더 많은 사람에게 전하고 나누어야 합니다.
우리 주변에서 조금만 관심을 기울이면 볼 수 있는 ‘고마리’라는 작은 식물이 있습니다. 고마리는 여름이 끝나갈 무렵 8월 말에서 9월 중순에 흰색과 분홍색의 예쁘고 작은 꽃을 피웁니다. 이 꽃은 손톱보다도 작고 줄기가 두어 가지밖에 안 되지만, 밑에 뿌리는 자기 몸집의 서너 배는 족히 되는 큰 뿌리를 갖고 있습니다. 이렇게 잘 발달 된 뿌리로 더러운 것들을 정화하는데, 오염물질인 질소와 인을 영양물로 흡수하기 때문에 고마리 군락이 있는 곳은 오염물질이 줄어들어 차츰 맑은 물로 바뀝니다. 고마리의 뛰어난 정화 능력은 축산 폐수도 깨끗한 물로 정화할 정도라서 고마리 군락 때문에 윗물보다 아랫물이 더 맑은 경우도 있습니다. 그래서 고마리는 주로 논둑이나 개울가 습지, 시커먼 도랑 주변에서 볼 수 있고, 보통 도시에서는 하수구 시궁창 같은 지저분한 곳에서 자랍니다.
이 고마리처럼, 우리 그리스도인은 기쁜 소식이 필요한 곳, 하나님의 사랑이 필요한 곳에서 세상을 맑고 밝게 밝혀야 합니다. 이것이 성탄절을 진정으로 기뻐하며, 감사하는 삶이 될 것입니다. 이 기쁨의 소식을 주님이 다시 오시는 그 기쁨의 날까지 이어가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지금 진정으로 마음 기울여야 할 것은, 예수님의 재림이 기쁜 소식이 되도록 준비하는 것입니다. 성탄절은 이미 세상에 오셔서 구원을 이루신 예수님을 기뻐하며 감사하는 것이지만, 더 중요한 것은 다시 오실 주님을 기쁘게 맞이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본문의 결론인 13절에서 주님께서 “그런즉 깨어 있으라. 너희는 그날과 그때를 알지 못하느니라.”라고 하십니다. 즉 세상의 일에 마음이 팔려 영이 잠들게 되면, 재림의 때를 놓치게 되므로 깨어 있으라고 하십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재림이 기쁜 소식이 되려면 어떻게 깨어 있어야 합니까?
마태복음 본문 앞에 배치된 24장은 예수님의 재림 전에 있을 재난의 징조들과 대처 방법, 그리고 예수님의 재림과 재림을 대비하는 방법을 기록했습니다. 이어지는 25장에서는 세 가지의 비유로서, 예수님의 재림이 가까워진 말세를 사는 그리스도인의 마땅한 신앙의 삶을 가르칩니다. 24:29-31을 봅시다. “그날, 환난 후에 즉시 해가 어두워지며 달이 빛을 내지 아니하며, 별들이 하늘에서 떨어지며, 하늘의 권능들이 흔들리리라. 그 때에 인자의 징조가 하늘에서 보이겠고, 그 때에 땅의 모든 족속들이 통곡하며 그들이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리라. 그가 큰 나팔소리와 함께 천사들을 보내리니, 그들이 그의 택하신 자들을 하늘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사방에서 모으리라.” 이 말씀은 예수님의 재림 모습과 당시의 환경을 말씀합니다. 자유주의 신학자들과 가톨릭 신학자들은 예수님의 재림을 부정적으로 말하지만, 예수님은 약속하신 대로 반드시 다시 오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시 오실 주님을 기쁘게 맞이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깨어 있으라.”라는 단어는 헬라어 ‘그레고류오(영, to be stay awake)’인데, ‘정신 차리다’, ‘경계하다’, ‘주의하다’라는 의미입니다. 물론 영과 육신의 모든 삶에 해당하지만, 특히 영적인 깨어 있음을 말합니다. 마태복음 본문 5절에서 “신랑이 더디 오므로 다 졸면 잘새”라고 하십니다. 이는 우리가 생각하는 시기보다 더 늦어지고 있다는 뜻입니다. 초대교회 시대 이후로 지금까지 ‘예수님의 재림이 임박했다.’라며, 교회가 긴장한 때가 많았습니다. 그런 때면 이장림과 같은 이단 종말론자들이 등장하여 많은 성도를 미혹했습니다. 이런 일이 자주 일어나다 보니, 거짓말 양치기 소년의 이야기처럼, 이제는 사람들이 믿지를 않고 마음에 두지도 않습니다. 이러한 상태가 ‘졸며 자는’ 현상입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슬기로운 자와 미련한 자가 모두 졸았다고 하십니다. 신앙이 좋은 사람이나, 그렇지 않은 사람이나 모두 방심하는 시대를 말합니다. 그런데 중요한 차이가 있습니다. 3-4절입니다. “미련한 자들은 등을 가지되 기름을 가지지 아니하고 4 슬기 있는 자들은 그릇에 기름을 담아 등과 함께 가져갔더니” 모두 등을 준비했다는 것은, 이들이 모두 그리스도인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한 무리는 여분의 기름을 준비하지 못했고, 다른 한 무리는 여분의 기름을 준비했다는 것입니다. ‘기름’은 등불을 밝히는 재료이며, 예수님을 향한 신앙고백이자 믿음이며, 은혜입니다. 그렇다면 ‘등’은 무엇이겠습니까? 내가 간직한 하나님의 은혜와 하나님께 대한 믿음을 나타내는 행동이자 삶입니다. 마태복음 5:16을 봅시다.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우리의 등불은 믿음과 은혜로 나타내는 선한 행위들을 통해서 사람들 앞에 비치는 빛입니다. 그러므로 시대와 환경이 어떻게 변하든지 믿음으로 나타내는 선한 행위를 계속해야 합니다. 요한계시록 19:7-8입니다. “우리가 즐거워하고 크게 기뻐하며 그에게 영광을 돌리세. 어린 양의 혼인 기약이 이르렀고 그의 아내가 자신을 준비하였으므로, 그에게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 옷을 입도록 허락하셨으니, 이 세마포 옷은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 이처럼, 은혜와 믿음으로 나타내는 선한 행실로, 세상에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삶이 재림의 소식이 되는 삶입니다.
예전에 ‘교통안전 캠페인 동영상’이 있었습니다. 그 내용은 이렇습니다.
장소는 극장 안, 객석을 가득 메운 관객들이 영화를 기다리는 동안 예고편 비슷한 영상이 시작되었습니다. 어느 승용차 운전자가 가로수가 늘어선 한적한 2차선 도로를 달리고 있습니다. 다른 화면은 나오지 않고 계속 운행 중인 승용차와 간간이 반대차선에서 지나치는 차들만 보입니다. 관객들은 도대체 왜 이런 영상을 보여주는지 몰라 웅성거립니다. 관객들이 지루할 즈음에 모든 관객의 휴대전화가 요란스럽게 벨소리를 울려댔습니다. 관객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모두 휴대전화를 꺼내서 확인합니다.
바로 그때, 화면에서 ‘쾅’하는 굉음이 들려왔습니다. 관객들은 순간 화면을 봤고 모두가 심장이 멎는 듯했습니다. 왜냐하면, 잘 달리던 승용차가 마주 오던 자동차와 충돌하여 도로 바깥으로 튕겨 나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관객들은 모두 휴대전화를 확인하느라 승용차가 왜 사고가 났는지를 알지 못했습니다. 객석에는 놀람과 탄식소리로 가득했습니다. 이 동영상은 말없이 “당신도 운전 중에 휴대전화를 사용하든지 한 눈 팔면 이렇게 사고가 난다.”라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사람은 세상이나 육신적인 것에 한눈팔지 않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물 위로 걸어오실 때, 베드로도 예수님을 향하여 물 위를 걸을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베드로가 거센 바람과 파도에 한눈을 파는 순간 물속으로 빠져들어 갔습니다.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은 그리스도인들을 한눈팔게 하는 것들이 너무도 많습니다. 사탄의 세력들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을 가장 싫어합니다. 그래서 할 수만 있다면 한눈팔도록 온갖 것으로 미혹합니다. 미혹 당하지 않으려면 옛 삶의 방식을 버려야 합니다. 마음 씀씀이, 말투, 행동 하나하나까지 성령 안에서 새롭게 하십시오. 이렇게 내 영을 새롭게 하는 삶으로 주님의 재림을 기쁘게 맞이할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마라나-타(μαράνα-θ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