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에서 벗어나고 싶을 때
작성자 배의신 댓글
/ 조회: 8,143회
작성일
2003-09-27 14:19
♡♥♡ 일상에서 벗어나고 싶을 때 / 골로새서 3:1-4
*** 들어가는 말
여러분, 때때로 “사는 것이 지겹다.”고 생각되거나, “이 자리에서 벗어나서 훌훌 떠나고 싶다.”고 생각될 때가 있지요? 아마 사람들은 누구나 일상의 생활에서 벗어나 속박이 없는 자유로움을 누리고 싶을 때가 있을 것입니다. 목회자인 저 역시 예외는 아닙니다. 저는 이러한 일로 인하여 많이 생각하고 고민하고 말씀 속에서 해답을 찾고자 애를 썼습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생각 자체가 신앙적이 아니며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 오해하지 않기 위하여 앞으로 말씀드릴 일상에서 벗어나고 싶을 때란, 하나님의 은혜 속에서 살면서 삶의 재충전을 위하여 잠시 쉬는 것과는 분명히 구별됩니다. 이러한 쉼은 주님께서도 제자들을 위하여 배려하셨던 것입니다. 여기서 일상에서 벗어나고 싶을 때란 앞에서 말씀드린 대로 사는 것이 지겹게 느껴지고, 다람쥐 쳇바퀴 돌듯이 여겨지는 생활에서 떠나고 싶다는 생각을 말합니다.
왜 이러한 생각이 신앙적이지 않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않는 생각일까요?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것은 세상의 가장 귀한 보배를 얻은 것보다 더 귀한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를 살리기 위하여 죽으셨으며, 영원한 소망을 위하여 다시 살아나셨다는 것은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큰 기쁨입니다. 우리는 지금 이러한 것을 모두 소유하고 있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베드로전서2:9절에서는 이 사실을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하셨습니다.
이처럼 귀한 존재이며 큰 기쁨을 소유한 우리가 생활 속에서 마음껏 누리고 즐거워해야 할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도 우리는 기뻐하고 즐거워하기 보다는 일상에서 벗어나고 싶고, 사는 것이 고통스럽게 느껴지는 것은 무엇인가 잘못된 것이 분명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해답으로 본문의 말씀을 주십니다.
먼저, 현대인의 성경으로 번역된 본문을 같이 읽어봅시다.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을 때 여러분도 함께 다시 살아났습니다. 그러니 하늘에 있는 풍부한 보화와 기쁨에 눈을 돌리십시오. 그곳에는 그리스도께서 영예와 능력을 가지고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십니다./ 하늘나라의 것으로 여러분의 생각을 채우십시오. 이 세상일을 염려하느라고 시간을 보내지 마십시오./ 마치 죽은 사람이 이 세상에 미련을 두지 않는 것처럼 여러분도 이 세상에 조금도 미련을 두지 마십시오. 여러분의 참 생명은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있습니다./ 우리들의 참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때 여러분도 그분과 함께 빛나며 그분의 모든 영광을 함께 나누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도 바울을 통하여 우리에게 “생각을 한 번 바꾸어 보라.”고 권면하십니다. 어떤 생각을 바꾸라는 것입니까? 바꾸어야 할 생각은 이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살지만 땅엣 것을 생각하지 말고, 위엣 것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땅엣 것이란 세상에 미련을 두고 세상일을 염려하는 것이며, 위엣 것이란 하나님 나라에 있는 풍부한 보화와 영원한 기쁨입니다.
왜 이렇게 생각을 바꾸어야 합니까? 이유는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 그 순간에 세상에 대하여는 죽었으며, 주님과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더 이상 세상은 우리의 관심거리가 아닙니다. 세상은 우리의 영원한 생명을 가꾸는 일터일 뿐입니다. 세상에서 일하는 동안 세상의 거친 바람으로 인하여 고통과 괴로움이 닥치겠지만, 우리 속사람, 즉 영의 생명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안전하게 숨겨져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로마서8:35절에서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라고 했으며, 38-39절에서는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고 했습니다. 이 숨겨진 생명은 예수께서 재림하시는 그 날에 영광 중에 다시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영원한 영광을 바란다면 지금 우리의 생각을 바꾸어야 합니다. 생각이 바뀌면 행동이 바뀌고 습관이 바뀌게 됩니다.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한 탐험가 콜럼버스의 일화 중에 ‘콜럼버스의 달걀’이라는 유명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 이야기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하고 돌아왔을 때 많은 사람들에게 환영을 받았습니다. 환영하는 연회석상에서 콜럼버스의 성공을 시기하는 사람들이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한 것은 우연의 결과라고 비아냥거렸습니다. 그들은
“신대륙이야 본래부터 그곳에 있었던 것이고, 단지 콜럼버스가 남보다 먼저 배를 몰고 서쪽으로 멀리 가다보니 우연히 발견한 것인데, 그런 것을 가지고 공연히 호들갑을 떤다.”
고 했습니다. 그때 콜럼버스는,
“나는 이번 일을 자네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자랑스럽게 생각하지는 않네, 다만 처음으로 그런 생각을 했다는 것만 공로라고 생각할 뿐이네.”
라고 대답하고는 상위에 있는 달걀을 하나 집어서 그곳에 있는 사람들에게 ‘테이블 위에 그것을 세워보라.’고 했습니다. 사람들은 달걀을 세워보려고 애썼지만 세울 수가 없었습니다. 보다 못한 콜럼버스가 달걀을 세웠는데, 달걀의 한 쪽 부분을 툭 쳐서 깨뜨려 가지고는 손쉽게 세웠던 것입니다.
모인 사람들이 다 어이 없어합니다. 그러면서 “그런 방법으로는 누가 못하겠느냐?”고 했습니다. 그때 콜럼버스는
“달걀을 깨뜨려서 세우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당신들은 이것을 생각하지 않았고 나는 생각했습니다. 신대륙의 발견도 마찬가지입니다. 당신들은 생각하지 않았지만, 나는 생각했습니다. 바로 이것이 중요합니다.”
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중요한 것은 생각의 차이입니다. 삶이 괴롭다고 생각하면 온 몸이 무기력해지고, 의욕이 없어지며, 짜증이 나고, 모든 것이 남의 탓처럼 여겨집니다. 그러나 지금의 삶이 영원한 생명과 즐거움과 영광을 위한 투자라고 생각하면 주저앉고 싶다가도 힘을 내게 되며, 모든 것이 즐거워 보이게 됩니다.
그러므로 일상에서 벗어나고 싶을 때는 위엣 것을 생각하십시오.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며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는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 아래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뜻을 이루시기 위하여 매 시대마다 하나님의 사람들을 준비해 두셨고 그들을 통하여 일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지금의 우리도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기 위하여 예비 된 사람들임에 틀림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 사실을 안 후에 이렇게 고백합니다. 빌립보서3:13-14절(한글 킹 제임스 역본)입니다. “형제들아, 나는 내가 붙잡은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다만 한 가지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들에 손을 뻗쳐,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고귀한 부르심의 상을 위하여 그 푯대를 향해 좇아갈 뿐이라.”
사도 바울은 자신을 부르신 하나님의 부르심과 그 부르심에 따르는 영광과 상급을 알고 난 후에는 세상의 것들이 배설물처럼 여겨졌습니다. 그래서 주님을 만나기 전에는 그토록 자랑스럽게 여기던 학식과 가문과 신분을 모두 버렸습니다. 그리고는 오히려 고난과 핍박이 따르는 하나님의 부르심의 길을 좇아갔습니다.
그러나 바울도 사람인지라 때로는 솟아오르는 인간적인 생각들과 세상에 젖은 육신의 소욕들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고린도전서9:27절에서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함이로라.”고 했습니다. 현대어성경으로 다시 읽습니다. “운동선수처럼 나는 내 몸을 엄격히 단련합니다. 내 멋대로가 아니라 마땅히 할 일을 해낼 수 있도록 훈련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다른 사람들을 경기에 참가시켜 놓고 나 자신은 실격자가 되어 퇴장 명령을 받을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라고 했습니다.
저나 여러분도 아직은 미완성입니다. 구원 받았다고 방심하여 세상 것에 미련을 두고, 세상일을 염려하게 되면 버림을 받게 됩니다. 경기는 경기 종료를 알리는 신호가 울릴 때까지 전심전력(全心全力) 하여 목표를 향하여 힘껏 뛰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자녀 된 우리도 하나님의 부르심과 상급을 바라보면서 신앙의 경주를 해야 합니다. 끝까지 신앙을 지킨 사람에게는 반드시 상급을 주십니다. 히브리서11:6절에서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위엣 것을 생각하며 산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땅엣 것과 위엣 것을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는 구절이 5절-17절까지에 나오고 있습니다. 5절-9절까지는 땅엣 것을 생각하는 생활이 무엇인지를 가르치고 있으며, 12절-17절에는 위엣 것을 생각하는 생활이 어떤 것인지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설명 대신 말씀을 그대로 읽어 드리겠습니다. 현대어 성경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선택을 받고 새 생명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깊은 사랑과 배려를 입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니 다른 사람에게 따뜻하고 친절하게 대하십시오. 겸손하게 온유와 인내로 / 관용을 베풀어 언제나 남을 용서하고 원한을 품지 마십시오. 주께서 여러분을 용서하신 것을 기억하고 여러분도 다른 사람을 용서하십시오. /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사랑에 넘치는 생활을 하는 일입니다. 사랑은 모두를 완전하게 하나로 묶어 주는 띠입니다. / 그리스도께 받은 평화가 항상 여러분의 마음과 생활에 깃들이도록 하십시오. 이것은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가 된 여러분의 책임이며 특권입니다. 그리고 항상 감사하는 생활을 하십시오. / 그리스도의 교훈을 마음에 간직해 그분의 말씀이 여러분의 삶을 풍부하게 하도록 하십시오. 그리고 그 말씀으로 지혜롭게 되어 서로 가르치고 충고하고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감사에 넘치는 마음으로 주님을 찬양하십시오. / 무슨 일을 하든지 무슨 말을 하든지 간에 주 예수의 대리인으로 행동하고 주 예수와 함께 아버지 하나님 앞에 나아가 감사를 드리십시오.”
비교되는 두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보십시오.
깊은 신앙의 사람인 헬렌 켈러(Helen Keller 1880∼1968)여사를 아시지요? 엘렌 켈러는 출생과 더불어 큰 병을 알아 19개월 만에 시력을 잃었습니다. 동시에 귀가 듣지 못하게 되었고, 듣지 못하니 자연히 말도 할 수 없는 벙어리가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녀를 위하여 신실한 신앙의 사람인 ‘설리반’선생님을 보내주셨습니다. 설리반 선생은 헬렌 켈러에게 말하는 법과 쓰는 법을 가르쳤으며, 예수님을 알게 했습니다. 헬렌 켈러는 비록 보지도, 듣지도, 말하지도 못했지만, 누구보다도 하나님을 선명히 볼 수 있었고, 예수의 음성을 들었으며, 하나님 나라를 생각하며 그 세계를 느꼈습니다. 어느 날 헬렌 켈러는, “나는 삶이 너무나 아름답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라고 했습니다. 보지도, 듣지도 못하는 사람이 세상을 너무 아름답게 보았습니다.
반면에 세상의 부귀영화와 권력을 한 손에 쥐고 세계를 뒤흔들었던 프랑스의 명장 ‘나폴레옹’은 영국과의 전쟁에서 패한 후 세인트헬레나 섬에서 귀향생활을 했습니다. 그가 죽기 전에 말하기를, “나는 내 인생의 행복했던 엿새를 알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헬렌 켈러와 나폴레옹은 신분이나 환경이나 여건이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차이가 있습니다. 가장 불행했던 헬렌 켈러는 하나님의 나라를 찾았으며, 나폴레옹은 땅의 부귀영화와 권력과 쾌락을 쫓았습니다. 그들의 결말은 뒤집혔습니다. 땅엣 것을 쫓았던 나폴레옹은 아끼는 사람 없이 불행 속에서 죽었으며, 헬렌 켈러는 신앙의 사람뿐만 아니라 온 세계의 많은 사람들의 마음에 행복과 용기를 심어주고 있습니다.
이처럼 위엣 것을 생각한다는 것은 생활 그 자체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생활 속에서 다른 사람을 배려하고, 용서하고, 관용하고, 사랑하며, 하나님께 감사하며 찬양하는 삶입니다. 그러므로 일상에서 벗어나고 싶을 때에는 땅엣 것에 미련을 두고 염려하는 생각을 바꾸어 내게 주어진 생명과 영광을 생각합시다.
그래서 주님이 부르시는 그 날까지 기뻐하고 감사하는 마음이 넘쳐서 행복을 누립시다. 뿐만 아니라 그로 인하여 많은 사람들을 옳은 대로 돌아오게 하는 열매를 맺어 큰 상급까지 덤으로 예비하는 복된 삶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 들어가는 말
여러분, 때때로 “사는 것이 지겹다.”고 생각되거나, “이 자리에서 벗어나서 훌훌 떠나고 싶다.”고 생각될 때가 있지요? 아마 사람들은 누구나 일상의 생활에서 벗어나 속박이 없는 자유로움을 누리고 싶을 때가 있을 것입니다. 목회자인 저 역시 예외는 아닙니다. 저는 이러한 일로 인하여 많이 생각하고 고민하고 말씀 속에서 해답을 찾고자 애를 썼습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생각 자체가 신앙적이 아니며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 오해하지 않기 위하여 앞으로 말씀드릴 일상에서 벗어나고 싶을 때란, 하나님의 은혜 속에서 살면서 삶의 재충전을 위하여 잠시 쉬는 것과는 분명히 구별됩니다. 이러한 쉼은 주님께서도 제자들을 위하여 배려하셨던 것입니다. 여기서 일상에서 벗어나고 싶을 때란 앞에서 말씀드린 대로 사는 것이 지겹게 느껴지고, 다람쥐 쳇바퀴 돌듯이 여겨지는 생활에서 떠나고 싶다는 생각을 말합니다.
왜 이러한 생각이 신앙적이지 않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않는 생각일까요?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것은 세상의 가장 귀한 보배를 얻은 것보다 더 귀한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를 살리기 위하여 죽으셨으며, 영원한 소망을 위하여 다시 살아나셨다는 것은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큰 기쁨입니다. 우리는 지금 이러한 것을 모두 소유하고 있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베드로전서2:9절에서는 이 사실을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하셨습니다.
이처럼 귀한 존재이며 큰 기쁨을 소유한 우리가 생활 속에서 마음껏 누리고 즐거워해야 할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도 우리는 기뻐하고 즐거워하기 보다는 일상에서 벗어나고 싶고, 사는 것이 고통스럽게 느껴지는 것은 무엇인가 잘못된 것이 분명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해답으로 본문의 말씀을 주십니다.
먼저, 현대인의 성경으로 번역된 본문을 같이 읽어봅시다.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을 때 여러분도 함께 다시 살아났습니다. 그러니 하늘에 있는 풍부한 보화와 기쁨에 눈을 돌리십시오. 그곳에는 그리스도께서 영예와 능력을 가지고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십니다./ 하늘나라의 것으로 여러분의 생각을 채우십시오. 이 세상일을 염려하느라고 시간을 보내지 마십시오./ 마치 죽은 사람이 이 세상에 미련을 두지 않는 것처럼 여러분도 이 세상에 조금도 미련을 두지 마십시오. 여러분의 참 생명은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있습니다./ 우리들의 참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때 여러분도 그분과 함께 빛나며 그분의 모든 영광을 함께 나누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도 바울을 통하여 우리에게 “생각을 한 번 바꾸어 보라.”고 권면하십니다. 어떤 생각을 바꾸라는 것입니까? 바꾸어야 할 생각은 이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살지만 땅엣 것을 생각하지 말고, 위엣 것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땅엣 것이란 세상에 미련을 두고 세상일을 염려하는 것이며, 위엣 것이란 하나님 나라에 있는 풍부한 보화와 영원한 기쁨입니다.
왜 이렇게 생각을 바꾸어야 합니까? 이유는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 그 순간에 세상에 대하여는 죽었으며, 주님과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더 이상 세상은 우리의 관심거리가 아닙니다. 세상은 우리의 영원한 생명을 가꾸는 일터일 뿐입니다. 세상에서 일하는 동안 세상의 거친 바람으로 인하여 고통과 괴로움이 닥치겠지만, 우리 속사람, 즉 영의 생명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안전하게 숨겨져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로마서8:35절에서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라고 했으며, 38-39절에서는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고 했습니다. 이 숨겨진 생명은 예수께서 재림하시는 그 날에 영광 중에 다시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영원한 영광을 바란다면 지금 우리의 생각을 바꾸어야 합니다. 생각이 바뀌면 행동이 바뀌고 습관이 바뀌게 됩니다.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한 탐험가 콜럼버스의 일화 중에 ‘콜럼버스의 달걀’이라는 유명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 이야기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하고 돌아왔을 때 많은 사람들에게 환영을 받았습니다. 환영하는 연회석상에서 콜럼버스의 성공을 시기하는 사람들이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한 것은 우연의 결과라고 비아냥거렸습니다. 그들은
“신대륙이야 본래부터 그곳에 있었던 것이고, 단지 콜럼버스가 남보다 먼저 배를 몰고 서쪽으로 멀리 가다보니 우연히 발견한 것인데, 그런 것을 가지고 공연히 호들갑을 떤다.”
고 했습니다. 그때 콜럼버스는,
“나는 이번 일을 자네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자랑스럽게 생각하지는 않네, 다만 처음으로 그런 생각을 했다는 것만 공로라고 생각할 뿐이네.”
라고 대답하고는 상위에 있는 달걀을 하나 집어서 그곳에 있는 사람들에게 ‘테이블 위에 그것을 세워보라.’고 했습니다. 사람들은 달걀을 세워보려고 애썼지만 세울 수가 없었습니다. 보다 못한 콜럼버스가 달걀을 세웠는데, 달걀의 한 쪽 부분을 툭 쳐서 깨뜨려 가지고는 손쉽게 세웠던 것입니다.
모인 사람들이 다 어이 없어합니다. 그러면서 “그런 방법으로는 누가 못하겠느냐?”고 했습니다. 그때 콜럼버스는
“달걀을 깨뜨려서 세우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당신들은 이것을 생각하지 않았고 나는 생각했습니다. 신대륙의 발견도 마찬가지입니다. 당신들은 생각하지 않았지만, 나는 생각했습니다. 바로 이것이 중요합니다.”
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중요한 것은 생각의 차이입니다. 삶이 괴롭다고 생각하면 온 몸이 무기력해지고, 의욕이 없어지며, 짜증이 나고, 모든 것이 남의 탓처럼 여겨집니다. 그러나 지금의 삶이 영원한 생명과 즐거움과 영광을 위한 투자라고 생각하면 주저앉고 싶다가도 힘을 내게 되며, 모든 것이 즐거워 보이게 됩니다.
그러므로 일상에서 벗어나고 싶을 때는 위엣 것을 생각하십시오.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며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는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 아래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뜻을 이루시기 위하여 매 시대마다 하나님의 사람들을 준비해 두셨고 그들을 통하여 일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지금의 우리도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기 위하여 예비 된 사람들임에 틀림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 사실을 안 후에 이렇게 고백합니다. 빌립보서3:13-14절(한글 킹 제임스 역본)입니다. “형제들아, 나는 내가 붙잡은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다만 한 가지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들에 손을 뻗쳐,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고귀한 부르심의 상을 위하여 그 푯대를 향해 좇아갈 뿐이라.”
사도 바울은 자신을 부르신 하나님의 부르심과 그 부르심에 따르는 영광과 상급을 알고 난 후에는 세상의 것들이 배설물처럼 여겨졌습니다. 그래서 주님을 만나기 전에는 그토록 자랑스럽게 여기던 학식과 가문과 신분을 모두 버렸습니다. 그리고는 오히려 고난과 핍박이 따르는 하나님의 부르심의 길을 좇아갔습니다.
그러나 바울도 사람인지라 때로는 솟아오르는 인간적인 생각들과 세상에 젖은 육신의 소욕들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고린도전서9:27절에서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함이로라.”고 했습니다. 현대어성경으로 다시 읽습니다. “운동선수처럼 나는 내 몸을 엄격히 단련합니다. 내 멋대로가 아니라 마땅히 할 일을 해낼 수 있도록 훈련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다른 사람들을 경기에 참가시켜 놓고 나 자신은 실격자가 되어 퇴장 명령을 받을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라고 했습니다.
저나 여러분도 아직은 미완성입니다. 구원 받았다고 방심하여 세상 것에 미련을 두고, 세상일을 염려하게 되면 버림을 받게 됩니다. 경기는 경기 종료를 알리는 신호가 울릴 때까지 전심전력(全心全力) 하여 목표를 향하여 힘껏 뛰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자녀 된 우리도 하나님의 부르심과 상급을 바라보면서 신앙의 경주를 해야 합니다. 끝까지 신앙을 지킨 사람에게는 반드시 상급을 주십니다. 히브리서11:6절에서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위엣 것을 생각하며 산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땅엣 것과 위엣 것을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는 구절이 5절-17절까지에 나오고 있습니다. 5절-9절까지는 땅엣 것을 생각하는 생활이 무엇인지를 가르치고 있으며, 12절-17절에는 위엣 것을 생각하는 생활이 어떤 것인지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설명 대신 말씀을 그대로 읽어 드리겠습니다. 현대어 성경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선택을 받고 새 생명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깊은 사랑과 배려를 입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니 다른 사람에게 따뜻하고 친절하게 대하십시오. 겸손하게 온유와 인내로 / 관용을 베풀어 언제나 남을 용서하고 원한을 품지 마십시오. 주께서 여러분을 용서하신 것을 기억하고 여러분도 다른 사람을 용서하십시오. /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사랑에 넘치는 생활을 하는 일입니다. 사랑은 모두를 완전하게 하나로 묶어 주는 띠입니다. / 그리스도께 받은 평화가 항상 여러분의 마음과 생활에 깃들이도록 하십시오. 이것은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가 된 여러분의 책임이며 특권입니다. 그리고 항상 감사하는 생활을 하십시오. / 그리스도의 교훈을 마음에 간직해 그분의 말씀이 여러분의 삶을 풍부하게 하도록 하십시오. 그리고 그 말씀으로 지혜롭게 되어 서로 가르치고 충고하고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감사에 넘치는 마음으로 주님을 찬양하십시오. / 무슨 일을 하든지 무슨 말을 하든지 간에 주 예수의 대리인으로 행동하고 주 예수와 함께 아버지 하나님 앞에 나아가 감사를 드리십시오.”
비교되는 두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보십시오.
깊은 신앙의 사람인 헬렌 켈러(Helen Keller 1880∼1968)여사를 아시지요? 엘렌 켈러는 출생과 더불어 큰 병을 알아 19개월 만에 시력을 잃었습니다. 동시에 귀가 듣지 못하게 되었고, 듣지 못하니 자연히 말도 할 수 없는 벙어리가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녀를 위하여 신실한 신앙의 사람인 ‘설리반’선생님을 보내주셨습니다. 설리반 선생은 헬렌 켈러에게 말하는 법과 쓰는 법을 가르쳤으며, 예수님을 알게 했습니다. 헬렌 켈러는 비록 보지도, 듣지도, 말하지도 못했지만, 누구보다도 하나님을 선명히 볼 수 있었고, 예수의 음성을 들었으며, 하나님 나라를 생각하며 그 세계를 느꼈습니다. 어느 날 헬렌 켈러는, “나는 삶이 너무나 아름답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라고 했습니다. 보지도, 듣지도 못하는 사람이 세상을 너무 아름답게 보았습니다.
반면에 세상의 부귀영화와 권력을 한 손에 쥐고 세계를 뒤흔들었던 프랑스의 명장 ‘나폴레옹’은 영국과의 전쟁에서 패한 후 세인트헬레나 섬에서 귀향생활을 했습니다. 그가 죽기 전에 말하기를, “나는 내 인생의 행복했던 엿새를 알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헬렌 켈러와 나폴레옹은 신분이나 환경이나 여건이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차이가 있습니다. 가장 불행했던 헬렌 켈러는 하나님의 나라를 찾았으며, 나폴레옹은 땅의 부귀영화와 권력과 쾌락을 쫓았습니다. 그들의 결말은 뒤집혔습니다. 땅엣 것을 쫓았던 나폴레옹은 아끼는 사람 없이 불행 속에서 죽었으며, 헬렌 켈러는 신앙의 사람뿐만 아니라 온 세계의 많은 사람들의 마음에 행복과 용기를 심어주고 있습니다.
이처럼 위엣 것을 생각한다는 것은 생활 그 자체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생활 속에서 다른 사람을 배려하고, 용서하고, 관용하고, 사랑하며, 하나님께 감사하며 찬양하는 삶입니다. 그러므로 일상에서 벗어나고 싶을 때에는 땅엣 것에 미련을 두고 염려하는 생각을 바꾸어 내게 주어진 생명과 영광을 생각합시다.
그래서 주님이 부르시는 그 날까지 기뻐하고 감사하는 마음이 넘쳐서 행복을 누립시다. 뿐만 아니라 그로 인하여 많은 사람들을 옳은 대로 돌아오게 하는 열매를 맺어 큰 상급까지 덤으로 예비하는 복된 삶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