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께로 나아가자
작성자 배의신 댓글
/ 조회: 7,424회
작성일
2005-01-30 21:42
*** 하나님께로 나아가자. / 출 33:1-11
** 들어가는 말
출애굽기 33:1-11, “1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네가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백성과 함께 여기서 떠나서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기를 네 자손에게 주마 한 그 땅으로 올라가라. 2 내가 사자를 네 앞서 보내어 가나안 사람과 아모리 사람과 헷 사람과 브리스 사람과 히위 사람과 여부스 사람을 쫓아내고, 3 너희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이르게 하려니와 나는 너희와 함께 올라가지 아니하리니 너희는 목이 곧은 백성인즉 내가 중로에서 너희를 진멸할까 염려함이니라.’ 하시니, 4 백성이 이 황송한 말씀을 듣고 슬퍼하여 한 사람도 그 몸을 단장하지 아니하니, 5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기를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르라 너희는 목이 곧은 백성인즉 내가 순식간이라도 너희 중에 행하면 너희를 진멸하리니 너희는 단장품을 제하라 그리하면 내가 너희에게 어떻게 할 일을 알겠노라.’ 하셨음이라. 6 이스라엘 자손이 호렙 산에서부터 그 단장품을 제하니라. 7 모세가 항상 장막을 취하여 진 밖에 쳐서 진과 멀리 떠나게 하고 회막이라 이름하니 여호와를 앙모하는 자는 다 진 바깥 회막으로 나아가며, 8 모세가 회막으로 나아갈 때에는 백성이 다 일어나 자기 장막문에 서서 모세가 회막에 들어가기까지 바라보며, 9 모세가 회막에 들어갈 때에 구름 기둥이 내려 회막문에 서며 여호와께서 모세와 말씀하시니, 10 모든 백성이 회막문에 구름 기둥이 섰음을 보고 다 일어나 각기 장막문에 서서 경배하며, 11 사람이 그 친구와 이야기함같이 여호와께서는 모세와 대면하여 말씀하시며 모세는 진으로 돌아오나 그 수종자 눈의 아들 청년 여호수아는 회막을 떠나지 아니하니라.”
사람이 무엇인가에 사로잡히거나, 간절하게 바라고 사모하게 되면, 마음도 시선도 그곳으로 집중하게 됩니다. 어린아이들은 부모를 그렇게 절대적으로 신뢰하며 사모합니다. 사랑하는 사람들은 그 눈빛만 보아도 알 수 있을 정도가 됩니다. 오죽했으면 “눈꺼풀에 콩깍지가 씌었다.”고 하겠습니까! 사랑에 사로잡히니까 모든 것이 아름답게만 보이는 것이지요. 사랑이 아름다운 것은 간절하게 사모하는 마음 때문입니다.
선교원을 할 때에, 한 아이가 저의 무릎에 앉아서는 똘망똘망한 눈망울로 무엇인가를 열심히 이야기합니다. 자신이 최근에 경험한 이야기를 날짜 구별도 없고 앞뒤도 없이 열심히 이야기 합니다. 몇 달 전의 사건이 ‘어제’가 되기도 하고, 제가 보기에는 아무것도 아닌 일이 자신의 대단한 영웅담으로 진지하게 이야기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다른 아이가 내게로 다가와서 무엇인가 말하려고 해서 얼굴을 돌리고 그 아이와 말하려고 하면, 무릎에 앉은 아이는 두 손으로 내 얼굴을 잡고는 자기 쪽으로 돌립니다. 자기만 봐달라는 것이지요. 그리고는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계속 들어달라고 합니다.
철없는 아이들의 이야기이지만, 저는 본문의 말씀을 읽으면서 이 일들이 생각났습니다. 본문에서 모세가 하나님께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제가 이 어린아이들처럼 그렇게 하나님을 사모하고 싶기도 합니다. 저는 나름대로 하나님을 사랑하며, 진실로 사모하고 신뢰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성도들을 사랑하고 주님께로 바르게 인도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지금까지의 삶을 돌아보면 정말 중요한 사실을 놓치고 살았습니다. 본문 다음에 나오는 12-23절의 말씀이 저의 심령에 꽂혔습니다. 지금까지 수십 번을 읽은 말씀인데, 바로 이 말씀이 그동안 답답하게 막혔던 그 문의 열쇠였습니다. 12-17절까지를 같이 읽어봅시다.
“12 모세가 여호와께 고하되 보시옵소서. 주께서 나더러 이 백성을 인도하여 올라가라 하시면서 나와 함께 보낼 자를 내게 지시하지 아니하시나이다 주께서 전에 말씀하시기를 나는 이름으로도 너를 알고 너도 내 앞에 은총을 입었다 하셨사온즉, 13 내가 참으로 주의 목전에 은총을 입었사오면 원컨데 주의 길을 내게 보이사 내게 주를 알리시고 나로 주의 목전에 은총을 입게 하시며 이 족속을 주의 백성으로 여기소서. 14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친히 가리라 내가 너로 편케 하리라. 15 모세가 여호와께 고하되 주께서 친히 가지 아니하시려거든 우리를 이 곳에서 올려 보내지 마옵소서. 16 나와 주의 백성이 주의 목전에 은총 입은 줄을 무엇으로 알리이까? 주께서 우리와 함께 행하심으로 나와 주의 백성을 천하 만민 중에 구별하심이 아니니이까? 17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의 말하는 이 일도 내가 하리니 너는 내 목전에 은총을 입었고 내가 이름으로도 너를 앎이니라.”
이 말씀은 하나님과 모세와의 대화입니다. 모세가 하나님께 떼를 쓰고 있습니다. 모세가 이처럼 떼를 쓰는 것은 “하나님의 임재”를 간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임재는 보편적으로 알고 있는 하나님의 무소부재(無所不在)하심과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하나님은 온 우주에 편만하시다는 것, 즉 안 계신 곳이 없으시다는 것이 하나님의 무소부재입니다. 하나님의 무소부재하심은 하나님의 통치와 권능과 능력이며, 간접적인 동행입니다(2,3절). 그러나 하나님의 임재하심은 직접적인 동행이며 동거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진정한 능력은 하나님의 임재하심에 있습니다. 왜 모세가 이렇게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간구하는 것입니까?
먼저, 본문의 배경을 봅시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나와서 하나님의 능력으로 홍해를 건너 시나이반도에 있는 시내 산에 도착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곳에서 이스라엘 백성들과 영원한 계약을 맺고자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람 모세는 하나님의 명을 따라서 시내 산에 올라갔습니다. 계약서인 율법을 받기 위해서였습니다. 모세가 하나님 앞에서 율법을 받는 동안 산 아래에서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한 주일 두 주일이 지나도 모세가 내려오지 않자 백성들이 ‘아론’을 시켜서 우상을 만들게 한 것입니다. 아론은 금송아지를 만들어서 ‘이 송아지가 너희를 인도하신 하나님이라.’고 했습니다. 백성들은 금송아지 앞에서 절하며 기뻐하며 뛰놀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대단히 화가 나셨습니다. 출애굽기 32:9-10절입니다. “여호와께서 또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 백성을 보니 목이 곧은 백성이로다. 그런즉 나대로 하게 하라. 내가 그들에게 진노하여 그들을 진멸하고 너로 큰 나라가 되게 하리라.”
그러자 모세가 하나님과 백성 사이에서 무릎을 꿇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자신의 생명을 바친 탄원을 드립니다. 출애굽기 32:31-32절입니다. “여호와께로 다시 나아가 여짜오되 슬프도소이다. 이 백성이 자기들을 위하여 금신을 만들었사오니 큰 죄를 범하였나이다. 그러나 합의하시면 이제 그들의 죄를 사하시옵소서 그렇지 않사오면 원컨대 주의 기록하신 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 버려 주옵소서.” 하나님께서는 모세의 기도를 들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진노를 멈추시기는 하셨지만, 그렇다고 이스라엘을 완전히 용서하신 것은 아니었습니다. 모세의 중보기도로 인하여 하나님께서 한 걸음 물러서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마음을 진정하신 후에 다시 이스라엘에게 말씀하십니다. 34절입니다. “이제 가서 내가 네게 말한 곳으로 백성을 인도하라. 내 사자가 네 앞서 가리라. 그러나 내가 보응할 날에는 그들의 죄를 보응하리라.” 그 다음 말씀이 본문말씀입니다. 이 말씀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마음이 다 녹아버렸습니다. 너무나 큰 충격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면 본문의 내용은 무엇입니까?
본문1-3절의 말씀을 다시 한 번 읽어봅시다. 1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네가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백성과 함께 여기서 떠나서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기를 네 자손에게 주마 한 그 땅으로 올라가라. 2 내가 사자를 네 앞서 보내어 가나안 사람과 아모리 사람과 헷 사람과 브리스 사람과 히위 사람과 여부스 사람을 쫓아내고, 3 너희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이르게 하려니와 나는 너희와 함께 올라가지 아니하리니 너희는 목이 곧은 백성인즉 내가 중로에서 너희를 진멸할까 염려함이니라.’ 하시니,
이 말씀 때문에 백성들은 두려움에 사로잡혀 말을 못하고 울고만 있었습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하나님께서는 약속하신 대로 가나안 땅에 가도록 허락하셨는데 무엇 때문에 백성들이 이렇게 큰 충격과 두려움과 슬픔에 사로잡혔습니까?
이유는 단 하나입니다. 3절 하반절의 “나는 너희와 함께 올라가지 아니하리니”라는 말씀 때문입니다. 즉 하나님의 임재를 거두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출애굽으로부터 계속 하나님이 이스라엘 진에 머무셨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을 섬김으로 인하여 하나님이 떠나려 하시는 것입니다.
백성들은 이제야 자신들이 저지른 일이 어떤 상황을 불러왔는지를 깨달았습니다. 4절을 보십시오. “백성이 이 황송한 말씀을 듣고 슬퍼하여 한 사람도 그 몸을 단장하지 아니하니” “황송한 말씀”이란 ‘비참한 말씀’, ‘통탄의 말씀’이라는 의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서 하나님이 떠나신다는 것은 비참한 일이며 큰 재앙이 됩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한 사람도 몸을 단장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단장품을 제하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단장품을 제하라는 말씀은 몸을 꾸미는 ‘장식품들을 내려놓으라.’는 말씀입니다. 이는 잘못을 통회하고 슬퍼하라는 말씀입니다. 백성들은 말씀대로 모든 장신구를 풀어놓았습니다.
그리고 모세는 자신의 장막을 진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설치했습니다. 그 장막 이름을 ‘회막’이라고 불렀습니다. 이 곳은 하나님을 만나는 곳이며, 하나님께 경배하는 곳입니다. 백성 중에 하나님을 사모하며, 하나님을 구하는 사람들은 회막으로 나아갔습니다. 즉 하나님께 경배하며 긍휼을 구하기 위하여 하나님께로 나아갔던 것입니다. 모세는 여호수아를 회막에서 거하며 하나님을 섬기도록 하고,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떠나지 못하시게 했습니다. 그리고 모세 자신은 다시 하나님께 간구했습니다. 우리가 앞에서 읽었던 12-17절의 말씀입니다. 즉 모세는 하나님의 임재를 간구했습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가지 않으시려거든 우리를 그곳으로 보내지 말아 달라.”고 호소했습니다. 모세의 끈질긴 간구에 하나님이 지셨습니다. “내가 친히 가리라. 내가 너로 편케하리라.”고 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17절에서는 “너의 말하는 이 일도 내가 하리니 너는 내 목전에 은총을 입었고, 내가 이름으로도 너를 앎이니라.”고 하셨습니다. 마치 얍복 강가의 야곱과 같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지금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지금 이 나라의 교회들이 하나님을 구하지 않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오로지 자신들의 마음에 드는 신(神)을 만들려고 합니다. 그리고 육신의 즐거움과 만족을 추구하고 있습니다. 잘 짜 맞추어진 프로그램들과 각종 행사들, 기계처럼 조각된 예배, 그곳에는 하나님의 임재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만족감만이 지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외치십니다. 이사야 1:11-13절입니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나는 숫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고 나는 수송아지나 어린 양이나 숫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 12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그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뇨?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 13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분향은 나의 가증히 여기는 바요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
주님께서는 마가복음 7:7절에서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너희들은 내가 진실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전혀 관심도 없고 알지도 못하는구나!’라고 탄식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호세아 6:6절에서는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고 하시며, 예레미야 9:24절에서는 “자랑하는 자는 이것으로 자랑할지니 곧 명철하여 나를 아는 것과 나 여호와는 인애와 공평과 정직을 땅에 행하는 자인 줄 깨닫는 것이라. 나는 이 일을 기뻐하노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은 상한 심령이며, 통회하는 마음입니다. 시편 51:17절에서 다윗은 “하나님의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고 고백 했으며, 시편 34:18절에서는 “여호와는 마음이 상한 자에게 가까이 하시고 중심에 통회하는 자를 구원하시는도다.”라고 했습니다. 이사야 57:15절에서 하나님께서는 “내가 높고 거룩한 곳에 거하며 또한 통회하고 마음이 겸손한 자와 함께 거하나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모세는 모든 삶의 자리로부터 멀리 떨어진 곳, 잡된 생각과 시끄러운 인간의 소음이 없는 곳, 인간이 자신을 돌아볼 수 있는 고독한 곳에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회막을 만들었습니다. 그곳에서 백성들은 오직 하나님의 임재만을 구했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기만을 간구했습니다.
이제 우리가 하나님께로 향하는 태도에도 변화가 있어야 합니다. 마태복음 6:33절에서 예수님이 하신 말씀대로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 즉 하나님의 임재와 영광을 구해야 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죄악을 슬퍼하며 통회하는 마음으로 예배해야 합니다. 이러한 겸손한 마음의 자리에 하나님이 임재하십니다. 하나님이 임하시면 우리의 모든 삶은 하나님의 뜻대로, 하나님의 때를 따라서 합당하고 온전하게 이루실 것입니다. 이사야 60:1-3절입니다. “일어나라. 빛을 발하라. 이는 네 빛이 일르렀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위에 임하였음이니라. 보라. 어두움이 땅을 덮을 것이며, 캄캄함이 만민을 가리우려니와 오직 여호와께서 네 위에 임하실 것이며, 그 영광이 네 위에 나타나리니, 열방은 네 빛으로, 열왕은 비취는 네 광명으로 나아오리라.” 인간의 회복은 하나님의 임재하심에 있음을 말씀하십니다. 영적인 어두움이 세상에 가득할 때에라도 하나님께서 임재하시면 모든 것이 회복되고 이루시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형상을 온전히 회복하기 위하여 ‘회막’으로 나아갑시다. 지금의 회막은 바로 이 곳 하나님께 예배하는 이 처소입니다. 여러분이 집에서 경건의 시간을 가진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아이들의 칭얼거림, 텔레비전의 소음들, 잡다한 일상이 있는 곳에서 하나님께 집중하기란 너무나 어렵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곳으로 설치한 예배당에서 하나님께로 향하라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의 마음을 새롭게 합시다. 하나님이 우리의 삶에 진정한 주인이 되실 수 있도록 통회하는 마음으로 우리의 자리를 비우고, 하나님을 구하는 깊은 기도와 말씀 속에서 하나님이 임재하실 자리를 마련합시다. 자리가 마련되면 하나님께서 오셔서 좌정하시고 우리의 주인이 되실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인이신 삶은 아무 것도 염려할 것이 없습니다.
인생의 시간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이제 더 이상 머뭇거리지 말고 결단하고 하나님께로 더 가까이 나아갑시다.
** 들어가는 말
출애굽기 33:1-11, “1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네가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백성과 함께 여기서 떠나서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기를 네 자손에게 주마 한 그 땅으로 올라가라. 2 내가 사자를 네 앞서 보내어 가나안 사람과 아모리 사람과 헷 사람과 브리스 사람과 히위 사람과 여부스 사람을 쫓아내고, 3 너희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이르게 하려니와 나는 너희와 함께 올라가지 아니하리니 너희는 목이 곧은 백성인즉 내가 중로에서 너희를 진멸할까 염려함이니라.’ 하시니, 4 백성이 이 황송한 말씀을 듣고 슬퍼하여 한 사람도 그 몸을 단장하지 아니하니, 5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기를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르라 너희는 목이 곧은 백성인즉 내가 순식간이라도 너희 중에 행하면 너희를 진멸하리니 너희는 단장품을 제하라 그리하면 내가 너희에게 어떻게 할 일을 알겠노라.’ 하셨음이라. 6 이스라엘 자손이 호렙 산에서부터 그 단장품을 제하니라. 7 모세가 항상 장막을 취하여 진 밖에 쳐서 진과 멀리 떠나게 하고 회막이라 이름하니 여호와를 앙모하는 자는 다 진 바깥 회막으로 나아가며, 8 모세가 회막으로 나아갈 때에는 백성이 다 일어나 자기 장막문에 서서 모세가 회막에 들어가기까지 바라보며, 9 모세가 회막에 들어갈 때에 구름 기둥이 내려 회막문에 서며 여호와께서 모세와 말씀하시니, 10 모든 백성이 회막문에 구름 기둥이 섰음을 보고 다 일어나 각기 장막문에 서서 경배하며, 11 사람이 그 친구와 이야기함같이 여호와께서는 모세와 대면하여 말씀하시며 모세는 진으로 돌아오나 그 수종자 눈의 아들 청년 여호수아는 회막을 떠나지 아니하니라.”
사람이 무엇인가에 사로잡히거나, 간절하게 바라고 사모하게 되면, 마음도 시선도 그곳으로 집중하게 됩니다. 어린아이들은 부모를 그렇게 절대적으로 신뢰하며 사모합니다. 사랑하는 사람들은 그 눈빛만 보아도 알 수 있을 정도가 됩니다. 오죽했으면 “눈꺼풀에 콩깍지가 씌었다.”고 하겠습니까! 사랑에 사로잡히니까 모든 것이 아름답게만 보이는 것이지요. 사랑이 아름다운 것은 간절하게 사모하는 마음 때문입니다.
선교원을 할 때에, 한 아이가 저의 무릎에 앉아서는 똘망똘망한 눈망울로 무엇인가를 열심히 이야기합니다. 자신이 최근에 경험한 이야기를 날짜 구별도 없고 앞뒤도 없이 열심히 이야기 합니다. 몇 달 전의 사건이 ‘어제’가 되기도 하고, 제가 보기에는 아무것도 아닌 일이 자신의 대단한 영웅담으로 진지하게 이야기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다른 아이가 내게로 다가와서 무엇인가 말하려고 해서 얼굴을 돌리고 그 아이와 말하려고 하면, 무릎에 앉은 아이는 두 손으로 내 얼굴을 잡고는 자기 쪽으로 돌립니다. 자기만 봐달라는 것이지요. 그리고는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계속 들어달라고 합니다.
철없는 아이들의 이야기이지만, 저는 본문의 말씀을 읽으면서 이 일들이 생각났습니다. 본문에서 모세가 하나님께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제가 이 어린아이들처럼 그렇게 하나님을 사모하고 싶기도 합니다. 저는 나름대로 하나님을 사랑하며, 진실로 사모하고 신뢰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성도들을 사랑하고 주님께로 바르게 인도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지금까지의 삶을 돌아보면 정말 중요한 사실을 놓치고 살았습니다. 본문 다음에 나오는 12-23절의 말씀이 저의 심령에 꽂혔습니다. 지금까지 수십 번을 읽은 말씀인데, 바로 이 말씀이 그동안 답답하게 막혔던 그 문의 열쇠였습니다. 12-17절까지를 같이 읽어봅시다.
“12 모세가 여호와께 고하되 보시옵소서. 주께서 나더러 이 백성을 인도하여 올라가라 하시면서 나와 함께 보낼 자를 내게 지시하지 아니하시나이다 주께서 전에 말씀하시기를 나는 이름으로도 너를 알고 너도 내 앞에 은총을 입었다 하셨사온즉, 13 내가 참으로 주의 목전에 은총을 입었사오면 원컨데 주의 길을 내게 보이사 내게 주를 알리시고 나로 주의 목전에 은총을 입게 하시며 이 족속을 주의 백성으로 여기소서. 14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친히 가리라 내가 너로 편케 하리라. 15 모세가 여호와께 고하되 주께서 친히 가지 아니하시려거든 우리를 이 곳에서 올려 보내지 마옵소서. 16 나와 주의 백성이 주의 목전에 은총 입은 줄을 무엇으로 알리이까? 주께서 우리와 함께 행하심으로 나와 주의 백성을 천하 만민 중에 구별하심이 아니니이까? 17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의 말하는 이 일도 내가 하리니 너는 내 목전에 은총을 입었고 내가 이름으로도 너를 앎이니라.”
이 말씀은 하나님과 모세와의 대화입니다. 모세가 하나님께 떼를 쓰고 있습니다. 모세가 이처럼 떼를 쓰는 것은 “하나님의 임재”를 간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임재는 보편적으로 알고 있는 하나님의 무소부재(無所不在)하심과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하나님은 온 우주에 편만하시다는 것, 즉 안 계신 곳이 없으시다는 것이 하나님의 무소부재입니다. 하나님의 무소부재하심은 하나님의 통치와 권능과 능력이며, 간접적인 동행입니다(2,3절). 그러나 하나님의 임재하심은 직접적인 동행이며 동거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진정한 능력은 하나님의 임재하심에 있습니다. 왜 모세가 이렇게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간구하는 것입니까?
먼저, 본문의 배경을 봅시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나와서 하나님의 능력으로 홍해를 건너 시나이반도에 있는 시내 산에 도착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곳에서 이스라엘 백성들과 영원한 계약을 맺고자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람 모세는 하나님의 명을 따라서 시내 산에 올라갔습니다. 계약서인 율법을 받기 위해서였습니다. 모세가 하나님 앞에서 율법을 받는 동안 산 아래에서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한 주일 두 주일이 지나도 모세가 내려오지 않자 백성들이 ‘아론’을 시켜서 우상을 만들게 한 것입니다. 아론은 금송아지를 만들어서 ‘이 송아지가 너희를 인도하신 하나님이라.’고 했습니다. 백성들은 금송아지 앞에서 절하며 기뻐하며 뛰놀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대단히 화가 나셨습니다. 출애굽기 32:9-10절입니다. “여호와께서 또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 백성을 보니 목이 곧은 백성이로다. 그런즉 나대로 하게 하라. 내가 그들에게 진노하여 그들을 진멸하고 너로 큰 나라가 되게 하리라.”
그러자 모세가 하나님과 백성 사이에서 무릎을 꿇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자신의 생명을 바친 탄원을 드립니다. 출애굽기 32:31-32절입니다. “여호와께로 다시 나아가 여짜오되 슬프도소이다. 이 백성이 자기들을 위하여 금신을 만들었사오니 큰 죄를 범하였나이다. 그러나 합의하시면 이제 그들의 죄를 사하시옵소서 그렇지 않사오면 원컨대 주의 기록하신 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 버려 주옵소서.” 하나님께서는 모세의 기도를 들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진노를 멈추시기는 하셨지만, 그렇다고 이스라엘을 완전히 용서하신 것은 아니었습니다. 모세의 중보기도로 인하여 하나님께서 한 걸음 물러서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마음을 진정하신 후에 다시 이스라엘에게 말씀하십니다. 34절입니다. “이제 가서 내가 네게 말한 곳으로 백성을 인도하라. 내 사자가 네 앞서 가리라. 그러나 내가 보응할 날에는 그들의 죄를 보응하리라.” 그 다음 말씀이 본문말씀입니다. 이 말씀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마음이 다 녹아버렸습니다. 너무나 큰 충격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면 본문의 내용은 무엇입니까?
본문1-3절의 말씀을 다시 한 번 읽어봅시다. 1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네가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백성과 함께 여기서 떠나서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기를 네 자손에게 주마 한 그 땅으로 올라가라. 2 내가 사자를 네 앞서 보내어 가나안 사람과 아모리 사람과 헷 사람과 브리스 사람과 히위 사람과 여부스 사람을 쫓아내고, 3 너희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이르게 하려니와 나는 너희와 함께 올라가지 아니하리니 너희는 목이 곧은 백성인즉 내가 중로에서 너희를 진멸할까 염려함이니라.’ 하시니,
이 말씀 때문에 백성들은 두려움에 사로잡혀 말을 못하고 울고만 있었습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하나님께서는 약속하신 대로 가나안 땅에 가도록 허락하셨는데 무엇 때문에 백성들이 이렇게 큰 충격과 두려움과 슬픔에 사로잡혔습니까?
이유는 단 하나입니다. 3절 하반절의 “나는 너희와 함께 올라가지 아니하리니”라는 말씀 때문입니다. 즉 하나님의 임재를 거두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출애굽으로부터 계속 하나님이 이스라엘 진에 머무셨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을 섬김으로 인하여 하나님이 떠나려 하시는 것입니다.
백성들은 이제야 자신들이 저지른 일이 어떤 상황을 불러왔는지를 깨달았습니다. 4절을 보십시오. “백성이 이 황송한 말씀을 듣고 슬퍼하여 한 사람도 그 몸을 단장하지 아니하니” “황송한 말씀”이란 ‘비참한 말씀’, ‘통탄의 말씀’이라는 의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서 하나님이 떠나신다는 것은 비참한 일이며 큰 재앙이 됩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한 사람도 몸을 단장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단장품을 제하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단장품을 제하라는 말씀은 몸을 꾸미는 ‘장식품들을 내려놓으라.’는 말씀입니다. 이는 잘못을 통회하고 슬퍼하라는 말씀입니다. 백성들은 말씀대로 모든 장신구를 풀어놓았습니다.
그리고 모세는 자신의 장막을 진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설치했습니다. 그 장막 이름을 ‘회막’이라고 불렀습니다. 이 곳은 하나님을 만나는 곳이며, 하나님께 경배하는 곳입니다. 백성 중에 하나님을 사모하며, 하나님을 구하는 사람들은 회막으로 나아갔습니다. 즉 하나님께 경배하며 긍휼을 구하기 위하여 하나님께로 나아갔던 것입니다. 모세는 여호수아를 회막에서 거하며 하나님을 섬기도록 하고,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떠나지 못하시게 했습니다. 그리고 모세 자신은 다시 하나님께 간구했습니다. 우리가 앞에서 읽었던 12-17절의 말씀입니다. 즉 모세는 하나님의 임재를 간구했습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가지 않으시려거든 우리를 그곳으로 보내지 말아 달라.”고 호소했습니다. 모세의 끈질긴 간구에 하나님이 지셨습니다. “내가 친히 가리라. 내가 너로 편케하리라.”고 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17절에서는 “너의 말하는 이 일도 내가 하리니 너는 내 목전에 은총을 입었고, 내가 이름으로도 너를 앎이니라.”고 하셨습니다. 마치 얍복 강가의 야곱과 같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지금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지금 이 나라의 교회들이 하나님을 구하지 않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오로지 자신들의 마음에 드는 신(神)을 만들려고 합니다. 그리고 육신의 즐거움과 만족을 추구하고 있습니다. 잘 짜 맞추어진 프로그램들과 각종 행사들, 기계처럼 조각된 예배, 그곳에는 하나님의 임재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만족감만이 지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외치십니다. 이사야 1:11-13절입니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나는 숫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고 나는 수송아지나 어린 양이나 숫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 12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그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뇨?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 13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분향은 나의 가증히 여기는 바요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
주님께서는 마가복음 7:7절에서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너희들은 내가 진실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전혀 관심도 없고 알지도 못하는구나!’라고 탄식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호세아 6:6절에서는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고 하시며, 예레미야 9:24절에서는 “자랑하는 자는 이것으로 자랑할지니 곧 명철하여 나를 아는 것과 나 여호와는 인애와 공평과 정직을 땅에 행하는 자인 줄 깨닫는 것이라. 나는 이 일을 기뻐하노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은 상한 심령이며, 통회하는 마음입니다. 시편 51:17절에서 다윗은 “하나님의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고 고백 했으며, 시편 34:18절에서는 “여호와는 마음이 상한 자에게 가까이 하시고 중심에 통회하는 자를 구원하시는도다.”라고 했습니다. 이사야 57:15절에서 하나님께서는 “내가 높고 거룩한 곳에 거하며 또한 통회하고 마음이 겸손한 자와 함께 거하나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모세는 모든 삶의 자리로부터 멀리 떨어진 곳, 잡된 생각과 시끄러운 인간의 소음이 없는 곳, 인간이 자신을 돌아볼 수 있는 고독한 곳에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회막을 만들었습니다. 그곳에서 백성들은 오직 하나님의 임재만을 구했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기만을 간구했습니다.
이제 우리가 하나님께로 향하는 태도에도 변화가 있어야 합니다. 마태복음 6:33절에서 예수님이 하신 말씀대로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 즉 하나님의 임재와 영광을 구해야 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죄악을 슬퍼하며 통회하는 마음으로 예배해야 합니다. 이러한 겸손한 마음의 자리에 하나님이 임재하십니다. 하나님이 임하시면 우리의 모든 삶은 하나님의 뜻대로, 하나님의 때를 따라서 합당하고 온전하게 이루실 것입니다. 이사야 60:1-3절입니다. “일어나라. 빛을 발하라. 이는 네 빛이 일르렀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위에 임하였음이니라. 보라. 어두움이 땅을 덮을 것이며, 캄캄함이 만민을 가리우려니와 오직 여호와께서 네 위에 임하실 것이며, 그 영광이 네 위에 나타나리니, 열방은 네 빛으로, 열왕은 비취는 네 광명으로 나아오리라.” 인간의 회복은 하나님의 임재하심에 있음을 말씀하십니다. 영적인 어두움이 세상에 가득할 때에라도 하나님께서 임재하시면 모든 것이 회복되고 이루시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형상을 온전히 회복하기 위하여 ‘회막’으로 나아갑시다. 지금의 회막은 바로 이 곳 하나님께 예배하는 이 처소입니다. 여러분이 집에서 경건의 시간을 가진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아이들의 칭얼거림, 텔레비전의 소음들, 잡다한 일상이 있는 곳에서 하나님께 집중하기란 너무나 어렵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곳으로 설치한 예배당에서 하나님께로 향하라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의 마음을 새롭게 합시다. 하나님이 우리의 삶에 진정한 주인이 되실 수 있도록 통회하는 마음으로 우리의 자리를 비우고, 하나님을 구하는 깊은 기도와 말씀 속에서 하나님이 임재하실 자리를 마련합시다. 자리가 마련되면 하나님께서 오셔서 좌정하시고 우리의 주인이 되실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인이신 삶은 아무 것도 염려할 것이 없습니다.
인생의 시간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이제 더 이상 머뭇거리지 말고 결단하고 하나님께로 더 가까이 나아갑시다.