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마음이 낙심될 때
작성자 배의신 댓글
/ 조회: 11,439회
작성일
2003-10-25 21:51
♡♥♡ 내 마음이 낙심될 때 / 눅 24:13-35
*** 들어가는 말
어느 청년 성도가 얼굴에 근심이 가득한 모습이었습니다. “왜 그렇게 얼굴이 어두우냐?”고 물었습니다. 청년은 ‘가정의 일이 실타래가 엉키듯이 꼬여서 실마리를 잡을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은 도무지 제 사정을 모르십니다. 일마다 되는 것이 없고 문들이 모두 닫혀서 나갈 수 있는 길이 없습니다.”라고 했습니다.
여러분은 혹시 삶의 일들이 꼬이고 실마리를 잡을 수 없어서 답답할 때가 없습니까? 우리 옛 말에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라고 했지만, 사방을 둘러보아도 도무지 탈출구가 없는 것처럼 여겨질 때가 있습니까? 저는 지금도 세상을 보고, 세상적인 눈으로 일들을 보면 가슴이 답답하고 도무지 실마리가 잡히지 않을 것처럼 여겨질 때가 있습니다.
본문의 상황이 이러합니다.
본문에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장사되신 후에 제자들에게 일어난 일련의 일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죽으시자 따르던 제자들은 두려움에 사로잡혀 제대로 거리를 다니지도 못했습니다. 예수님이 장사된 지 사흘이 지난 아침에 어떤 여인들이 예수님이 다시 살아나셨다고 했지만, 제자들의 마음에는 여전히 ‘모든 것이 다 끝났다.’는 좌절감이 엄습했습니다. 제자들은 하나 둘씩 제 갈 길로 흩어져 갔습니다.
예수님의 열 두 제자 중에 하나는 배반하여 죽었고, 갈릴리가 고향인 제자들과 또 다른 제자들이 합세하여 일곱 명은 고향으로 돌아갔습니다. 예루살렘에서 가까운 ‘엠마오’가 집인 두 제자도 ‘더 이상 기대할 것이 아무것도 없는’ 허탈한 마음으로 집으로 향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기대는 본문21절에서 “우리는 이 사람이 이스라엘을 구속할 자라고 바랐노라.”고 한 표현에서 잘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의 기대는 예수님이 사형을 받아 죽음으로서 산산이 부수어졌습니다. 이제 더 이상 길은 없습니다. 다시 예전의 그 고통스러운 삶의 자리로 돌아가는 것뿐입니다.
지금 우리나라의 현실을 보아도, 한국교회의 현실을 보아도, 마음은 낙심이 됩니다. 사람의 힘으로는 어떻게 할 수 없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혹시 이런 심정이 되어 마음이 낙심될 때가 있습니까? 기대했던 일들이 실타래처럼 엉키어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몰라 낙심이 되고 근심이 쌓일 때가 없습니까?
누가복음18장18절 이하에는 부자청년에 대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부자청년은 예수님께 나아와서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라고 묻습니다. 예수님은 ‘계명을 지키고, 네 소유를 다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고 너는 나를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청년은 심히 근심하면서 돌아갔다고 했습니다. 그 때에 주님께서 “재물이 있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어떻게 어려운지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고 하셨습니다. 그 때 사람들은 낙심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탄식합니다.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나이까?”
세상적인 기준으로 생각하면 불가능입니다. 쥐도 아니고 개미도 아니고 그 큰 약대가 어떻게 바늘귀로 빠져나가겠습니까? 이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사람들은 자신들의 능력의 한계에 부딪칠 때에, 자신의 이해력을 벗어날 때에 불가능이라고 생각하며 낙심하게 됩니다. 그런데 주님의 대답을 들어보십시오. “무릇 사람의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은 하실 수 있느니라.”(눅18:27)고 하십니다. 이태리 속담에도 “하나님은 문을 닫으시되, 창문은 열어 두신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모든 길이 막히고, 모든 문이 닫힌 듯한 상황에서 사람이 낙심될 때에도 길은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본문을 통하여 그 길을 가르쳐 주십니다. 말씀을 들으면서 여러분이 생각하는 나름대로의 길을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1. 낙심이 될 때에는 믿음의 문을 여십시오.
본문22-24절을 보십시오. 엠마오로 향하던 두 제자가 부활하신 예수님께 하는 말입니다. “또한 우리 중에 어떤 여자들이 우리로 놀라게 하였으니, 이는 저희가 새벽에 무덤에 갔다가 그의 시체는 보지 못하고 와서 ‘그가 살으셨다.’ 하는 천사들의 나타남을 보았다 함이라. 또 우리와 함께 한 자 중에 두어 사람이 무덤에 가 과연 여자들의 말한 바와 같음을 보았으나 ‘예수는 보지 못하였느니라.’ 하거늘”
이들의 말을 들으면서 생각나는 것이 없습니까? 예수님께서 이 일에 대하여 예고하신 말씀입니다. 마태복음16:21절에서 “이 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 삼 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가르치시니”라고 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이 후로도 두 번을 더 같은 말씀으로 가르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26:32절에서는 “그러나 내가 살아난 후에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리라.”고 강조하셨습니다.
사람이 지나치게 근심이 되고 낙심이 되면 생각하는 능력과 이해력이 떨어집니다. 제자들도 당장 눈앞에 닥친 어려움과 근심으로 인하여 이미 이전에 이 일에 대하여 말씀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생각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천사의 입을 통하여 다시 기억나게 하셨습니다. 본문 앞 쪽의 5-6절입니다. “어찌하여 산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 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느니라. 갈릴리에 계실 때에 너희에게 어떻게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라.”고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은 깨닫지 못했습니다.
제자들이 왜 이렇게 답답합니까? 그 이유는 믿음의 문이 닫혔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은 어려운 때를 대비한 믿음을 준비해 두지 못했습니다. 주님께서 함께 계실 때에 그렇게 믿음을 준비하라고 하셨지만, 그들은 ‘설마’하며 안일하게 생각했고, 오히려 자리 다툼에만 마음이 쏠려 있었습니다.
저나 여러분도 마찬가지입니다. 그토록 ‘갑자기 닥칠 어려운 때를 대비하여 깨어 있어 믿음을 준비하라.’고 하지만, 마음속으로는 ‘준비는 해야겠는데, 설마 내게까지야!’라는 생각으로 무시해버립니다. 그러고는 다시 눈앞의 세상일에 매어 까맣게 잊어버립니다. 그러다가 어려움이 닥치면 부랴부랴 주님을 찾고, 이리저리 도움을 구해보지만 준비하지 못한 자의 고통만 더할 뿐입니다.
믿음은 어려운 때를 위한 것입니다. 평안할 때는 특별히 큰 믿음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마치 우리가 각종 보험을 드는 것과 같습니다. 나는 지금 건강하고, 또한 아이들도 어려서 당장 많은 학자금이 들어가는 것도 아닙니다. 하지만 자동차 보험도 들고, 암 보험도 들고, 교육보험도 듭니다. 왜 그렇게 합니까? 언제 닥칠지 모르는 어려운 때와 예상되는 수요를 대비하기 위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믿음의 보험을 들어놓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어려움이 닥치고 낙심이 될 때에 믿음의 문을 열 수 없었습니다. 믿음의 문을 만들지 않았기 때문이지요. 고난과 근심과 좌절과 낙심의 때를 위하여 믿음을 준비하십시오. 믿음을 준비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내 영에 새겨두는 것이며, 주님과의 교제의 줄을 끊지 않고 유지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고난의 때, 근심의 때, 낙심의 때에는 그 믿음의 문을 여십시오. 믿음의 문을 열면 소망이 보입니다.
2. 낙심이 될 때는 주님을 부르십시오.
요한 웨슬레의 명언 중에 “가장 최선은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시는 것이다.(The best of all is God is with us.)”라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에게 있어서 가장 최선의 시간은 지금입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시간은 과거도 아니고 미래도 아니고 지금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는 과거도 미래도 없습니다. 하나님께는 모든 시간이 항상 현재입니다. 그리고 주님을 구주로 영접한 성도들에게는 지금 주님이 함께 하십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와 동행하신 것처럼, 지금 우리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눈에 보이는 이상으로 더 확실하게 우리의 길에 동행하시고, 우리의 식탁에 같이 앉아 주십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성령께서 우리 영에 거주하십니다. 그래서 우리 몸은 성전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주님이 우리와 항상 함께 하시지만 우리 자신의 사정을 아뢰고, 도움을 구하고, 불러야 합니다. 구약성경에서나 신약성경에서나 모두 동일하게 이 사실을 말씀하십니다. 죄악으로 인하여 나라가 망하고 노예생활을 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회복을 약속하시면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에스겔36:37,38절입니다.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래도 이스라엘 족속이 이와 같이 자기들에게 이루어 주기를 내게 구하여야 할지라. 내가 그들의 인수로 양 떼같이 많아지게 하되, 제사드릴 양 떼, 곧 예루살렘 정한 절기의 양 떼같이 황폐한 성읍에 사람의 떼로 채우리라. 그리한즉 그들이 나를 여호와인줄 알리라.”고 하셨습니다. 마태복음7:7,8절에서는 예수님께서,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얻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들은 동행하시며 말씀을 풀어주시는 분이 예수님이신 줄 몰랐습니다. 하지만 말씀의 신비로움에 도취되어 지나가시려는 예수님을 강권하여 자신들과 함께 하시도록 붙잡았습니다. 풍랑 이는 바다를 괴롭게 노를 저으며 항해하던 제자들은 자신들의 힘의 한계를 느낄 때에야 비로소 주무시던 예수님을 깨우며 도움을 구했습니다. 엠마오의 두 제자가 주님을 붙잡았을 때에 주님은 그들의 눈을 밝히셨습니다. 풍랑 이는 바다에서 제자들은 늦었지만 주님을 깨우며 부르짖었을 때에 바람과 파도를 잔잔케 하셨습니다.
여러분은 지금 주님께 아뢰고 부르짖고 있습니까? 여러분의 마음이 낙심되고, 어려움과 근심에 쌓일 때, 일들이 가로막히고 고통스러울 때, 함께 하시는 주님을 부르십시오. 도움을 구하십시오. 사정을 아뢰십시오. 이것이 주님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주님을 의지하면 약속대로 주님이 도와주십니다. 혹시라도 세상 사람이나 권력이나 재물을 의지하지 마세요. 세상은 우리의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
제가 초등학생 시절 가을 운동회 때였습니다. ‘손님 찾기 장애물 경기’가 있었습니다. 운동장 트랙에 여러 가지 장애물이 있고, 장애물을 다 넘으면 접힌 종이쪽지가 나란히 있습니다. 그 중의 하나를 선택하여 펴면, 그 곳에는 이름이 적혀 있습니다.
우리 반의 육상선수였던 아이가 들어있는 조였습니다. 그 조에 키도 작고 잘 달리지 못하는 친구가 있었습니다. “땅!” 하는 총소리와 함께 다섯 명의 아이들이 달립니다. 육상선수인 아이는 당연히 선두에서 사다리를 통과하고 뜀틀을 뛰어넘고, 가마니를 통과하여 종이를 집어 들었습니다. 그런데 그 육상선수의 얼굴이 울상이 되었습니다. 그 아이는 관중석을 두리번거리다가 자기 할머니를 불러서 손을 잡고 뜁니다.
꼴찌로 도착한 키 작은 친구는 본부석이 있는 곳으로 가더니 ‘체육 선생님!’이라고 소리쳤습니다. 체육 선생님은 그 아이를 들쳐 업고 뛰었습니다. 결과는 뻔하지요. 가장 못 달리는 친구가 일등을 했습니다.
함께 하는 사람이 많고 적음보다, 누가 함께 하느냐가 중요합니다. 우리에게는 창조주 하나님이시며, 온 피조세계의 주인이신 주님께서 함께 하십니다. 그분은 우리를 지으신 분이시며, 구원하신 분이시며, 지금도 함께 하시며, 영원한 나라로 인도하셔서 영원토록 함께 하실 하나님이십니다.
이 능력의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데도 불구하고 고통하고 근심하고 낙심하지는 않습니까? 부르지 않았기 때문이며, 도움을 구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요한복음16:24절입니다.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고 약속하십니다.
이제, 어려운 때를 위하여 믿음을 준비합시다. 말씀을 영의 창고에 쌓고, 주님과의 교통의 줄을 잡읍시다. 그리고 함께하시는 주님을 부르고, 도움을 구하고, 사정을 아룁시다. 그리하여 무능한 사람이 아니라, 능력 있는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사랑과 행복과 기쁨을 누리시기를 축원합니다.
*** 들어가는 말
어느 청년 성도가 얼굴에 근심이 가득한 모습이었습니다. “왜 그렇게 얼굴이 어두우냐?”고 물었습니다. 청년은 ‘가정의 일이 실타래가 엉키듯이 꼬여서 실마리를 잡을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은 도무지 제 사정을 모르십니다. 일마다 되는 것이 없고 문들이 모두 닫혀서 나갈 수 있는 길이 없습니다.”라고 했습니다.
여러분은 혹시 삶의 일들이 꼬이고 실마리를 잡을 수 없어서 답답할 때가 없습니까? 우리 옛 말에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라고 했지만, 사방을 둘러보아도 도무지 탈출구가 없는 것처럼 여겨질 때가 있습니까? 저는 지금도 세상을 보고, 세상적인 눈으로 일들을 보면 가슴이 답답하고 도무지 실마리가 잡히지 않을 것처럼 여겨질 때가 있습니다.
본문의 상황이 이러합니다.
본문에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장사되신 후에 제자들에게 일어난 일련의 일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죽으시자 따르던 제자들은 두려움에 사로잡혀 제대로 거리를 다니지도 못했습니다. 예수님이 장사된 지 사흘이 지난 아침에 어떤 여인들이 예수님이 다시 살아나셨다고 했지만, 제자들의 마음에는 여전히 ‘모든 것이 다 끝났다.’는 좌절감이 엄습했습니다. 제자들은 하나 둘씩 제 갈 길로 흩어져 갔습니다.
예수님의 열 두 제자 중에 하나는 배반하여 죽었고, 갈릴리가 고향인 제자들과 또 다른 제자들이 합세하여 일곱 명은 고향으로 돌아갔습니다. 예루살렘에서 가까운 ‘엠마오’가 집인 두 제자도 ‘더 이상 기대할 것이 아무것도 없는’ 허탈한 마음으로 집으로 향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기대는 본문21절에서 “우리는 이 사람이 이스라엘을 구속할 자라고 바랐노라.”고 한 표현에서 잘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의 기대는 예수님이 사형을 받아 죽음으로서 산산이 부수어졌습니다. 이제 더 이상 길은 없습니다. 다시 예전의 그 고통스러운 삶의 자리로 돌아가는 것뿐입니다.
지금 우리나라의 현실을 보아도, 한국교회의 현실을 보아도, 마음은 낙심이 됩니다. 사람의 힘으로는 어떻게 할 수 없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혹시 이런 심정이 되어 마음이 낙심될 때가 있습니까? 기대했던 일들이 실타래처럼 엉키어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몰라 낙심이 되고 근심이 쌓일 때가 없습니까?
누가복음18장18절 이하에는 부자청년에 대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부자청년은 예수님께 나아와서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라고 묻습니다. 예수님은 ‘계명을 지키고, 네 소유를 다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고 너는 나를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청년은 심히 근심하면서 돌아갔다고 했습니다. 그 때에 주님께서 “재물이 있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어떻게 어려운지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고 하셨습니다. 그 때 사람들은 낙심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탄식합니다.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나이까?”
세상적인 기준으로 생각하면 불가능입니다. 쥐도 아니고 개미도 아니고 그 큰 약대가 어떻게 바늘귀로 빠져나가겠습니까? 이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사람들은 자신들의 능력의 한계에 부딪칠 때에, 자신의 이해력을 벗어날 때에 불가능이라고 생각하며 낙심하게 됩니다. 그런데 주님의 대답을 들어보십시오. “무릇 사람의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은 하실 수 있느니라.”(눅18:27)고 하십니다. 이태리 속담에도 “하나님은 문을 닫으시되, 창문은 열어 두신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모든 길이 막히고, 모든 문이 닫힌 듯한 상황에서 사람이 낙심될 때에도 길은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본문을 통하여 그 길을 가르쳐 주십니다. 말씀을 들으면서 여러분이 생각하는 나름대로의 길을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1. 낙심이 될 때에는 믿음의 문을 여십시오.
본문22-24절을 보십시오. 엠마오로 향하던 두 제자가 부활하신 예수님께 하는 말입니다. “또한 우리 중에 어떤 여자들이 우리로 놀라게 하였으니, 이는 저희가 새벽에 무덤에 갔다가 그의 시체는 보지 못하고 와서 ‘그가 살으셨다.’ 하는 천사들의 나타남을 보았다 함이라. 또 우리와 함께 한 자 중에 두어 사람이 무덤에 가 과연 여자들의 말한 바와 같음을 보았으나 ‘예수는 보지 못하였느니라.’ 하거늘”
이들의 말을 들으면서 생각나는 것이 없습니까? 예수님께서 이 일에 대하여 예고하신 말씀입니다. 마태복음16:21절에서 “이 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 삼 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가르치시니”라고 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이 후로도 두 번을 더 같은 말씀으로 가르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26:32절에서는 “그러나 내가 살아난 후에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리라.”고 강조하셨습니다.
사람이 지나치게 근심이 되고 낙심이 되면 생각하는 능력과 이해력이 떨어집니다. 제자들도 당장 눈앞에 닥친 어려움과 근심으로 인하여 이미 이전에 이 일에 대하여 말씀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생각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천사의 입을 통하여 다시 기억나게 하셨습니다. 본문 앞 쪽의 5-6절입니다. “어찌하여 산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 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느니라. 갈릴리에 계실 때에 너희에게 어떻게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라.”고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은 깨닫지 못했습니다.
제자들이 왜 이렇게 답답합니까? 그 이유는 믿음의 문이 닫혔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은 어려운 때를 대비한 믿음을 준비해 두지 못했습니다. 주님께서 함께 계실 때에 그렇게 믿음을 준비하라고 하셨지만, 그들은 ‘설마’하며 안일하게 생각했고, 오히려 자리 다툼에만 마음이 쏠려 있었습니다.
저나 여러분도 마찬가지입니다. 그토록 ‘갑자기 닥칠 어려운 때를 대비하여 깨어 있어 믿음을 준비하라.’고 하지만, 마음속으로는 ‘준비는 해야겠는데, 설마 내게까지야!’라는 생각으로 무시해버립니다. 그러고는 다시 눈앞의 세상일에 매어 까맣게 잊어버립니다. 그러다가 어려움이 닥치면 부랴부랴 주님을 찾고, 이리저리 도움을 구해보지만 준비하지 못한 자의 고통만 더할 뿐입니다.
믿음은 어려운 때를 위한 것입니다. 평안할 때는 특별히 큰 믿음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마치 우리가 각종 보험을 드는 것과 같습니다. 나는 지금 건강하고, 또한 아이들도 어려서 당장 많은 학자금이 들어가는 것도 아닙니다. 하지만 자동차 보험도 들고, 암 보험도 들고, 교육보험도 듭니다. 왜 그렇게 합니까? 언제 닥칠지 모르는 어려운 때와 예상되는 수요를 대비하기 위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믿음의 보험을 들어놓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어려움이 닥치고 낙심이 될 때에 믿음의 문을 열 수 없었습니다. 믿음의 문을 만들지 않았기 때문이지요. 고난과 근심과 좌절과 낙심의 때를 위하여 믿음을 준비하십시오. 믿음을 준비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내 영에 새겨두는 것이며, 주님과의 교제의 줄을 끊지 않고 유지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고난의 때, 근심의 때, 낙심의 때에는 그 믿음의 문을 여십시오. 믿음의 문을 열면 소망이 보입니다.
2. 낙심이 될 때는 주님을 부르십시오.
요한 웨슬레의 명언 중에 “가장 최선은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시는 것이다.(The best of all is God is with us.)”라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에게 있어서 가장 최선의 시간은 지금입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시간은 과거도 아니고 미래도 아니고 지금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는 과거도 미래도 없습니다. 하나님께는 모든 시간이 항상 현재입니다. 그리고 주님을 구주로 영접한 성도들에게는 지금 주님이 함께 하십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와 동행하신 것처럼, 지금 우리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눈에 보이는 이상으로 더 확실하게 우리의 길에 동행하시고, 우리의 식탁에 같이 앉아 주십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성령께서 우리 영에 거주하십니다. 그래서 우리 몸은 성전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주님이 우리와 항상 함께 하시지만 우리 자신의 사정을 아뢰고, 도움을 구하고, 불러야 합니다. 구약성경에서나 신약성경에서나 모두 동일하게 이 사실을 말씀하십니다. 죄악으로 인하여 나라가 망하고 노예생활을 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회복을 약속하시면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에스겔36:37,38절입니다.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래도 이스라엘 족속이 이와 같이 자기들에게 이루어 주기를 내게 구하여야 할지라. 내가 그들의 인수로 양 떼같이 많아지게 하되, 제사드릴 양 떼, 곧 예루살렘 정한 절기의 양 떼같이 황폐한 성읍에 사람의 떼로 채우리라. 그리한즉 그들이 나를 여호와인줄 알리라.”고 하셨습니다. 마태복음7:7,8절에서는 예수님께서,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얻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들은 동행하시며 말씀을 풀어주시는 분이 예수님이신 줄 몰랐습니다. 하지만 말씀의 신비로움에 도취되어 지나가시려는 예수님을 강권하여 자신들과 함께 하시도록 붙잡았습니다. 풍랑 이는 바다를 괴롭게 노를 저으며 항해하던 제자들은 자신들의 힘의 한계를 느낄 때에야 비로소 주무시던 예수님을 깨우며 도움을 구했습니다. 엠마오의 두 제자가 주님을 붙잡았을 때에 주님은 그들의 눈을 밝히셨습니다. 풍랑 이는 바다에서 제자들은 늦었지만 주님을 깨우며 부르짖었을 때에 바람과 파도를 잔잔케 하셨습니다.
여러분은 지금 주님께 아뢰고 부르짖고 있습니까? 여러분의 마음이 낙심되고, 어려움과 근심에 쌓일 때, 일들이 가로막히고 고통스러울 때, 함께 하시는 주님을 부르십시오. 도움을 구하십시오. 사정을 아뢰십시오. 이것이 주님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주님을 의지하면 약속대로 주님이 도와주십니다. 혹시라도 세상 사람이나 권력이나 재물을 의지하지 마세요. 세상은 우리의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
제가 초등학생 시절 가을 운동회 때였습니다. ‘손님 찾기 장애물 경기’가 있었습니다. 운동장 트랙에 여러 가지 장애물이 있고, 장애물을 다 넘으면 접힌 종이쪽지가 나란히 있습니다. 그 중의 하나를 선택하여 펴면, 그 곳에는 이름이 적혀 있습니다.
우리 반의 육상선수였던 아이가 들어있는 조였습니다. 그 조에 키도 작고 잘 달리지 못하는 친구가 있었습니다. “땅!” 하는 총소리와 함께 다섯 명의 아이들이 달립니다. 육상선수인 아이는 당연히 선두에서 사다리를 통과하고 뜀틀을 뛰어넘고, 가마니를 통과하여 종이를 집어 들었습니다. 그런데 그 육상선수의 얼굴이 울상이 되었습니다. 그 아이는 관중석을 두리번거리다가 자기 할머니를 불러서 손을 잡고 뜁니다.
꼴찌로 도착한 키 작은 친구는 본부석이 있는 곳으로 가더니 ‘체육 선생님!’이라고 소리쳤습니다. 체육 선생님은 그 아이를 들쳐 업고 뛰었습니다. 결과는 뻔하지요. 가장 못 달리는 친구가 일등을 했습니다.
함께 하는 사람이 많고 적음보다, 누가 함께 하느냐가 중요합니다. 우리에게는 창조주 하나님이시며, 온 피조세계의 주인이신 주님께서 함께 하십니다. 그분은 우리를 지으신 분이시며, 구원하신 분이시며, 지금도 함께 하시며, 영원한 나라로 인도하셔서 영원토록 함께 하실 하나님이십니다.
이 능력의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데도 불구하고 고통하고 근심하고 낙심하지는 않습니까? 부르지 않았기 때문이며, 도움을 구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요한복음16:24절입니다.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고 약속하십니다.
이제, 어려운 때를 위하여 믿음을 준비합시다. 말씀을 영의 창고에 쌓고, 주님과의 교통의 줄을 잡읍시다. 그리고 함께하시는 주님을 부르고, 도움을 구하고, 사정을 아룁시다. 그리하여 무능한 사람이 아니라, 능력 있는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사랑과 행복과 기쁨을 누리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