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혜롭고 순결하게
작성자 배의신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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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03-10-18 22:19
♡♥♡ 지혜롭고 순결하게 / 마10:16
*** 들어가는 말
“보라.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 보냄과 같도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같이 지혜롭고 비둘기같이 순결하라.”
이 말씀을 생각하노라면, 주님께서 제자들을 많이 아끼고 사랑하심을 느낄 수 있습니다. 아직 신앙이 어린 제자들을 세상에 내 보내는 것이 안쓰러운 마음으로 신신당부하는 부모님 같은 마음입니다. 마치 어린양처럼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 아이를 시냇가에 내 놓는 부모의 마음입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뱀같이 지혜롭고 비둘기같이 순결하라.”고 당부하십니다.
주님은 지금 우리들에게도 이와 같이 당부하십니다. ‘이리’같은 험난한 세상에서 아무런 방어책도 없이 살아가는 ‘양’같은 성도들에게 주님은 살아갈 원리를 가르쳐 주십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신 세상에서 나그네로 사는 성도의 삶의 원리는 ‘지혜롭고 순결하게 사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뱀’과 ‘비둘기’라는 두 동물의 이미지를 사용하셔서 강렬한 인상을 심어주고 계십니다. 주님께서는 그만큼 제자들이 잊지 않고 기억하기를 바라신 것입니다.
‘뱀’은 ‘유혹자’의 대표적인 이미지입니다. 하와를 유혹하여 금단의 열매를 따먹게 하고, 남편까지 유혹하게 하여 인류를 하나님으로부터 떨어지게 했습니다. 이 뱀의 정체를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계시록20:2절입니다. “용을 잡으니 곧 옛 뱀이요, 마귀요, 사단이라.” 그리고 계시록12:9절에서는, “큰 용이 내어 쫓기니, 옛 뱀 곧 마귀라고도 하고 사단이라고도 하는 온 천하를 꾀는 자라. 땅으로 내어 쫓기니 그의 사자들도 저와 함께 내어 쫓기니라.”고 했습니다. “옛 뱀”이란, 하와를 유혹했던 바로 그 뱀을 말합니다.
사단과 마귀는 창세로부터 지금까지, 그리고 심판을 받아 지옥에 갇힐 때까지 사람들을 미혹케 하고,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고 떨어지게 하는 유혹자입니다. 주님께서는 이 유혹자의 근원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요한복음8:44절입니다.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을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저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저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니라.”고 하십니다. 사단은 욕심과 살인과 불법과 거짓으로 자신의 뜻을 이룹니다. 이것이 바로 세상 사람들의 지혜입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러한 사단의 것인 세상의 지혜를 가지라고 하신 것입니까? 결코 아닙니다. 뱀의 지혜를 가지라는 것이 아니라, 뱀 같은 그런 지혜로운 마음을 가지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면서 주님은 제자들이 가져야 할 지혜로운 마음을 17절 이하에서 열거하십니다. 대표적으로 19-20절을 봅시다.
“너희를 넘겨 줄 때에 어떻게 또는 무엇을 말할까 염려치 말라. 그 때에 무슨 말할 것을 주시리니,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속에서 말씀하시는 자 곧 너희 아버지의 성령이시니라.”
주님은 제자들이 복음을 전하다가 사람들에게 잡혀서 관리들에게 넘겨질 때를 말씀하십니다. 이런 난감한 일을 당했을 때에 세상적인 잔꾀로 벗어나려 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런 때에 염려도 되고 당황되겠지만, 인간적인 잔꾀를 부리지 말고, 주님을 의지하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을 의지하고 담대하게 나아가면 성령께서 대답할 말을 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주님이 말씀하시는 지혜가 바로 이것입니다. “성령의 도우심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성령님은 성도와 항상 함께 하시면서 성도를 도우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뿐만 아니라 무작정 주님을 위하여 핍박을 받고 도전에 맞서라고 하지 않으십니다. 성령께서는 우리의 걸음을 인도하시면서 때로는 부딪치지 않고 피하게도 하십니다(22-23절). 상대할 가치가 없으면 피해야 합니다. 험담이나 비난, 세상의 유혹, 이단사상 등 이런 것에는 맞서지 말고 피하는 것이 가장 좋은 길입니다. 이런 일을 상대하면 쓸데없는 논쟁이 일어날 뿐입니다. 디모데전서6:20절에서는 “디모데야 네게 부탁한 것을 지키고 거짓되이 일컫는 지식의 망령되고 허한 말과 변론을 피하라.”고 하셨고, 디도서3:9절에서는 “그러나 어리석은 변론과 족보 이야기와 분쟁과 율법에 대한 다툼을 피하라 이것은 무익한 것이요 헛된 것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이처럼 우리를 인도하시는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사려 깊고 신중하게 따르는 것이 지혜입니다.
주님은 이어서 “비둘기같이 순결하라.”고 하십니다. 비둘기는 온유한 성품과 순결과 순종의 이미지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성령께서 비둘기 형상으로 나타나기도 하셨습니다. ‘순결함’이란, 원어에서는 ‘섞이지 않는’, ‘순진한’, ‘죄 없는’, ‘단순한’ 등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즉 불의 와 섞이지 않는 것은 ‘세상과 타협하지 않는 것’이며, 세상의 더러움과 섞이지 않는 것은 ‘순수한 성품’입니다. 그리고 세상적인 잔꾀를 부리지 않고 단순하게 주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어떤 분들은 ‘예수를 믿어도 요령껏 믿어야지 죽자 사자 믿느냐.’라고 합니다. 성도들 가운데서도 ‘교회의 일이나, 섬김의 일이나, 봉사 하는 일을 적당히 하라.’고 합니다. 요령이나 적당한 것이나 좋은 의미로 사용되면 ‘최선을 다하면서도 한계를 넘지 않는 지혜로움’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의미는 ‘자신의 유익과 남의 시선을 고려하여 눈치껏’이라는 좋지 않은 것입니다. 이런 상태는 하나님께서 싫어하시는 형태입니다.
아합 왕 시대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우상과 하나님 사이에서 적당하게 처신하고 있었습니다. 세상적으로 본다면 요령 있는 처신이겠지요.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열왕기상18:21절에서 “너희가 어느 때까지 두 사이에서 머뭇머뭇 하려느냐? 여호와가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좇고 바알이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좇을지니라.”고 하셨습니다. 소아시아 교회 중에서 라오디게아 교회도 역시 세상과 하나님 사이에서 적당하고 요령껏 처신하고 있었습니다. 핍박도 피하고 생계도 유지할 수 있는 일거양득(一擧兩得)의 길이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요한계시록3:15-16절에서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더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더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더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내치리라.”고 하십니다.
여러분이 만일 자신이나 가족의 생계가 걸린 문제라든지, 생명이 걸린 문제라면 적당하고 요령껏 하겠습니까? 아마도 죽어라고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도인 우리는 이처럼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성령의 인도하심에 의지해야 합니다. 그리고 불의와 세상과 타협하지 않는 순수한 마음과 오직 주님을 바라보는 단순한 믿음으로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매일 매 순간을 이러한 마음으로 살도록 힘써야 합니다.
이처럼 지혜로움과 순결함은 두 발처럼 안전하고 든든하게 설 수 있게 합니다. 둘 중에 하나라도 빠지면 위태롭고 불안정하게 됩니다.
미국의 한 인디언부족은 그들의 딸이 성숙해지면 옥수수 밭으로 데리고 가서 인생교육을 시킨다고 합니다. 아버지는 딸을 옥수수 밭의 한 고랑에 세워두고는, ‘밭의 끝까지 가면서 가장 좋은 옥수수를 따라.’고 합니다. 그런데 한번 내디딘 발걸음을 돌이키거나 한번 본 옥수수를 다시 보지 않아야 합니다.
이 시험을 거친 대부분의 딸들은 밭고랑 끝까지 이르도록 옥수수를 따지 못한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좋은 옥수수가 눈에 띄어도 다음에 더 좋은 옥수수가 나타날 것 같아 따지 않고 지나치다가 결국은 못 따고 빈손이 되는 것입니다. 이 과정을 통하여 인디언들은 그들의 딸에게 남편감을 잘 고르도록 교훈했다고 합니다.
지금 세상은 요지경 같은 세상이고, 육신의 욕망을 자극하는 세상이며, 유혹자들이 이 끝없이 깊은 웅덩이로 유혹하고 있습니다. 어느 것이 옳은 것인지 선택하기가 무척 어렵습니다. 하지만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사려 깊고 신중하게, 그리고 세상과 타협하지 않고 주님을 바라보고 나아갑시다. 이처럼 지혜롭고 순결하게 살면 우리에게 주어진 한 번 뿐인 인생의 기회를 결코 빈손으로 끝내지는 않을 것입니다. 우리 주님이 함께 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가 주님을 의지하는 지혜와 순결함으로 최상의 열매들을 수확하는 복된 삶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 들어가는 말
“보라.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 보냄과 같도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같이 지혜롭고 비둘기같이 순결하라.”
이 말씀을 생각하노라면, 주님께서 제자들을 많이 아끼고 사랑하심을 느낄 수 있습니다. 아직 신앙이 어린 제자들을 세상에 내 보내는 것이 안쓰러운 마음으로 신신당부하는 부모님 같은 마음입니다. 마치 어린양처럼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 아이를 시냇가에 내 놓는 부모의 마음입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뱀같이 지혜롭고 비둘기같이 순결하라.”고 당부하십니다.
주님은 지금 우리들에게도 이와 같이 당부하십니다. ‘이리’같은 험난한 세상에서 아무런 방어책도 없이 살아가는 ‘양’같은 성도들에게 주님은 살아갈 원리를 가르쳐 주십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신 세상에서 나그네로 사는 성도의 삶의 원리는 ‘지혜롭고 순결하게 사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뱀’과 ‘비둘기’라는 두 동물의 이미지를 사용하셔서 강렬한 인상을 심어주고 계십니다. 주님께서는 그만큼 제자들이 잊지 않고 기억하기를 바라신 것입니다.
‘뱀’은 ‘유혹자’의 대표적인 이미지입니다. 하와를 유혹하여 금단의 열매를 따먹게 하고, 남편까지 유혹하게 하여 인류를 하나님으로부터 떨어지게 했습니다. 이 뱀의 정체를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계시록20:2절입니다. “용을 잡으니 곧 옛 뱀이요, 마귀요, 사단이라.” 그리고 계시록12:9절에서는, “큰 용이 내어 쫓기니, 옛 뱀 곧 마귀라고도 하고 사단이라고도 하는 온 천하를 꾀는 자라. 땅으로 내어 쫓기니 그의 사자들도 저와 함께 내어 쫓기니라.”고 했습니다. “옛 뱀”이란, 하와를 유혹했던 바로 그 뱀을 말합니다.
사단과 마귀는 창세로부터 지금까지, 그리고 심판을 받아 지옥에 갇힐 때까지 사람들을 미혹케 하고,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고 떨어지게 하는 유혹자입니다. 주님께서는 이 유혹자의 근원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요한복음8:44절입니다.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을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저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저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니라.”고 하십니다. 사단은 욕심과 살인과 불법과 거짓으로 자신의 뜻을 이룹니다. 이것이 바로 세상 사람들의 지혜입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러한 사단의 것인 세상의 지혜를 가지라고 하신 것입니까? 결코 아닙니다. 뱀의 지혜를 가지라는 것이 아니라, 뱀 같은 그런 지혜로운 마음을 가지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면서 주님은 제자들이 가져야 할 지혜로운 마음을 17절 이하에서 열거하십니다. 대표적으로 19-20절을 봅시다.
“너희를 넘겨 줄 때에 어떻게 또는 무엇을 말할까 염려치 말라. 그 때에 무슨 말할 것을 주시리니,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속에서 말씀하시는 자 곧 너희 아버지의 성령이시니라.”
주님은 제자들이 복음을 전하다가 사람들에게 잡혀서 관리들에게 넘겨질 때를 말씀하십니다. 이런 난감한 일을 당했을 때에 세상적인 잔꾀로 벗어나려 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런 때에 염려도 되고 당황되겠지만, 인간적인 잔꾀를 부리지 말고, 주님을 의지하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을 의지하고 담대하게 나아가면 성령께서 대답할 말을 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주님이 말씀하시는 지혜가 바로 이것입니다. “성령의 도우심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성령님은 성도와 항상 함께 하시면서 성도를 도우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뿐만 아니라 무작정 주님을 위하여 핍박을 받고 도전에 맞서라고 하지 않으십니다. 성령께서는 우리의 걸음을 인도하시면서 때로는 부딪치지 않고 피하게도 하십니다(22-23절). 상대할 가치가 없으면 피해야 합니다. 험담이나 비난, 세상의 유혹, 이단사상 등 이런 것에는 맞서지 말고 피하는 것이 가장 좋은 길입니다. 이런 일을 상대하면 쓸데없는 논쟁이 일어날 뿐입니다. 디모데전서6:20절에서는 “디모데야 네게 부탁한 것을 지키고 거짓되이 일컫는 지식의 망령되고 허한 말과 변론을 피하라.”고 하셨고, 디도서3:9절에서는 “그러나 어리석은 변론과 족보 이야기와 분쟁과 율법에 대한 다툼을 피하라 이것은 무익한 것이요 헛된 것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이처럼 우리를 인도하시는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사려 깊고 신중하게 따르는 것이 지혜입니다.
주님은 이어서 “비둘기같이 순결하라.”고 하십니다. 비둘기는 온유한 성품과 순결과 순종의 이미지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성령께서 비둘기 형상으로 나타나기도 하셨습니다. ‘순결함’이란, 원어에서는 ‘섞이지 않는’, ‘순진한’, ‘죄 없는’, ‘단순한’ 등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즉 불의 와 섞이지 않는 것은 ‘세상과 타협하지 않는 것’이며, 세상의 더러움과 섞이지 않는 것은 ‘순수한 성품’입니다. 그리고 세상적인 잔꾀를 부리지 않고 단순하게 주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어떤 분들은 ‘예수를 믿어도 요령껏 믿어야지 죽자 사자 믿느냐.’라고 합니다. 성도들 가운데서도 ‘교회의 일이나, 섬김의 일이나, 봉사 하는 일을 적당히 하라.’고 합니다. 요령이나 적당한 것이나 좋은 의미로 사용되면 ‘최선을 다하면서도 한계를 넘지 않는 지혜로움’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의미는 ‘자신의 유익과 남의 시선을 고려하여 눈치껏’이라는 좋지 않은 것입니다. 이런 상태는 하나님께서 싫어하시는 형태입니다.
아합 왕 시대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우상과 하나님 사이에서 적당하게 처신하고 있었습니다. 세상적으로 본다면 요령 있는 처신이겠지요.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열왕기상18:21절에서 “너희가 어느 때까지 두 사이에서 머뭇머뭇 하려느냐? 여호와가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좇고 바알이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좇을지니라.”고 하셨습니다. 소아시아 교회 중에서 라오디게아 교회도 역시 세상과 하나님 사이에서 적당하고 요령껏 처신하고 있었습니다. 핍박도 피하고 생계도 유지할 수 있는 일거양득(一擧兩得)의 길이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요한계시록3:15-16절에서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더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더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더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내치리라.”고 하십니다.
여러분이 만일 자신이나 가족의 생계가 걸린 문제라든지, 생명이 걸린 문제라면 적당하고 요령껏 하겠습니까? 아마도 죽어라고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도인 우리는 이처럼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성령의 인도하심에 의지해야 합니다. 그리고 불의와 세상과 타협하지 않는 순수한 마음과 오직 주님을 바라보는 단순한 믿음으로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매일 매 순간을 이러한 마음으로 살도록 힘써야 합니다.
이처럼 지혜로움과 순결함은 두 발처럼 안전하고 든든하게 설 수 있게 합니다. 둘 중에 하나라도 빠지면 위태롭고 불안정하게 됩니다.
미국의 한 인디언부족은 그들의 딸이 성숙해지면 옥수수 밭으로 데리고 가서 인생교육을 시킨다고 합니다. 아버지는 딸을 옥수수 밭의 한 고랑에 세워두고는, ‘밭의 끝까지 가면서 가장 좋은 옥수수를 따라.’고 합니다. 그런데 한번 내디딘 발걸음을 돌이키거나 한번 본 옥수수를 다시 보지 않아야 합니다.
이 시험을 거친 대부분의 딸들은 밭고랑 끝까지 이르도록 옥수수를 따지 못한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좋은 옥수수가 눈에 띄어도 다음에 더 좋은 옥수수가 나타날 것 같아 따지 않고 지나치다가 결국은 못 따고 빈손이 되는 것입니다. 이 과정을 통하여 인디언들은 그들의 딸에게 남편감을 잘 고르도록 교훈했다고 합니다.
지금 세상은 요지경 같은 세상이고, 육신의 욕망을 자극하는 세상이며, 유혹자들이 이 끝없이 깊은 웅덩이로 유혹하고 있습니다. 어느 것이 옳은 것인지 선택하기가 무척 어렵습니다. 하지만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사려 깊고 신중하게, 그리고 세상과 타협하지 않고 주님을 바라보고 나아갑시다. 이처럼 지혜롭고 순결하게 살면 우리에게 주어진 한 번 뿐인 인생의 기회를 결코 빈손으로 끝내지는 않을 것입니다. 우리 주님이 함께 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가 주님을 의지하는 지혜와 순결함으로 최상의 열매들을 수확하는 복된 삶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