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문
하나님의 마음을 얻는 믿음
*** 하나님의 마음을 얻는 믿음 / 마태복음 15:21-28
마태복음 15:21-28, “21 예수께서 거기서 나가사 두로와 시돈 지방으로 들어가시니 22 가나안 여자 하나가 그 지경에서 나와서 소리 질러 이르되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하게 귀신 들렸나이다.’ 하되 23 예수는 한 말씀도 대답하지 아니하시니 제자들이 와서 청하여 말하되 ‘그 여자가 우리 뒤에서 소리를 지르오니 그를 보내소서.’ 24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 하시니 25 여자가 와서 예수께 절하며 이르되 ‘주여, 저를 도우소서.’ 26 대답하여 이르시되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하지 아니하니라.’ 27 여자가 이르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하니 28 이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시니 그 때로부터 그의 딸이 나으니라.”
** 들어가는 말
우리 그리스도인의 신앙에서 많이 언급되는 주제가 뭘까요?
예배, 기도, 찬양, 전도, 사랑, 믿음, 성경, 구원, 심판, 재림, 행함 등. 거의 매일 생각하게 되는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 가운데 예수께서 특별하게 관심을 가지셨으며, 우리에게 경각심을 일깨우는 것이 있습니다. 누가복음 18:8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라고 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재림하실 때, 과연 세상에서 믿음을 보실 것인가? 이 물음은 강한 부정을 나타냅니다. 그 대답은 ‘천만에, 그는 보시지 못할 것이다.’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믿음이 예수께서 바라신 가장 큰 것임을 전제합니다. 예수께서 오실 때, 세상에서 믿음을 거의 보시지 못할 것을 예언합니다. 경건의 모양을 가진 사람은 많겠지만, 신실하고 정직하여 믿음을 가진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우리를 두렵게 하는 말씀입니다. 지금 우리 시대에는 주님을 향한 진실한 믿음을 가진 사람들을 찾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오심을 기억하고 감사하는 이 대강절에 우리의 믿음을 점검해 봅시다.
※ 본문 말씀의 내용과 의미를 살펴봅시다.
본문 말씀은 예수께서 시돈 지방에서 행하셨던 이적 이야기입니다. 예수께서 이방인 지역인 두로와 시돈 지방으로 들어가실 때였습니다. 어떤 여인이 예수님의 뒤를 따라오면서 ‘귀신들린 자신의 딸을 고쳐 달라.’라며 소리를 질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들은 척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어찌나 시끄럽게 굴었던지 제자들이 예수께 “그 여자가 우리 뒤에서 소리를 지르오니 보내소서.”라고 요청했습니다. 이 말은 ‘너무 시끄러우니 빨리 소원을 들어주어 보내시지요.’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라고 거절의 뜻을 분명히 하셨습니다. 하지만 그 여인은 포기하지 않고 예수님 앞에 와서 절하며 도와주시기를 간청했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여인에게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하지 아니하니라.”라고 하셨습니다. 여인은 자신을 개로 표현하는 모멸감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믿음을 꿋꿋하게 드러냅니다. “주여, 옳소이다 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정말 포기를 모르는 대단한 믿음입니다. 예레미야 29:12-13입니다. “너희가 내게 부르짖으며 내게 와서 기도하면 내가 너희들의 기도를 들을 것이요. 너희가 온 마음으로 나를 구하면 나를 찾을 것이요 나를 만나리라.” 이 약속의 말씀 그대로 여인은 소원을 이루었습니다. 주님의 마음을 얻어낸 것입니다.
※우리가 이해하는 믿음은 어떤 것입니까?
우리가 먼저 분명히 정립해야 하는 것은 ‘내가 이해하는 믿음이란 무엇인가?’라는 것입니다.
먼저, 물어보겠습니다.
“만일 큰 질병으로 고통받는 사람이 ‘나는 반드시 나을 것이다.’라는 믿음을 가지고, 가만히 앉아서 기도만 한다면 그 병이 낫겠습니까?” 물론 “나는 나을 수 있다.”, “하나님께서 반드시 낫게 해 주실 것이다.”라는 희망과 믿음이 있어야 함은 두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께서 병자들을 고쳐주시면서 “너희 믿음대로 되라.”라고 하셨으니,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은 꼭 필요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믿음만 가지고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은 채 기도만 하고 있다면, 과연 그 병이 낫게 될 것인가?’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야고보 선생은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에서 “행함이 없는 믿음”이란, ‘하나님을 온전하게 신뢰하지 못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만일 내가 ‘하나님께서 내가 원하는 이 일을 이루신다.’라고 확신한다면, 그대로 행동할 것입니다. 예컨대, 예수께서 열 명의 나병 환자를 고쳐주실 때, “가서 너희 몸을 제사장에게 보이라.”라고 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제사장이 나병 환자를 판정하거나, 나은 것을 판정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몸은 여전히 나병으로 덮여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예수님을 믿고 그대로 제사장이 있는 곳으로 떠났으며, 가던 도중에 자신들의 몸이 나았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것이 자신의 믿음을 행동으로 나타내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이 땅에서 활동하시던 때는 의학이 발달하지 못한 시대여서 마을마다 병자들이 넘쳐났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해결해야 할 문제점들이 산더미처럼 쌓여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이적을 체험한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합니다.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누가복음 8:43-46을 봅시다. “이에 열두 해를 혈류 증으로 앓는 중에 아무에게도 고침을 받지 못하던 여자가, 예수의 뒤로 와서 그의 옷 가에 손을 대니 혈류 증이 즉시 그쳤더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게 손을 댄 자가 누구냐?’ 하시니, 다 ‘아니라.’ 할 때에, 베드로가 이르되 ‘주여, 무리가 밀려들어 미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게 손을 댄 자가 있도다. 이는 내게서 능력이 나간 줄 앎이로다.’ 하신대” 베드로의 말처럼, 무리가 밀고 당기고 하면서 예수님의 옷에 손을 대거나 스친 사람이 한둘이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예수님의 관심을 받지도 못했고, 그 어떤 능력도 경험하지 못했습니다. 오늘에도 많은 그리스도인이 당시의 무리처럼, 예수님 곁을 맴돌고 있지만 예수님의 관심도, 능력도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원인이 무엇일까요? 예배하고, 기도하고, 찬양도 하고, 말씀도 듣지만, 예수님의 관심을 받도록 예수께 집중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변화산 아래에서 귀신들린 아들을 고쳐달라고 왔던 아이 아버지는 예수께 “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도와주소서.”라고 했습니다. 즉 제자들에게 실망하여 예수께 집중하지 못했고, 온전한 신뢰가 없었던 것입니다. 지금도 그리스도인들이 주님께 ‘하실 수 있으시면, 해 주세요.’라는 투로, 예수님께 진정으로 집중하거나 신뢰하지 못하기 때문에 예수님의 마음을 얻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즉 믿음에 관한 진정한 이해가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마음을 얻는 진정한 믿음은 어떤 것입니까?
※ 하나님의 마음을 얻는 믿음은 어떤 것입니까?
‘믿음’을 신약성경에서는 ‘pistis’라는 단어를 사용하는데, 이 단어는 ‘확신’, 특히 ‘구원에 관해 예수 그리스도를 신뢰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세상에서 말하는 ‘신용’이나, 보편적인 신뢰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을 확신하는 것입니다. 본문에 등장하는 가나안 여인을 살펴보면, 딸의 병을 고치는 것에 집중하지 않고, 오히려 예수께 집중하고 있음을 봅니다. 즉 가나안 여인은 예수님을 완전히 신뢰하여 예수님의 마음을 얻고자 했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가져야 할 믿음의 방향입니다. 앞에서 말씀드렸던 예수님 주변을 서성거렸던 무리는 결정적으로 예수께 대한 신뢰가 없었습니다. 한 예로, 예수께서 베데스다 연못에 가셨을 때를 봅시다. 그곳에는 연못의 물이 움직이기를 기다리는 병자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그 연못에는 가끔 천사들이 내려와서 물을 흔들어 놓는데 그때 가장 먼저 물에 들어가는 사람은 어떤 병이라도 낫는다.’라는 전설을 믿고 요행을 기다리는 병자들이었습니다. 그 많은 병자 속에서 예수님은 유일하게 삼십 팔 년이나 된 병자에게 관심을 가지셨고, “네 자리를 들고 일어나 걸어가라.”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왜 이 사람에게 관심을 가지셨겠습니까? 그 이유를 바울의 이적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루스드라에서 복음을 전할 때, 나면서 앉은뱅이가 된 사람이 말씀을 듣고 있었습니다. 그때 바울이 그를 보았습니다. 그리고 “구원받을 만한 믿음이 그에게 있는 것을 보고” 그에게 말했습니다. “네 발로 바로 일어서라.” 그리고 그 앉은뱅이는 즉시 일어났습니다. 예수님의 명령을 들은 삼십 팔 년 된 병자도, 즉시 일어났습니다. 이는 예수님을 향한 믿음이 없으면 이렇게 행동할 수가 없습니다. 이들처럼, 자신이 처한 상황이나 환경을 생각하지 않고, 예수님의 말씀에 즉각 반응했다는 것은 예수님을 완전히 신뢰했음을 의미합니다. 요한일서 5:4-5을 봅시다. “무릇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기는 승리는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자가 아니면 세상을 이기는 자가 누구냐?” 이 말씀에서 세상을 이기는 능력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사람에게 주어진다고 하십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얻는 믿음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이심과 나를 구원하신 분이심을 온전히 신뢰하는 것입니다.
가나안 여인은 유대인에게 환영받을 수 없는 이방인입니다. 그리고 사랑하는 딸이 흉악한 귀신이 들려 끔찍한 고통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당시로는 딸을 고칠 가능성은 전혀 없었습니다. 딸의 고통을 바라만 보아야 하는 어머니의 마음은 자신이 대신이라도 했으면 좋겠다는 그런 고통이었을 것입니다. 이 여인의 꿈은 딸의 병을 고치는 것이었습니다. 여인은 어떤 기회에 예수님에 관한 소식을 들었을 것이며, 예수님 만이 자신의 소원을 이루게 하실 수 있음을 알았습니다. 그런데 유일한 희망이던 예수께서 자신이 거주하는 지역을 지나가신다는 것입니다. 여인은 사람들과 예수님의 냉대에도 불구하고 예수님 앞에 와서 길을 막고는 엎드려 절하면서 “주여 저를 도우소서.”라고 간청했습니다. 예수께서는 직설적으로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하지 아니하니라.”라고 냉대뿐만 아니라 무시하고 천대하는 투로 거절했습니다. ‘개’ 라니! 안 고쳐주면 그만이지 그렇게 험한 말까지 들어야 하겠습니까? 그러나 가나안 여인은 그 자존심 구기는 말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오히려 그 사실을 인정하면서 간청합니다.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결국, 여인은 주님으로부터 “여자야,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라는 답변을 받아냈습니다. 가나안 여인은 자신의 끈질긴 믿음으로 예수님의 마음을 얻었습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전적으로 신뢰하지 않고는 할 수 없는 행위입니다.
설교 서론 부문에서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라는 말씀을 인용했었는데, 그 원인 구절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누가복음 18:1-8에서 예수께서 하신 ‘과부와 재판장 비유’입니다. 예수님은 이 비유를 통하여 ‘인내하며 간절하게 부르짖는 기도’에 관하여 가르치셨습니다. 그 결론부인 7-8절입니다.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지 아니하시겠느냐? 그들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주시리라.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니라.” 이 믿음은 ‘예수께서 나를 구원하시는 주인 되심을 온전히 신뢰하는’ 믿음입니다. ‘나를 구원하신다.’라는 것은, 영혼 구원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영과 육신의 모든 삶을 살피시고 도우시며, 구원하심을 의미합니다. 즉 전인적(全人的)인 구원입니다. 예수께서 이렇게 내 삶의 모든 부분에서 전인적인 구원을 이루시는 분이심을 신뢰하는 것이 하나님의 마음을 얻는 믿음입니다. 역대하 16:9입니다. “여호와의 눈은 온 땅을 두루 감찰하사 전심으로 자기에게 향하는 자들을 위하여 능력을 베푸시나니” 이 사실은 오늘도 변함이 없습니다.
미국의 작가인 ‘월리엄 A. 패더(William A. Feather)’가 쓴 글 가운데 재미있는 글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소년 시절에 길을 가다가 5달러(6,000원)를 주웠습니다. 가난했던 그는 그 돈이 정말 큰돈이었습니다. 이 돈으로 그 소년은 돈의 위력을 체험했습니다. 그는 계속 돈을 얻기 위하여 땅을 보고 다녀야 한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평생 길바닥을 보고 다니면서 돈이 될 만한 것들을 주웠습니다. 그가 평생에 주운 것들은 단추가 29,519개, 머리핀이 54,172개, 수천 개의 동전을 주웠습니다. 그러나 그는 부자가 되지 못했고, 그것들을 줍느라고 아름다운 하늘도, 땅의 꽃과 새들과 푸른 초목을 보지 못하고 살았습니다. 그리고 보너스로 얻은 것 한 가지가 바로 꼽추처럼 굽어 버린 등이었다고 합니다.
길바닥을 휩쓸며 평생을 돌아다니면서 수많은 잡다한 것을 주웠지만, 사실 인생의 가장 아름다운 모습, 그리고 인생의 참된 가치는 다 잃어버렸다는 얘기입니다. 이런 사람을 ‘넝마주이 인생’이라고 부릅니다. 이 사람은 돈을 줍는데 평생을 다 허비했지만, 인생의 가장 중요한 것을 하나도 얻지 못한 불행한 사람입니다. 이런 넝마주의 인생은 당장 눈앞의 이익과 쾌락을 쫓아다니다가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잃어버린 사람들입니다.
지금처럼 혼탁한 시대를 사는 그리스도인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마음을 얻는 것입니다. 구약의 역사서에서 가장 많이 말하는 것은, 하나님의 마음을 얻은 사람과 세상과 우상을 쫓다가 하나님의 마음을 잃어버린 사람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두말할 필요도 없이 하나님의 마음을 얻은 사람의 생애에 평안과 번영과 능력이 있었습니다. 우리도 가나안 여인처럼, 예수 그리스도께 내 모든 생명과 꿈과 소망을 이룰 능력이 있음을 신뢰하며, 간절하게 붙잡으셔서 하나님의 능력 안에서 살아가시기를 축복합니다.
마라나-타(μαράνα-θ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