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체와 마음이 원하는 것
작성자 배의신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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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05-02-14 22:17
*** 육체와 마음이 원하는 것 / 엡 2:1-10
** 들어가는 말
에베소서 2:1-10, “1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2 그 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3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4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5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이라) 6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7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자비하심으로써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려 하심이니라. 8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9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 10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얼마 전 TV에서 재미있는 실험 하나를 소개한 적이 있습니다. 이 실험은 미국에서 실시한 것인데, 사람의 자기관심에 대한 집착 정도를 알아보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실험을 위하여 남여노소 수십 명을 대형 스크린이 설치된 강당으로 모았습니다. 그리고는 문제를 냈습니다. 문제는 ‘스크린에 등장하는 두 선수가 농구공을 몇 번이나 주고받는지를 알아맞히는 것’이었습니다.
곧 상영이 시작되고, 등장한 두 선수는 온갖 묘기를 연출하며 농구공을 주고받았습니다. 한 참 후에 사회자가 스크린을 끄고는 한 사람씩 지명하여 농구공을 주고받은 횟수를 물었습니다. 거의 대부분이 정확한 답을 말했습니다. 그러자 사회자는 “방금 보았던 영상물에서 두 선수 말고 다른 이상한 것을 본 것이 없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사전에 전혀 예고하지 않았던 문제인지라 참여한 사람 중에 한 사람도 답을 말하지 못했습니다.
사회자는 다시 스크린을 켠 후에, “이번에는 아무런 목적의식을 갖지 말고 편안한 마음으로 보십시오.”라고 했습니다. 영상물을 다시 본 사람들은 모두가 놀라서 입을 다물지 못했습니다. 두 선수가 농구공을 주고받는 동안 고릴라 복장을 한 사람이 뒤에 나타나서 이상한 포즈를 취하기도 하고, 심지어 두 선수를 손으로 툭툭 치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또렷하게 보이는 모습을 처음에는 전혀 보지를 못했던 것입니다.
이 실험은 사람이 자신의 관심에 대한 집착이 얼마나 강한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즉 사람은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을 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원하는 것만을 보는 경향이 강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육신적인 인간의 일반적인 성향입니다. 로마서 3:10-12절에서 인간의 관심에 대하여 말씀하십니다. “10 기록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11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12 다 치우쳐 한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라고 하셨으며, 본문2-3절에서는 “2 그 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3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라고 하십니다.
이와 같이 육신을 가지고 있는 우리는 눈에 보이고 감각으로 느껴지는 ‘육체와 마음이 원하는 것’을 따라가려는 행동이 지배적입니다. 비록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고 하지만, 여전히 육체를 가지고 있는 우리는 자신이 원하는 것을 하려는 욕망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읽으면서, 느끼고 깨달을 것을 순종하려 하지만, 어느새 육체의 욕망을 따라가는 자신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신앙의 위대한 선조인 사도 바울도 이러한 자신을 보면서 탄식했습니다. 로마서 7:21-24절입니다.
“21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22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23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 24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현대어성경 “21 나 스스로는 늘 올바른 일을 원하나 어쩔 수 없이 잘못된 일을 해버리는 이것이 인생의 현실인 것 같습니다. 22 속으로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살고 싶어 하면서도 23 내 속 깊은 곳에 어떤 다른 것이 있어서 그것이 내 마음에 분란을 일으켜 나를 누르고 아직도 내 속에 도사리고 있는 죄의 노예로 만들어 버립니다. 나는 마음으로는 늘 기쁨으로 하나님 섬기는 종이 되기를 원하면서도 실제로는 여전히 죄의 노예가 되어 있는 자신을 봅니다. 이제 여러분은 내 형편이 어떻다는 것을 아셨을 것입니다. 아, 나는 얼마나 비참한 처지에 놓인 인간입니까! 누가 이 죽을 수밖에 없는 노예 상태에서 나를 해방시켜 줄 것입니까?”)
이러한 현상은 예수님의 제자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에 제자들에게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있으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주님이 피땀을 흘리시며 기도하시는 동안 잠들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깨어 기도하지 못하고 잠든 것을 보시고,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마 26:41)라고 하셨습니다. 공동번역 성경에서는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깨어 기도하라. 마음은 간절하나 몸이 말을 듣지 않는구나!”라고 번역했습니다. 그러나 몸이 말을 듣지 않는다고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따라가면 그 결과는 ‘멸망’입니다. 본문 3절에서도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따르면 ‘진노의 자녀’가 된다고 하셨으며, 로마서 8:12-13절에서는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빚진 자로되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살 것이 아니니라.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라고 단언하십니다.
사람은 다급해지면 당장 눈앞에 보이는 것을 잡으려합니다. 우리의 대적인 사단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욥이 고난을 당한 것도 바로 그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욥이 의로운 사람임을 자랑하실 때, 사단이 그 말씀을 듣고는 ‘하나님이 잘 해 주시기 때문에 그렇지요. 만일 급작스러운 고난을 주시면 하나님을 배반할 것입니다.’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해보라.’고 허락하셨습니다. 처음에는 모든 재산과 가족을 쳤으며, 다음에는 욥의 육체를 쳤습니다. 그러나 욥은 그 고난 속에서도 하나님을 의지하는 철저한 신앙으로 이겨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러한 고난이 올 때에 하나님을 뒤로하고 육체의 생각을 따라가지 않도록 더욱 깨어 기도해야 합니다. 히브리서 11장에서 믿음의 사람 모세에 대하여 이렇게 평가합니다. 24-26절입니다. “24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거절하고, 25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26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을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주심을 바라봄이라.”
그러면, 육체와 마음이 원하는 것이란 무엇입니까?
먼저 말씀을 봅시다. 로마서 8:7절입니다.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고 하셨으며, 야고보서 4:4절에서는 “간음하는 여자들이여, 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의 원수임을 알지 못하느뇨? 그런즉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 되게 하는 것이니라.”고 하십니다. 즉 육체와 마음이 원하는 것은 세상과 친구가 되는 것이며, 이것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는 길입니다.
육체와 마음이 원하는 것은 속사람인 영(靈)과는 정 반대의 길에 서 있는 것입니다. 육체는 그 재질이 흙이며, 세상에 속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육체는 좀 더 편안하고, 쾌락적이고, 자극적인 것을 요구합니다. 그리고 속사람인 영적인 요청에 대하여는 불편함과 거부감을 나타내며 무시하려는 경향이 강합니다. 속사람인 영은 하나님의 법을 따르며 하나님의 나라를 소망하지만, 육체와 마음은 이 세상에서의 삶과 눈에 보이는 욕망을 강렬하게 추구합니다. 사람은 누구든지 이 반대되는 두 길에서 한쪽을 택하게 되어 있습니다. 동시에 두 길을 다 갈 수는 없습니다.
어느 신앙상담을 전문으로 하는 목회자에게 젊은 여자 성도가 상담을 청했습니다.
“저는 늘 엄마와 다툽니다. 정말이지 함께 살 수가 없어요. 우리는 매일 싸웁니다. 저는 어떻게 해야죠?”
목사님은 “싸움을 그치면 됩니다.”라고 간단하게 대답했습니다. 그러면서 말을 덧붙였습니다.
“싸움은 저절로 일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화를 내고 싸우기로 선택하는 것입니다. 내가 원하지도 않는데 화가 나고 싸움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상대방이 어떻게 하든지 내가 싸우려는 마음을 중단하면 싸움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이 말은 자신을 잘 다스려서 분명한 선택을 하라는 것입니다. 마태, 마가, 누가, 세 복음서(공관복음)에 모두 등장하는 부자 청년 관원에 대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길을 가실 때에 이 청년이 달려와 꿇어앉아 예수님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겠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예수님은 “네가 계명을 알지 않느냐? 그 계명을 지켜라.”고 하셨습니다. 청년은 “계명은 내가 어려서부터 다 지켰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예수님은 “네게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는데, 가서 네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부자 청년은 그 말씀을 듣고는 슬픈 표정으로 근심에 싸여 돌아갔다고 했습니다. 이 청년은 하나님의 나라와 세상 모두를 다 갖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꼭 하나를 선택해야만 하는 기회가 주어졌을 때 육체와 마음이 원하는 것을 택했습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여러분에게 이런 결단을 해야 하는 기회가 주어진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예수님은 누가복음 16:13절에서 “집 하인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나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길 것임이니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재물은 육체와 마음이 추구하는 세상의 대표가 됩니다. 저와 여러분은 이 두 길 중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쪽을 택한 사람들입니다. 그렇다면 당연히 육체와 마음이 원하는 것을 따르던 생활을 멈추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주인이 되신 후에는 우리의 생명도 삶도 더 이상 우리의 것이 아닙니다. 고린도전서 7:22-23절입니다. “주 안에서 부르심을 받은 자는 종이라도 주께 속한 자유자요. 또 이와 같이 자유자로 있을 때에 부르심을 받은 자는 그리스도의 종이니라. 23 너희는 값으로 사신 것이니 사람들의 종이 되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러면 우리 육체의 모든 삶을 다 포기해야 합니까? 아닙니다. 우리가 육체로 구성되어 있는데 육체의 삶을 다 포기하면 죽는 것이겠지요. 육체의 삶을 다 포기하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고린도전서 5:10절에서 이렇게 표현합니다. “이 말은 이 세상의 음행하는 자들이나 탐하는 자들과 토색하는 자들이나 우상 숭배하는 자들을 도무지 사귀지 말라 하는 것이 아니니 만일 그리하려면 세상 밖으로 나가야 할 것이라.”고 하십니다. 포기해야 하는 것은 한 가지입니다. ‘내가 내 삶의 주인이기를 포기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는 것이 주인 됨을 포기하는 것입니까?
육체와 마음이 원하는 것을 이기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먼저, 말씀을 봅시다. 갈라디아서 5:16-17절입니다.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라고 하십니다. 내 삶의 주인 됨을 포기하는 길은 성령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즉 육체와 마음이 원하는 것을 이기는 길은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받는 길 뿐입니다.
본문 말씀에서 우리가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따라 가는 진노의 자녀이었을 때에 하나님의 사랑으로 우리를 살려주셨다고 하십니다. 예수님 안에서 우리를 살리신 이유는 선한 일을 행하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예수님 안에서 행하는 모든 선한 일은 성령께서 주관하십니다. 즉 우리가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받지 않고서는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뜻을 행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령님은 하나님의 깊으신 뜻까지도 통달하신 분이시며, 우리 가운데 임재하시고 역사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고린도전서 2:10절입니다.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시느니라.”고 하셨고, 요한복음 14:26절에서는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고 하셨습니다.
성령께서 나의 삶을 다스리시도록 하려면 내 심령이 ‘성령 충만’해야 합니다. 성령 충만은 하나님의 말씀과 깊은 기도로 이루어집니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시면서 제자들에게 당부하셨습니다.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 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 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행1:4-5)고 하셨습니다. 제자들과 초대교회 성도들은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서 뜨겁게 기도했습니다. 오순절이 되었을 때, 기도하는 성도들에게 성령이 임하셨으며, 성령의 충만함을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을 간절히 사모하고 갈망하며 기도할 때에 성령 충만함을 받게 됩니다.
지금 이 나라와 민족, 한국 교회와 우리 교회는 모두 기도를 절실하게 필요로 합니다. 교회에 기도의 불이 꺼지면 성도들의 삶이 힘들고 어려워집니다. 지금은 하나님을 찾아야 할 때이며, 하나님의 임재를 구해야 할 때입니다. 우리가 간절히 기도할 때 성령의 충만하심을 주실 것이며, 하나님의 영광이 임하실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누가복음 11:13절에서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천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임하심은 우리 삶의 충만을 의미합니다.
성도 여러분, 이제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따르는 좁은 시야에서 벗어납시다. 현실에 집착하게 되면 더욱 큰 고민에 빠질 뿐입니다. 어차피 내가 할 수 없는 일은 조금이라도 빨리 주님께 맡기는 것이 지혜로움입니다. 여러분의 삶에, 가정에, 우리 교회에 함께 하시는 주님이 주무시도록 버려둔 채 홀로 고통과 두려움에 몸부림치지 말고, 기도로 주님을 깨웁시다. 그리고 주님께 내 삶의 주권을 넘겨드립시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은혜를 충만하게 누리며, 주님 안에서 선한 열매를 풍성하게 맺는 삶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 들어가는 말
에베소서 2:1-10, “1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2 그 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3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4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5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이라) 6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7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자비하심으로써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려 하심이니라. 8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9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 10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얼마 전 TV에서 재미있는 실험 하나를 소개한 적이 있습니다. 이 실험은 미국에서 실시한 것인데, 사람의 자기관심에 대한 집착 정도를 알아보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실험을 위하여 남여노소 수십 명을 대형 스크린이 설치된 강당으로 모았습니다. 그리고는 문제를 냈습니다. 문제는 ‘스크린에 등장하는 두 선수가 농구공을 몇 번이나 주고받는지를 알아맞히는 것’이었습니다.
곧 상영이 시작되고, 등장한 두 선수는 온갖 묘기를 연출하며 농구공을 주고받았습니다. 한 참 후에 사회자가 스크린을 끄고는 한 사람씩 지명하여 농구공을 주고받은 횟수를 물었습니다. 거의 대부분이 정확한 답을 말했습니다. 그러자 사회자는 “방금 보았던 영상물에서 두 선수 말고 다른 이상한 것을 본 것이 없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사전에 전혀 예고하지 않았던 문제인지라 참여한 사람 중에 한 사람도 답을 말하지 못했습니다.
사회자는 다시 스크린을 켠 후에, “이번에는 아무런 목적의식을 갖지 말고 편안한 마음으로 보십시오.”라고 했습니다. 영상물을 다시 본 사람들은 모두가 놀라서 입을 다물지 못했습니다. 두 선수가 농구공을 주고받는 동안 고릴라 복장을 한 사람이 뒤에 나타나서 이상한 포즈를 취하기도 하고, 심지어 두 선수를 손으로 툭툭 치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또렷하게 보이는 모습을 처음에는 전혀 보지를 못했던 것입니다.
이 실험은 사람이 자신의 관심에 대한 집착이 얼마나 강한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즉 사람은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을 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원하는 것만을 보는 경향이 강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육신적인 인간의 일반적인 성향입니다. 로마서 3:10-12절에서 인간의 관심에 대하여 말씀하십니다. “10 기록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11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12 다 치우쳐 한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라고 하셨으며, 본문2-3절에서는 “2 그 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3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라고 하십니다.
이와 같이 육신을 가지고 있는 우리는 눈에 보이고 감각으로 느껴지는 ‘육체와 마음이 원하는 것’을 따라가려는 행동이 지배적입니다. 비록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고 하지만, 여전히 육체를 가지고 있는 우리는 자신이 원하는 것을 하려는 욕망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읽으면서, 느끼고 깨달을 것을 순종하려 하지만, 어느새 육체의 욕망을 따라가는 자신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신앙의 위대한 선조인 사도 바울도 이러한 자신을 보면서 탄식했습니다. 로마서 7:21-24절입니다.
“21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22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23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 24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현대어성경 “21 나 스스로는 늘 올바른 일을 원하나 어쩔 수 없이 잘못된 일을 해버리는 이것이 인생의 현실인 것 같습니다. 22 속으로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살고 싶어 하면서도 23 내 속 깊은 곳에 어떤 다른 것이 있어서 그것이 내 마음에 분란을 일으켜 나를 누르고 아직도 내 속에 도사리고 있는 죄의 노예로 만들어 버립니다. 나는 마음으로는 늘 기쁨으로 하나님 섬기는 종이 되기를 원하면서도 실제로는 여전히 죄의 노예가 되어 있는 자신을 봅니다. 이제 여러분은 내 형편이 어떻다는 것을 아셨을 것입니다. 아, 나는 얼마나 비참한 처지에 놓인 인간입니까! 누가 이 죽을 수밖에 없는 노예 상태에서 나를 해방시켜 줄 것입니까?”)
이러한 현상은 예수님의 제자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에 제자들에게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있으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주님이 피땀을 흘리시며 기도하시는 동안 잠들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깨어 기도하지 못하고 잠든 것을 보시고,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마 26:41)라고 하셨습니다. 공동번역 성경에서는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깨어 기도하라. 마음은 간절하나 몸이 말을 듣지 않는구나!”라고 번역했습니다. 그러나 몸이 말을 듣지 않는다고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따라가면 그 결과는 ‘멸망’입니다. 본문 3절에서도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따르면 ‘진노의 자녀’가 된다고 하셨으며, 로마서 8:12-13절에서는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빚진 자로되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살 것이 아니니라.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라고 단언하십니다.
사람은 다급해지면 당장 눈앞에 보이는 것을 잡으려합니다. 우리의 대적인 사단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욥이 고난을 당한 것도 바로 그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욥이 의로운 사람임을 자랑하실 때, 사단이 그 말씀을 듣고는 ‘하나님이 잘 해 주시기 때문에 그렇지요. 만일 급작스러운 고난을 주시면 하나님을 배반할 것입니다.’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해보라.’고 허락하셨습니다. 처음에는 모든 재산과 가족을 쳤으며, 다음에는 욥의 육체를 쳤습니다. 그러나 욥은 그 고난 속에서도 하나님을 의지하는 철저한 신앙으로 이겨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러한 고난이 올 때에 하나님을 뒤로하고 육체의 생각을 따라가지 않도록 더욱 깨어 기도해야 합니다. 히브리서 11장에서 믿음의 사람 모세에 대하여 이렇게 평가합니다. 24-26절입니다. “24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거절하고, 25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26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을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주심을 바라봄이라.”
그러면, 육체와 마음이 원하는 것이란 무엇입니까?
먼저 말씀을 봅시다. 로마서 8:7절입니다.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고 하셨으며, 야고보서 4:4절에서는 “간음하는 여자들이여, 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의 원수임을 알지 못하느뇨? 그런즉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 되게 하는 것이니라.”고 하십니다. 즉 육체와 마음이 원하는 것은 세상과 친구가 되는 것이며, 이것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는 길입니다.
육체와 마음이 원하는 것은 속사람인 영(靈)과는 정 반대의 길에 서 있는 것입니다. 육체는 그 재질이 흙이며, 세상에 속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육체는 좀 더 편안하고, 쾌락적이고, 자극적인 것을 요구합니다. 그리고 속사람인 영적인 요청에 대하여는 불편함과 거부감을 나타내며 무시하려는 경향이 강합니다. 속사람인 영은 하나님의 법을 따르며 하나님의 나라를 소망하지만, 육체와 마음은 이 세상에서의 삶과 눈에 보이는 욕망을 강렬하게 추구합니다. 사람은 누구든지 이 반대되는 두 길에서 한쪽을 택하게 되어 있습니다. 동시에 두 길을 다 갈 수는 없습니다.
어느 신앙상담을 전문으로 하는 목회자에게 젊은 여자 성도가 상담을 청했습니다.
“저는 늘 엄마와 다툽니다. 정말이지 함께 살 수가 없어요. 우리는 매일 싸웁니다. 저는 어떻게 해야죠?”
목사님은 “싸움을 그치면 됩니다.”라고 간단하게 대답했습니다. 그러면서 말을 덧붙였습니다.
“싸움은 저절로 일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화를 내고 싸우기로 선택하는 것입니다. 내가 원하지도 않는데 화가 나고 싸움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상대방이 어떻게 하든지 내가 싸우려는 마음을 중단하면 싸움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이 말은 자신을 잘 다스려서 분명한 선택을 하라는 것입니다. 마태, 마가, 누가, 세 복음서(공관복음)에 모두 등장하는 부자 청년 관원에 대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길을 가실 때에 이 청년이 달려와 꿇어앉아 예수님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겠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예수님은 “네가 계명을 알지 않느냐? 그 계명을 지켜라.”고 하셨습니다. 청년은 “계명은 내가 어려서부터 다 지켰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예수님은 “네게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는데, 가서 네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부자 청년은 그 말씀을 듣고는 슬픈 표정으로 근심에 싸여 돌아갔다고 했습니다. 이 청년은 하나님의 나라와 세상 모두를 다 갖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꼭 하나를 선택해야만 하는 기회가 주어졌을 때 육체와 마음이 원하는 것을 택했습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여러분에게 이런 결단을 해야 하는 기회가 주어진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예수님은 누가복음 16:13절에서 “집 하인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나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길 것임이니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재물은 육체와 마음이 추구하는 세상의 대표가 됩니다. 저와 여러분은 이 두 길 중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쪽을 택한 사람들입니다. 그렇다면 당연히 육체와 마음이 원하는 것을 따르던 생활을 멈추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주인이 되신 후에는 우리의 생명도 삶도 더 이상 우리의 것이 아닙니다. 고린도전서 7:22-23절입니다. “주 안에서 부르심을 받은 자는 종이라도 주께 속한 자유자요. 또 이와 같이 자유자로 있을 때에 부르심을 받은 자는 그리스도의 종이니라. 23 너희는 값으로 사신 것이니 사람들의 종이 되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러면 우리 육체의 모든 삶을 다 포기해야 합니까? 아닙니다. 우리가 육체로 구성되어 있는데 육체의 삶을 다 포기하면 죽는 것이겠지요. 육체의 삶을 다 포기하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고린도전서 5:10절에서 이렇게 표현합니다. “이 말은 이 세상의 음행하는 자들이나 탐하는 자들과 토색하는 자들이나 우상 숭배하는 자들을 도무지 사귀지 말라 하는 것이 아니니 만일 그리하려면 세상 밖으로 나가야 할 것이라.”고 하십니다. 포기해야 하는 것은 한 가지입니다. ‘내가 내 삶의 주인이기를 포기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는 것이 주인 됨을 포기하는 것입니까?
육체와 마음이 원하는 것을 이기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먼저, 말씀을 봅시다. 갈라디아서 5:16-17절입니다.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라고 하십니다. 내 삶의 주인 됨을 포기하는 길은 성령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즉 육체와 마음이 원하는 것을 이기는 길은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받는 길 뿐입니다.
본문 말씀에서 우리가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따라 가는 진노의 자녀이었을 때에 하나님의 사랑으로 우리를 살려주셨다고 하십니다. 예수님 안에서 우리를 살리신 이유는 선한 일을 행하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예수님 안에서 행하는 모든 선한 일은 성령께서 주관하십니다. 즉 우리가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받지 않고서는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뜻을 행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령님은 하나님의 깊으신 뜻까지도 통달하신 분이시며, 우리 가운데 임재하시고 역사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고린도전서 2:10절입니다.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시느니라.”고 하셨고, 요한복음 14:26절에서는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고 하셨습니다.
성령께서 나의 삶을 다스리시도록 하려면 내 심령이 ‘성령 충만’해야 합니다. 성령 충만은 하나님의 말씀과 깊은 기도로 이루어집니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시면서 제자들에게 당부하셨습니다.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 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 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행1:4-5)고 하셨습니다. 제자들과 초대교회 성도들은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서 뜨겁게 기도했습니다. 오순절이 되었을 때, 기도하는 성도들에게 성령이 임하셨으며, 성령의 충만함을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을 간절히 사모하고 갈망하며 기도할 때에 성령 충만함을 받게 됩니다.
지금 이 나라와 민족, 한국 교회와 우리 교회는 모두 기도를 절실하게 필요로 합니다. 교회에 기도의 불이 꺼지면 성도들의 삶이 힘들고 어려워집니다. 지금은 하나님을 찾아야 할 때이며, 하나님의 임재를 구해야 할 때입니다. 우리가 간절히 기도할 때 성령의 충만하심을 주실 것이며, 하나님의 영광이 임하실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누가복음 11:13절에서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천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임하심은 우리 삶의 충만을 의미합니다.
성도 여러분, 이제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따르는 좁은 시야에서 벗어납시다. 현실에 집착하게 되면 더욱 큰 고민에 빠질 뿐입니다. 어차피 내가 할 수 없는 일은 조금이라도 빨리 주님께 맡기는 것이 지혜로움입니다. 여러분의 삶에, 가정에, 우리 교회에 함께 하시는 주님이 주무시도록 버려둔 채 홀로 고통과 두려움에 몸부림치지 말고, 기도로 주님을 깨웁시다. 그리고 주님께 내 삶의 주권을 넘겨드립시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은혜를 충만하게 누리며, 주님 안에서 선한 열매를 풍성하게 맺는 삶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