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이란?
작성자 배의신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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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05-02-27 21:59
*** 행복이란? / 아가서4:16-5:8
*** 들어가는 말
아가서 4:7-5:8, \"7 나의 사랑 너는 순전히 어여뻐서 아무 흠이 없구나. 8 나의 신부야 너는 레바논에서부터 나와 함께 하고 레바논에서부터 나와 함께 가자 아마나와 스닐과 헤르몬 꼭대기에서 사자 굴과 표범 산에서 내려다보아라. 9 나의 누이 나의 신부야 네가 내 마음을 빼앗았구나 네 눈으로 한 번 보는 것과 네 목의 구슬 한 꿰미로 내 마음을 빼앗았구나. 10 나의 누이 나의 신부야 네 사랑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 네 사랑은 포도주에 지나고 네 기름의 향기는 각양 향품보다 승하구나. 11 내 신부야 네 입술에서는 꿀 방울이 떨어지고 네 혀 밑에는 꿀과 젖이 있고 네 의복의 향기는 레바논의 향기 같구나. 12 나의 누이, 나의 신부는 잠근 동산이요 덮은 우물이요 봉한 샘이로구나. 13 네게서 나는 것은 석류나무와 각종 아름다운 과수와 고벨화와 나도초와 14 나도와 번홍화와 창포와 계수와 각종 유향목과 몰약과 침향과 모든 귀한 향품이요. 15 너는 동산의 샘이요 생수의 우물이요 레바논에서부터 흐르는 시내로구나. 16 북풍아 일어나라. 남풍아 오라. 나의 동산에 불어서 향기를 날리라. 나의 사랑하는 자가 그 동산에 들어가서 그 아름다운 실과 먹기를 원하노라. 1 나의 누이, 나의 신부야 내가 내 동산에 들어와서 나의 몰약과 향 재료를 거두고 나의 꿀송이와 꿀을 먹고 내 포도주와 내 젖을 마셨으니 나의 친구들아 먹으라. 나의 사랑하는 사람들아 마시고 많이 마시라. 2 내가 잘지라도 마음은 깨었는데 나의 사랑하는 자의 소리가 들리는구나 문을 두드려 이르기를 '나의 누이, 나의 사랑, 나의 비둘기, 나의 완전한 자야 문 열어다고 내 머리에는 이슬이, 내 머리털에는 밤 이슬이 가득하였다.' 하는구나. 3 내가 옷을 벗었으니 어찌 다시 입겠으며 내가 발을 씻었으니 어찌 다시 더럽히랴마는 4 나의 사랑하는 자가 문틈으로 손을 들이밀매 내 마음이 동하여서 5 일어나서 나의 사랑하는 자 위하여 문을 열 때 몰약이 내 손에서, 몰약의 즙이 내 손가락에서 문빗장에 듣는구나. 6 내가 나의 사랑하는 자 위하여 문을 열었으나 그가 벌써 물러갔네. 그가 말할 때에 내 혼이 나갔구나. 내가 그를 찾아도 못 만났고 불러도 응답이 없었구나. 7 성중에서 행순하는 자들이 나를 만나매 나를 쳐서 상하게 하였고 성벽을 파수하는 자들이 나의 웃옷을 벗겨 취하였구나. 8 예루살렘 여자들아 너희에게 내가 부탁한다. 너희가 나의 사랑하는 자를 만나거든 내가 사랑하므로 병이 났다고 하려무나.\"
아가서(雅歌書)는 히브리어 원어 성경에서는 '쉬르 하쉬림', 영어 역본에서는 'The song of songs'라고 했습니다. 즉 ‘노래들 중의 노래’, ‘가장 아름다운 노래’라는 말입니다. 내용은 ‘남여간의 아름다운 사랑의 노래’입니다. 솔로몬 왕이 가장 사랑했던 ‘술람미’라는 왕비와의 행복한 사랑을 노래하는 내용입니다. 이 성경은 단순히 솔로몬왕의 사랑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솔로몬을 통하여 하나님과 하나님의 백성들과의 사랑을 나타내는 세상에서 거룩하고 가장 아름다운 사랑의 이야기입니다.
특히 이 노래는 이스라엘의 절기에 부르는 지정곡입니다. 성경 중에는 ‘머길로트’ 즉 ‘다섯 두루마리’라고 불리는 유대의 명절에 읽혀지는 책이 있습니다. 아가서(유월절), 룻기(맥추절), 애가(예루살렘 파멸을 기념하는 금식일), 전도서(장막절), 에스더(부림절). 이 다섯 권입니다. 아가서가 유월절에 읽히는 것은 유월절이 이스라엘을 신부로 맞아들이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대역사이기 때문입니다. 구약성경에서는 하나님이 신랑으로,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신부로 표현되고 있으며, 신약성경에서는 예수님이 신랑으로 성도들이 어린양의 신부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구약의 유월절은 유대인들이 애굽으로부터 구속받는 날이었습니다. 곧 신약에서의 예수님의 십자가 속죄의 날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이 책은 창조주 하나님께서 피조물인 인간에게 나타내신 최고의 사랑이야기입니다.
이 시간에 읽은 본문은 크게 두 부분입니다. 하나는 신랑인 주님께서 신부인 성도들을 사랑하시는 놀랍도록 아름답고 지순한 사랑 이야기이며, 다른 하나는 신랑의 사랑에 대한 신부의 사랑이야기입니다. 특히 성도인 우리를 향하신 주님의 사랑은 가슴이 벅차고 감당할 수 없는 절대적인 사랑입니다. 스바냐 3:17절에서 표현하신 바로 그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시라. 그가 너로 인하여 기쁨을 이기지 못하여 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인하여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하리라.”
우리 주님의 고난을 생각하며 부활을 소망하는 사순절에 주님의 우리를 향하신 깊으신 사랑을 생각하며 그 사랑 안으로 들어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주님이 당하신 고난과 죽으심은 우리를 사랑하신 사랑의 절정입니다. 우리를 주님의 신부로 맞아들이기 위하여 그 멸시와 천대와 고통을 몸소 당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자신의 생명을 주시면서 까지 사랑하신 그 사랑에 나는 어떻게 응답하고 있습니까? 사랑의 부름에 사랑으로 화답하여 사랑으로 하나가 되는 것이 진정한 행복입니다.
여러분도 행복을 누리고 싶지요? 진정한 행복은 사랑으로 하나를 이루는 것입니다. 올해 주보의 로고를 보십시오. 무엇이라고 써 있습니까? ‘행복은 하나 되는 것’입니다. 가정의 행복은 부부가 사랑으로 하나가 되고, 부모와 자녀가 사랑으로 하나가 되고, 온 가족이 그리스도의 신부가 되어 사랑으로 하나를 이루는 것입니다. 교회의 행복은 모든 성도가 그리스도의 신부가 되어 서로 사랑하며 예수님과 하나를 이루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진정으로 행복하지 못했다면 말씀을 들으면서 지금 여러분의 앞에 서 계시는 주님의 사랑을 받아들이십시오. 주님은 지금 우리를 가슴 저미도록 사랑하시며, 여러분의 사랑을 갈망하십니다. 말씀을 듣는 중에 온 마음으로 주님을 부르십시오. 주님은 기꺼이 오실 것입니다.
먼저, 우리를 향하신 예수님의 사랑의 노래가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신부에게 완전히 마음을 빼앗기셨습니다. 9절에서 “나의 누이 나의 신부야, 네가 내 마음을 빼앗았구나. 네 눈으로 한 번 보는 것과 네 목의 구슬 한 꿰미로 내 마음을 빼앗았구나.” 라고 고백합니다.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우리에게 이렇게 사랑고백을 하십니다. 정말 너무 사랑스러워서 견딜 수 없어 하십니다. 4:1-5절을 함께 읽어봅시다. (현대어성경) “아, 아리따워라. 그대 너무나 아름다워라. 이리도 사랑스러울까, 내 사랑아. 너울 뒤에 아른거리는 그대 두 눈은 비둘기같이 사랑으로 빛나는구나. 그대 머리칼은 염소 떼처럼 길르앗 언덕에 물결치는 염소 떼처럼 어깨 위에서 춤추는구나. 2 그대 이는 털 깎으려고 목욕시킨 양과 같이 희기도 하여라. 새끼 없는 어미는 하나도 없는 양과도 같이 쪽 고르게도 났구나. 3 그대 입술은 심홍빛 오라기. 입술을 뗄 때마다 아, 어찌 그리도 사랑스러운지. 너울 뒤에는 석류같이 발그스레한 그대 두 볼. 4 그대 목덜미는 미끈하고 둥그런 다윗 망대. 천 개나 되는 방패가 걸려 있듯 목덜미 따라서 목걸이가 둥그스레 걸려 있구나. 5 그대 젖가슴은 나리 꽃밭에서 풀을 뜯고 있는 쌍둥이 새끼 사슴.”
여러분은 이런 고백을 받아보셨습니까? 저는 남자로서 해본 적도 없고 남자라서 받아본 적도 없습니다. 그런데 주님이 이렇게 고백하십니다. 그런데 이런 사랑의 고백을 받기 위해서는 신부된 성도가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본문 7절에서 “나의 사랑 너는 순전히 어여뻐서 아무 흠이 없구나.” 라고 했습니다. “순전히 어여쁘다”라는 말은 ‘어느 곳 하나 흠잡을 데 없는 아름다움’을 말하며, “흠이 없구나.”라는 말은 제사 때에 사용되는 제물의 완전함을 말할 때 사용된 ‘완전함’을 의미합니다. 온 몸 전체가 아름답고 아무런 결함이 없다는 것입니다.
1940년 머빈 르로이 감독(1900-1987)이 리메이크한 흑백영화인 ‘애수’(Waterloo Bridge)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아름답고 청순한 발레리나 ‘마이러 레스터’와 영국군 젊은 대위 ‘로이 크로닌’과의 아름답고 슬픈 사랑을 그리고 있는 영화입니다.
전쟁 중에 만나 사랑을 하게 된 두 사람은 결혼하려는 찰나에 출전 명령을 받아 약혼만 한 채로 로이 대위는 전쟁터로 떠나게 됩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돌아오기를 고대하던 어느 날 신문의 전사자 명단에서 약혼자의 이름을 발견하고 오열합니다. 상심한 마음에 직장에서 해고까지 받고, 급기야 병저 눕게 됩니다. 병이 나은 후, 그녀의 친구가 몸을 팔아서 자신의 병간호까지 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결국 생계를 위하여 자신도 창녀의 생활을 하게 됩니다.
그 날도 자신을 데려가 줄 사람을 기다리며 워털루 역에서 서성거리고 있을 때, 한 무리의 군인들이 쏟아져 나옵니다. 그 중에 낯익은 얼굴이 놀랍고 반가움으로 달려옵니다. 바로 죽은 줄로만 알았던 사랑하는 약혼자 로이였습니다. 로이는 어떻게 알고 마중까지 나왔느냐며 감격해 하며 포옹합니다. 그동안의 마이러의 생활을 전혀 알지 못하는 로이는 결혼 승낙을 받기 위하여 그의 어머니가 있는 스코틀랜드로 갑니다. 행복한 결혼식을 앞두었지만 로이의 사랑을 받아들일 수 없는 마이러. 과거를 그냥 묻은 채 현재의 행복으로 빠져들 수는 없었습니다. 그녀는 너무도 자상하고 교양 있는 로이 어머니에게 진실을 털어놓고 로이에게는 비밀로 해달라고 간청한 뒤 저택을 빠져나갑니다. 그리고는 ‘그가 살아 있는 줄만 알았더라면…’ 이라는 아쉬움의 말만 남긴 채 달리는 자동차에 몸을 던집니다.
만일 로이가 살아 있음을 알았더라면 아무리 생활이 어렵고 힘들어도 몸을 팔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지금 예수님을 믿는 수많은 사람 중에도 이 성경말씀이 정말 사실임을 믿는다면 지금처럼 이렇게 주님을 멀리하고 세상의 삶으로 자신을 더럽히지는 않을 것입니다. 우리 주님이 오시는 그날에 ‘주님이 살아계신 줄만 알았더라면…’이라고 탄식하며 스스로 주님의 얼굴을 피할 사람들이 얼마나 많겠습니까? ‘주님이 정말로 재림하실 줄 알았더라면, 이런 날이 있을 줄 알았더라면 조금 더 참을 것을, 주님 말씀에 순종할 것을’ 이라고 후회할 사람들이 참으로 많을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와 영원한 행복의 혼인잔치를 앞두고, 그 아름다운 천국 문 앞에서 스스로 돌아서야 할 것입니다. 이 사실을 주님께서 요한계시록 6:15-17절에서 이렇게 표현하십니다. (현대어성경) “15 그러자 땅 위의 모든 왕과 세상의 지도자들, 부자와 군대의 고위장성들, 신분이 높은 자와 낮은 자들, 노예와 자유인들이 모두 뒤범벅이 되어 동굴과 산의 바위 밑에 몸을 숨긴 채 16 산을 향하여 '우리 위로 무너져 다오. 보좌에 앉으신 분의 얼굴에서 우리를 가려다오. 어린양의 진노에서 우리를 숨겨다오. 17 하나님과 어린 양의 큰 진노의 날이 왔구나. 그 진노에서 살아남을 자가 누구란 말인가?' 하고 부르짖었습니다.”
성도에게 있어야 할 것도 있습니다. 본문 13-15절입니다. “13 네게서 나는 것은 석류나무와 각종 아름다운 과수와 고벨화와 나도초와 14 나도와 번홍화와 창포와 계수와 각종 유향목과 몰약과 침향과 모든 귀한 향품이요. 15 너는 동산의 샘이요 생수의 우물이요 레바논에서부터 흐르는 시내로구나.” 이 말씀은 신부의 삶에서 나타나는 생활의 열매를 말합니다. 즉 신부된 성도의 삶에서 나오는 아름답고 향기로운 신앙과 사랑의 열매를 의미합니다. 이는 더 말씀드리지 않아도 잘 알 것입니다.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택하신 이유가 바로 열매를 맺게 하기 위함입니다. 주님은 요한복음 15:16절에서,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과실을 맺게 하고 또 너희 과실이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니라.”고 하십니다. 만일 열매가 없다면 저주받은 무화과나무처럼 말라 죽게 될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신부된 성도의 가장 중요한 마음가짐이 있습니다. 본문12절입니다. “나의 누이, 나의 신부는 잠근 동산이요 덮은 우물이요 봉한 샘이로구나.” 여기서 “동산”, “우물”, “샘”은 모두 ‘신부’, 즉 성도들을 의미합니다. 특히 우물과 샘은 아내를 가리키는 상징적인 표현입니다. 중요한 것은 “잠근 동산이요 덮은 우물이요 봉한 샘”이라는 것입니다. 잠그고, 덮고, 봉했다는 말은 주인이 있다는 말이며, 다른 사람에게는 개방되지 않음을 나타냅니다. 즉 성도는 오직 예수님에게만 속했다는 의미입니다. 예수님과 혼인한 성도는 예수님만 바라보고, 예수님만 사랑하고, 예수님만 의지해야 합니다. 이는 성도의 삶에서 어떤 것보다 우선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6:3절을 봅시다. “나는 나의 사랑하는 자에게 속하였고, 나의 사랑하는 자는 내게 속하였다. 그가 백합화 가운데서 그 양 떼를 먹이는구나.”라고 고백합니다.
주님의 사랑에 대한 우리의 사랑의 응답이 있어야 합니다.
4:16절에서 신부는 신랑을 자신의 동산으로 초청을 했습니다. 그리고 5:1절에서는 신랑이 신부의 초청에 응하여 신부의 동산에서 친구까지 초대하여 마음껏 먹고 마시고 즐깁니다. 그런데 이 두 구절에서 1인칭 단수로 된 호칭이 12회나 등장합니다. 특히 신부는 4:16절에서 “그 동산”이라고 자신을 신랑의 소유로 호칭합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신부된 성도가 하나를 이룬다는 사실을 말씀합니다. 요한복음 17:21절에서 주님은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같이 저희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라고 하나 됨을 위하여 기도하십니다.
그런데 안타까운 시간이 다가왔습니다. 시간이 흘러 신부의 마음이 신랑으로부터 좀 멀어졌습니다. 어느 날, 신랑이 먼 길을 여행하여 늦은 밤에 신부를 찾아왔습니다. '나의 누이, 나의 사랑, 나의 비둘기, 나의 완전한 자야 문 열어다고 내 머리에는 이슬이, 내 머리털에는 밤 이슬이 가득하였다.' 며 문을 두드렸습니다. 그런데 신부는 잠자리에 들었기 때문에 일어나기를 주저하다가 계속 되는 신랑의 요청에 마음이 움직여 뒤 늦게 일어나서 문을 열었습니다. 그런데 문을 열고 보니 신랑은 떠난 뒤였습니다. 뒤 늦게 밤거리를 달려서 신랑을 찾았지만 오히려 성의 순찰자들에게 붙잡혀 상처를 입고 혼만 나고 상사병이 났습니다.
성도가 주님과의 관계가 멀어지면 세상에서 고통을 당하게 됩니다. 영의 싸움을 하는 성도들이 주님의 도움이 없으면 사단의 세력에게 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길이 조금 힘들고 어렵다고, 자신을 희생해야 하고, 아까운 물질도 드려야 하고, 세상의 즐거움까지도 멀리해야 한다는 사실이 고통스럽다고 주님을 멀리하면 더욱 큰 어려움과 실패가 찾아옵니다.
천국으로 향하는 길은 결코 쉽고 평안하고 즐거움만 있는 길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마태복음16:24절에서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고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뿐만 아니라 주님은 마태복음 7:13-14절에서 (현대어성경) “하늘나라는 좁은 문으로만 들어갈 수 있다. 지옥으로 가는 길은 넓고 그 문도 커서 쉬운 길을 택한 많은 사람이 다 그리로 들어간다. 그러나 생명으로 들어가는 길은 좁고 그 문도 작아서 그리로 찾아드는 사람이 별로 없다.”고 하십니다.
그러나 이 길의 끝에는 영원한 행복을 누릴 수 있는 보장인 주님과의 혼인잔치 자리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19:7-9절에서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즐거워하고 크게 기뻐하여 그에게 영광을 돌리세 어린 양의 혼인 기약이 이르렀고 그 아내가 예비하였으니 8 그에게 허락하사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를 입게 하셨은즉 이 세마포는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 하더라. 9 천사가 내게 말하기를 기록하라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청함을 입은 자들이 복이 있도다 하고 또 내게 말하되 이것은 하나님의 참되신 말씀이라 하기로”
우리 신랑 되신 예수님을 만날 날이 멀지 않았습니다. 신랑의 나라인 하나님의 나라에는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면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은 주님을 얼마나 사랑합니까? 매일 그분의 편지를 읽고 있습니까? 매일 그분과 대화합니까?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주일이 기다려지고, 예배가 감격스럽고, 주님을 위한 헌신이 기쁘고 즐겁습니다. 나를 위하여 자신의 모든 것을 주신 주님이십니다. 우리의 모든 것도 기쁘게 헌신하고 드림으로서 주님께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신부로서 영원한 행복을 예비하시기를 축원합니다.
*** 들어가는 말
아가서 4:7-5:8, \"7 나의 사랑 너는 순전히 어여뻐서 아무 흠이 없구나. 8 나의 신부야 너는 레바논에서부터 나와 함께 하고 레바논에서부터 나와 함께 가자 아마나와 스닐과 헤르몬 꼭대기에서 사자 굴과 표범 산에서 내려다보아라. 9 나의 누이 나의 신부야 네가 내 마음을 빼앗았구나 네 눈으로 한 번 보는 것과 네 목의 구슬 한 꿰미로 내 마음을 빼앗았구나. 10 나의 누이 나의 신부야 네 사랑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 네 사랑은 포도주에 지나고 네 기름의 향기는 각양 향품보다 승하구나. 11 내 신부야 네 입술에서는 꿀 방울이 떨어지고 네 혀 밑에는 꿀과 젖이 있고 네 의복의 향기는 레바논의 향기 같구나. 12 나의 누이, 나의 신부는 잠근 동산이요 덮은 우물이요 봉한 샘이로구나. 13 네게서 나는 것은 석류나무와 각종 아름다운 과수와 고벨화와 나도초와 14 나도와 번홍화와 창포와 계수와 각종 유향목과 몰약과 침향과 모든 귀한 향품이요. 15 너는 동산의 샘이요 생수의 우물이요 레바논에서부터 흐르는 시내로구나. 16 북풍아 일어나라. 남풍아 오라. 나의 동산에 불어서 향기를 날리라. 나의 사랑하는 자가 그 동산에 들어가서 그 아름다운 실과 먹기를 원하노라. 1 나의 누이, 나의 신부야 내가 내 동산에 들어와서 나의 몰약과 향 재료를 거두고 나의 꿀송이와 꿀을 먹고 내 포도주와 내 젖을 마셨으니 나의 친구들아 먹으라. 나의 사랑하는 사람들아 마시고 많이 마시라. 2 내가 잘지라도 마음은 깨었는데 나의 사랑하는 자의 소리가 들리는구나 문을 두드려 이르기를 '나의 누이, 나의 사랑, 나의 비둘기, 나의 완전한 자야 문 열어다고 내 머리에는 이슬이, 내 머리털에는 밤 이슬이 가득하였다.' 하는구나. 3 내가 옷을 벗었으니 어찌 다시 입겠으며 내가 발을 씻었으니 어찌 다시 더럽히랴마는 4 나의 사랑하는 자가 문틈으로 손을 들이밀매 내 마음이 동하여서 5 일어나서 나의 사랑하는 자 위하여 문을 열 때 몰약이 내 손에서, 몰약의 즙이 내 손가락에서 문빗장에 듣는구나. 6 내가 나의 사랑하는 자 위하여 문을 열었으나 그가 벌써 물러갔네. 그가 말할 때에 내 혼이 나갔구나. 내가 그를 찾아도 못 만났고 불러도 응답이 없었구나. 7 성중에서 행순하는 자들이 나를 만나매 나를 쳐서 상하게 하였고 성벽을 파수하는 자들이 나의 웃옷을 벗겨 취하였구나. 8 예루살렘 여자들아 너희에게 내가 부탁한다. 너희가 나의 사랑하는 자를 만나거든 내가 사랑하므로 병이 났다고 하려무나.\"
아가서(雅歌書)는 히브리어 원어 성경에서는 '쉬르 하쉬림', 영어 역본에서는 'The song of songs'라고 했습니다. 즉 ‘노래들 중의 노래’, ‘가장 아름다운 노래’라는 말입니다. 내용은 ‘남여간의 아름다운 사랑의 노래’입니다. 솔로몬 왕이 가장 사랑했던 ‘술람미’라는 왕비와의 행복한 사랑을 노래하는 내용입니다. 이 성경은 단순히 솔로몬왕의 사랑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솔로몬을 통하여 하나님과 하나님의 백성들과의 사랑을 나타내는 세상에서 거룩하고 가장 아름다운 사랑의 이야기입니다.
특히 이 노래는 이스라엘의 절기에 부르는 지정곡입니다. 성경 중에는 ‘머길로트’ 즉 ‘다섯 두루마리’라고 불리는 유대의 명절에 읽혀지는 책이 있습니다. 아가서(유월절), 룻기(맥추절), 애가(예루살렘 파멸을 기념하는 금식일), 전도서(장막절), 에스더(부림절). 이 다섯 권입니다. 아가서가 유월절에 읽히는 것은 유월절이 이스라엘을 신부로 맞아들이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대역사이기 때문입니다. 구약성경에서는 하나님이 신랑으로,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신부로 표현되고 있으며, 신약성경에서는 예수님이 신랑으로 성도들이 어린양의 신부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구약의 유월절은 유대인들이 애굽으로부터 구속받는 날이었습니다. 곧 신약에서의 예수님의 십자가 속죄의 날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이 책은 창조주 하나님께서 피조물인 인간에게 나타내신 최고의 사랑이야기입니다.
이 시간에 읽은 본문은 크게 두 부분입니다. 하나는 신랑인 주님께서 신부인 성도들을 사랑하시는 놀랍도록 아름답고 지순한 사랑 이야기이며, 다른 하나는 신랑의 사랑에 대한 신부의 사랑이야기입니다. 특히 성도인 우리를 향하신 주님의 사랑은 가슴이 벅차고 감당할 수 없는 절대적인 사랑입니다. 스바냐 3:17절에서 표현하신 바로 그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시라. 그가 너로 인하여 기쁨을 이기지 못하여 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인하여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하리라.”
우리 주님의 고난을 생각하며 부활을 소망하는 사순절에 주님의 우리를 향하신 깊으신 사랑을 생각하며 그 사랑 안으로 들어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주님이 당하신 고난과 죽으심은 우리를 사랑하신 사랑의 절정입니다. 우리를 주님의 신부로 맞아들이기 위하여 그 멸시와 천대와 고통을 몸소 당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자신의 생명을 주시면서 까지 사랑하신 그 사랑에 나는 어떻게 응답하고 있습니까? 사랑의 부름에 사랑으로 화답하여 사랑으로 하나가 되는 것이 진정한 행복입니다.
여러분도 행복을 누리고 싶지요? 진정한 행복은 사랑으로 하나를 이루는 것입니다. 올해 주보의 로고를 보십시오. 무엇이라고 써 있습니까? ‘행복은 하나 되는 것’입니다. 가정의 행복은 부부가 사랑으로 하나가 되고, 부모와 자녀가 사랑으로 하나가 되고, 온 가족이 그리스도의 신부가 되어 사랑으로 하나를 이루는 것입니다. 교회의 행복은 모든 성도가 그리스도의 신부가 되어 서로 사랑하며 예수님과 하나를 이루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진정으로 행복하지 못했다면 말씀을 들으면서 지금 여러분의 앞에 서 계시는 주님의 사랑을 받아들이십시오. 주님은 지금 우리를 가슴 저미도록 사랑하시며, 여러분의 사랑을 갈망하십니다. 말씀을 듣는 중에 온 마음으로 주님을 부르십시오. 주님은 기꺼이 오실 것입니다.
먼저, 우리를 향하신 예수님의 사랑의 노래가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신부에게 완전히 마음을 빼앗기셨습니다. 9절에서 “나의 누이 나의 신부야, 네가 내 마음을 빼앗았구나. 네 눈으로 한 번 보는 것과 네 목의 구슬 한 꿰미로 내 마음을 빼앗았구나.” 라고 고백합니다.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우리에게 이렇게 사랑고백을 하십니다. 정말 너무 사랑스러워서 견딜 수 없어 하십니다. 4:1-5절을 함께 읽어봅시다. (현대어성경) “아, 아리따워라. 그대 너무나 아름다워라. 이리도 사랑스러울까, 내 사랑아. 너울 뒤에 아른거리는 그대 두 눈은 비둘기같이 사랑으로 빛나는구나. 그대 머리칼은 염소 떼처럼 길르앗 언덕에 물결치는 염소 떼처럼 어깨 위에서 춤추는구나. 2 그대 이는 털 깎으려고 목욕시킨 양과 같이 희기도 하여라. 새끼 없는 어미는 하나도 없는 양과도 같이 쪽 고르게도 났구나. 3 그대 입술은 심홍빛 오라기. 입술을 뗄 때마다 아, 어찌 그리도 사랑스러운지. 너울 뒤에는 석류같이 발그스레한 그대 두 볼. 4 그대 목덜미는 미끈하고 둥그런 다윗 망대. 천 개나 되는 방패가 걸려 있듯 목덜미 따라서 목걸이가 둥그스레 걸려 있구나. 5 그대 젖가슴은 나리 꽃밭에서 풀을 뜯고 있는 쌍둥이 새끼 사슴.”
여러분은 이런 고백을 받아보셨습니까? 저는 남자로서 해본 적도 없고 남자라서 받아본 적도 없습니다. 그런데 주님이 이렇게 고백하십니다. 그런데 이런 사랑의 고백을 받기 위해서는 신부된 성도가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본문 7절에서 “나의 사랑 너는 순전히 어여뻐서 아무 흠이 없구나.” 라고 했습니다. “순전히 어여쁘다”라는 말은 ‘어느 곳 하나 흠잡을 데 없는 아름다움’을 말하며, “흠이 없구나.”라는 말은 제사 때에 사용되는 제물의 완전함을 말할 때 사용된 ‘완전함’을 의미합니다. 온 몸 전체가 아름답고 아무런 결함이 없다는 것입니다.
1940년 머빈 르로이 감독(1900-1987)이 리메이크한 흑백영화인 ‘애수’(Waterloo Bridge)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아름답고 청순한 발레리나 ‘마이러 레스터’와 영국군 젊은 대위 ‘로이 크로닌’과의 아름답고 슬픈 사랑을 그리고 있는 영화입니다.
전쟁 중에 만나 사랑을 하게 된 두 사람은 결혼하려는 찰나에 출전 명령을 받아 약혼만 한 채로 로이 대위는 전쟁터로 떠나게 됩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돌아오기를 고대하던 어느 날 신문의 전사자 명단에서 약혼자의 이름을 발견하고 오열합니다. 상심한 마음에 직장에서 해고까지 받고, 급기야 병저 눕게 됩니다. 병이 나은 후, 그녀의 친구가 몸을 팔아서 자신의 병간호까지 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결국 생계를 위하여 자신도 창녀의 생활을 하게 됩니다.
그 날도 자신을 데려가 줄 사람을 기다리며 워털루 역에서 서성거리고 있을 때, 한 무리의 군인들이 쏟아져 나옵니다. 그 중에 낯익은 얼굴이 놀랍고 반가움으로 달려옵니다. 바로 죽은 줄로만 알았던 사랑하는 약혼자 로이였습니다. 로이는 어떻게 알고 마중까지 나왔느냐며 감격해 하며 포옹합니다. 그동안의 마이러의 생활을 전혀 알지 못하는 로이는 결혼 승낙을 받기 위하여 그의 어머니가 있는 스코틀랜드로 갑니다. 행복한 결혼식을 앞두었지만 로이의 사랑을 받아들일 수 없는 마이러. 과거를 그냥 묻은 채 현재의 행복으로 빠져들 수는 없었습니다. 그녀는 너무도 자상하고 교양 있는 로이 어머니에게 진실을 털어놓고 로이에게는 비밀로 해달라고 간청한 뒤 저택을 빠져나갑니다. 그리고는 ‘그가 살아 있는 줄만 알았더라면…’ 이라는 아쉬움의 말만 남긴 채 달리는 자동차에 몸을 던집니다.
만일 로이가 살아 있음을 알았더라면 아무리 생활이 어렵고 힘들어도 몸을 팔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지금 예수님을 믿는 수많은 사람 중에도 이 성경말씀이 정말 사실임을 믿는다면 지금처럼 이렇게 주님을 멀리하고 세상의 삶으로 자신을 더럽히지는 않을 것입니다. 우리 주님이 오시는 그날에 ‘주님이 살아계신 줄만 알았더라면…’이라고 탄식하며 스스로 주님의 얼굴을 피할 사람들이 얼마나 많겠습니까? ‘주님이 정말로 재림하실 줄 알았더라면, 이런 날이 있을 줄 알았더라면 조금 더 참을 것을, 주님 말씀에 순종할 것을’ 이라고 후회할 사람들이 참으로 많을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와 영원한 행복의 혼인잔치를 앞두고, 그 아름다운 천국 문 앞에서 스스로 돌아서야 할 것입니다. 이 사실을 주님께서 요한계시록 6:15-17절에서 이렇게 표현하십니다. (현대어성경) “15 그러자 땅 위의 모든 왕과 세상의 지도자들, 부자와 군대의 고위장성들, 신분이 높은 자와 낮은 자들, 노예와 자유인들이 모두 뒤범벅이 되어 동굴과 산의 바위 밑에 몸을 숨긴 채 16 산을 향하여 '우리 위로 무너져 다오. 보좌에 앉으신 분의 얼굴에서 우리를 가려다오. 어린양의 진노에서 우리를 숨겨다오. 17 하나님과 어린 양의 큰 진노의 날이 왔구나. 그 진노에서 살아남을 자가 누구란 말인가?' 하고 부르짖었습니다.”
성도에게 있어야 할 것도 있습니다. 본문 13-15절입니다. “13 네게서 나는 것은 석류나무와 각종 아름다운 과수와 고벨화와 나도초와 14 나도와 번홍화와 창포와 계수와 각종 유향목과 몰약과 침향과 모든 귀한 향품이요. 15 너는 동산의 샘이요 생수의 우물이요 레바논에서부터 흐르는 시내로구나.” 이 말씀은 신부의 삶에서 나타나는 생활의 열매를 말합니다. 즉 신부된 성도의 삶에서 나오는 아름답고 향기로운 신앙과 사랑의 열매를 의미합니다. 이는 더 말씀드리지 않아도 잘 알 것입니다.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택하신 이유가 바로 열매를 맺게 하기 위함입니다. 주님은 요한복음 15:16절에서,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과실을 맺게 하고 또 너희 과실이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니라.”고 하십니다. 만일 열매가 없다면 저주받은 무화과나무처럼 말라 죽게 될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신부된 성도의 가장 중요한 마음가짐이 있습니다. 본문12절입니다. “나의 누이, 나의 신부는 잠근 동산이요 덮은 우물이요 봉한 샘이로구나.” 여기서 “동산”, “우물”, “샘”은 모두 ‘신부’, 즉 성도들을 의미합니다. 특히 우물과 샘은 아내를 가리키는 상징적인 표현입니다. 중요한 것은 “잠근 동산이요 덮은 우물이요 봉한 샘”이라는 것입니다. 잠그고, 덮고, 봉했다는 말은 주인이 있다는 말이며, 다른 사람에게는 개방되지 않음을 나타냅니다. 즉 성도는 오직 예수님에게만 속했다는 의미입니다. 예수님과 혼인한 성도는 예수님만 바라보고, 예수님만 사랑하고, 예수님만 의지해야 합니다. 이는 성도의 삶에서 어떤 것보다 우선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6:3절을 봅시다. “나는 나의 사랑하는 자에게 속하였고, 나의 사랑하는 자는 내게 속하였다. 그가 백합화 가운데서 그 양 떼를 먹이는구나.”라고 고백합니다.
주님의 사랑에 대한 우리의 사랑의 응답이 있어야 합니다.
4:16절에서 신부는 신랑을 자신의 동산으로 초청을 했습니다. 그리고 5:1절에서는 신랑이 신부의 초청에 응하여 신부의 동산에서 친구까지 초대하여 마음껏 먹고 마시고 즐깁니다. 그런데 이 두 구절에서 1인칭 단수로 된 호칭이 12회나 등장합니다. 특히 신부는 4:16절에서 “그 동산”이라고 자신을 신랑의 소유로 호칭합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신부된 성도가 하나를 이룬다는 사실을 말씀합니다. 요한복음 17:21절에서 주님은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같이 저희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라고 하나 됨을 위하여 기도하십니다.
그런데 안타까운 시간이 다가왔습니다. 시간이 흘러 신부의 마음이 신랑으로부터 좀 멀어졌습니다. 어느 날, 신랑이 먼 길을 여행하여 늦은 밤에 신부를 찾아왔습니다. '나의 누이, 나의 사랑, 나의 비둘기, 나의 완전한 자야 문 열어다고 내 머리에는 이슬이, 내 머리털에는 밤 이슬이 가득하였다.' 며 문을 두드렸습니다. 그런데 신부는 잠자리에 들었기 때문에 일어나기를 주저하다가 계속 되는 신랑의 요청에 마음이 움직여 뒤 늦게 일어나서 문을 열었습니다. 그런데 문을 열고 보니 신랑은 떠난 뒤였습니다. 뒤 늦게 밤거리를 달려서 신랑을 찾았지만 오히려 성의 순찰자들에게 붙잡혀 상처를 입고 혼만 나고 상사병이 났습니다.
성도가 주님과의 관계가 멀어지면 세상에서 고통을 당하게 됩니다. 영의 싸움을 하는 성도들이 주님의 도움이 없으면 사단의 세력에게 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길이 조금 힘들고 어렵다고, 자신을 희생해야 하고, 아까운 물질도 드려야 하고, 세상의 즐거움까지도 멀리해야 한다는 사실이 고통스럽다고 주님을 멀리하면 더욱 큰 어려움과 실패가 찾아옵니다.
천국으로 향하는 길은 결코 쉽고 평안하고 즐거움만 있는 길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마태복음16:24절에서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고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뿐만 아니라 주님은 마태복음 7:13-14절에서 (현대어성경) “하늘나라는 좁은 문으로만 들어갈 수 있다. 지옥으로 가는 길은 넓고 그 문도 커서 쉬운 길을 택한 많은 사람이 다 그리로 들어간다. 그러나 생명으로 들어가는 길은 좁고 그 문도 작아서 그리로 찾아드는 사람이 별로 없다.”고 하십니다.
그러나 이 길의 끝에는 영원한 행복을 누릴 수 있는 보장인 주님과의 혼인잔치 자리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19:7-9절에서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즐거워하고 크게 기뻐하여 그에게 영광을 돌리세 어린 양의 혼인 기약이 이르렀고 그 아내가 예비하였으니 8 그에게 허락하사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를 입게 하셨은즉 이 세마포는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 하더라. 9 천사가 내게 말하기를 기록하라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청함을 입은 자들이 복이 있도다 하고 또 내게 말하되 이것은 하나님의 참되신 말씀이라 하기로”
우리 신랑 되신 예수님을 만날 날이 멀지 않았습니다. 신랑의 나라인 하나님의 나라에는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면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은 주님을 얼마나 사랑합니까? 매일 그분의 편지를 읽고 있습니까? 매일 그분과 대화합니까?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주일이 기다려지고, 예배가 감격스럽고, 주님을 위한 헌신이 기쁘고 즐겁습니다. 나를 위하여 자신의 모든 것을 주신 주님이십니다. 우리의 모든 것도 기쁘게 헌신하고 드림으로서 주님께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신부로서 영원한 행복을 예비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