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가는 일체의 비결
작성자 배의신 댓글
/ 조회: 7,161회
작성일
2003-10-13 11:47
♡♥♡ 살아가는 일체의 비결 / 빌4:11-13
*** 들어가는 말
세상에는 수많은 인종이 있고, 인종마다 특색 있는 문화를 형성하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문화란 곧 사람들이 살아가는 삶의 자취입니다. 그래서 민족이나 인종들의 문화를 살펴보면 그들이 추구하는 것이나 살아온 환경을 짐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각 민족이나 인종들은 여건이나 환경에 따라서 나름대로의 살아가는 방식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처럼 사람들이 살아가는 환경이나 방식이나 추구하는 것에 차이가 있다할지라도, 근본적인 인간의 삶이라고 하는 것은 같습니다. 즉 첨단 과학으로 발달한 사회에서 사는 사람들이나, 열악한 환경에서 미개한 생활을 하는 사람들이나, 의식주 생활, 종족보존의 본능, 가정과 집단을 이루고 살아가는 인간의 근본적인 삶은 같습니다.
중요한 것은 ‘어떤 삶의 환경과 문화 속에서 살든지 기쁨과 즐거움과 만족이 있느냐?’라고 하는 것입니다. 만일 첨단 과학이 발달한 사회에서 부와 권력을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삶의 즐거움과 만족이 없다면 불행한 인생입니다. 반면에 가난하고 미개한 환경에서 살더라도 삶이 즐겁고 만족이 있다면 행복한 인생입니다. 잠언15:16-17절(현대어성경)에서, “가진 것 많지 않아 비록 가난하여도 여호와 모시고 살아가는 나날은, 가진 것 많아 걱정거리 많은 부자들보다도 행복한 나날이라. 값싼 채소만 먹고 살면서도 서로 우애 있게 아껴 주며 사는 것이, 값비싼 갈비짝 뜯으면서도 서로 못미더워 증오하는 것보다 행복하다.”고 했습니다.
여러분은 어떠합니까? 지금의 삶이 행복하고 만족합니까?
본문에는 사도 바울이 ‘어떤 환경에서도 살아가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다.’고 고백하면서 그 비결을 공개했습니다. 우리도 이 시간에 바울이 터득한 살아가는 비결을 배우려고 합니다.
1. 환경을 이기는 것이 그리스도인이 살아가는 비결입니다.
빌립보서는 사도 바울이 로마 감옥에 갇혀있을 때 빌립보교회에 보낸 서신입니다. 감옥에 갇혀 있는 사람이 자유로운 성도들을 오히려 위로하면서 “너희도 기뻐하고 나와 함께 기뻐하라.”(빌2:19)고 했으며,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빌4:4)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사도 바울은 비참하고 우울한 환경에서도 기뻐하고 즐거워했습니다.
바울은 이처럼 기쁘게 살 수 있는 비결이 환경을 극복한 것에서 비롯되었다고 고백합니다. 이러한 기쁨의 삶은 환경을 이긴 사람이 아니면 불가능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고 했습니다. 그 비결은 “어떠한 형편에서든지 내가 자족하기를 배웠노니”라는 구절 속에 있습니다. 즉 “만족하는 것”입니다.
‘만족함’은 하나님을 온전히 믿고 의지하는 그리스도인에게서 나타나는 특징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이 모든 역사와 환경과 일들을 다스리시며 섭리하심을 믿기 때문입니다. 모든 일이 잘 되고, 행복하고, 부귀영화를 누리면서 만족하는 것은 세상 사람들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사도 바울처럼 온갖 고생과 억울한 매 맞음과 감옥살이, 죽음의 위기에 이르는 환경까지도 만족하는 것입니다. 골로새서1:24절을 봅시다. “내가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 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고 고백합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합니까?
그 해답은 앞 쪽에 있습니다. 빌립보서3:10-11절을 봅시다. (한글 킹 제임스 역)“이는 내가 그를 알고 그의 부활의 능력과 그의 고난의 교제를 알아 그의 죽음의 본을 따르려 함이며,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자들의 부활에 이르려는 것이라.”고 합니다. 바울의 목표는 부활의 삶입니다. 즉 주님께서 약속하신 하나님 나라에서의 영광스러운 부활의 삶을 누리는 것이 목표입니다. 이 목표를 바라는 기쁨으로 인하여 지금의 모든 환경이 어떤 것이었든 오히려 영광스러운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이어지는 14절에서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고 한 것입니다.
환경을 이기는 삶의 비결은 모든 일에 만족하는 것이며, 환경을 뛰어 넘어 모든 일에 만족할 수 있는 비결은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부름의 상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화니 제인 크로스비(Fanny Jane Crosby, 1820-1915)’ 여사는 앞을 못 보는 맹인이면서 9,000여 편에 달하는 영감 넘치는 찬송시를 썼습니다. 우리 찬송가에도 23편이나 수록되어 있습니다. 337장“인애하신 구세주여”, 144장, “예수 나를 위하여 십자가를 질 때” 434장 “나의 갈길 다가도록” 204장 “예수로 나의 구주삼고”등 많은 성도들이 애창하는 찬송가들입니다.
크로스비는 어렸을 때에 식모의 실수로 소경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어려서부터 할머니가 들려주는 성경이야기를 듣고 영의 눈이 열렸습니다. 크로스비는 자신의 비관적인 환경에 굴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 환경을 기뻐했습니다.
크로스비는 “만약에 하나님이 나에게 시력을 허락해 주신다 해도 나는 안 받으렵니다. 하늘나라에 가면 밝은 눈을 주실 터인데, 세상에서 더럽혀지지 않은 깨끗한 눈으로 우리 주님의 얼굴을 보렵니다.”라면서 “나는 내 눈을 멀게 한 그 사람을 만난다면, 그에게 한없는 감사를 드리겠다.”고 했습니다.
우리나라의 ‘사랑의 원자탄’이라고 불리는 ‘손양원’목사님과 같은 그런 분입니다. 이런 삶이 결코 쉽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도 이렇게 살아가도록 힘써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성도들이 이런 삶을 살도록 끊임없이 권면합니다. 왜냐하면,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의 능력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 나라에서의 상급을 예비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이렇게 살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2. 능력 주시는 자 안에 머물러야 합니다.
신학교 교수였던 ‘버클러’ 박사가 한 해에는 전교에서 ‘희랍어’의 최고점을 받은 학생이 맹인임을 알았습니다. 교수는 그에게 “어떻게 볼 수 없으면서도 그 어려운 희랍어를 보는 사람들보다 더 잘 했느냐?”고 물었습니다. 그 맹인 학생은 빌립보서 4장13절로 대답했다고 합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수 있느니라.”
사도 바울은 ‘모든 환경에서 만족하며 살아가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다.’고 하면서,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고 했습니다. 아마 바울도 이 편지를 읽는 성도들이 ‘어떻게 모든 환경에서 만족하며 살아갈 수 있느냐?’라고 묻을 것을 예상 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 대답을 이어서 바로 기록했습니다.
바울은 어떤 환경을 만나도 만족할 수 있고, 기쁘게 살 수 있는 비결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다고 했습니다. “in the Lord”(주 안에서), “ἐν χρισω”(in christ, 예수 안에서)라는 말은 사도 바울의 모든 서신을 통하여 나타나는 핵심 구절입니다. 사도 바울이 살고, 일하고, 행하는 모든 것은 오로지 그리스도 예수를 위해서였습니다. 그래서 로마서14:8절에서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라.”고 했습니다.
여러분은 혹시 “그렇게 살아야 한다는 것은 알지만, 육신의 생활이 있는데 어떻게 그렇게 사나.”라는 생각이 안 드십니까? 물론 그렇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이 육신의 생활을 팽개치라는 말은 결코 아닙니다. 누구보다도 예수님께서 우리가 연약한 육체를 가지고 있음을 더 잘 알고 계십니다. 이 말씀은 성도가 모든 생활에서 환경을 다스리시고 섭리하시는 주님을 생각하며 순종하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살려고 힘써도 실수하고 다시 육신의 생활을 염려하고 환경에 매이게 된다는 것을 주님께서 아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더욱 주님을 의지하고 도움을 구하라는 것입니다.
힘들고 어렵지만, 하나님의 부름의 상을 기대하고, 하나님 나라의 영광을 기대하는 성도라면, 이렇게 살아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도 말하기를 “두 마리 토끼를 쫓으면 둘 다 놓친다.”고 했습니다. 주님께서는 마태복음6:24절에서,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며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며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고 하셨으며, 야고보 선생을 통하여 야고보4:4절에서, “간음하는 여자들이여, 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의 원수임을 알지 못하느뇨? 그런즉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 되게 하는 것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삶에 더 큰 비중을 두고 있습니까? 육신이 사는 이 세상입니까? 아니면 영원한 삶을 누릴 하나님의 나라입니까?
얼마 전에 세상을 뜬 한 어른을 알고 있습니다. 그분은 이 땅에서는 수 십 억원에 이르는 많은 재산을 모았습니다. 그러면서도 사는 것은 인색하고 구차하게 살았습니다. 제가 수차례 “영감님, 집도 깨끗하게 차리고 살고, 예수 믿고, 다른 사람들도 도우면서 여생을 즐겁게 사십시오.”라고 권면했습니다. 그러나 매번 “이렇게 살아도 좋은데 뭐”라고 하면서 애써 모은 재산을 아까워했습니다. 그런데 며칠 전에 그 많은 재산을 땀 한 방울 흘리지 않은 다른 사람에게 남겨두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또 한 분, 이 마을에 사셨던 할머니가 있었습니다. 그분은 일찍 남편과 사별하고 긴 세월을 아끼고 아껴서 수억 원 대의 재산을 소유했습니다. 그렇지만 거의 거지처럼 살았습니다. 먹는 것조차 아까워하며, 몇 십 원을 아까워했습니다. 그러면서 재산을 늘리려고 대금업을 했는데, 암으로 급작스럽게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 분은 많은 재산에 차용해 준 돈만해도 억대가 넘는다고 하는데, 죽고 나니 병원에 입원해 있었던 몇 달의 입원비가 없었으며, 장례비조차 없었습니다. 돈을 빌려간 사람들은 근거가 없기 때문에 모르는 척 했고, 남은 부동산은 자식도 없어서 친척들의 몫이 되고 말았습니다.
1993년에 200억 원대의 거액복권에 당첨됐던 재미교포 이옥자씨가 8년 만에 파산했다는 뉴스를 들으셨지요?
미국 현지 언론에 따르면 미주리주 세인트루이스에 거주하는 이 씨는 당시 약 234억 원짜리 복권에 당첨됐습니다. 그러나 과도한 기부와 도박, 투자 실패 등으로 이를 모두 탕진하고 2001년 7월에 미연방 미주리 동부지방 파산법원에서 파산절차를 밟고 있다고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복권이 당첨된 후 남편과 이혼하고 가정도 파탄이 났다고 합니다.
좀 더 편안하고 남들 보기에도 번듯한 삶을 살아보겠다고, 재물에 집착하고 세상일에 매이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지혜의 왕 솔로몬은 이미 이 사실을 간파하고 전 2:18-19절(현대어성경)에서 “내가 이 세상에서 수고하여 거둔 모든 것들을 다음 사람에게 넘겨주고 떠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 참으로 괴롭다. 게다가 내 뒤를 이을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일지 어리석은 사람일지 그 누가 안단 말인가? 그런데도 내가 이 세상에서 이루어 놓은 모든 것은 그의 것이 되고 만다니, 이 얼마나 허망한 일인가!”라고 탄식했습니다. 그러면서 솔로몬은 전도서2:24절에서 “사람이 먹고 마시며 수고하는 가운데서 심령으로 낙을 누리게 하는 것보다 나은 것이 없나니, 내가 이것도 본즉 하나님의 손에서 나는 것이로다.”라고 고백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에서 솔로몬처럼 부귀영화를 누린 사람은 전에도 없었고, 후에도 없으리라.’고 하셨습니다. 솔로몬은 1000명에 달하는 처첩을 거느렸으며, 금을 돌처럼 흔하게 썼다고 했습니다. 이 솔로몬이 전도서12:13-14절에서 생의 결론을 말하기를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명령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사람의 본분이니라. 하나님은 모든 행위와 모든 은밀한 일을 선악 간에 심판하시리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얻으려는 결론의 증거를 솔로몬에게서 찾을 수 있습니다. 어떤 환경을 만나도 만족할 수 있고, 기쁘게 살 수 있는 비결은 세상의 부귀영화가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습니다. 이것이 전도서의 결론이며, 사도 바울이 터득한 살아가는 일체의 비결입니다. 즉, 환경을 이기는 삶의 비결은 모든 일에 만족하는 것이며, 환경을 뛰어 넘어 모든 일에 만족할 수 있는 비결은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부름의 상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살아갈 수 있는 능력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있습니다.
이제, 우리 자신의 이 땅에서의 즐거움을 누리는 삶과 더 중요한 하나님 나라에서의 영원한 기쁨과 행복을 위하여 열심을 냅시다. 그리고 모든 생활 속에서 역사하시는 주님을 생각하면서 감사하며 만족하는 삶을 이루시기를 축원합니다.
*** 들어가는 말
세상에는 수많은 인종이 있고, 인종마다 특색 있는 문화를 형성하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문화란 곧 사람들이 살아가는 삶의 자취입니다. 그래서 민족이나 인종들의 문화를 살펴보면 그들이 추구하는 것이나 살아온 환경을 짐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각 민족이나 인종들은 여건이나 환경에 따라서 나름대로의 살아가는 방식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처럼 사람들이 살아가는 환경이나 방식이나 추구하는 것에 차이가 있다할지라도, 근본적인 인간의 삶이라고 하는 것은 같습니다. 즉 첨단 과학으로 발달한 사회에서 사는 사람들이나, 열악한 환경에서 미개한 생활을 하는 사람들이나, 의식주 생활, 종족보존의 본능, 가정과 집단을 이루고 살아가는 인간의 근본적인 삶은 같습니다.
중요한 것은 ‘어떤 삶의 환경과 문화 속에서 살든지 기쁨과 즐거움과 만족이 있느냐?’라고 하는 것입니다. 만일 첨단 과학이 발달한 사회에서 부와 권력을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삶의 즐거움과 만족이 없다면 불행한 인생입니다. 반면에 가난하고 미개한 환경에서 살더라도 삶이 즐겁고 만족이 있다면 행복한 인생입니다. 잠언15:16-17절(현대어성경)에서, “가진 것 많지 않아 비록 가난하여도 여호와 모시고 살아가는 나날은, 가진 것 많아 걱정거리 많은 부자들보다도 행복한 나날이라. 값싼 채소만 먹고 살면서도 서로 우애 있게 아껴 주며 사는 것이, 값비싼 갈비짝 뜯으면서도 서로 못미더워 증오하는 것보다 행복하다.”고 했습니다.
여러분은 어떠합니까? 지금의 삶이 행복하고 만족합니까?
본문에는 사도 바울이 ‘어떤 환경에서도 살아가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다.’고 고백하면서 그 비결을 공개했습니다. 우리도 이 시간에 바울이 터득한 살아가는 비결을 배우려고 합니다.
1. 환경을 이기는 것이 그리스도인이 살아가는 비결입니다.
빌립보서는 사도 바울이 로마 감옥에 갇혀있을 때 빌립보교회에 보낸 서신입니다. 감옥에 갇혀 있는 사람이 자유로운 성도들을 오히려 위로하면서 “너희도 기뻐하고 나와 함께 기뻐하라.”(빌2:19)고 했으며,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빌4:4)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사도 바울은 비참하고 우울한 환경에서도 기뻐하고 즐거워했습니다.
바울은 이처럼 기쁘게 살 수 있는 비결이 환경을 극복한 것에서 비롯되었다고 고백합니다. 이러한 기쁨의 삶은 환경을 이긴 사람이 아니면 불가능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고 했습니다. 그 비결은 “어떠한 형편에서든지 내가 자족하기를 배웠노니”라는 구절 속에 있습니다. 즉 “만족하는 것”입니다.
‘만족함’은 하나님을 온전히 믿고 의지하는 그리스도인에게서 나타나는 특징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이 모든 역사와 환경과 일들을 다스리시며 섭리하심을 믿기 때문입니다. 모든 일이 잘 되고, 행복하고, 부귀영화를 누리면서 만족하는 것은 세상 사람들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사도 바울처럼 온갖 고생과 억울한 매 맞음과 감옥살이, 죽음의 위기에 이르는 환경까지도 만족하는 것입니다. 골로새서1:24절을 봅시다. “내가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 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고 고백합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합니까?
그 해답은 앞 쪽에 있습니다. 빌립보서3:10-11절을 봅시다. (한글 킹 제임스 역)“이는 내가 그를 알고 그의 부활의 능력과 그의 고난의 교제를 알아 그의 죽음의 본을 따르려 함이며,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자들의 부활에 이르려는 것이라.”고 합니다. 바울의 목표는 부활의 삶입니다. 즉 주님께서 약속하신 하나님 나라에서의 영광스러운 부활의 삶을 누리는 것이 목표입니다. 이 목표를 바라는 기쁨으로 인하여 지금의 모든 환경이 어떤 것이었든 오히려 영광스러운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이어지는 14절에서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고 한 것입니다.
환경을 이기는 삶의 비결은 모든 일에 만족하는 것이며, 환경을 뛰어 넘어 모든 일에 만족할 수 있는 비결은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부름의 상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화니 제인 크로스비(Fanny Jane Crosby, 1820-1915)’ 여사는 앞을 못 보는 맹인이면서 9,000여 편에 달하는 영감 넘치는 찬송시를 썼습니다. 우리 찬송가에도 23편이나 수록되어 있습니다. 337장“인애하신 구세주여”, 144장, “예수 나를 위하여 십자가를 질 때” 434장 “나의 갈길 다가도록” 204장 “예수로 나의 구주삼고”등 많은 성도들이 애창하는 찬송가들입니다.
크로스비는 어렸을 때에 식모의 실수로 소경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어려서부터 할머니가 들려주는 성경이야기를 듣고 영의 눈이 열렸습니다. 크로스비는 자신의 비관적인 환경에 굴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 환경을 기뻐했습니다.
크로스비는 “만약에 하나님이 나에게 시력을 허락해 주신다 해도 나는 안 받으렵니다. 하늘나라에 가면 밝은 눈을 주실 터인데, 세상에서 더럽혀지지 않은 깨끗한 눈으로 우리 주님의 얼굴을 보렵니다.”라면서 “나는 내 눈을 멀게 한 그 사람을 만난다면, 그에게 한없는 감사를 드리겠다.”고 했습니다.
우리나라의 ‘사랑의 원자탄’이라고 불리는 ‘손양원’목사님과 같은 그런 분입니다. 이런 삶이 결코 쉽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도 이렇게 살아가도록 힘써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성도들이 이런 삶을 살도록 끊임없이 권면합니다. 왜냐하면,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의 능력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 나라에서의 상급을 예비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이렇게 살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2. 능력 주시는 자 안에 머물러야 합니다.
신학교 교수였던 ‘버클러’ 박사가 한 해에는 전교에서 ‘희랍어’의 최고점을 받은 학생이 맹인임을 알았습니다. 교수는 그에게 “어떻게 볼 수 없으면서도 그 어려운 희랍어를 보는 사람들보다 더 잘 했느냐?”고 물었습니다. 그 맹인 학생은 빌립보서 4장13절로 대답했다고 합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수 있느니라.”
사도 바울은 ‘모든 환경에서 만족하며 살아가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다.’고 하면서,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고 했습니다. 아마 바울도 이 편지를 읽는 성도들이 ‘어떻게 모든 환경에서 만족하며 살아갈 수 있느냐?’라고 묻을 것을 예상 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 대답을 이어서 바로 기록했습니다.
바울은 어떤 환경을 만나도 만족할 수 있고, 기쁘게 살 수 있는 비결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다고 했습니다. “in the Lord”(주 안에서), “ἐν χρισω”(in christ, 예수 안에서)라는 말은 사도 바울의 모든 서신을 통하여 나타나는 핵심 구절입니다. 사도 바울이 살고, 일하고, 행하는 모든 것은 오로지 그리스도 예수를 위해서였습니다. 그래서 로마서14:8절에서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라.”고 했습니다.
여러분은 혹시 “그렇게 살아야 한다는 것은 알지만, 육신의 생활이 있는데 어떻게 그렇게 사나.”라는 생각이 안 드십니까? 물론 그렇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이 육신의 생활을 팽개치라는 말은 결코 아닙니다. 누구보다도 예수님께서 우리가 연약한 육체를 가지고 있음을 더 잘 알고 계십니다. 이 말씀은 성도가 모든 생활에서 환경을 다스리시고 섭리하시는 주님을 생각하며 순종하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살려고 힘써도 실수하고 다시 육신의 생활을 염려하고 환경에 매이게 된다는 것을 주님께서 아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더욱 주님을 의지하고 도움을 구하라는 것입니다.
힘들고 어렵지만, 하나님의 부름의 상을 기대하고, 하나님 나라의 영광을 기대하는 성도라면, 이렇게 살아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도 말하기를 “두 마리 토끼를 쫓으면 둘 다 놓친다.”고 했습니다. 주님께서는 마태복음6:24절에서,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며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며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고 하셨으며, 야고보 선생을 통하여 야고보4:4절에서, “간음하는 여자들이여, 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의 원수임을 알지 못하느뇨? 그런즉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 되게 하는 것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삶에 더 큰 비중을 두고 있습니까? 육신이 사는 이 세상입니까? 아니면 영원한 삶을 누릴 하나님의 나라입니까?
얼마 전에 세상을 뜬 한 어른을 알고 있습니다. 그분은 이 땅에서는 수 십 억원에 이르는 많은 재산을 모았습니다. 그러면서도 사는 것은 인색하고 구차하게 살았습니다. 제가 수차례 “영감님, 집도 깨끗하게 차리고 살고, 예수 믿고, 다른 사람들도 도우면서 여생을 즐겁게 사십시오.”라고 권면했습니다. 그러나 매번 “이렇게 살아도 좋은데 뭐”라고 하면서 애써 모은 재산을 아까워했습니다. 그런데 며칠 전에 그 많은 재산을 땀 한 방울 흘리지 않은 다른 사람에게 남겨두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또 한 분, 이 마을에 사셨던 할머니가 있었습니다. 그분은 일찍 남편과 사별하고 긴 세월을 아끼고 아껴서 수억 원 대의 재산을 소유했습니다. 그렇지만 거의 거지처럼 살았습니다. 먹는 것조차 아까워하며, 몇 십 원을 아까워했습니다. 그러면서 재산을 늘리려고 대금업을 했는데, 암으로 급작스럽게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 분은 많은 재산에 차용해 준 돈만해도 억대가 넘는다고 하는데, 죽고 나니 병원에 입원해 있었던 몇 달의 입원비가 없었으며, 장례비조차 없었습니다. 돈을 빌려간 사람들은 근거가 없기 때문에 모르는 척 했고, 남은 부동산은 자식도 없어서 친척들의 몫이 되고 말았습니다.
1993년에 200억 원대의 거액복권에 당첨됐던 재미교포 이옥자씨가 8년 만에 파산했다는 뉴스를 들으셨지요?
미국 현지 언론에 따르면 미주리주 세인트루이스에 거주하는 이 씨는 당시 약 234억 원짜리 복권에 당첨됐습니다. 그러나 과도한 기부와 도박, 투자 실패 등으로 이를 모두 탕진하고 2001년 7월에 미연방 미주리 동부지방 파산법원에서 파산절차를 밟고 있다고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복권이 당첨된 후 남편과 이혼하고 가정도 파탄이 났다고 합니다.
좀 더 편안하고 남들 보기에도 번듯한 삶을 살아보겠다고, 재물에 집착하고 세상일에 매이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지혜의 왕 솔로몬은 이미 이 사실을 간파하고 전 2:18-19절(현대어성경)에서 “내가 이 세상에서 수고하여 거둔 모든 것들을 다음 사람에게 넘겨주고 떠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 참으로 괴롭다. 게다가 내 뒤를 이을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일지 어리석은 사람일지 그 누가 안단 말인가? 그런데도 내가 이 세상에서 이루어 놓은 모든 것은 그의 것이 되고 만다니, 이 얼마나 허망한 일인가!”라고 탄식했습니다. 그러면서 솔로몬은 전도서2:24절에서 “사람이 먹고 마시며 수고하는 가운데서 심령으로 낙을 누리게 하는 것보다 나은 것이 없나니, 내가 이것도 본즉 하나님의 손에서 나는 것이로다.”라고 고백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에서 솔로몬처럼 부귀영화를 누린 사람은 전에도 없었고, 후에도 없으리라.’고 하셨습니다. 솔로몬은 1000명에 달하는 처첩을 거느렸으며, 금을 돌처럼 흔하게 썼다고 했습니다. 이 솔로몬이 전도서12:13-14절에서 생의 결론을 말하기를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명령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사람의 본분이니라. 하나님은 모든 행위와 모든 은밀한 일을 선악 간에 심판하시리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얻으려는 결론의 증거를 솔로몬에게서 찾을 수 있습니다. 어떤 환경을 만나도 만족할 수 있고, 기쁘게 살 수 있는 비결은 세상의 부귀영화가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습니다. 이것이 전도서의 결론이며, 사도 바울이 터득한 살아가는 일체의 비결입니다. 즉, 환경을 이기는 삶의 비결은 모든 일에 만족하는 것이며, 환경을 뛰어 넘어 모든 일에 만족할 수 있는 비결은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부름의 상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살아갈 수 있는 능력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있습니다.
이제, 우리 자신의 이 땅에서의 즐거움을 누리는 삶과 더 중요한 하나님 나라에서의 영원한 기쁨과 행복을 위하여 열심을 냅시다. 그리고 모든 생활 속에서 역사하시는 주님을 생각하면서 감사하며 만족하는 삶을 이루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